그 다음이 또 중요합니다. “심지어 사회적 재생산의 가장 탄압적이고 가장 치명적인 형식들조차도, 우리가 분석해야 하는 이런저런 조건에서 욕망으로부터 생겨나는 조직화 속에서, 욕망에 의해 생산된다.” 그러니까 욕망에 의해 자기 억압이 생산된다는 것이죠. 다음이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입니다. 스피노자가 제기했고, 라이히가 재발견한, 정치철학의 근본 문제는 이렇게 요약됩니다.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서문에서 말한 구절입니다. <왜 인간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싸우기라도 하는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울까?> 네덜란드 공화정이 붕괴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던진 질문입니다. 당시 정치적으로 가장 민주적이었던 곳이 네델란드였어요. 그곳이 왕당파의 혁명으로 인해서 무너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에 동조해요. 스피노자는 ‘혁명’을 왕당파의 반란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혁명을 부정했다고 해요. “어째서 사람들은, 세금을 더많이! 빵을 더 조금! 하며 외치는 지경까지 가는 걸까. 라이히의 말처럼, 놀라운 건 어떤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고 어떤 사람들이 파업을 한다는 점이 아니라, 굶주리는 자들이 늘 도둑질을 하는 건 아니며 착취당하는 자들이 늘 파업을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적인 문제이기도 하죠. 사람들은 오히려 거꾸로 갔죠. 더 보수적인 정권을 지지하고 보수적인 정당을 지지하고. 자청해서 삥 뜯기는 거죠. 착취당하길 바라는 거죠.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가 뭐냐? “왜 인간들은 몇 세기 전부터 착취와 모욕과 속박을 견디되, 남들을 위해서는 물론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도 그런 일들을 바라는 지점까지 간 걸까?” 이제부터 라이히의 성취를 평가하고 한계를 지적합니다. “라이히는 파시즘을 설명하기 위해 대중들의 오해나 착각을 내세우기를 거부하고, 욕망을 통한 설명, 욕망의 견지에서의 설명을 요구하는데, 이럴 때 그는 가장 위대한 사상가였다.” 이어서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의 내용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아니,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그 순간, 그 상황에서 저들은 파시즘을 욕망했고, 군중 욕망의 이런 변태성을 설명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왜 극우 보수 정권을 계속 원할까요? 분명 자기에게 해로운데도 말이죠. 사람들이 속아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요. 그런데 또 뽑는단 말이에요. 국회의원 선거할 때 뽑고, 재보선할 때 또 뽑고, 지방선거할 때 또 뽑고. 보통은 사람들이 속아서라고 생각해왔어요. 좌파는 이데올로기 문제로 치부하고, 사람들을 계몽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반면 라이히나 들뢰즈·과타리, 거슬러가면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다고 진단해요. 사람들이 원했다는 거예요. 자청해서 노예가 되기를 바라는 일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분석하는 게 과제라는 거예요. 들뢰즈·과타리는 특히 68혁명 발발부터 몰락까지 이르는 과정에 주목해야.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보수 정치인 드골을 다시 대통령으로 불러오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냐는 거죠? 우리한테도 익숙한 상황이죠? 이런 의미에서 《안티 오이디푸스》는 굉장히 현재적이고 현실에서 써먹을 데가 많은 책입니다. 그렇지만 라이히는 불충분했어요. “라이히는 ‘사회적 생산 과정 속에 있는 또는 있어야만 하는 그런 합리성’과 ‘욕망 속의 비합리적인 것’을 구별하고 오직 후자만을 정신분석의 관할로 삼음으로써, 자기가 무너뜨리고 있던 것을 제 쪽에서 되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 그는 사회장과 욕망의 공통 척도 또는 동일 외연을 찾는 일을 포기한다.” 라이히가 유물론적 정신의학을 진정으로 정초하지 못한 까닭은 그가 ‘욕망적 생산’이라는 범주를 놓쳤기 때문이에요. 욕망은 합리성도 생산하고 비합리성도 생산하는 범주입니다. 그것은 사회에 직접 구성체 또는 조직들을 생산한다는 거죠.
집단 환상의 현실성
소절 ‘집단 환상의 현실성’을 보겠습니다. 사회적 탄압이 아무리 욕망적 생산을 왜곡한다 해도, “욕망은 현실계를 생산한다” 또는 “욕망적 생산은 사회적 생산과 다르지 않다”라는 원리는 그대로라고 합니다. 또한 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다.” 심리적 현실이 있다고 해도 모든 것은 욕망적 생산이라는 말을 위배하지 않아요. 욕망적 생산에서 이른바 심리적 현실도 파생되니까요. 욕망적 생산은 그것마저도 생산해요. 그래서 우리가 거칠게 마음과 정신의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과 물질 영역으로 부르는 것의 관계는 이분법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둘은 동시에 생산됩니다.
다음 부분 중요한데요. “환상은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 그것은 집단 환상인바 제도 분석이 이를 잘 보여 준 바 있다.” 제도 분석은 과타리가 프랑스 남부 도시 라 보르드(La Borde)에서 장 우리(Jean Oury)와 같이 했던 실험이에요. 정신병원은 제도입니다. 정신병원을 구성하는 주요 구성원들, 즉 의사, 간호사, 사무원, 행정직원, 그리고 환자들, 보호자들, 이들의 관계는 보통 위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죠. 제도 분석은 한마디로 위계 조직을 다른 형태로 평평하게 수평적 관계로 만들려는 실험이었습니다. 병원 운영도 환자와 간호사와 의사의 위계 없이 상의하며 바꿔가려고 노력했어요. 들뢰즈·과타리는 이 대목이 집단 환상과 제도 분석의 탁월한 사례라고 얘기해요. 이 얘기가 원서 73쪽 아래부터 나옵니다.
유사한 예로, 아프리카 은뎀부(Ndembu)족의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원서 197쪽에 나와요. 정신병에 걸린 환자 K가 등장해요.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가 그를 치료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환자 K는 겉보기에 굉장히 오이디푸스적인 상황에 있습니다. 외할아버지의 망령에 시달립니다. 오이디푸스적 분석을 할 수도 있겠으나, 은뎀부족은 다르게 접근해요. 실제로 외할아버지는 위대한 족장이었어요. 그런데 식민지가 되면서 부족이 둘로 나뉘게 되요. 영국의 식민지배자 편에 서서 관료가 된 쪽과 전통 부족에 속했던 쪽으로요. K는 원래 족장이 되어야 했는데, 부족을 가로지르는 사회 역사적인 사건들 때문에 지위가 흔들리고 앓게 된 거죠. 따라서 이것을 치료하는 방식도 집단 전체를 재가동하는 형태여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집단 분석”이에요. 이때 드러나는 것 중 하나가 모든 환상이 집단 환상이라는 점이에요. K가 환상을 겪었다면 그 환상은 K만의 것이 아니에요. 한 개인을 둘러싼 집단 전체가 함께 겪는 환상이라는 거죠. 그래서 3장 말미에 이런 말이 나오기도 해요. “개인 환상 아래서 집단 환상들의 본성을 발견하라.”(원서 323쪽) 또 다른 사례도 있어요. 원서 73쪽을 보면, 베트남전쟁에 출전했다 돌아온 군인이 있어요. 이 사람이 겪은 일은 그 사회, 그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상처입니다. 그 상처 때문에 이 사람이 어떤 망상에 시달린다면 그건 이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돌아오면. “환상은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 사회장 전체를 함께 생각해야만 해요. ‘집단 환상’이라는 개념을 썼지만, 어떻게 보면 집단이 함께 겪는 정신적 사건들이에요. 들뢰즈·과타리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사회가 겪는 트라우마’라고 표현할 수 있죠. 중요한 것은, 집단 환상이 왜 발생했는가? 그리고 집단 환상이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가? 이런 걸 밝히는 겁니다. 하나는 집단 환상이 편집증으로 갈 수 있어요. 히틀러는 독일인들에게 게르만족의 종족적 우월성을 함께 누리자고 조성했어요. 그래서 전쟁과 파시즘 쪽으로 나갔습니다. 이게 하나의 길이에요. 또 하나는 유토피아적 환상입니다. 유토피아적 환상은 뭐냐? 이 사회가 다르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제도’ 얘기할 때마다 하는 말인데, 제도가 만들어진 거라면 제도는 또 만들어질 수 있어요. 이 사회가 아닌 다른 사회를 꿈꾸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는 거죠. 이것은 혁명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환상이라는 경험이 하나는 굉장히 편집증적, 파시즘적으로 갈 수 있어요. 편집증은 다 누른다는 뜻이 되죠. 다른 하나는 분열적, 혁명적으로 갈 수 있어요. 분열은 깨부수는 거죠. 다른 세계를 건설하려고 하는 게 혁명입니다. 이 집단 환상 또는 그에 대한 분석인 제도 분석, 이렇게 됩니다. 한 개인의 문제로 모든 것을 풀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집단, 단체, 제도, 이 속에서 개인들이 특정하게 행동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걸 분석해야 해요. 특정하게 형성된 집단 또는 제도 안에서는 사람이 대략 일정하게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집단 분석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집단을 잘 들여다봐서 그게 ‘예속 집단’이냐 ‘주체 집단’이냐를 구분해야 해요. 예속 집단은 구성원이 파시즘적인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만들어진 집단이에요. 주체 집단은 반대입니다. 항상 혁명적인 힘으로 현실을 바꾸게끔 사람들이 움직이도록 형성되어 있는 집단이에요. 분열분석에서는 집단 분석이 중요해요. 왜냐면 현재 집단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가령 혁명을 꿈꾸는 좌파 정당이나 조직이 있을 때, 집단 분석 또는 제도 분석을 해서 그 집단이 실제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보는 게 일차적입니다. 명분상으로는 좌파고 진보고 어쩌고 내세울 수 있지만, 그 집단 자체가 실제로 어떻게 가는지 또는 어떻게 굴러갈 수밖에 없는지는 겉으로 내세운 말만으로 알 수 없어요. 그래서 필요한 게 집단 분석, 분열분석이에요. 싸움을 한다면, 그 부분을 바꿔나가는 싸움이 일차적입니다. 개인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제도와 집단의 문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천개의 고원》에 가면 ‘배치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그 까닭도 여기 있습니다. 하나의 집단이 어떤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가, 배치되어 있는가가 관건이에요. 배치체를 파악하는 게 핵심이고, 또 배치체를 어떻게 바꾸는가도 핵심입니다.
이어서 봅니다. “집단 환상에는 두 종류가 있다. […] 하나는 욕망 기계들이, 이것들이 형성하는 거대 군중 속에서 파악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기계들이, 이것들을 형성하는 욕망의 요소적 힘들에 관련 되는 방향이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이죠. “리비도가 가장 탄압적인 사회 형식들을 포함해서 기존 사회장을 투자하”는 건 파시즘 또는 억압적 사회 상태의 재생산으로 향하는 거죠. 반대로 “리비도가 기존 사회장에 혁명적 욕망을 연결하는 대체-투자로 진행”되는 건 혁명적 방향이죠. 몇 가지 예가 언급됩니다. 19세기의 위대한 사회주의 유토피아들은 이상적 모델이 아니라 집단 환상이었다는 거예요. 대체-투자는 현재의 투자를 철회하고 다른 데 투자한다는 뜻이죠. 지금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을 해체하고, 현행 제도를 벗어나 다른 것을 만드려는 시도로 집단 환상이 작용했던 거죠.
19세기 유토피아 사상가의 그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욕망 기계들과 사회・기술 기계들 사이에는 결코 본성의 차이가 없다. 구별이 있긴 하지 만, 그건 단지 크기의 비율(rapports)에 따른 체제의 구별이다.” 크기의 비율이란 건 다른 게 아니고, 미시(micro) 차원과 거시(macro) 차원을 가리켜요. 미시 차원은 욕망 기계의 층위고, 거시 차원은 사회 기술 기계의 층위입니다. 앞의 예를 통해 설명하면, 거시 차원에서 어떤 집단이나 정당이 진보적이고 좌파적이고 혁명적이라고 내세울 수 있어요. 그런데 미시적으로 보면 그 안에서 사람이 살아가고 행동하는 방식이 탄압적이고 억압적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있어요. 과거 운동권 조직 중에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내부적으로 여성 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이면서도 바깥으로 보이는 모습은 진보적이고 혁명적이었죠. 결국 그런 것은 실패합니다. 체제의 차이, 크기의 비율은 이런 차원의 구분을 가리킨다고 보면 됩니다. 미시 차원은 들뢰즈·과타리 용어로 분자적, 요소적 차이로, “요소적 힘”이라고 언급되었고, 거시 차원은, 이 문단에 “거대 군중”이라고 언급되었는데, 그램분자적 층위입니다. 분자와 그램분자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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