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그리고 결핍의 주체적 상관물인 환상이 어디에서 오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들뢰즈·과타리는 말합니다. 환상을 ‘결핍의 주체적 상관물’이라고 얘기한 건, 일단 결핍이 만들어지고 나면 결핍을 채우려고 하게 돼요. 결핍을 채우려는 활동이 욕망이 돼버려요. 이제 욕망은 환상 또는 심적 현실의 수준에서 이해됩니다. 이어지는 문장들에서 설명됩니다. “결핍은 사회적 생산 속에서 설비되고 조직된다. 결핍은, 생산력들로 복귀해서 생산력들을 전유하는 반생산의 심급에 의해 역-생산된다. 결핍은 결코 1차적이지 않다. 생산은 결코 그에 앞선 결핍에 따라 조직되지 않는다.” 결핍이 있기 때문에 생산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결핍이야말로 선행하는 생산의 조직화 후에 자리 잡고 액포화되고 번식한다.” ‘액포(液胞)’는 세포 안이 텅 비게 된 상태입니다. ‘공포(空胞)’라고도 번역되는데, 발음이 ‘공포(恐怖)’오 혼동돼서 ‘액포’로 옮겼습니다. 원래 맑스가 쓴 용어입니다. 관련해서, 각주에서 모리스 클라벨(Maurice Clavel)의 인용이 나오는데, 읽어보기 바랍니다.
끝으로 원서 36쪽 맨 위입니다. “생산의 풍부함 속에 결핍을 조직하기, 모든 욕망을 결핍에 대한 큰 공포 속으로 몰아넣 기, 욕망 외부에 있다고 상정되는 현실적 생산에 대상을 의존시키기(합리성의 요구들) 등 시장경제라는 저 공백의 실천, 이게 바로 지배계급의 예술이며, 반면 욕망의 생산은 환상(오직 환상)으로 넘어간다.” ‘art’라는 표현을 썼는데, 예술이 맞아요. 없는 걸 만들어 내는 겁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조작이 아닙니다. 그럼 왜 시장경제가 공백을 만들어내는 실천이냐? 즉, 결핍과 필요를 만들어 내는 실천이고 사람들이 결핍에 대한 공포를 지니게 만드는 실천이냐? 이어서 이걸 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전 단계에서, 시장경제 자체가 일단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시장경제 속에서는 생필품,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갖고 있지 않아요. 모든 것은 상품 형태로 구매해야 합니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사지 않으면 안 돼요. 사기 위해서는 돈이 반드시 매개가 되어야 해요. 돈이 필요하니까 벌어야 해요. 돈은 뭘로 버느냐? 나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알바를 하건 취직을 하건 해야 합니다. 땅 판다고 돈 나오냐는 얘기가 맞는 거예요. 옛날 같으면 땅 파면 돈이 나올 수 있어요. 농사지어서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그렇지 않아요. 일단 땅부터가 없어요. 필요한 모든 것은 시장 안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시장경제’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시장 안에서 돈과 재화 또는 서비스의 형태로 순환하는 과정을 통해 획득하고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에 놓여진다는 거 자체가 결핍과 필요, 그리고 결핍에 대한 공포로 조직화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훌륭합니까.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죠. 늘 말씀드리듯, 아침에 회사에 가기 싫은데 차려입고 가야만 하는 거예요. 왜 자발적으로 그래야만 하는가? 시장경제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사회 기계 때문입니다. 들뢰즈·과타리의 가장 기본적인 논의는 이 지점에서 전개됩니다. 이어지는 문단에 ‘자발적 예속’이라고 나오는데, 자발적 예속이 왜 일어나느냐가 문제입니다. 답은, 특정 조건하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이 조건 아래서는 다르게 살 수가 없어요. 특히 중심지, 서울이라는 곳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이게 상당히 자기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데요. 시골에 있으면 약간의 욕심만 버리면 자급자족이 가능해요. 생활비도 저렴하고 직접 땅에서 생산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일단 도시로 오면, 생활비, 집세, 생필품, 교통비, 통신비 같은 게 없으면 안 되죠. 이런 것들이 필요해져요. 굉장히 아이러니한 상황이죠. 자기를 그 안에 집어넣고 사서 고생하는 거죠. 사람이 서울로 오면 기회는 생기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서울이라는 기계의 부품으로, 그것도 자잘한 부품으로 들어갑니다. 자발적 예속이 다른 의미가 아니에요. 하지만 시골의 삶도 낭만적으로 그려서는 안 됩니다. 과연 자급자족이 가능할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시골 또한 자본주의의 일부로 종속되어 있으니까요.
사회적이자 욕망적인,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생산
다음 문단 앞부분의 요점은 맑스와 프로이드를 병렬시켜 둘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모두 다 잘못됐다는 겁니다. 문단 중간쯤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맑스-프로이트의 병렬은 어디까지나 불모이고 무의미하다.” 왜냐? 맑스는 현실적, 사회적 생산이 전부라고 봐요. 한편 프로이트의 얘기는 다 은유고 비유예요. 별거 없습니다. 돈은 똥이랑 같다. 그게 의미하는 게 뭐가 있어요. 똥이 생산을 가리키긴 해요. 그런데 그거랑 돈이랑은 현실에선 관계가 없죠. 그러니까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둘을 합치려는 시도는 불가능한 시도이자 쓸모없어요. 다른 조합이 필요합니다. 프로이트 말고 라이히를 뒤에서 등장시키죠. 이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제 굉장히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진실로, 사회적 생산은 특정 조건들에서 단지 욕망적 생산 자체이다.” 모든 건 욕망적 생산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게 그겁니다. 그런데 특정 조건에서 사회적 생산이 있습니다. 특정 조건이라는 게 중요한데, 최소한 셋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토지 단계, 전제군주 단계, 자본 단계. 그래서 조건들이라는 복수형을 씁니다. 그러니까 특정한 사회적 생산은 특정한 조건에서 욕망적 생산이 발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몇 가지 주장이 따라 나옵니다. “사회장(社會場)은 즉각 욕망에 의해 주파되고 있다.” 사회장은 프랑스어 ‘le champ social’, 영어로 ‘social field’입니다. “사회장은 욕망의 역사적으로 규정된 생산물이다.” “리비도는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을 투자하기 위해 그 어떤 매개나 승화도 심리 조작도 변형도 필요하지 않다.” 리비도는 생산의 에너지, 기계 작동의 에너지죠. 사회장을 리비도가 직접 흘러간다는 겁니다. 성(sexe)과 성욕(sexualité) 자체가 우주와 사회의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욕망과 사회가 있을 뿐, 그밖엔 아무것도 없다.” 이런 주장은 정신분석에 대한 정면 논박입니다. 프로이트는 욕망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을 나누면서 시작하는 반면, 들뢰즈·과타리는 그 둘이 하나의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전제부터 크게 달라요. 전제가 다르면 이어지는 논증과 귀결, 그리고 실천도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내가 탐탁치 않게 보는 철학은 대부분 전제에 동의할 수 없어서고, 그래서 많이 읽질 못해요. 왜 제대로 읽지도 않고 싫어하고 반박하느냐는 얘기를 듣곤 합니다. 그런데 전제를 보면 대체로 감이 와요. 읽기의 경험이 쌓여서라고밖에는 답하기 어렵네요.
여기 ‘사회장’, ‘역사적으로 규정된’이라는 표현들이 나오는데, 역사적으로 규정되었다 하면구체적인 걸 지칭할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들뢰즈·과타리의 역사철학, 즉 토지 시대, 전제군주 시대, 자본 시대, 이렇게 셋을 가리킵니다. 욕망과 사회만 있다고 할 때, 욕망은 에너지고 사회는 그 에너지가 표출된 형태입니다. 사회가 욕망적 생산의 표층이라고 해야 할까요. 욕망적 생산은 밑에 깔려 있고, 사회적 생산은 그것의 표피에 위치합니다. 그래서 욕망적 생산이 사회적 생산의 바탕에 있다고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생산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모든 일이 토지 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 다음은 전제군주의 몸 위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자본 위에서 모든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들뢰즈·과타리는 자본주의 단계에 오니까 욕망적 생산이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고 봅니다. 거의 외연이 같아졌다는 거죠. 표피가 굉장히 얇아진 거예요. 그래서 자본주의 생산 시기에는 욕망적 생산이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됐고, 그래서 자본주의 시기가 욕망적 생산이 발견된 시점이자 동시에 그것의 특성이 확인되는 일이 겨우 가능해진 거예요. 그 전까지는 욕망적 생산의 비밀을 알 수 없었습니다. 철학의 역사를 봤을 때, 예전의 사상가들이 우주의 본질을 몰랐다면, 그건 당연해요. 왜냐면 그것이 처음 자기의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낸 게 자본주의가 무르익으면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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