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대상적 존재란 현실계 그 자체이다.” 여기 나오는 ‘대상적 존재’의 의미는 6회와 23회 강의를 참고하세요. 요약하면, 욕망이 만들어내어 대상의 위치에 정립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생산된 현실이 욕망의 대상이란 말입니다. 욕망과 대상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 즉 자기가 생산한 것이 자기 앞에 놓이는 형태로 존재하게 되는 식입니다. ‘자기 앞’이라고, ‘앞에 서 있다’고 했지만 그게 또 자기 자신이기도 합니다. 순환 속에 놓여 있으니까요. 계속 그 일이 반복됩니다. “심리적 현실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특수한 실존 형식이란 없다.” 모든 게 ‘the real’이고 ‘reality’라는 겁니다. 이어 다시 맑스를 소환합니다. “결핍은 없으며, 다만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적 존재>로서의 겪음(passion)이 있다.” 겪음은 ‘passion’이고, 독일어 ‘라이덴(Leiden)’입니다. 영어 ‘suffering’이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어떤 것을 겪는 겁니다. 이 용어의 의미는 설명이 더 필요한데, 뒤에서 자세히 살피겠습니다. 이 경우의 겪음은 다른 뜻이 아니라 생산되는 거예요. ‘나는 느낀다’, ‘기분’, ‘내공량’이 생산되는 일이 ‘겪음’입니다. 겪음이라는 말에도 수동이라는 의미가 있죠. 앞에서 ‘수동적 종합’을 말씀드렸죠? 결국 생산의 경과의 세 번째 단계에서 ‘생산된다’는 의미가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심리적 현실’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결핍’과는 상관 없고, 또 ‘별도의 현실’도 아니고, 생산의 경과의 덤으로써 생산된 결과물이라는 거예요. 그래야 유물론적인 정신의학이겠지요. 세 종합은 동시에 성립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물질적 과정과 심리적 과정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하나의 현실이되 양 측면이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이 그대로 성립할 수 있습니다. 책 전체에 걸쳐 스피노자 이름은 딱 6번 나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심리철학, 심신이론은 스피노자적입니다. 스피노자의 심리철학을 ‘유물론적 정신의학’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봐도 괜찮습니다. 여기서도 맑스를 인용하고 있죠. 굉장히 중요한 부분마다 맑스를 인용합니다. 이 점을 눈여겨 보면, 이른바 ‘맑스론’을 굳이 따로 쓸 필요가 없었다는 게 확인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근간이 맑스와 니체입니다. 반대편에 프로이트가 있고요. 그러니 맑스론을 따로 쓸 필요가 없었던 거죠. 《안티 오이디푸스》의 내용을 잘 추출해서 맑스론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핍이 어디서 오는지 다음 단계에서 물어야겠죠. 결핍도 역시 사회적으로 생산됩니다. 그게 착취의 역할이에요. 원래는 충만한데, 충만함에서 빼앗기고 나면 결핍이 생겨납니다. 결핍되니까 필요하게 되고 그것을 바라게 되죠. ‘필요(besoin, need)’라는 말은 ‘욕구’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필요’가 무난해 보입니다. 필요는 “현실계 속에 있는 역-생산물”입니다. 필요를 만드는 일을 “공백(空白)의 실천(pratique du vide)”이라고 부릅니다. 공백의 실천을 통해, 결핍을, 또 필요를 사회 속에 생산해 내는 겁니다. ‘공백의 실천’이란 텅 빈 무언가를 실천을 통해 만들어 낸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대표적인 방식이. 빼앗아 감으로서 빈자리가 생기죠.
이어서 흥미로운 얘기가 쭉 나오는데, 직접 읽어보시고요. 다음 부분은 같이 보겠습니다. ““사람은 풀이 아니다, 사람은 오래전에 엽록소 종합을 잃어버렸고, 사람은 어쨌든 먹어야 한다…….” 이런 식의 말들은 부질없다. 이럴 때 욕망은 결핍에 대한 저 비루한 공포가 된다.” 어쨌든 사람은 먹어야 하지 않느냐, 먹을 게 필요하지 않느냐, 이런 식의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없는 것을 채우려는 비루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결핍 개념은 굉장히 사회적인 개념입니다. 상대적 박탈감이란 말을 쓸 수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결핍감이 엄청 세뇌되어 있어요. 그래서 결핍감에 시달립니다.
다른 사례로 대표적으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오래된 미래》에서 말한 라다크 마을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가난하고 서로 돕는 생활을 합니다. 다 같이 굶어도 거기에 결핍감은 없어요. 배는 고파도 결핍감은 없어요. 다큐멘터리를 보면 남미나 아프리카 오지, 또는 중앙아시아 지역, 티벳이나 몽골을 촬영한 것을 보면, 사람들은 무지 가난하고 가진 게 진짜 없어요. 문명화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어요. 사냥하고 벌꿀 따는 장면이 죽 나와요. 사람들은 늘 배고프고 가끔 사냥이나 채취에 성공해요. 산양이라도 한 마리 잡으면 며칠은 축제가 되고, 그 다음 며칠은 배고프고 합니다. 보존 수단이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다 같이 결핍감 없이 살아요. 그들에게는 삶이 충만해요. 물론 절대 빈곤 상황이라면 문제겠죠. 그런데 절대 빈곤조차 착취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지금 사회에서 다시 결핍감 없는 옛날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느냐 하는 건 별개 문제입니다만.
인간의 대상성, 대상적 존재와 관련해서 “욕망하기란 생산하기, 현실에서 생산하기이다”라고 한 번 더 강조됩니다. 나아가 현실계는 불가능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계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라캉에 대한 반박입니다. 라캉은 ‘실재’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니까요.
몇 줄 아래에는 헨리 밀러(Henry Miller)의 《섹서스》의 한 구절이 나옵니다. 뒷부분에 나오는 이런 구절은 참 좋습니다. <과거에 집착하면서 전진한다는 것은 쇠사슬에 금속구(球)를 부착한 족쇄를 질질 끌고 가는 것과 같다.> 다음에 수수께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살아 있는 견자, 그는 나폴리의 혁명가의 옷을 걸친 스피노자이다.” 나는 이 구절이 무슨 뜻인지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무리 검색해도 나폴리와 스피노자가 무슨 상관인지를 나오지 않고, 어떤 연구서에도 이 대목에 대한 언급이 없어요. 그러다 드디어 알아냈습니다. 들뢰즈는 1970년에 《스피노자》라는 책을 씁니다. 1981년에 몇 개의 장이 추가되어 증보판이 발간되고요. 1장에는 ‘스피노자의 삶’이라는 짤막한 전기가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는 또한 그림을 그렸다. 이른 시기에 스피노자의 전기를 쓴 콜레루스(Colerus)는 스피노자가 나폴리의 혁명가 마사니엘로(Masaniello)의 자세와 복장을 한 모습으로 자신을 그렸다고 보고한다.”(Deleuze,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Minuit, 1981, pp. 14-15.) 마사니엘로(본명 Tommaso Aniello; 1620–1647)는 이탈리아의 어부이자 시장의 어물전 상인으로, 25세의 나이로 나폴리 왕국에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 저항해 반란을 이끌었으나 같은 해 암살되었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이 구절은 바로 들뢰즈가 썼던 이 구절과 연관됩니다. 이 대목에서도 명시적으로 스피노자의 사상과 이 책의 연관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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