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이해하려 어디까지 노력해야 할까?

타인을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 자신을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타인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많은 타인을 만나고 또 소식을 전해 듣는다. 관계 속에서 살려면 타인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윤리의 첫 번째 과제로 여겨지기도 한다.

타인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와는 별개로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어디까지 얼마나 노력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이 살아온 맥락과 처지를 이해하는 것은 분명 요긴하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나와의 관계 속에서 나의 맥락과 처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 사람의 맥락과 처지를 이해하려 해야 할까? 실제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은가? 대등한 관계라면 같은 비율로 행동하는 것이 평등하지 않겠는가?

나는 연예인과 프로스포츠 선수와 정치인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다(고 늘 말했다). 이들은 명성과 인기로 먹고살기 때문에 그건 그들의 비즈니스일 뿐이다. 나의 비즈니스에 그들도 관심이 없는 건 매한가지고. 사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제 상호 관계 속에 놓이게 되었으니까.

나도 강의를 하고 책을 출판하고 강연도 다니는 사람이라 약간의 유명세를 치르기도 한다. 나의 상태와 무관하게 시간과 체력을 쓰게 되는 일도 흔하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무례하다’거나 ‘건방지다’ 같은 평도 나온다. 나의 사회 활동의 상당 부분은 ‘봉사’에 가깝다. 이 사회를 좋게 만드는 데 얼마라도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 경제적 보상을 가장 앞에 두었다면 결코 할 수 없었을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이 맥락에서 약간의 유명세는 감수할 몫이라고 본다.

돌아와서,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다시 생각해 보자. 나는 이 주장이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인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첫째, 이 주장은 너무 당위적이어서 실제 세상에서 실현되기 어렵다. ‘어떻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를 함께 말하지 않는 담론은 전적으로 불필요하지는 않지만 더 깊이 고민하며 이야기해야 한다.

둘째, 이 주장은 사람 사이의 실제 관계를 고려하지 않아서, 차별을 조장한다.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노력하는 쪽이 더 손해 보는 구조다.

셋째, 현실 권력 관계를 외면할 계기를 제공한다. 역사적 -정치적 가해자를 과연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까? 식민 지배와 독재의 가해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이왕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이해보다 진상 규명과 그에 합당한 사죄와 배상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은가?

넷째,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정적 차원에서 구체적 개인들을 이해하는 건 중요하지만,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결국 감정을 극복하고 타개책을 구성해야 한다. 심지어 개개인을 이해하는 것보다 제도와 구조를 손 보는 게 더 중요하다. 제도와 구조가 유지되면, 한(恨)이 반복될 뿐이며 그건 최악이다.

다섯째, 방금 전에 지적한 사항의 연장선상에서, 듣는 자에게 권력이 쏠리는 현상, 니체가 지적했던 이른바 ‘사제 권력’이 작동할 수 있다. 약자는 목소리를 듣는 이에게 의탁하게 된다. 자칫 현상 유지에 머물게 한다. 더 멀리 나아가 정치적 개입으로 이어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종합하면,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사회 구조를 이해하고 변혁하려고 노력해야 마땅하다. 타인의 이해라는 사안은 결국은 윤리와 정치 사이의 간격과 관련되는 문제가 아닐까? 윤리는 관계에 주목하지만 정치는 관계 틀의 변화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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