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025

결핍으로서의 욕망이라는 관념론적 착상 (환상)

이제 ‘욕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역사적인 고찰을 합니다. 플라톤은 대화편 《소피스트》에서 정치가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그러면서 인간 활동의 여러 영역을 구분하는 작업을 해요. 인간의 활동에는 ‘생산하는 것’과 ‘획득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고 봐요. 획득에는 사냥이나 낚시 같은 게 있어요. 플라톤은 획득과 관련된 인간 활동이 욕망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획득은 없는 것, 결핍된 것을 소유하려는 행위죠. 그러니까 들뢰즈·과타리에 따르면 욕망과 획득, 또는 욕망과 결핍의 관계가 첫걸음부터 잘못 결합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야 말로 관념론적, 변증법적, 허무주의적 착상이라고 합니다. “이 착상은 욕망을 무엇보다도 결핍, 대상의 결핍, 현실적 대상의 결핍이라고 규정한다.” 플라톤에서 <생산> 쪽은 무시되고 있었죠. 결핍된 현실적 대상을 추구하는 추구하는 게 욕망이라고 이해됐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생산의 국면이 강조된 칸트를 봅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 보면 욕망을 <자신의 표상을 통해 이 표상의 대상들의 현실성을 야기하는 능력>이라고, 다시 말해 표상을 만듦으로써 그것을 현실 대상으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규정합니다. 대상을 생산해 내는 능력이 욕망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칸트가 드는 사례들은 “미신적 신앙들, 환각들, 환상들”이고, 이는 “심리적 현실”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표상을 통해 표상의 대상의 현실성을 만들어 냈다고 하지만, 표상의 대상의 현실성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사과라는 표상을 떠올려서, 사과를 머릿속에 만들어내면, 사과가 머릿속에 생기잖아요. 바로 그 측면만을 가리키는 거죠. 그래서 칸트한테서도 욕망은 현실적 대상을 생산하는 것과 관련을 맺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산성을 보는 것은 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이때 결핍은 아까 지적했듯 현실적 대상의 결핍이죠, “[…]고전적 착상을[…]”, 즉, 플라톤적 착상을 되묻지 않고, 거기에 의존해서 이걸 심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욕망의 역사에서 두 가지 중요한 잘못된 걸음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그런 착상이 정신분석과 라캉에서 되풀이된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라캉을 보면 세 개의 측면이 있습니다. 들뢰즈·과타리의 이론을 선취하고 있는 친화적인 측면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측면, 퇴행적인 측면이 있고, 그다음에 라캉 제자들의 활동의 측면이 있습니다. 제자 중에는 보수적인 쪽으로 나아가는 라캉 우파가 있고, 들뢰즈·과타리의 생각과 많이 친화적인 라캉 좌파가 있습니다. 라캉의 위치는 이중적이에요. 대표적으로 원서 34쪽의 각주를 보면 확인됩니다. ‘작은 대상-a’를 욕망 기계 및 부분대상들과 관련짓는 혁명적인 측면과 그리고 기표로서의 ‘큰 타자’를 도입하는 측면이 있어요. 큰 타자와 관련해서 결핍이 다시 부활하는 거죠. 생산하는 욕망 기계로서의 작은 대상-a와 결핍으로서의 큰 타자가 라캉에게서 공존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사람을 혼란케 하는 문구들이 있어서 꼼꼼하게 봐야 해요. 원서 32~33쪽을 보면. “실제로 욕망이 현실적 대상의 결핍이라면, 욕망의 현실 자체는 환상된 대상을 생산하는 <결핍의 본질> 속에 있다.” 말이 어렵죠. 우선 욕망이 현실적 대상의 결핍과 관련된다고 가정됩니다. 플라톤, 칸트, 라캉에게 공통된 가정이죠. 다음에 “결핍의 본질”이란 현실적 대상이 결핍되어 있다는 거죠. 현실적 대상이 결핍되어 있으니까, 욕망은 환상된 대상, 심리적 현실만을 생산할 수밖에 없고 이것과 연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욕망의 현실 자체는 환상된 대상을 생산하는 일과 관련을 맺습니다. 이미 현실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욕망은 현실적 대상의 결핍으로 가정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환상적 대상만을, 심리적 현실만을 생산하는 것으로 욕망의 기능과 자격이 국한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게 결핍의 본질입니다. 결핍이 들어오게 되면 그런 일이 벌어닙니다. 욕망을 이렇게 가정하는 순간 실재에 도달할 수 없다는 라캉의 얘기들이 바로 따라나옵니다. 이렇게 되면 “욕망은 생산으로 파악”되고는 있지만 “환상의 생산으로 파악”되는 것이며, 정신분석, 즉 프로이트와 라캉에 의해 “완전히 설명된” 것이 됩니다. 반어법이죠. 욕망은 전혀 설명되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들뢰즈·과타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욕망이 결핍하고 있는 현실적 대상은 그 나름으로는 외부적인 자연적 또는 사회적 생산에 관련되는 반면,[…]”. 현실적 대상은 욕망 바깥에 있는 자연적, 사회적 생산 또는 현실과 관련되어 있고요. “욕망은 마치 <각 현실적 대상 뒤에는 꿈꾼 대상>이 있거나 현실적 생산들 뒤에는 정신적 생산이 있기라도 한 양, 현실을 이중화하게 될 하나의 상상물을 내부적으로 생산한다.” 정신 과정이 선행하고 그것이 실현되는 별도 과정이 또 필요하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되면 세계가 이중화되죠. 모델을 먼저 만들어내는 일이 인간의 일이고, 그것을 바깥으로 만들내는 별도의 과정, 외화의 과정이 필요한 거죠. 헤겔의 방식입니다. 그 외화에서 소외가 일어납니다. 정신분석과 헤겔과의 친화성은 이런 지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둘 다 욕망을 생산과 관련짓기보다 관념적 대상 또는 심리적 대상의 생산과 관련시키는 거죠.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작업이 그거예요. 정신적 대상의 산출이죠. 정신분석이 아무리 국수봉지, 자동차 또는 이런 저런 것을 분석한다고 해도 기본적인 방식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극장 기계”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꿈과 신화와 비극을 얘기했는데, 극장은 현실이 아니죠. 현실과 단절된 다른 세계죠. 환상의 세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의 재현이지 그 자체가 현실은 아니에요. 결국 공장이 아니에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세익스피어가 이 점을 아주 예리하게 보고 있어요. 세익스피어의 극을 보면, 《한여름 밤의 꿈》이 대표적인데, 극 안에 극이 다시 등장해요. 그래서 《한여름 밤의 꿈》에서는 서민들이 연극을 하고, 귀족과 왕이 연극 장면을 보고 낄낄 대요. 그런데 관객이 그 전체 장면을 봐요. 연극 안에 또 연극이 들어 있어요. 그렇게 이중화하면 관객의 위치가 가시화됩니다. 뭐가 현실이고, 뭐가 연극이냐? 뭐가 현실이고, 뭐가 예술이냐? 무한 확장이 가능해요. 접혀있는 관계가 성립하는 거죠. 연극적 행위와 실제 살아가는 행위, 연극배우와 실제 사람들 간의 관계가 어떠한지 생각하게끔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세익스피어 연극이 가지고 있는 독특함입니다. 이런 점은 연구도 많이 됐겠죠. 이 책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만, 들뢰즈 세익스피어에 찬사를 보내는 지점도 따로 있어요. 칸트 철학을 요약하면서 《햄릿》과 《리어왕》 그리고 《폭풍우》를 언급합니다. 그것을 ‘극장 기계’라고 말할 때 세익스피어의 사례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이 대목이 왜 중요하냐면, 욕망이 현실을, 그것도 사회적, 자연적 현실을 생산한다는 욕망관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하나고, 또 하나는 욕망을 인간적 욕망이 아닌 다른 차원, 비인간적 차원, 자연적 차원, 우주적 차원으로 놓는 것도 여기서 일어나고 있어요. 욕망은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주 자체의 에너지, 생산하는 에너지로 착상됩니다. 인간의 욕망은 우주적 욕망의 부분이죠. 뒤에서 그 표현들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와요. 나의 학위논문 제목이 《비인간주의적 존재론》인데, 인간 중심으로 또는 인간에서 시작해서 보기 시작하면 우주가 보이지 않아서예요. 우주의 모습도 인간을 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되는 거죠. 그래서 철저하게 인간을 제거하고 우주에서 시작해서 우주의 일부인 인간을 보는 게 접근 순서상 맞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과타리가 한 작업이 그런 작업이라고 해석한 거죠. 나의 해석이기는 하지만, 그거 말고는 길이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물리적인(physical)’ 영역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자연과학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자연과학의 탐구가 해명하지 못하는 ‘형이상학적(metaphysical)’ 혹은 철학적인 접근이 여전히 남아있습다. 들뢰즈·과타리는 그 긴장관계를 끊임없이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 생각의 세 가지 위대한 창조적 활동으로서 과학과 예술과 철학을 꼽습니다. 과학을 인간 사고의 중요한 창조적 활동으로 평가하는 거죠. 가령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조금 나이가 많은 하이데거가 기술에 대해 보인 알레르기 반응과 모든 게 기계라고 선언하는 들뢰즈·과타리의 반응의 차이는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다음 문장. “바로 이런 식으로 필요는 상대적 결핍에 의해 정의되고 자신의 고유한 대상에 의해 규정되는 반면, 욕망은 환상을 생산하는 자로서 나타나며, 대상에서 이탈함으로써,[…]”, 현실적 대상에서 이탈함으로써, “[…]또 이와 동시에 결핍을 배가해 절대적인 것으로 데려가[…]”, 결핍은 채워지지 않으니까, 결핍이 점점 커지는 거죠, “[…]<존재의 치유할 수 없는 불충분함>, <삶그 자체인 존재-의-결핍>으로 만듦으로써,[…]” 이 표현들은 라캉의 것이죠,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 그러니까 욕망의 운명인거죠. “이런 까닭에 욕망이 필요들에 기대 있다고 제시하고, 욕망의 생산성이 계속해서 작동하는 것은 필요들에 기초해서라고, 또 필요들이 대상의 결핍과 관계된다는 점에 기초해서라고 제시하는 일이 있게 된다(기댐의 이론).” 정신분석과 라캉의 이야기를 몇 줄로 요약한 거예요. 이것만 봐도 라캉의 특정 측면과의 대결 의식이 확연히 드러나죠.

클레망 로세(Clément Rosset)라는 흥미로운 학자가 있는데 한국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들뢰즈·과타리는 로세의 《최악의 논리》를 인용합니다. 인용 바로 앞입니다. “욕망의 대상을 정의하기 위해서 욕망이 결핍하고 있던 결핍을 강조하게 되면,[…]” 말은 어려워 보이지만, 욕망에는 원래 결핍이 들어있지 않은데 그 결핍을 강조하게 되면,이라는 뜻이죠. 이어지는 인용은 직접 보기 바랍니다. 세계 속에 욕망의 대상의 자리가 비게 된다는 추론이 성립합니다. 세계를 이분화하는 거죠. 하나는 전적으로 심리적인 현실, 하나는 진짜 현실의 구분이 생겨납니다.

지금까지 두 가지 얘기를 한 셈인데요. 하나는 욕망에 관한 고전적인 착상을 플라톤과 칸트를 통해서 언급하면서 획득과 관련되거나 심리적 현실의 생산과 관련된다는 측면을 지적했습니다. 후반부에서는 정신분석은 그 연장선상에서 그것을 완성시켰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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