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돌파구를 고민하자 (4) : 사대주의 극복과 한국어 인문학 연구 공동체의 성장

  • 이 글은 《AI 빅뱅: 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동아시아, 2023)의 245-254쪽의 전문입니다.

한국에서 인문학이 올바로 실천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어떤 역사적, 지리적, 언어적 전통에서 유래했건 간에 그건 단지 새로운 인문학을 건설하는 재료와 자원일 뿐이라는 점이 다. 둘째, 우리의 확장된 인문학은 철저히 한국어로 작업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문제를 문제로 삼고 거기서 출발해 보편성에 도달하는 것이 지금 한국 인문학의 과제다.

⑴ 온갖 역사와 전통의 자원들을 우리 문제와 관점에서 활용하기

그간 인문학은 서양 중심 학문이었다. 서양 근대의 식민주의 때문에 비서양 유산은 소홀히, 나아가 부정적으로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 다. 힘의 우위가 가치의 우위를 낳았고, 우리 역시 그에 굴복했다. 한국의 근대 인문학은 일본을 거쳐 서양 인문학을 일방적으로 수입함으 로써 성립했고, 지금까지도 저들의 대상과 주제, 방법과 관행을 따라 가기 급급했다. 이 과정에서 식민주의, 시장 만능 자본주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같은 부정적 유산을 내면화했다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대한 반발로 한자 문화권의 전통에서 서양 인문학의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도 간간이 있었다. 동양 전통과의 단절이 현재의 위기를 낳았다는 진단과 처방도 있었다. 심지어 한국에서 인문학을 하려면 누구건 한문 고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마저 있었다. 한때나마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서양과 다른 전통을 주목하고 발굴해야 한다는 실천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서양과 동양을 나누는 이분법은 가짜 문제이고, 따라서 처음부터 풀릴 수 없는 문제라고 본다. 중요한 건 출처가 아니라 지금의 쓸모다. 확장된 인문학을 위해 쓰임새가 있는 개념과 사상이 라면 가져다 쓰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외면하면 된다. 되도록 많은 자원을 활용하는 건 학자의 의무다. 풀어야 하는 건 지금 여기의 우리 문제다. 가용 자원을 최대한 소환하기 위해 다양한 언어 유산의 힘을 빌려 와야 마땅하다. 자원 채굴은 인문학의 오랜 업적 중 하나였 다. 외국어의 유용성은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돌아볼 대목이 있다. 영어로 된 자원에만 매달 리는 현상이다. 요컨대 학문의 영어 편식과 예속이 심각하다. 내가 문제로 느끼는 대목은, 특히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 갈수록 비영어 담론을 철저하게 무시하거나 혹은 무지하다는 점이다. 비영어권 문헌에서는 명시적으로 다뤄지는 것이 참조되지 않는 데 대해, 그것이 틀렸거나 후져서 아니면 비현실적이거나 한국 맥락에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져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읽지 않아서 혹은 읽을 기회가 없어서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학문적 게으름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말 그대로, 한국 학자들의 담론장 안에서 비영어권의 논의까지 굳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거슬러 가면, 영어 담론의 도서 목록 안에 비영어 담론이 별로 없다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한국어를 쓰는 학자 대다수가 영어 도서 목록에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담론으로 여기게 된 것은, 내가 여러 차례 강조했던, 유학 留學 의문제 때문으로 보인다. 유학 자체도 문제지만 미국 유학이 더 큰 문제 다. 언제부턴지 미국 대학의 커리큘럼에 없으면 몰라도 상관없게 되어버렸다. 학문의 미국 의존이 커질수록 이 경향이 강해졌다고 보인 다. 이건 제도라는 무의식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이며, 대체로 학자 개인의 자질과 무관하게 관철된다.

나는 이런 경향이 분석과 성찰의 빈곤화를 초래했다고 보며, 그래서 굳이 욕먹을 각오를 하며 이런 비판을 던진다. 분석과 성찰의 자원은 어디서 끌어와도 좋다. 다만 편식이 아니어야 한다. 그런데 영어라는 언어 자체가 편식이 심각하다. 영어로 번역된 건 굳이 원어를 확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게 영어권 담론의 풍조다. 그런 점에서 현재 영어는 적어도 19세기부터 이어져 온 제국주의의 유일 언어the language다.

안타까운 건 한국 학자 대다수가 영어 담론장의 노예인 듯 보인다는 점이다. 노예란 자기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스스로 평가하지 못하는 자 아니던가. 학자들의 전반적 수준마저 이런데 어찌 사회 개혁을 말하고 정치 정상화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물론 학자들의 높이가 사회의 최고 높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⑵ 한국어 인문학 연구 공동체를 중심에 놓기

이로부터 한국어로 인문학을 해야 한다는 두 번째 원칙이 이어진다. 왜 한국어여야 하는가? 그건 우리 연구가 한국어 공동체에서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언어로 행하는 비판 작업이다. 따라서 연구 자가 가장 잘 구사할 수 있는 언어로 작업해서 연구 공동체에 제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에 대한 응수 또한 그런 식이어야 한다. 그래야 연구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사상이 발전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인문학 연구가 난맥상을 보여왔다면, 가장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연구 언어로서 한국어에 대한 경시’ 혹은 ‘한국어 연구 공동체의 부실함’에서 찾을 수 있다고 진단한다. 연구 주제를 잘 설정하는 것 못지않게 한국어 연구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시급하다. 앞서 동서고금의 자원을 가리지 않고 가져다 써야 한다는 첫 번째 원칙은 결국 한국어 번역과 저술을 통해 한국어 창고에 자원을 축적해야 한다는 것으로 수렴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업적 평가나 임용 및 승진 심사에서 한국어 논문보다 A&HCI 저널에 수록된 외국어(주로 영어) 논문이 우대받거나 필수로 요구된다는 점은 연구 언어로서의 한국어에 대한 폄하를 잘 보여준다. 영어 강의를 필수로 요구하는 관행도 마찬가지로 문제다. 다 알고 있듯, 이런 요구는 대략 자연과학과 공학 영역의 관행을 표준으로 삼아 인문학을 평가하는 기준을 마련한 데서 비롯한다. 하지만 SCI 저널에 영어로 논문을 수록하라고 강조하고 언어의 결을 무시하는 요구는 전혀 인문학적이지 않다.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 등은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문학의 고유성을 배려해야 한다. 한국학 분야나 비영어권 분야는 한국에서 굳이 영어로 논문을 쓰고 강의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나아가 이런 변화에 맞는 질적 평가 기준과 방법도 고안할 필요가 있다. 객관적 지표로 평가하기 어려운 것이 인문학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지점에서 인문학의 데이터가 무엇인지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의 데이터를 ‘텍스트’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공자왈맹자왈孔子曰孟子曰’의 고전 텍스트 말이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각각 ‘자연’과 ‘사회’에 대한 측정 자료를 근거로 한다. 누군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면 “자, 이 데이터를 봐라”라고 근거를 제시한다는 말이다. 근거가 부실할 수도 있고, 부분적일 수도 있고,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근거에는 근거로 맞서고 반박한다. 그래서 ‘과학’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데이터가 매개되지 않으면 집단 작업으로서의 과학은 실천 불가능하다. 모든 전문가가 공개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데이터 야말로 과학의 근거다.

이 점에서 과학은 ‘협업’의 실천이다. 학자들은 데이터로부터 가설과 이론을 만들고 검증한다. 그런 조각 퍼즐 맞추기가 과학의 일이고 과학의 장점이다. 이 점에서 과학은 개인 작업도 개인의 성취도 아니 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착안해 사회를 연구하려 한다. 인간 사회는 자연물처럼 측정을 기다리고 있지 않으며 많은 간섭 요인도 있기에, 사회 데이터에서 자연과학 수준의 근거를 대는 게 어렵다. 이런 한계가 있지만, 자연과학의 실천을 모범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확보하려 한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데이터는 무엇일까? 주로 문헌을 연구하는 전통 인문학의 관행을 보면, ‘텍스트’가 데이터라고 오해하기 쉽다. 이런 가설은 인문학의 엄밀성에 의문을 낳는 원인이다. 고전 문헌을 다루는 것까진 좋다. 하지만 물어보자. 시대와 장소와 관행과 기술技術이 달라졌다면 옛 문헌이 여전히 설득력이 있을 수 있을까? 과학에서 데이터로 반박된 부분은 대개 역사의 일부로 남는다. 역사학의 대상일 뿐 더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문학이 수천 혹은 수백년 전 문헌을 가져올 때 설득력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문헌을 근거로 삼는 것이 인문학이 비현실적이 되는 원인 아닐까? 한동안 나는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문헌만 파고드는 훈고학이 아니려면 인문학은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인문학은 오늘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제공하는 지식을 데이 터로 편입해야만 한다. 문헌은 그런 실증 데이터에 부합할 때 설득력을 얻는다. 인문학 연구자끼리의 소소한 정담은 중요하지 않다. 정담 또한 사회 속에서만 유의미하다. 연구 결과가 전문가를 넘어 확산하지 못하면서 사회의 호응을 기대하면 안 된다. 문제는 인문학 연구자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지식을 이해할 문해력도 없고 그 지식을 활용할 의사도 별로 없다는 데 있다.

그동안 한국의 인문학은 그다지 ‘자생’적이지도 못했고, ‘자주’적이 지도 않았으며, ‘자립’적이길 기대한 적도 없었다. 전통 인문학은 서양 인문학 제도의 수입이라는 점에서 자생적이지 않다. 지리적으로 지금 이곳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으니 자주적이지 않다. 사회에 주는게 거의 없으면서 ‘인문학은 중요하다’며 원조만 호소할 뿐이니 자립 적이지 않다. 인문학은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지 못했고, 자신의 의무를 애초부터 자각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끌고 갈 힘이 없었다. 더욱이 가장 중요한 매체인 한국어도 놓쳤다.
인문학 자신이 ‘융합’의 주체요 현장이어야 한다. 그런 탈바꿈 없이 사회에 존재감을 주장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은 현실의 삶에 지침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옛날 그 어느 좋던 시절을 얘기하는 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상을 제시하는 일도 아니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한국어 공동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한국에서 인문학을 하는 일차적 이유다.

⑶ 우리의 구체성에서 출발해서 보편성에 이르기

인문학은, 아니 무릇 학문이라면 보편성을 가져야 할 텐데, 한국어를 고집하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물음은 논점을 놓치고 있다. 한국어로 학문을 한다고 보편성을 갖지 못하란 법이 어디 있으며, 학자가 자신이 가장 잘 구사하는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표현하는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영어로 발표해서 선진국에서 먼저 인정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도 고답적이다. 그간 한국 인문학의 사대주의 경향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이 있었다. 21 우리는 무엇보다 한국에서 학문하는 까닭을 물어야 한다. 누구를 향해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는가? 연구성과를 읽는 이는 주로 누구인가? 어떤 문제를 풀려 하고 있는가? 이곳의 구체성을 통해 보편성에 이르려는 노력은 얼마나 했는가? 서양 모델로 접근되지 않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려 하는가?

과연 완성된 선진국 같은 게 있긴 한 걸까? 특히 코로나19 발발 이후로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하고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완성된 선진 국은 환상일 뿐이고, 몇몇 요건을 만족하는 선진국이 있지만 이들조차 다른 몇몇 부문은 한참 뒤처져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부문에서의 선진국 혹은 선진국의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건 지향이자 목표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진국일까? 자신의 문제를 문제로 삼는 사회, 자신의 문제가 인간의 보편적 문제임을 자각하고 해결하려 애쓰는 사회, 남의 문제를 남의 문제로 객관화해서 자기 문제를 풀기 위해 주체 적으로 수용하는 사회, 남에게 문제를 문제로 포착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사회, 그런 사회가 선진국 아닐까.

사실 한국은 문제들로 들끓고 있다. 조용할 날이 없고, 도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제기된다. 하지만 노동, 여성, 환경, 세대, 기후, 난민, 역사 등의 문제를 ‘수입한 문제’가 아닌 ‘우리 현실의 구체적 문제’로 자각하고 문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우리 문제를 발굴하는 중이다. 역설적이게도 최근까지 한국의 지식 인은 서양에서 정립한 문제 혹은 서양을 거쳐 수입한 문제, 서양에 근접한 비서구권 국가가 문제시한 문제만을 문제로 여겨왔던 것 같다. 자신이 유학한 나라, 자신이 주로 읽은 언어권, 그곳의 문제만 문제고 이곳의 문제는 문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폄하해 왔던 것도 같다.

미국에서 유학한 경제학자가 한국 경제에 가장 무지하다는 말이 있다. 한국이 아닌 미국의 경제 현실을 데이터로 삼았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구체적 상황과 맥락 아래 있다. 사람이 문제의 중심에 있기에 구체적 역사와 궤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의 문제를 풀려면 구체적인 데이터를 통해 문제를 잘 정립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데이터를 외면한 채 문제를 위한 문제만 그려보려 했던 건 아닐까? 허망하게도 말이다.

더욱이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이곳의 문제를 푸는 것이 인류에 기여하는 지름길이다. 앞서도 확인했지만, 이미 문화예술 콘텐츠를 통해 한국적 구체성이 인류적 보편성과 맞닿을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이 왜, 어떻게 성공하게 되었는지 서양이 먼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제 사상과 가치를 놓고 한국어를 통해 승부하는 일은 한국 인문학에 부여된 숙제다. 여기가 사상의 전쟁에서 최전선이다.

이미 마련되어 있어서 그저 가져와 쓸 문제틀이란 없다. 우리 문제에 가져다 쓸 방법론이란 없다. 문제는 설정하는 자에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고, 방법이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고민 끝에 남은 흔적일 뿐이다. 어디서 가져다 쓸 생각 말고 직접 발명해야 한다. 본받 아야 할 모델 따윈 없다. 직접 모델을 만들어야 하고, 자신이 모델이 되어야 한다. 역사는 흥망성쇠의 궤적으로 가득 차 있다. 영원한 선진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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