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023

세 번째 시간 시작합니다. 1장 4절 나갈 차례인데, 그전에 영어로 혹은 프랑스어로 같은 말이지만 한국어로는 경우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는 용어 몇 개를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바로 subject와 object입니다. 편의상 영단어로 진행합니다. subject는 인식론적인 관점에서는 ‘주관’입니다. 보는 쪽이 주관이잖아요. ‘대상’ 또는 ‘객체’에 대응되죠. 보는 것의 상대편에 위치하는 것, 보이는 것이 대상 또는 객체입니다. subject와 object 둘 다 형용사로 만들 수 있습니다. subjective와 objective. 철저하게 인식론적인 맥락입니다.

‘주체’라고 할 때는 윤리학 맥락에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물론 인식론 측면에서 주체라는 말을 쓰기도 해요. 그러나 행동의 주체라는 말을 더 많이 쓰죠. 주체라고 할 때는 자기로부터 뭔가가 비롯된다는 뜻이 강합니다.

문법적으로는 ‘주어’라고도 합니다. subject가 주어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서양어에서는 주어가 없이는 문장이 구성이 안 되죠. 그래서 주어 자리에 항상 뭔가 있어야 합니다. ‘비가 내린다’ 할 때도, ‘it rains’라고 뭐라도 갖다놔야 해요. 니체는 문법이 ‘실체’라는 오류를 빚어냈다고 비판해요. 항상 주어 자리에 뭔가를 놓아야 한다는 생각의 관성이 실체를 끌어왔다는 거예요. 이 문제는 따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근대 철학의 특정한 맥락에서, 인식 주관의 상대에 놓여있는 것이 ‘객체’입니다. 독일어로 ‘오브옉트(Objekt)’라고 합니다. 유사한 말로 ‘게겐슈탄트(Ggegenstand)’가 있습니다. 마주보고(gegen) 서 있다(stand)는 뜻입니다. 오브옉트는 라틴어에서 유래했고, 게겐슈탄트는 독일어, 토속어에서 유래했어요.

그런데 이 대상이라는 게 헤겔을 거쳐 포이어바흐, 맑스로 오는 과정에서 주체가 생산해서 자기 앞에 놓게 된 것이라는 뜻을 지니게 됩니다. 상당히 현상학적인 의미입니다(후설은 나중에 이걸 정립했습니다). ‘노에시스(noesis)’, 즉 인식작용에 의해 ‘노에마(noema)’, 즉 인식대상이 설정되는 거죠. 자기가 만들어낸 것을 자기가 인식하는, 그러니까 현상학적으로 인식의 확실성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대상에는 주체가 만들어내서 자기 앞에 세워놓은 것이라는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래서 대상이라고 번역할 때는 이런 의미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건 앞에서 잠깐 봤던 제라르 그라넬이라는 학자가 맑스를 분석하면서 말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어 ‘오브제’는 인식 대상으로 이해될 수 있고, 또 주체 활동의 결과물, 생산물로 이해될 수 있어요. 후자는 존재론적입니다. 주체의 활동이 자기 앞에 만들어 가져다 놓은 그것이니까, 인식론적 맥락과 의미가 달라요. 내가 볼 때, 맑스가 이 존재론적 작업을 특히 《포이어바흐 테제》에서 활발하게 수행했다고 생각됩니다. 발표하진 않았지만,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subject와 object 쌍이 굉장히 주의를 기울여 이해해야 한다는 걸 먼저 말씀드립니다.

들뢰즈·과타리로 가면 subject는 사실상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난 시간에 봤던, 생산의 세 번째 종합의 결과물로 등장하게 되는 subject, 생산의 경과의 잔여 혹은 나머지로 나타나는 subject입니다. 이 subject는 ‘자아’에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왜냐면 이 subject는 물질적인 진행 과정, 경과의 달라짐에 따라 계속 함께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subject, 주체는 사실 거기에 해당한다는 게 들뢰즈·과타리의 주장입니다. 그동안 철학사에서 논의되었던 subject라는 게 결국은 그런 거라고 규명하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우주론적인 또는 존재론적인 의미의 subject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주 자신이 subject입니다. 우주 자신이 생산의 경과를 스스로 이끌어가죠. 자기 생산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그럴 때 subject, 존재론적인 수준의 subject는 앞에서 말한 인간학적 수준의 subjet와 서로 차이난다고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주체’가 아닌 거죠.

이 두 주체가 묘하게 만나 교차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게 분열자입니다. 우리도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에 한편으로 우주적인 주체에 속하기도 해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우주의 부분이기 때문에 이 우주적 경과 전체를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주 운행의 결과로서의 주체 위치에 놓이기도 하는 거죠. 두 개의 주체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혼란이 많이 정리될 수 있을 거예요.

4. 유물론적 정신의학

무의식과 생산의 범주

본문으로 들어가서요. 원서 29쪽입니다. 처음에 클레람보(Clérambault)라는 정신의학자가 등장합니다. 《여성의 에로틱한 열정과 페티시즘》이라는 책이 번역되어 있어요. 여기서 들뢰즈·과타리가 채택하는 클레람보의 장점으로 “전체적·체계적 성격의 망상은 부분적·국지적 자동증(自動症)들에 비하면 2차적”이라는 명제를 제시합니다. 이걸 두 부분으로 쪼갤 수 있죠. ‘부분적·국지적 자동증’이 1차적이고 ‘망상’이 2차적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분적·국지적 자동증은 앞에서 얘기했던 욕망 기계들 또는 부분대상들과 관련됩니다. 부분적/partial이고 국지적/local이니까까요. 전체적/whole이고 체계적/systematic인 건 마지막에 옵니다. 이건 주체의 탄생 부분과, ‘나는 느낀다’의 측면과 관련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클레람보의 명제는 충분히 근거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동증 분석에서 클레람보는 ‘신경학적 메커니즘’만 보았을 뿐 ‘욕망 기계들을 작동시키는 경제적 생산의 경과’를 못 보았다고 말합니다. 무의미하게 열거하거나 하는 행위가 자동증인데, 실제 이런 자동증을 낳는 진정한 원인을 못 봤다는 거예요. 그리고 역사를 말합니다. 역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의학에서는 ‘가족력’, 즉 개인이 살아온 관계와 이력을 가리키죠. 여기서는 타고난 성격이나 획득된 성격만을 얘기랍니다. 하지만 진짜 역사, 물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역사는 이야기하지 못하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클레람보의 성취가 있지만 제한되어 있다는 거예요. 정신의학의 역사에서 제한된·부분적 성취만 이루었는데, 이는 마치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포이어바흐에 대해서 말한 대목과 비슷하다는 거예요. 인용하자면, “포이어바흐가 유물론자인 한 그에게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그가 역사를 고찰하는 한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이 비판을 클레람보에게 적용합니다. 클레람보가 유물론자인 한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역사를 고찰할 때는 유물론적 고찰을 하지 않았다는 거죠. 이건 바로 들뢰즈·과타리가 하려는 얘기입니다. “참된 유물론적 정신의학은, 기계론에 욕망을 도입하기, 욕망에 생산을 도입하기라는 이중 작업”으로 정의된다고 합니다. ‘기계론’은 메카니즘(mécanisme)의 번역입니다. 들뢰즈·과타리는 ‘마시니즘(machinisme)’이라는 말도 쓰는데, 이건 흔히 기계론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말 그대로, 욕망이 들어가 있는 기계, 욕망 기계에 관한 이론을 지칭합니다. 나는 우리말 번역으로 그냥 ‘범기계주의’라고 하는데, 충분히 설명이 붙지 않으면 역시 미진한 번역어입니다. 욕망에 생산을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욕망을 ‘결핍된 것을 채우려는 활동’으로 착상하는 것에 대한 비판과 관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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