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돌파구를 고민하자 (1) : 누구에게 돈을 받느냐의 문제

인문학(studia humanitatis) 연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 물음은 연구 활동 혹은 결과물에 누가 돈을 지급하는가의 문제를 통해 분석해야 한다. 논문, 책, 전문 강의, 자문을 매개로 돈을 지급할 수 있는 개인은 아주 적으며 산정되는 가격도 높지 않다. 연구의 ‘가치’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우긴들, 그 중요한 일에 ‘가격’을 매기는 쪽의 입장에서는, 흔히 얘기되듯, ‘너 좋아서 하는 일 아니냐?‘는 반응만 있을 뿐이다. 연구자 쪽에서 반박의 여지는 많지 않다.

이 대목에서, 문화와 문명의 중요성을 외친들 별 소용없어 보인다. 배부른 소리라는 것이다. 쟁점은 ‘당장의 물질적 풍요와 복리’에 얼마나 이바지하느냐에 머문다. 당장 공학은 가시적인 결과물을 산출하며, 예컨대 집도 짓고 자동차도 만들고 도시도 건설하고 디지털 문명도 세운다. 이 앞에서 역사 속 문화와 문명은 초라해 보인다.

‘직업’이란 간단히 말해 ‘돈을 버는 활동’이다. 이른바 먹고사는 문제의 요점은 ‘누구에게 돈을 받느냐’ 혹은 ‘누가 돈을 주느냐’로 귀결된다. 지금껏 인문학 연구자는 대체로 대학교수라는 밥벌이 수단으로 영위했다. 강의, 연구, 봉사를 대학 교수의 주된 활동으로 꼽는데, 결국 대학에서 임금 형태로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이해하면 된다. 최근에는 대학교수도 분화가 심해졌고, 상당 비율이 비정규직, 기간제 교수다. 또한 시간강사로서 강의만 담당하거나, 이조차 못하는 대학 밖 연구자도 늘어나는 추세다. 최저 생계를 꾸리기도 어려운 인문학 연구자가 점증한다. 이를 본 학문후속세대는 연구자의 길을 단념하고 있는 추세고.

대학을 중심으로 묘사했지만, 요점은 누가 인문학 연구자에게 돈을 줄 의향이 있느냐로 모아진다. 지금은 대학조차 ‘연구’를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돈을 주려 하지 않는다. 연구할 시간조차 남겨주지 않으면서 강의(주 20시간도 흔하다)하라는 요구가 생생한 증거다. 이 정도 강의하면, 주말과 휴일, 방학 동안 겨우 체력이 회복될 수 있을 뿐 연구 시간은 없다고 봐도 된다.

나는 시민의 세금이 적절한 만큼 인문학 연구(R&D)에 쓰여야 한다고 보지만, 문제는 그 ‘적절한 양’을 누가 결정하느냐에 있다. 시민들의 호응과 지지, 정치인의 후견, 기재부 관리의 수긍이 함께 가야 한다. 지금의 현실은 이 세 주체가 인문학 연구에 그닥 호의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인문학 연구의 사회적 의미를 누가 설득하고 입증해야 하는가?결국 인문학 연구자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설득하고 입증할 능력이 떨어진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해왔듯, 당위 수준의 담론이 대부분이다. 지원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종 시민, 정치인, 관리를 힐난하기까지 한다. 온통 돈밖에 모르는 세상이라고 한탄도 한다.

나는 비정규직으로서 35년 넘게 철학을 연구하고 강의하고 저술해 왔다. 내 활동의 대부분을 ‘사회 봉사’라 여긴다. 성인이 된 이래로 생계와 연구를 위해 별도로 돈을 벌려고 노력했다. 후원 따위는 개나 줘,가 평생의 마인드였다. 나는 운이 좋아서 저술과 강의를 좋아해주고 각종 사안에 자문역으로 불러주는 이가 많았다. 줄타기 인생이었다.

연구 예산을 유치할 능력도 없으면서 예산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 돈을 쓰는 쪽에서도 기쁘게 보람을 느끼면서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내 머릿속에 인문학의 돌파구가 그려지고 있다. 여유가 되는 대로 이 문제를 고찰해 보려 한다. 이를 위해서 인문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 인문학의 돌파구 마련 기획에 후원해주실 분은 기꺼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독지가 혹은 기업이나 재단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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