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과타리가 이 대목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태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다들 굉장한 어려움이 있다는 거예요. 들뢰즈·과타리의 ‘주체’를 고정된 정체성을 지닌 ‘자아(moi, self)’라는 이름의 전통적 주체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물질적인 세계의 흐름을 단일한 걸로 보지 마세요. 굉장히 복합적으로 우주가 변전하는데, 그 중 하나의 계열이 ‘김재인’이라는 몸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강의 중인 김재인이라는 몸도 물질적 구성물이고, 계속 변화합니다. 더웠다, 추웠다, 목 아팠다, 물 마셨다, 집중하는 눈빛을 보면서 반가웠다, 피곤했다 등 여러 일을 겪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일들을 겪고 있어요. 들뢰즈는 외부의 물체와 만나면서 몸이 끊임없이 변할 때, 그것을 ‘변용(affection)’이라는 말로 부릅니다. 그와 동시에 생겨나는 느낌들의 흐름도 계속 지나갑니다. 느낌들의 변화기 때문에 이건 공간을 점유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 느낌들은 힘이 세지는 상승 운동과 힘이 약해지는 하강 운동 사이에서 변동합니다. 들뢰즈는 변용과 동시에 일어나는 이런 내적 변화, 느낌의 변동을 ‘기운(affect)’이라는 말로 부릅니다. ‘변용’과 ‘기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아무튼 기운의 중심이 주체입니다. ‘중심’이라고 말하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데, 움직임의 단위로서 몸이 있는 것과 비슷하게 그 몸을 중심으로 흐름이 흘러간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중심이 먼저 있다기보다, 유동하는 중심이 있다, 혹은 매번 중심에 해당하는 뭔가가 변전한다고 해야 더 정확할 거예요.
여기 계신 분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우주 전체에 걸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만 주체가 있다고 얘기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에게도 그런 느낌과 기분의 변동이 있는지 없는지 논해 볼 수는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다른 존재, 가령 돌멩이에도 영혼이 있다고 합니다. 영혼의 표현이 약할 뿐이라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우주 삼라만상에 대해 주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잔여물, 나머지, 덤이 떨어지면, 그걸 주체라고 할 수 있다는 거죠. 짚고 갈 점이 있습니다. 비인간에게 주체와 영혼이 있다 해도 그것과 소통할 수 있는지 어떤지는 별개입니다. 사실상 인간은 인간과만 소통할 수 있습니다. 비인간과의 소통은 상대방 입장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방적인 ‘소통의 느낌’에 불과합니다. 타인과의 소통 여부도 검증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적어도 살아가면서 언어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소통 가능성을 긍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음 절, 4절의 제목이 ‘유물론적 정신의학’입니다. ‘유물론’과 ‘정신’ 현상을 함께 논합니다. 조금 현대화해서 보자면, 정신이 뇌라는 물질 활동의 결과로 생겨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더 중요한 건 그 일(정신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질적인 경과와 동시에 일어나는 느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거론할 수 있을 거예요. 스피노자의 《윤리학》에는 물체들의 계열과 관념들의 계열이 순서(ordo)와 연결이 같다는 말이 나옵니다. 나중에 이 대목은 좀 더 발전시켜 설명하겠습니다. 나의 해석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아이디어를 들뢰즈·과타리가 여기서 좀 더 정교하게 개진했고, 뇌에 대한 현대적 연구와 마음 혹은 정신에 대한 연구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단 여기까지 하고요.
“맑스의 말처럼, 괴로움마저도 자기 향유이다.” 맑스가 원래 했던 말과 원문이 조금 다릅니다. 독일어로 ‘괴로움’은 ‘라이덴(Leiden)’, ‘자기 향유’는 ‘젤프스트게누스(Selbstgenuß)’입니다. 괴로움은 프랑스어로 ‘수프리르(souffrir)’인데, 영어로 ‘suffering’, 일본어로 ‘고(苦)’로 옮겼습니다. 동사로 ‘겪다’라는 뜻입니다. ‘자기 향유’는 프랑스어로 ‘주이르드수아(jouir de soi)’인데, 영어로 ‘self-enjoymnet’, 일본어로 ‘자기를 향수(自己を享受)’라고 옮겼습니다. 동사 ‘주이르(jouir)’는 영어로 ‘enjoy’인데, 명사형이 ‘주이상스(jouissance)’예요. ‘향유한다, 누린다’는 뜻이죠. 주이상스가 ‘기쁨’, ‘성적 쾌락’의 의미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파생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특수한 의미라는 거죠.
이 문장은 결국 ‘괴로워하는 것마저도 자기를 향유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괴로움, 고통도 일종의 쾌, 즐거움이라는 거예요. 선뜻 이해가 안 가죠? 굳이 여기서 맑스를 인용할 필요는 없었지만,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에 나온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이렇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등급(degree)’의 관점을 도입해야 합니다. 쾌에도 등급이 있어서, 가장 저질의 쾌가 고통이고, 가장 고급한 쾌가 희열입니다. 쾌는 하나의 막대기처럼 연결되어 있어, 양 끝이 최고와 최저의 극단입니다. 이게 ‘포함적 분리’의 의미기도 합니다(자세한 점은 앞에 소개한 논문 참조). 그런데 큰 고통을 겪는다면,. 그게 왜 자기 향유냐?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큰 고통은 자기를 느끼는 방식이에요. ‘주이상스’ 혹은 ‘인조이’라는 말도 쾌와 고의 대립에서 쾌 쪽을 가리키기보다 우선 쾌와 고의 연속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느끼고누리고 향유하는 것도 쾌를 향유하는 것도 다 같은 부류의 활동이라는 겁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느낌의 수준에서 겪어 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쁘고 좋은 것만 즐기고 누린다고 이해할 필요가 없는 거죠. 지젝에서 이 말을 ‘향락’이라고 번역했던데, 들뢰즈적인 용법, 또는 맑스적인 용법과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맑스나 들뢰즈·과타리는 훨씬 더 유물론적이에요. 어떤 것을 겪는 겁니다. 겪는데 느낌의 형태로 겪는 거죠. 겪는다는 게 물리적으로 겪는 게 있고 정신적으로 겪는 게 있는데, 굳이 구분을 하면 정신적으로 겪는 게 주이상스예요. ‘향락’이라고 번역하면 절대 안 됩니다. ‘향유’라고 해도 좋은 느낌이 살짝 강하기는 하지만, 괴로움을 느낌 수준에서 겪는 걸 향유라고 한다면 그럴 법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 문장은 이렇습니다. “분명 모든 욕망적 생산은 이미 즉각 완수이자 소비이며, 따라서 <쾌감>이다.” 앞에서 용어 설명하며 말했듯, ‘완수’와 ‘소비’의 두 뜻을 들뢰즈·과타리도 구분해서 표현했습니다. ‘쾌감(프: volupé, 영: sensual pleasure독: Wollust, 일: 향락(享樂))’이라는 말은 몇 줄 내려가면 대문자로 시작하는 이탤릭체로 ‘볼룹타스(Voluptas)’라고 부연되어 있습니다. 주로 성적 쾌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들뢰즈·과타리에게 ‘성적’이라는 말과 ‘몸적’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어입니다. 몸의 느낌, 몸이 겪는 느낌, 성적인 느낌, 이 셋은 별로 다른 뜻이 아니에요. 아까 설명했듯, 일본어 번역의 ‘향락’은 너무 과하다는 느낌입니다.
세 번째 종합이 이런 식으로 수행된다는 거예요. 생산의 종합 제일 끝에 덤으로 떨어진 느낌의 조각이죠. 그런데 생산의 경과는 계속되니까, 느낌의 조각도 계열을 형성하면서 계속되죠. 그 느낌이 꼭 한 개인만을 관통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스피노자식으로 얘기해서, 들뢰즈·과타리식으로 얘기해도 마찬가지인데, 개인들의 모임을 또 다른 형태의 몸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들뢰즈·과타리는 ‘집단’이라고 표현합니다. 집단 전체를 관통하는 물질 과정 혹은 생산의 경과가 있으면, 그 집단 전체가 어떤 느낌을 함께 지닐 수, 겪을 수 있는 거죠. 그게 ‘주체 집단’인데, 그 주체 집단을 만드는 게 어려운 정치적인 과제라고 설정됩니다.
돌발 질문: 유물론적으로 느낌을 형성한다는 건 ‘정신(mental)’을 부정하는 걸로 봐야 되는 게 아닌가?
답변: 그렇게 표현해도 크게 차이가 있는 거 갖지는 않습니다. 정신이 별도로, 독립해서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생산의 세 계기가 동시에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 중 ‘정신’과 관련된 부분을 ‘주체’라고 부른다는 거죠. 이것도 생산되는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 기계들이 작동하는 ‘그 순간’ 생산됩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용어로 ‘평행’하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영어로 하면 모든 국면(가령 물체와 관념)에서 order and connection이 평행하다. 조금만 말씀드리면, 이 두 개념이 굉장히 중요한데, order는 흔히 ‘질서’라고 번역하지만 생산의 경과에서 ‘순서’라고 번역할 수 있고, connection은 욕망 기계들의 생산 원리인 ‘그리고…, 그다음에…’예요.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order and connection이라는 구절은 굉장히 중요하고, 진태원 선생님이 그 구절에 대해 해석도 하고 논문도 썼는데, 입장이 서로 좀 달라요. 나는 스피노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을 들뢰즈·과타리가 훨씬 더 정교하게 표현했다고 봅니다. 특히 진행되는 거여서 order는 순서고, 그다음에 connection, 즉 연결도 순차적입니다. order와 connection은 동의어에 가깝죠. 들뢰즈·과타리 얘기를 똑같이 말할 수 있죠. 우주의 전체 경과는 물체적, 물질적이지만 잔여물이 항상 따라다닙니다. 잔여물은 후행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입니다. 스피노자는 이 책에서 몇 번 안 나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직관을 다른 말로 변형해서 집어넣으려는 노력을 많이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슈레버 얘기는 책을 안 보면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니, 꼭 보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되죠. “바로 이 잔여 에너지가 무의식의 셋째 종합을, <따라서 그것은 ……이다>라는 결합 종합 또는 소비의 생산을 추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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