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018

“기입 표면에 […]”. 기입 표면은 기관 없는 몸이에요. 기입 표면, 등록 표면, 분배 표면, 다 같은 거였습니다. “[…] 주체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이 눈에 띄게 되니 말이다.” 주체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잔여물이 곧 주체예요. 주체를 설명하는 말을 계속 보겠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주체이다. 고정된 정체성이 없고, 기관 없는 몸 위를 방황하며, 늘 욕망 기계들 곁에 있고, […]” 이런 서술은 저 그림으로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그림 참조]]. “[…] 생산물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몫에 의해 정의되며, 도처에서 생성 내지 아바타라는 덤을 얻고, […]” 노름판이 있으면 옆에서 개평 얻죠? 그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 자신이 소비하는 상태들에서 태어나고 또 각 상태마다 다시 태어나니까.” 주체를 설명하는 문구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조금 미리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원서 27쪽 맨 아래 새로 시작하는 문단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아까 소개한 클로솝스키의 니체 해석을 언급합니다. 책의 구절을 인용하기 전에 그의 작업에 대한 평가부터 합니다. “그는 가장 높은 사고와 가장 날카로운 지각을 구성하는 물질적 감정으로서의 기분(Stimmung)의 현존을 보여 주었다.” 프랑스어로 번역하지 않고 독일어를 그대로 남겨두면서 ‘슈티뭉(Stimmung)’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말로 ‘기분’, ‘정서’, ‘분위기’를 뜻합니다. 하이데거에게도 중요하게 취급되는 용어인데, 하이데거가 니체적 의미를 얼마나 빌려왔는지 모르겠으나, 하이데거와 니체는 상극이므로 서로 관련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기분이라는 것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인간적이고 인물적인 거와 분리해서 기분 자체만을 떠올려 보세요. 여기서 얘기하는 게 그겁니다.

그리고 같은 것이 원서 25쪽의 새로 시작하는 문단 중간쯤에 ‘나는 느낀다’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프랑스어 ‘주상스(Je sens)’, 영어 ‘I feel’입니다. 클로소프스키가 ‘기분’이라고 한 것이 ‘나는 느낀다’라는 것 자체입니다. ‘나는 느낀다’와 ‘기분’, 이 둘이 같은 겁니다. 둘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분’ 혹은 ‘느낌’ 자체를 떼어놓고 고찰해야 합니다.

이런 특성으로 묘사되는 주체는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자아, 느낌들 또는 기분들을 교체해 가면서 간직하는 자아와는 거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있는 거는 오직 기분들의 연속된 흐름, 또는 나는 느낀다의 연속된 흐름뿐입니다. 들뢰즈·과타리에게 주체란 뭐냐? 바로 그 느낌들의 계열, 또는 기분들의 계열입니다. 그러면 기분 혹은 느낌은 어떻게 생산되느냐? 생산의 경과의 두 단계(생산의 생산과 등록의 생산)를 거치면서 ‘잔여물’ 혹은 ‘나머지’로서 생겨납니다(소비의 생산 혹은 완수의 생산). 그러니까 우리가 ‘나’라는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인간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나’는 굉장히 사회적인 것일 뿐이에요. 체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사실 느낌들의 변화, 자기 기분 상태의 변화, 느낌 혹은 기분의 교체와 연쇄예요. 그걸 ‘준(準)안정적(métastable)’이라고 묘사하기도 합니다(원서 26쪽). 안정적이지는 않고, 일시적이고 잠정적이고 잠깐 지속되기도 하는 것들의 연쇄입니다. 그래서 어떨 땐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나도 느끼고 딴 사람들도 느끼는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왜냐면 나를 구성하는 것은 여기서 언급되듯 느낌들 혹은 기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고정된 정체성을 지닌 자아는 입증이 불가능합니다. 자아는 생물학적 실체가 아니지요? 따라서 타인이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자기 안을 들여다본다는 ‘내성(內省, introspection)’에 의해 확인되는 무엇일까요? 혹은 언어와 몸짓 같은 것을 통해 표현되어 타인이 관찰할 수 있는 무엇일까요? 막상 내성을 통해 보이는 건 결국 기분 혹은 느낌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까 그렇게 느꼈다는 느낌도 실은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이니까요. 타인에게 표현되는 것들도 대체로 계속 변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들뢰즈·과타리가 말하는 주체는 이런 식으로도 입증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옵니다. “<따라서 그것은 나다, 따라서 그것은 내 것이다…….>”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대략 아르토가 했을 법한 말입니다. 주체에 대한 선언이 나옵니다. ‘따라서(donc)’ 라는 것은 영어로 ‘therefore’ 또는 ‘so’입니다. ‘따라서’라는 것은 저 생산의 생산 및 등록의 생산의 결과로서라는 뜻입니다. 생겨난 그 무엇, 그것이 나다. 그러니까 받아들이는 거죠. 바로 윗줄에 ‘도처에서 생성 내지 아바타라는 덤을 얻’는다는 게 그런 뜻입니다. ‘생성’ 혹은 ‘아바타’는 생산의 경과의 두 계기를 거치면서 뭔가가 생겨났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적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나다, 따라서 그것은 내 것이다…….>라는 대목은 번역이 영어본에서 아주 잘못되어 있습니다. 3절 첫 문단이니까 비교해 보셔요. 프랑스어로는 이렇습니다. “c’est donc moi, c’est donc à moi…” 영어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therefore it’s me, therefore it belongs to me.’ 그게 나다, 나에게 속한다, 내 거다. 같은 내용을 두 번 반복해서 다르게 표현한 거예요. 강조한 거죠. 여기서 ‘그것’은 생산의 결과물이죠. 느낌 혹은 기분, 그건 나다, 그건 내 거다. 영어본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It’s me, and so it’s mine.”(영어본 16쪽) ‘therefore’를 ‘so’로 쓸 수는 있어요. 그런데 위치가 어떤가요? ‘so’가 중간에 있어요. 이 번역을 빌면 이렇게 할 순 있겠죠. ‘So it’s me, so it’s mine.’ ‘so’가 중간에 있게 앞뒤 두 문장이 추론 관계에 놓이게 돼요. 아주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런 지독한 오역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

유진 홀랜드(Eugene Holland)라는 들뢰즈 연구자가 있어요. 1999년에 《《안티 오이디푸스》 입문》이라는 책을 낸 미국 학자입니다. 홀랜드는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결합 종합’을 해석하는 데 몇 쪽이나 할애해요. 그런데 잘못된 번역에 근거해서 서술해요. 완전 큰 오류죠. 말인즉슨, 홀랜드는 세 번째 종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얘기에요. 그럼 누가 잘 이해했느냐? 《안티 오이디푸스》 연구서를 보면 전 세계에 딱 세 권 나와 있어요. 단행본이요. 나의 박사논문 서지에 이름이 있으니까 확인하세요. 미국의 유진 홀랜드, 내 친구 호주의 이안 뷰캐넌(Ian Buchanan), 프랑스의 기욤 실베르탱-블랑(Guillaume Sibertin-Blanc), 이렇게 셋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결합 종합’ 부분을 제대로 해설하고 있지 않습니다. 영어로 읽은 분들은 이 대목에서 걸려 넘어졌다고 할 수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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