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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을 통해 본 재현과 표현의 문제 (문성원, 부산대 철학과)
                                                                                                          
1.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은 개념을 창출하는 학문입니다. 그는 개념을 다루는 철학이, 감각의 힘을 다루는 예술, 인식의 기능을 다루는 과학과 더불어, 우리 두뇌가 카오스와 대적하기 위하여 타고 가는 세 개의 뗏목, 세 개의 구도라고 하지요. 들뢰즈는 이 세 가지가 환원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기본적 특성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또 한편 부인하기 어려운 것은 철학이 과학과 예술의 동향에 따라 큰 영향을 받아왔다는 점입니다. 철학이 개념을 창출한다 할 때, 그 창출 작업의 동인이나 필요성이 때로 과학의 발전에서, 때로 예술의 자극에서 올 수 있다는 얘깁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적 면도 크게 작용합니다. 들뢰즈가 직접적으로는 잘 강조하지 않는 정치, 넓은 의미의 정치의 개입을 간과할 수 없지요. 그런 까닭에 루이 알튀세르 같은 이는 철학의 역할을 과학과 정치 사이에서 잡았던 것입니다.

반면, 들뢰즈에게는 예술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집니다. 그래서 얼핏보면 알튀세르의 정치를 예술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술에 대한 들뢰즈의 강조가 나름의 정치성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니까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방향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2. 이야기를 너무 벌려나가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들뢰즈의 철학 전반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의도도 능력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표현(expression) 개념에만 논의를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도 들뢰즈에게서 개념이 어떤 위상을 가지는 것인지를 잠시 말하고 넘어가는 게 불가피해 보입니다. 표현이라는 개념이 예술과(물론 문학과) 가깝게 여겨지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표현 개념은 보통의 '표현주의'에서 말하는 표현과 다를 겁니다(특히 그것이 '주체'의 표현을 뜻하는 경우 그렇습니다). 저는 '표현'을 무엇보다도 '재현'(representation)과 대치되는 것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들뢰즈에서 그 개념이 갖는 의미도 그와 같은 관계에서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우리는 표현 개념의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 함의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3. 들뢰즈가 표현 개념을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저작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1968)입니다. 제가 주 텍스트로 삼는 것은 이 책이지요. 이 책은 게루, 마트롱, 마슈레, 네그리 등의 작업과 함께 스피노자 르네상스에 크게 기여한 저작입니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 있듯 표현 개념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킨 것이 특색이지요.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 후에 들뢰즈가 펴낸 {스피노자, 실천적 철학}(1970)에서는 '표현' 개념이 중요하게 다루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책은 논저라기보다는 스피노자 철학을 설명하는 소책자이긴 합니다. 하지만 주요 개념 해설에조차 '표현' 항목이 빠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들뢰즈는 한 개념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어떤 주요한 개념을 축으로 삼아 체계적 철학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그와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답변으로는 의아스러움이 풀리기 어렵습니다. 저는 스피노자 해석에서 나타난 대로의 '표현'이 들뢰즈의 주요 철학적 개념이 되기에는, 그러니까 그 '이론에서의 정치'를 만족시키기에는 충분치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만,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잠깐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표현'이 이후의 들뢰즈 저작에서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표현'은, 이를테면 {카프카}(1975, 가타리와 공저)에서, 특히 '표현기계'라는 형태로, 주요하게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때의 '표현'이 스피노자 해석에서의 '표현'과 같지는 않습니다. 즉 이때의 표현은 '형식을 부수고' '단절을 표시하는' 표현입니다. 이른바 언어의 '탈영토화'와 관련되지요. 그런가 하면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다룬 {감각의 논리}(1981)에서는 직접적으로 회화적 표현이 다루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스피노자를 설명할 때와 같거나 유사한 방식으로 표현 개념이 취급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4. 그렇다면 우리는 들뢰즈에서 '표현'과 관련하여 어떤 공통된 지표를 찾아낼 수는 없는 것일까요?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찾을 수 있는 특성이 바로 '재현과의 대치'입니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에서조차 '재현'의 극복을 보고자 합니다. 그에게는 '재현과 단절'하고 '삽화성을 방해'하고 '서술을 깨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스피노자 해석에서 나타나는 표현 개념의 경우에도 바로 이 재현에 대한 거부가 논의의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실 들뢰즈를 위시한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가들 덕분에 '재현'을 거부하고 반대한다는 말에는 어느덧 우리도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나 '왜'입니까? 왜 재현을 거부해야 합니까? 재현이 없으면 사유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개념이란 바로 이 재현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는 때로 representation을 표상表象;Vorstellung이라 옮깁니다.)

"우리가 재현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그것이 동일성의 형식에 머물러 있다는 데 있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적어도 하이데거 이후로 동일성이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고정된 규정이, 그 규정들을 통해 조작되는 세계가 문제입니다. 하이데거는 이 문제를 존재자(Seiendes)와 존재(Sein)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제기합니다. 이런 시도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적 사유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현대 기술 문명의 극복 수단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지요. 하이데거를 넘어서고자 한 레비나스 역시 그 극복의 원천을 자신의 전통 속에서, 즉 히브리 전통 속에서 찾습니다. 존재까지도 넘어선 곳, 이해관계(interest, inter-esse ; 사이 존재)를 넘어선 윤리, 레비나스는 여기에서 현대 서구 문명의 극복책을 구합니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어떨까요? 들뢰즈 역시 뒤를 돌아다봅니다. 새로움을 찾고자 하는 일견 역설적인 태도이지요. 하지만 그는 하이데거나 레비나스와는 달리 고대 그리스 이후의 서구 철학사 속에서 '내재적'으로 그 답을 구합니다. 물론 주류 철학이 아닌 비주류의 철학 속에서. 이를테면 스토아 학파에게서, 스피노자-라이프니츠에게서, 니체에게서, 그리고 베르그손에게서. '표현'은 그 가운데서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스피노자-라이프니츠, 특히 스피노자에서. 이렇게 뒤돌아보는 시선은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입니다.

 

5. 스피노자-라이프니츠 철학이 왜 비주류냐, 그렇다면 누구의 철학이 주류란 말이냐,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겠지요. 답은 분명합니다. 스피노자-라이프니츠에 견주자면 데카르트 철학이 주류입니다. 다음을 봅시다.

<사실상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공통의 기획을 갖는다. 그들의 철학은 새로운 "자연주의"의 두 측면을 구성한다. 이 자연주의는 반(反)데카르트주의적 반발의 참 의미이다. 페르디낭 알키에는 아주 훌륭한 글에서 어떻게 데카르트가 수학적·기계론적 학문의 기획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17세기 전반기를 지배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기획의 일차적 결과는 '자연'으로부터 모든 잠재성virtualit  혹은 잠재력potentialit , 모든 내재적 능력, 모든 내속하는 존재를 박탈함으로써 '자연'을 평가절하한 것이었다. 데카르트 형이상학은 바로 그 기획을 완성시키는데, 이는 그것이 존재를 자연 밖에서, 자연을 사유하는 주체 안에서, 자연을 창조한 신 안에서 찾기 때문이다. 반대로 반(反)데카르트적 반발에서는 힘 혹은 역능을 지닌 '자연'의 권리들을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308쪽) 

데카르트가 수학적·기계론적 기획을 대표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데카르트 철학은 조작적 사유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얘기지요. 하지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도 수학이 전문가가 아니냐, 기하학적 엄밀성을 추구하고 미분 계산법을 창안한 이들이 그들 아니냐,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무한'을 세계에, 자연에 내속시켰습니다. 이것이 자연을 조작가능한 가능성의 실현 대상으로만 보는 태도로부터 이들을 구해 줍니다. '주체-객체'의 구도, 이른바 주체주의의 길로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점은 특히 스피노자에게서 두드러집니다.

주지하다시피 반(反)주체주의는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의 공통적 특징이지요. 거칠게 보면 이는 근대적 주체의 전횡에 대한 반성을 의미합니다. 한때는 주체성이야말로 철학적 세계관이 도달해야 할 목표였던 적이 있지요. 헤겔은 스피노자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가 실체를 주체로 보지 못했다는 점을 큰 결함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를 뒤집어 보면, 즉 근대적 주체성의 극복을 과제로 설정하면, 결점이 거꾸로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들뢰즈처럼 스피노자에 관심을 갖는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은, 스피노자를 통해서 반주체주의를 캐냈다기보다는, 반주체주의를 뒷받침할 철학적 근거를 찾다가 보니까 스피노자를 부각시키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6. 그러면 이제 스피노자의 표현 개념은 어떤 것인지를, 또 그것이 반주체주의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표현'이 어떻게 '재현'의 문제를 극복하느냐가 역시 관심의 초점이 되겠지요.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에티카} 1부에서 표현 관념은 정의 6에서부터 등장한다. "내가 말하는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다시 말해 그 각각이 영원하고 무한한 하나의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이루어진 실체이다.">

여기서 속성(attribut; attribute)들은 신의 본질을 표현합니다. 그런가 하면 신은 이 표현인 속성들로 이루어지지요. 세 가지가 등장합니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인 신, 그 신의 본질, 그리고 신의 본질의 표현인 속성들. 신의 본질이 뭐냐, 신이 실체라는 건 무슨 뜻이냐, 이런 문제들은 일단 접어둡시다. 우선 표현이 3항 관계라는 점에 주목해 보도록 합시다.

이것의 중요성은 역시 재현과 비교해 볼 때 드러납니다. 대체로 재현은 2항 관계로 취급되거든요. 재현하는 것과 재현되는 것, 표상(representation)과 대상,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주관-객관(subject-object)의 관계하에서 작동합니다. 주관이 객관을 재현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관, 객관, 재현의 삼항관계를 얘기하긴 어렵지요. 재현이 재현(re-presentation)인 한에서 자체 독립성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상정되니까요.

사실상 재현은 항상 '마이너스'입니다. 이 마이너스는 재현이 전제하는 동일화 작용--'re-present'해야 하니까요--의 불가피한 결과지요. 말하자면 재현은 항상 제거하고 죽이는 게 있다는 얘깁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이러한 제거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고정된 명료함을 주고 조작 가능성을 주니까 말이지요. 재현은 투명한 듯 보이지만 고정된 막으로 작용합니다. 마치 필름에 찍힌 상과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객관에 충실한 듯하면서 객관을 보는 눈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개입하지요. 이것이 재현의 역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표현'은 이런 재현의 방식을 넘어서고자 합니다. 

따라서 '표현'에는 '재현'에서와는 다른 어떤 적극적인 역할이나 작용이 부여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들뢰즈에 따르면, 표현은 감싸고(envelopper) 펼치는(expliquer) 작용을 합니다.

<펼친다는 것은 전개한다d velopper는 것이다. 감싼다는 것은 함축한다impliquer는 것이다. 그렇지만 두 항이 반대항은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표현의 두 측면을 지시할 뿐이다. 한편으로 표현은 펼침, 즉 자신을 표현하는 것의 전개, 다자(多者) 속에서의 '일자(一者)'의 현시(그의 속성들 속에서의 실체의 현시, 그 다음 그들 양태들 속에서의 속성들의 현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다자적(多者的) 표현은 '일자'를 감싼다. '일자'는 그를 표현하는 것 속에 감싸여 있고, 그를 펼치는 것 속에 각인되어 있으며, 그를 현시하는 모든 것에 내재해 있다.>(23-4쪽)

그러니까 표현은 한쪽이 한쪽을 투영하는 식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표현은 一과 多를 매개하는 관계이고, 그런 의미에서 풍부화의 원리이며 방식이지요. 표현을 매개로 실체에서 속성으로, 속성에서 양태로 풍부화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또한 복합complication의 방식--impliquer와 expliquer를 계기로 갖는, pli의 방식-- 이기도 합니다.

 

7. 들뢰즈는 이러한 표현의 은유적 장치가 거울과 씨앗이라고 설명합니다. 거울보다는 씨앗의 비유가 이해하기 더 쉬울까요? 이를테면 나무가 씨앗 속에 감싸여 있고 펼쳐지는 것처럼 세계가 그러한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반면에 거울의 비유에서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울과 거울에 비치는 대상만을 생각하면 이것은 재현의 이항관계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라, "여기서 거울은 자기 안에 반사되는 존재와 이미지를 응시하는 존재를 흡수"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표현하는 것[반사되는 존재]과 감싸고 표현되는 것[이미지를 응시하는 존재]을 펼치는 삼항관계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거울은 자기가 감싸고 있는 풍부함과 펼쳐지는 풍부함을 상실 없이 매개할 수 있는 것이지요.

 

8. 들뢰즈는 이런 방식에 따른 삼항관계로 스피노자의 체계를 정리합니다. 먼저 실체-속성-본질이라는 실체의 삼항일조(triade), 그리고 속성-양태-변양이라는 양태의 삼항일조. 복잡한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얘기를 접겠습니다. 저는 다만 들뢰즈가 표현 개념을 매개로 하여 스피노자의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를 구체적인 유한 양태와 연결하려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가 무한자를 유한자와 연결시키는 방식이야 초월자를 자연 속에 집어넣는 범신론 또는 내재론의 특성을 갖는 것입니다만, 오늘날의 견지에서 볼 때는 거꾸로 유한자가 어떻게 무한자와 연결되느냐가 관심거리일 수 있습니다. 표현 개념에 대한 관심도 여기에서 주어집니다. 유한자가 무한자의 표현일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재현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초점이 되는 것이지요.

   

9. 그러나 모든 유한자가 다 똑 같은 표현인 것은 아닙니다. 각 유한자는 그 본질에 따라서 무한자를 표현하지요. 그리고 그 유한자의 본질은 그 놈이 실체의 역능(potentia; puissance ; power)--이것 자체는 물론 무한한 것입니다만--을 얼마나 자기 안에 넣고 있느냐에 따라, 그 intensity(intensit ; 內包性 또는 强度)에 따라 달라집니다. 또 유한 양태는 그 본질이 표현되는 특징적 관계 아래 해당되는 외연적(extensive) 부분들이 확보되어야만 실존하게 됩니다. (스피노자에서는 유한자의 본질과 실존이 구분됩니다. 무한자에서는 물론 실존과 본질이 합치하지요.) 말하자면 양태들은 나름의 tension을 감싸고(in-tension) 펼치는(ex-tension) 셈이지요. 사실 이 두 가지는 양태가 가지는 표현 방식입니다. 양태의 본질이 intrinsical(본래적, 내재적; intrins que)한 방식이라면, 양태의 실존은 extrinsical(비본래적, 외부적; extrins que)한 방식인 것이지요. 이것을 각각 복합과 펼침을 통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감싸고 펼침, 다시 말하지만, 이 두 가지는 표현의 두 계기고 필요 조건입니다.  

다른 한편, 유한자가 자신의 능력을 언제나 다 같은 방식으로 실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유한자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어지겠지요. 유한자가 지니는 것은 특정한 변용(affection) 능력인데, 이것은 수동적으로 실현될 수도, 능동적으로 실현될 수도 있습니다. 능동적 변용이란 우리[해당 유한자] 안에 원인을 갖는 변용을, 수동적 변용은 우리 밖에 원인을 갖는 변용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비례 관계에 있습니다. 수동적인 변용은 능동적 변용의 제한성을 나타내지요. 그것은 감싸는 것이긴 해도 펼치는 것은 못 됩니다. 그래서 수동적인 변용은 '표현'에 이르지 못 합니다. 자, 여기서 표현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10. 그것은 이미지와 표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보통 '표현'하면 이미지를 떠올리지요. 표현과 이미지, 자연스러운 연결 아닙니까. 그런데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에 따르면 이미지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미지는 수동적인 것이니까요. 다음을 보세요.

<가장 명확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유형(有形)의physique 자국, 흔적 혹은 인상, 신체의 변용 자체, 어떤 신체가 우리 신체의 약하고 무른 부분들에 미치는 효과이고, 비유적 의미에서 이미지는 대상을 그것의 효과에 의해 우리에게 인식시킬 뿐인 변용의 관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connaissance은 인식이 아니라 기껏해야 재인식r cognition에 불과하다. 거기서 지시indication 일반의 특징이 도출된다: 주 "지시대상"indiqu 은 결코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 우리의 가변적 구성의 일시적 상태이다; 부(간접적) 지시대상은 외부 사물의 본질 혹은 본성이 아니라 외관인 바, 이 외관은 우리에게 사물을 그것의 효과에 입각해서 재인식하는 것만을, 따라서 옳건 그르건 단지 그것의 현존을 긍정하는 것만을 허락할 뿐이다. 우연과 마주침의 산물이고, 순전히 지시적이며, 재인식에 봉사하므로 우리가 갖는 관념들은 비표현적이다. 다시 말해 부적실inad quate하다. 부적실한 관념은 절대적 결핍이나 절대적 무지가 아니다: 그것은 인식의 결핍을 감싼다.>(203-4쪽)          

부적실한 관념이란 그것의 정확한 원인에 대한 관념을 포함하지 못하는 관념입니다. 말하자면 이미지는 자신의 원인이 뭔지 모르는 채 결과만 감싸는 것인 셈이지요. 그래서 펼칠(expliquer; explicate) 수가 없습니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넘어서서 무한과 이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표현'이 아니지요.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에서 '표현'의 주요한 의의는 무한과 연결된다는 점에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미지는 오히려 '재현'에 가깝습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지시'이고 '기호'일 따름이지요.

여기서 이미지의 위상은 뚝 떨어집니다. 사실 철학사적으로 보면 이미지 및 이미지화(想像; imagination)는 대개 불완전한 인식 요소로, 개념화 이전의 단계로 취급받아 왔지요. 스피노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적실한 관념에, 원인에 대한 정확한 파악에, '공통 개념'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우리는 신에 대한 관념에, 세계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요. 적어도 이처럼 적실한 관념에 이르러야 우리의 관념은 '표현'일 수 있습니다.

 

11.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귀결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미지에 대한 오늘날의 높은 관심에 매달린다면, 이런 귀결이 못마땅해 보일지 모릅니다. 사실 이미지에 대한 관심 가운데는 비판적인 견지에서도 평가해 줄만한 게 있습니다. 이미지 속에서 지배적인 개념적 질서를 넘어서는 것, '재현'을 넘어서는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들, 예를 들면 바르트의 푼크툼 같은 것을 찾고자 하는 시도들을 내세울 수 있겠지요. 베르그손의 이미지론이 관심을 끄는 이유도 아마 그런 데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닌게 아니라,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이후에 더 이상 이런 식의 '표현' 개념을 강조하지 않았던 이유의 일단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스피노자 식의 인식론적 귀결, 특히 공통 개념을 통해 신적 본질에 이르고 지복(至福)에 도달한다는 식의 귀결이 별반 호소력이 없다면, '재현'을 비판하고 '동일성'을 깨뜨리는 데 굳이 스피노자 식의 '표현'을 고집할 이유가 없겠지요. 아마 그것은 '탈영토화'의 전략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들뢰즈의 영화론에서 보듯 이미지를 통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게 낫겠지요. 스피노자에게서는 탈주체주의적 함축을 활용하는 데 집중하고 말이지요.

 

12.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소개한 들뢰즈의 '표현' 개념에 여전히 주목할 만한 계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의 표현이 무한의 표현이라는 점이 그것인데요, 이런 계기 내지 특성은 형태와 방향을 달리하면서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무한의 표현은 초월적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무한이란 잡히거나 규정되지 않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초월적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들뢰즈의 어려움과 특색이 이 초월 또는 무한을 내재성의 구도 속으로 끌어넣는 데 있다고 봅니다. 이른바 '내재적 초월론'의 어려움--이것을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공유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와 달리 들뢰즈의 경우는 신적 인식에 이르는 체계성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 어려움은 가중됩니다. 안주할 곳이 없는 탈영토화-재영토화의 연속, 끊임없이 차이지는 반복 속에서의 현기증 나는 방황.  

 

13.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느냐구요? 글쎄요, 이재성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레비나스도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레비나스에서의 표현은 무한의 표현이라는 계기를 가지면서도, 내재적 초월론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지요. 레비나스에서의 표현은 무엇보다도 '타자'의 표현이고 이 타자는 외재성(exteriority)에 속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면서도 그것은 우리에게 출현합니다. 타인의 얼굴로서 말이지요. 그리고 이 표현은 우리에게 최초의 '의미'를 줍니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의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의미화의 원천인 타인(Autrui; the Other)의 현전 즉 표현은 가지적인 본질로 [내부에서]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들리며, 그래서 외재적으로 추구됩니다. 표현 또는 얼굴은, 나로부터 비롯한 것처럼 언제나 나의 사유에 내재하는 이미지들을 넘쳐흐릅니다. 넘쳐흐름의 이미지로 환원될 수 없는 이 넘쳐흐름은, 형이상학적 욕망(D sir; Desire)과 선의 정도에 따라--또는 그 과도함에 따라-- 생산됩니다. 이때의 선은 나와 타자의 비대칭적 도덕입니다. 이 외재성의 거리는 즉각 높이로 뻗어나갑니다.> (영어본 297쪽, 불어포켓판 331쪽) 

이렇듯 레비나스의 표현은 철저히 윤리적인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윤리는 역능의 긍정을 얘기하는 스피노자 식의 윤리와는 다르지요. 스피노자의 윤리는 무한을 타자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무한을 분유하고 그 무한에 참여하는 것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선은 타자의 수용과 환대가 아니라 역능의 증대니까요. 반면에 레비나스에서는 타자를 한껏 높히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래서 레비나스가 추구하는 선은 지복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됩니다.     

또 여기서 보는 것처럼 레비나스의 경우에도 표현은 이미지를 넘어섭니다. 이 점은 이미지가 사유 내적인 것으로 설정되는 한 당연한 것이지요. 사실 레비나스는 이미지나 예술 일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는 윤리적 관계와 '얼굴'의 생동하는 무한함이 살아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요컨대 레비나스에서 표현은 외재적 무한의 현현이고 초월의 현전입니다.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재현과 동일성을 넘어섭니다. 재현의 고정된 질서에 대한 비판으로 작용할 수가 있지요. 그런가 하면 내재성의 부담을 또한 넘어서 있습니다. 그 때문에 체계성의 유혹이나 준거의 불확실성 양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얼굴, 레비나스의 '표현'이 갖는 장점은 이런 면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족>
레비나스에서 '표현'이 타자의 얼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1974)에서는 '표현'이 감성과 관련하여 말함(le Dire; the Saying)과 함께 등장하기도 합니다. "나의 자유에 대해 앞선, 현전과 재현에 대해 앞선, 타인(Autrui)에 대한 책임은 어떤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입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노출(exposition)입니다. 그것은 이 노출 자체를 가정함이 없는 노출, 주저함이 없는 노출, 노출의 노출이며, 표현이고, 말함입니다. 말함의 솔직함이고 진정함이고 진실됨입니다. 이 말함은, 타자의 면전에서 단어들을 내뱉으면서 말(le Dit; the said) 속에서 스스로를 숨기고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말합니다. 그것은 속살까지 벌거벗음이고, 피부에 닿는, 신경에 닿는 감성(sensivilit ; sensibility)입니다. 고통까지 무릅쓰는 감성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스스로 의미를 주는 전적인 표시작용입니다(tout signe, se signifiant; wholly sign, signifying itself). 존재의 끝에 대한 대체(la substitution   bout d' tre)는 말함에 가 닿습니다. 이 말함은 기호(signe; sign)의 증여이며, 이러한 기호의 증여에 대한 기호의 증여이고, 스스로의 표현입니다. 말의 모든 주제화에 앞서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표현이 더듬거림이거나 아직 원시적인 말함이거나 어린애의 말함인 것은 아닙니다."(불어 포켓판, p. 31, 영어판,  p. 15.)

* 2006년 경에 작성된 글인 듯합니다. 몇 가지 이견이 있지만, 표현과 재현의 대립에 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