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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들뢰즈 철학에서 plan이라는 말만큼 중요하면서도 번역하기 힘든 말도 없을 듯하다. 한국의 초기 수용 단계에서는 "구도"라고 옮겨지다가 더 시간이 지나서는 "평면"이라고 옮겨졌다. 나는 <천 개의 고원>을 번역할 때 조금 과감하게 '판'으로 옮겼고, <안티 오이디푸스>(여기서는 핵심 개념으로 등장하지 않지만)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대체로 '면'으로 옮겼다. 내가 이렇게 "주류" 번역어에서 벗어나려 했던 건 이유가 있어서인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개념의 의미를 들뢰즈 본인이 직접 해명하고 있는데, 그건 "구도"도 "평면"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라리 수학적 의미로는 "평면"이 아니라 "곡면"이 낫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그러던 중 2016년 가을학기에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학생들과 <천 개의 고원>(1980)의 '서론'으로 수정 증보되어 재수록된 <리좀>(단행본으로 1976년에 출간된 바 있음)을 한 줄 한 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러면서 carte라는 중요한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지의 문제에 직면했다. 이 단어는 영어로 'map'으로 번역되었고, 나도 <천 개의 고원>에서 뜻을 정확히는 모른 채 '지도'라고 무심코 옮긴 바 있다. 그런데 자꾸 걸리는 점은 들뢰즈&과타리가 'carte는 calque가 아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Tout autre est le rhizome, carte et non pas calque. Faire la carte, et pas le calque." (MP 20) 영어본: "The rhizome is altogether different, a map and not a tracing. Make a map, not a tracing." (ATP 12, by Brian Massumi) 한글 수정본: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모사가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모사는 만들지 말라." 당시 나는 이 구절에서 코집스키(Alfred Korzybski)의 저 유명한 말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The map is not the territory)를 떠올렸다. 당연히 지도는 그것이 재현하는 실제 영토(땅)가 아니라 그것을 특정한 규약(code)에 따라 변형한 거지! 그런데 곰곰히 더 생각해 보면,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지도는 일종의 모사가 아니던가. 즉, 지도가 영토에 근거하지 영토가 지도에 근거하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지도는 모사이고 재현일 뿐 아니던가. 내 의문은 이렇게 커져갔다.

 

그러다가 carte의 어원을 추적하기 시작했는데, 그건 고대 희랍어 파퓌루스의 면을 뜻하는 χάρτης (kartès)를 음차한 라틴어 charta였다(여기에서 영어 단어 card도 유래하며, 프랑스어에서 carte의 일차적인 뜻은 card이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carte에 가장 어울리는 한국어는 '도면'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들뢰즈&과타리는 가끔 '설계도'라는 뜻을 가진 일련의 단어들을 선호한다(바빠서 전거는 생략). 아무튼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이제 <천 개의 고원>의 11고원을 다시 읽다가 plan을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plan이 '도면'으로 번역되는 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carte는 plan으로 전환될 수 있다. 프랑스어에서 plan의 중요한 뜻 중 하나가 바로 '지도'이기도 하다. plan는 '평평하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 형용사 planus에서 왔으며, 영어로는 통상 plane으로 옮긴다. 사실 들뢰즈&과타리는 <리좀>에서만 'carte'라는 말을 쓰지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plan'을 쓴다. 물론 plan을 '계획'이나 '구도'라는 뜻에서 쓰지 않고 "기하학적 의미에서 plan"이라고 얘기된다. ("Ce plan d'immanence ou de consistance n'est pas un plan au sens de dessein dans l'esprit, projet, programme, c'est un plan au sense géométrique, section, intersection, diagramme", SPP 164; "Spinoza et nous", 1978에 처음 발표된 후, 수정 증보되어 1981년 이 책에 실림.) 아무튼 들뢰즈의 설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지는 않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는 있다. 가령 "[C'est] une composition de vitesses et d'affects sur ce plan de consistance : un plan, un programme ou plutôt un diagramme, un problème, une question-machine."("그것은 이 존립면 위에서의 속도들과 정감들의 합성이다. 즉, plan, programme 또는 차라리 diagramme, 문제, 기계-물음.", MP 315~316, 한글본 489) 같은 문장에서는 다시 plan이 programme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아무튼 이 모든 점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 저 "기하학적 의미의 plan"은 결국 "도면"으로 이해할 때 가장 적합하며, 내가 앞 글에서 번역 소개한 "<자연>의 도면(plan)을 순수한 위도와 경도로 정의한 건 바로 스피노자의 공로였다. 경도와 위도는 지도제작(cartographie)의 두 요소이다."(MP 318, 한글본 493~494)라는 구절에 딱 어울린다. 

 

그래서 나는 plan을 "도면" 또는 다른 말과 결합할 때는 짧게 "면"이라고 옮길 것이다. 잠깐, 그러면 carte는? 당분간은 '지도'라고 옮길 테지만, 더 좋은 말을 찾아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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