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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지난 번에 올렸던  들뢰즈, [니체와 철학] 강독 강의 1 (http://armdown.net/schizo/10726)의 속편입니다.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 글을 참조하세요.

 

2013년 11월 5일 니체와 철학 강의록

 

1강. 영어판 서문

 

<녹음파일2>

이제 두 번째 축으로 가보겠습니다. “두 번째 축은 권력(puissance)과 관련되어 있으며, 윤리학과 존재론을 형성한다.” 첫 번째 축은 범주로 치면 인식론에 해당합니다. 어떤 현상을, 현상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과 관련되지요. 엄밀하게 보면 들뢰즈에게 인식론 그 자체는 별 문젯거리가 아닙니다만. 제가 다른 데서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습니다. 두 번째 축은 윤리학과 존재론, 또는 정치철학까지 포함됩니다. 저는 첫째 축은 오래 봐서 시시하고, 현재는 이 둘째 축이, 존재론, 윤리학, 정치철학, 미학 등이 관심이 갑니다. “니체에 대한 오해들의 정점은 바로 권력과 관련된다. <권력의지>를 “권력을 원하거나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때마다,” 일단 이 앞 문장부터 보겠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힘에의 의지”라는 번역 논란에도 이런 오해가 들어 있는 겁니다. 더 많은 힘을 추구하려는 의지. 이렇게 되면 사실 무한퇴행에 빠집니다. 더 많은 힘, 더 많은 힘, 더 많은 힘,.. 이렇게 끝 갈 데가 없어요. 니체 철학을 그렇게 해석한 다음에, 결국 역설에 빠진 의지는 자포자기로 간다고 비난하면서 이게 니체의 한계라고 지적하는 식입니다. 들뢰즈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계속 읽어 보면요, “그런 식으로 해석할 때마다 우리는 니체의 사상과 아무 상관없는 시답잖은 생각들과 만나는 셈이다. 만약 모든 것들이 힘들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진실이라면, <권력>은 현존하는 힘들의 원소(élément), 아니 차라리 미분적 관계를 지시한다.” 이 “미분적 관계”(rapport différentiel)라는 말은 “발생적 관계”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여러 힘들이 관계를 맺잖아요? 여러 힘이 관계를 맺을 때, 그 관계를 형성하게끔 해주는 요소(élément)가 바로 권력이라는 거예요. 힘들은 물론 우연히 만나서 어떤 친화성에 따라 결합하기도 하고 거리를 두기도 하고 그래요. 그런데 ‘관계’는 굉장히 어려운 개념입니다. 이 대목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두 항이 있을 때 그 두 항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워요. 하지만 수학에서도 “3체 문제”(3 body problem) 또는 “다체문제”(many-body problem)라고 해서, 물체가 셋 이상이 되면 세 물체의 운동을 기술할 방정식이 없다고 합니다. 3항 이상이 되면 그것들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서너 개도 아니고, 10kg짜리 쌀자루 안에 있는 쌀들의 관계를 한방에 설명하는 건 보통 어려운 게 아니겠지요? 그런데 그건 한편으로는 쉽고 한편으로는 어려워요. 하나를 하나의 ‘묶음’으로 만들어주는 요인이 뭘까?,를 답하면 됩니다. 힘들이 관계를 맺을 때, 일단 시간을 정지시켜요. 그렇게 하면 이 상태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어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본질’을 부여하는 핵심어이기도 하겠고요. 권력이 바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관계를 만들어 주는, 형성해 주는 어떤 요소, 그것이 권력입니다. 이 “미분적 관계”라는 번역은 어떻게 해도 참 어렵지요. 어쨌건 기본적으로 그 관계는 둘로 구분됩니다. 권력과 관련해서는 긍정과 부정입니다. 다음 문장, “이 관계는 “긍정”과 “부정” 같은 유형의 동역학적 질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권력은 힘들의 발생 관계인데, 그 발생 관계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겁니다. 긍정이라는 것은 관계를 긍정한다는 거고, 부정은 관계를 부정한다는 거를 말합니다. 즉 긍정하면 관계가 형성되지만, 부정하면 관계가 형성이 안 돼요. 그래서 실제로는 긍정적 권력만이 관계를 형성합니다. 즉, 현상, 사물, 유기체, 사회, 의식, 마음 등은 긍정적인 권력만이 형성할 수 있어요. 부정적인 권력은 결국 아무것도 안하고 손 놓고 있는 일, 즉 ‘무위(無爲)의 인위(人爲)’ 또는 방치, 아니면 관계를 해체하는 요소입니다. 형성하는 힘과 흩어버리고 부수는 힘을 생각했을 때, 긍정은 형성하는 힘이요 부정은 파괴하는 힘입니다. (제가 방금 “힘”이라고 표현했지만 정확한 개념으로는 “권력”입니다.) 물론 긍정과 부정 역시도 단일한 의미를 가지지는 않아요. 긍정도 2가지 의미가 있고, 부정도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점은 나중에 [니체와 철학] 2장을 읽을 때 설명하겠습니다. 계속 읽으면. “따라서 권력은 의지가 원하는 것,” 프랑스어로 보면 “ce que la volonté veut”, 영어로 “what the will wills”이니까, 의지가 원하는 ‘것’은 목적어인데요, 권력은 ‘의지가 원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권력은 그게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의지 속에서 원하는 자”, 프랑스어로 보면 “ce qui veut dans la volonté”, 영어로 “what wills in the will”, 즉 의지 안에서 원하는 ‘것’, 즉 의지 안에 있으면서 의지작용을 하는 주어입니다. 그러니까 의지가 있다면, 의지는 뭔가를 바라고, 욕구하고, 추구하고, 소망하고 등을 하는데, 의지가 그냥 그런 작용들을 하느냐 하면, 그게 아니라, 그 안에 의지의 주어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권력이라는 겁니다. 마흐트. 퓌상스. 그러니까 권력이 발휘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하고자 하는 것, 또 하나는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전자가 긍정이고 후자가 부정입니다. 권력은 (뭔가를) 원합니다. 원하는 방식이 긍정과 부정인데, 부정은 결국은 뭘 하지 않겠다는 거,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의지에 관해서는 그래요. 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꼭이요! 의지에 관해서는 하려고 하는 게 긍정이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부정이에요. 부정하면 실제로 아무것도 안 이뤄져요. 부정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말이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하는 게, 예를 들자면, 아도르노 같은 사람이, 헤겔도 그렇고요, 부정에 의해 뭔가가 생겨난다고 할 때의 그런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거예요. 의지에 있어서는 부정은 안하겠다는 뜻이에요. 그런데데 아도르노와 헤겔의 경우에는 부정이란 ‘안 하겠다’가 아니라 ‘거부하겠다’는 뜻이지요. 그렇지만 여기서도 ‘~하겠다’가 먼저예요. 이게 의지의 측면이고, 의지의 긍정의 측면이에요. 의지가 발휘되는 방식은 두 가지밖에 없어요. 아니, 정확히는 한 가지죠. 들뢰즈는 니체를 해석하면서 그 두 가지이자 한 가지인 것을 계속 강조해요. 긍정하는 의지만이 회귀한다는 말은, 의지의 본성과 관련해 보자면, 정의상 그럴 수밖에 없어요. 부정하려는 의지는 아무것도 안하는 거기 때문에, 예를 들자면, 물속에 빠진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하면, 사람이 떠오르나요? 아무것도 안하면 꼬르륵 가라앉는 거랑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발버둥을 치는 건 의지거든요. 그게 긍정이고요. 이 긍정이라는 말이 니체에서 제일 오해되는 개념 중 하나인데, 그 까닭은 사람들이 보통 변증법에서 사용하는 부정과 서로 뒤섞어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변증법의 부정도 긍정하는 의지를 포함하고 있어요. 엄밀하게 말하면 부정이 뭔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긍정이 이루는 거예요. 그 점을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다음 문장. “그리고 “권력을 원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권력의지의 가장 낮은 등급, 그것의 부정적 형식일 뿐이며, 또는 반동적 힘들이 사물들의 상태 속에서 권력의지를 장악할 때, 그것이 취하는 용모일 뿐이다.”

자료 6쪽의 둘째 문단을 참고하겠습니다. “힘과 힘의 관계는 “의지”라고 불린다. 바로 그 때문에 무엇보다 권력의지라는 니체의 원리에 대해 오해를 피해야만 한다. 이 오해는 의지가 권력을 원한다거나 지배하기를 욕망한다는 뜻이 아니다(적어도 일차적인 뜻은 아니다). 사람들이 권력의지를 ‘지배욕’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한, 불가피하게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한데요,] 기성 가치들에 의존하도록 만들고 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돈, 지위, 명성 등이 있습니다,] 왜냐면 이런저런 경우, 이런저런 갈등에서 기성 가치들만이 어느 것(qui)이 가장 강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평가들의 조형 원리(principe plastique)이자, 아직 인정되지 않은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를 위한 숨은 원리인 권력의지의 본질을 오인한 것이다. 니체는 말하기를, 권력의지는 탐내거나 심지어 획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고 증여하는 데 있다.” 권력의지의 핵심은 일차적으로 ‘창조’와 ‘증여’에 있다는 것입니다,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권력의지는 ‘조형 원리’라고 얘기됩니다. 뭔가를 형성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술가의 작업을 권력의지의 대표적인 모델인 겁니다. 예술가는 자기가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이건 어떤 형태의 증여이자 창조입니다. 주는 거예요, 뺏는 게 아니라. 이런 예술가적 의지가 권력의지의 가장 대표적인 모델이라는 겁니다. 오해하면 안되는 게, 예술가의 조형 의지를 권력의지의 한 ‘사례’로 보는 해석이 많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사례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모델’이에요. 권력의지의 작동 방식은 예술가적인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오해했던 식으로, 예술가적 권력의지가 따로 있고, 무슨 권력의지가 따로 있고, 이런 식으로 보게 되면, 권력의지의 본성은 딴 데 있는 게 돼버려요. 하이데거는 두 권으로 된 자신의 강의록 [니체](1961)에서 “예술로서의 권력의지”, “인식으로서의 권력의지” 같은 표현을 쓴 바 있지요. (들뢰즈는 하이데거의 강의록을 접하지 않았으며, 짧은 글들만을 접했지만, [니체와 철학]에서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거꾸로 예술가의 조형 의지가 권력의지의 모델 그 자체라면, 다른 곳에서 작동하는 그런 권력의지도 예술가적 조형 원리를 따르는 겁니다. 뺏는 게 아니라 주는 거다, 뭔가를 만드는 거다, 이 점이 잘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든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힘들의 관계를 형성한다, 또는 힘들의 관계를 긍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힘들은 우연히 서로 만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권력의지가 하는 일은 힘들의 만남을 자체를 긍정하는 겁니다. 우연한 만남을 긍정하는 겁니다. 이 만남을 긍정하고, 저 만남을 긍정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이 만났다는 것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이미 뭔가가, 어떤 몸, 물체, 사물, 현상 등 세상 만물이 형성됐다는 거거든요. 바로 그것을 긍정하는 겁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요. 힘들은 사방으로 무수한 관계를 맺으면서 펼쳐져요. 그리고 힘들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바의 끝가지 가는 거(go to their limits)예요. 한계까지 가는 게 힘들의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작동 방식이에요. 그러면서 관계를 맺어요. 바로 그것을 긍정하는 게 권력의지, 권력이라는 거죠. 참고로 ‘권력’과 ‘의지’와 ‘권력의지’는 니체에게서 서로 호환되는 개념이라고 보면 됩니다. 맥락에 따라 서로 바꿔 쓰기도 합니다, 왜냐면 니체한테는 의지의 안에서 의지를 행하는 것이 마흐트, 퓌상스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얘는 주어요, 얘는 몸통이다, 이런 식으로 둘을 분리시켜서는 절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의지’라 하면 ‘권력의지’의 약칭이고, ‘권력’은 ‘권력의지’의 약칭이라고 보는 게 가장 적절합니다. 그것의 본질은 주는, 형성하는, 조형하는 능력입니다. 다음 문장 조금 더 보면. “권력의지로서의 <권력>은 의지가 의욕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 안에서 의욕하는 이다.” 아까 영어판 서문에서 똑같은 표현을 봤었죠. “몸소 나타난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는 변형과 형성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해체, 이런 것들을 긍정하는 신이거든요. 디오니소스(Dionysos)라는 이름이 ‘디오’(dio)와 ‘니소스’(nysos), 두 번 태어났다는 뜻이죠. 사지가 찢기고 다시 결합되죠. 찢기는 사지가 힘들이고, 결합이 권력의지의 작용입니다. 그런 디오니소스가 우주 사방에 몸소 나타나는 거예요. 이렇게 이해하면 권력의지에 대한 상을 조금 더 또렷하게 그려볼 수 있습니다. 한 문장 건너서 보겠습니다. “또한 권력의지는 항상 변화무쌍하고 공기와 같은 다원론적인 원소로써 제시된다.” 여기서 “변화무쌍하고 공기와 같다”는 표현도 디오니소스가 몸소 나타났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지요. 그 뒷부분은 각자 읽어보세요.

다시 자료 앞부분으로 갑니다. 여기도 비슷한 얘기를 다시 합니다. 아까는 현상의 본질로서, 또는 현상의 의미로서 ‘주인과 노예’, ‘능동과 반동’이라는 ‘유형’을 찾아가는 게 중요했다면, 이제는 “몸소 나타난 디오니소스” 내지 ‘주어 자리에 있는 권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질문의 형태가 달라집니다. “니체 철학의 가장 독창적인 성격 중 하나는 “~은 무엇인가”(qu’est-ce que)를 “어떤 자가 ~인가”(qu’est-ce qui)?로 바꾼 점이다.” 프랑스어 qui, 영어 which one이 저 ‘권력’의 자리에 오는 거죠. 누가, 어떤 자가, 무엇이 이 현상을 이처럼 만들어냈는가? 질문 형식이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은 무엇인가?”가 초시간적인 질문이라면, (이는 고대 희랍부터 유행했던 방식인데, 희랍어로 “ti esti?”, 영어로 “what is...?”, 즉 불변하는 본질에 대한 물음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what is justice), 선이란 무엇인가(what is good)?, 미란 무엇인가(what is beautiful) 등 이런 식입니다. 플라톤의 물음 방식이죠. 그 답변으로 나온 게 저 유명한 ‘이데아’입니다. 궁극적으로 “what is?”에 대해 가장 강하고 엄밀하게 답변한 건 파르메니데스였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다”(what is is what is not is not)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그냥 불변하면서 있고 존재하지 않으면서 있는 것은 없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반박하기 힘든 답변을 내놓았던 거예요. 니체는 바로 그런 본질에 관한 질문(what is)을 누가, 어떤 자가, 무엇이(which one is) 로 바꾼 겁니다. 이 새로운 물음은 ‘그런 질문을 하는 자가 누구냐’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이 그런 현상을 만들었느냐’일 수도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건 앞에서 보았던 ‘유형’에 대한 물음과 짝을 이루는 물음입니다.

계속 봅니다. “가령 어떤 명제가 주어질 때 어느 것이 그것을 언표할 수 있는가?” 다르게 표현하면, ‘누가, 어떤 자가 그것을 언표할 수 있느냐?’, ‘누가, 어떤 자가 이것을 말할 만한 능력이 있느냐?’, 이런 식을 물음을 바꿨다는 거죠. “여기서도 모든 “인물적” 지칭을 버려야 한다. “~인 자”는 한 개체, 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사건을, 말하자면 어떤 명제나 현상에서 관계 맺고 있는 힘들을 가리키며, 이 힘들을 규정하는 발생적 관계(권력)를 가리킨다.” 힘들이 관계를 맺으면 현상인데, 현상이 탄생했기 때문에 사건입니다. 힘들이 관계를 맺으면 ‘사건’이고, 그 현상 또는 사건에서 지배적인 힘은 ‘본질’이고, 또 누가 ‘그’ 현상을 형성했는가, 어떤 원리가 ‘그’ 사건을 형성했는가를 물으면 ‘권력’이 답입니다, 힘들의 ‘그’ 관계를 규정하는, ‘그’ 꼴로 만들어내는 발생적 관계가 권력 입니다. ““~인 자”는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의 탈 또는 용모, 하나의 번개이니다.” 번개라는 말은 사건과 관계됩니다. 순간적인 사건이지요. 그리고 번개는 행위자와 행위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걸 얘기할 때, 니체가 [도덕 계보학]에서 드는 사례이기도 해요. ‘번개’와 ‘친다’는 말은 구분되지 않아요. 둘은 동시에 하나인 사건입니다. 이 점은 책을 읽어가며 설명하겠습니다.

 

다음 문단, ‘영원회귀’로 갑니다. 악명 높죠! “<영원회귀>에 대한 오해는 <권력의지>에 대해 행해진 오해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왜인가 하니 <영원회귀>를 (모든 다른 조합들이 생성된 다음에) 한 조합의 회귀라고 이해할 때마다,” 여기서 잠깐 끊어 살펴보죠.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부분들이 있죠? 이 부분들이 조합하는 방식들은 무수히 많겠지요. 그런데 우주 안에서 그 조합은 다 일어났어요. 우주는 유한하니까, 유한한 것들 속에 있는 부분들도 유한하겠죠.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다 보면 유한 것들의 조합은 최소한 한 번 다 끝난 겁니다. 그렇다면 그 조합은 처음부터 되풀이될 겁니다. 조합의 집합의 반복이에요. 이렇게 생각하는 게 중요한 통속적 이해의 한 사례입니다. 니체 자신이 그걸 암시하는 노트를 남기기도 했는데, 사실은 니체가 폐기한 가설입니다. 그렇게 볼 때마다, “<영원회귀>를 <동일한 것>[the identical] 또는 <똑같은 것>[the same]의 회귀라고 할 때마다, 여전히 우리는 니체의 사고를 유치한 가설로 대치하는 셈이다.” 앞에서 “권력의지”에 대한 통상의 오해를 평가하면서는 “시답잖은 생각”이라고 표현했죠. “모든 [형태의] 동일성에 대한 비판을 니체보다 더 멀리까지 밀고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라투스트라]에서 두 번에 걸쳐, 니체는 <영원회귀>가 <똑같은 것>을 회귀하게 만드는 하나의 원(圓)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부정한다. 영원회귀는 그와는 정반대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선별, 이중의 선별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니체의 윤리학을 구성하는 의지 또는 생각의 선별이 있다. 그것의 영원회귀를 원하게 될 그러한 것만을 의욕하라.” 그러니까 내가 행하는 행위가 딱 한번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다고 할 만한 그런 행위만을 의욕하라. 이것은 윤리학적 명령입니다. 이건 무시무시한 거예요. 가끔 말씀드리지만, 이게 운명이거든요. 어떤 행위가 운명으로 긍정되려면, 그 행위를 의지하는 순간, 말하면서 행동하는 그 순간, 자신이 최선을 선택했었다는 게 시간이 흐른 후에도 긍정되어야 하고, 이럴 때만 그 선택이 후회하지 않는 선택으로서 운명이 됩니다. 달리 선택할 수는 없었던 거거든요. 내가 무한 번 이 삶을 되풀이해서 살게 되더라도 나는 이렇게 선택할 거라고 자신에게 물어 본 다음에 행동하는 겁니다. 이렇게 할 때에만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고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 되므로, 윤리적으로 행동의 원칙으로 정립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니체와 철학] 2장 14절에서 언급될 ‘영원회귀의 윤리적 양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존재론적, 우주론적 양상도 있습니다. “니체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존재>의 선별이 있다.” 첫째 양상은 행위의 선별과 관련됐는데, 이번 양상은 존재의 선별과 관련됩니다. 행위의 선별은 내가 행동하기 전에 그 행동의 원칙으로 삼을 게 무엇이냐와 관련됩니다. 내가 이 행동의 선택이 영원히 되풀이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행동하면 행위를 선별하는 겁니다. 이걸 할까 말까, 이 행동을 내가 무한한 반복 속에서, 내가 또 태어나고 또 태어난다 하더라도 선택할 것인가? 행위의 선별입니다. 두 번째는 존재의 선별인데요, “말의 가장 충만한 의미에서 생성하는 자만이 회귀하며, 회귀할 소질이 [어떤 능력이] 있다. 단지 능동과 긍정만이 회귀한다.” 능동과 긍정만이 회귀한다는 말은, 일단 이해하고 나면 굉장히 쉬운 진술입니다. 먼저 긍정만이 회귀한다는 말을 보겠습니다. 앞에서 부정은 아무것도 안 하려는 것, 그럼으로써 아무것도 안하는 거라고 했죠. 한편 반동은 자기가 뭘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걸 하는 무언가에, 능동적인 무언가에 그냥 맞장구치듯이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부정과 반동이 결합되면 사라질 운명에 처합니다. 이 우주 차원에서 볼 때 능동과 긍정만이 그 다음 순간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힘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어려운 내용이니까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세계는 늘 힘들이 다 발현된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 하나하나가 다 제 딴에 발휘될 만큼 발휘된 상태가 우주의 매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긍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요. 매순간 우리가 마음으로는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힘들은 늘 발현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주의 각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끝까지 발현된 힘들만이 돌아옵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도 과연 반동적인 힘, 저열한 것들도 회귀하는가라는 생각에 그렇다면 그것이 가장 역겨운 일이라고 구역질합니다. 문제적 장면입니다. 반동적 힘들, 부정적 의지들마저 돌아온다면, 그건 감당할 수 없는 사태입니다. 그래서 그게 아님을 밝히는 것이 니체에게, 차라투스트라에게 굉장히 중요한 과제인 겁니다. 다음 문장을 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힙니다. “<존재>는 생성에 속하며, 생성에만 속한다.” 대문자로 “존재”라고 말하면서 이게 “생성에 속하며, 생성에만 속한다”고 합니다. 생성만이 존재한다, 생성만이 있다는 겁니다. 우주는 끊임없는 생성 과정인 겁니다. 다음. “생성에 대립되는 것은, 즉 <똑같은 것>이나 <동일한 것>은 가장 엄밀하게 말한다면 있지 않다. 권력의 가장 낮은 등급으로서의 부정, 힘의 가장 낮은 등급으로서의 반동은 회귀하지 않는데, 왜냐면 그것은 유일한 <존재>[즉, 우주]를 구성하는 생성의 반대물이기 때문이다.” 부정과 반동은 생성의 반대물이기 때문에 회귀할 수 없다는 게 존재론적 증명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영원회귀>가 똑같은 것의 반복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반대로 변모와”, 변모하는 게 변신이고 이게 디오니소스의 핵심이고 조형 원리였죠, 이 변모, 이 생성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본다. <영원회귀>는 생성에 저항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생성의 순간, 생성의 영원성이다.” 마지막 표현 재밌어요. 영어로 번역하면, “the instant or the eternity of becoming”, 순간과 영원이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어 “ou”, 영어 “or”는 부연 설명에서 많이 사용합니다. 늘 드리는 말씀인데, 생성하는 순간은 영원으로 편입되고, 동시에 다시 영원히 새로운 생성이 도래합니다. 생성의 순간과 생성의 영원성. 이 지점에서 순간은 곧 영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간과 영원의 동일성은, 들뢰즈가 가끔 애기하고, 그리고 니체도 가끔 얘기하는데, 제가 볼 때는 시간에 대한 이해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 양상입니다. 하지만 영원과 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해되는 시간과는 다른 어떤 시간성이거든요. 곰곰이 생각하면 순간만이 영원한 거 같아요. 영원한 건 순간 말고는 없다고 보여요. 아주 예리한 시간의 칼로 딱 잘라도 순간은 변치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 순간은 과거로 묻혀버린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일단 일이 일어난 그 순간은 무효화될 수 없어요. 무효화 될 수 없다는 건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들뢰즈는 영속(permanence)과 지속(duration)이 영원이 아니라고 자주 강조하는데, 아무리 오래 가도 결국에 그건 영원이라는 관념과는 다른 거죠. 그러니깐 “사랑의 순간은 영원하다”, 이 말은 사랑이 변하더라도 맞는 얘기죠. “<영원회귀>는 순수 능동과 순수 긍정을 풀어주며, 나아가 그것들을 창조한다. 그리고 넘는 인간은 이와 다른 내용을 갖고 있지 않다. 넘는 인간은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공동 산물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니체는 <권력의지>가 [권력을] 원하거나 탐내거나 추구하는 데 있지 않고 단지 “증여”하고 “창조”하는 데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무엇보다도 니체가 <생성>이라고 부른 것을 분석할 작정이다.” 이 생성은, 영원회귀나 권력의지도 결국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는데, 들뢰즈에게서는 ‘차이와 반복’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차이를 빚어내는 반복, 생성만이 있다. 우주는 생성 과정이다.

 

이제 서문의 세 번째 주제로 갑니다. 지금까지 세 개의 주요 개념을 다뤘죠. 힘과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개념적 접근이었습니다, 이제 정감적(affective) 측면이 별도로 있습니다. 이게 또 다른 게, 지금까지는 지적으로 우리에게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감성적으로 호소하는 면모가 니체에게 있다는 겁니다. 직접 보면 알아들을 만합니다. 첫 문장으로 갑니다.

 

“그러나 니체-물음은 [여기서 “니체-물음”이란 표현은 프랑스어 특유의 조어법인데, ‘니체라는 존재는 무엇이냐’, ‘니체의 고유성이 무엇이냐’ 라는 물음을 가리킵니다, 그건] 개념적 분석들에 대해서보다는 독자의 어떤 전체적 분위기와 온갖 종류의 정감적 성향을 부추기는 실천적 평가들에 의해 우선적으로 제기된다.” 니체 책은 머리로 이해 못해도 열정적으로 따라가며 읽게 됩니다. 모르는 대목은 건너뛰기도 하지만 뭔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게 있습니다. 이런 게 정감(affect)과 관련된 측면이고, 개념적 측면보다 먼저라는 겁니다. 실은 니체의 글이 이런 식이기 때문에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을 입증하려 했던 겁니다. 들뢰즈의 책들 중에 유일하게 이런 제목을 지었어요. 니체를 ‘철학’과 관련시키는 겁니다. 들뢰즈의 책 제목들은 다 의도가 있어요. 유일하게 의도 없는 제목이 [푸코]입니다. 푸코, 제목에 딱 이름만 바친 겁니다. 대개는 ‘뭐와 뭐’나 ‘뭐의 뭐’ 이런 식입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칸트의 비판철학] 등, 이렇게 어떤 고유명사와 해석을 결합한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니체와 철학”을 결합한 건 니체의 텍스트가 갖고 있는, 언뜻 보기에 철학적이지 않아 보이는, 우리의 정서에 호소하는 부분 때문입니다. 그런 정감적 부분 때문에 니체는 파시스트도 되고 허무주의자도 되었던 거죠. “스피노자 식으로, 니체는 개념과 정감 사이에 아주 깊은 관계가 있음을 항상 주장했다. 개념적 분석들은 필수불가결하며, 니체는 그것들을 그 누구보다 멀리까지 수행한다. 그러나 개념적 분석들은 만약 [이게 중요합니다,] 니체의 것이 아닌 어떤 분위기 속에서 파악한다면, 무효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니체의 정감적인 측면을 먼저 파악하고 개념을 파악하는 순서로 가야지, 안 그러면 니체와 혼동될 다른 것들로 파악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니체는 마지막 작품 [이 사람을 보라]에서 자신을 혼동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계속 혼동되어온 게 니체 사후의 운명이기도 했습니다. 들뢰즈는 악명 높은 오해 네 가지를 열거합니다. “1) 니체의 “노예”에서 주인에 의해 지배되며, 그래야 마땅한 어떤 사람을 보는 것, 2) 권력의지를 권력을 원하거나 추구하는 의지로 이해하는 것, 3) <영원회귀>를 똑같은 것의 진절머리 나는 것의 회귀로 착상하는 것, 4) 넘는 인간을 이미 주어진 주인 종족으로 상상하는 것 — 이럴 때 니체와 그의 독자 사이에는 그 어떤 적극적 관계도 가능할 수 없다. 니체는 허무주의자로, 또는 더 나쁘게는 파시스트로, 기껏해야 모호하고 섬뜩한 예언자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니체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는 닥쳐올 운명을, 차라투스트라가 “원숭이”나 “익살광대”와 중첩될 운명을 알고서, 차라투스트라가 그의 원숭이(예언자, 파시스트, 또는 광인…)와 혼동될 것임을 예고했던 것이다.” 네, 니체 책을 보면 이런 장면이 참 많이 나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니체에 대한 책은 개념 분석의 재확립만큼이나 실천적 또는 정감적 몰이해를 교정하기 위해 애써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을 쓸 때 이런 부분도 신경을 많이 썼다는 거죠.

 

다음 문단. “그리고 니체가 니힐리즘을 역사를 점령하는 운동으로 진단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 누구도 니힐리즘 개념을 더 잘 분석하지는 못했다. 니체는 그 개념을 발명했던 것이다.” 니힐리즘이란 ‘무를 향한 의지’(will to nothingness)로 규정됩니다. 허무주의는 의지의 발현 방식 중의 하나입니다. 무를 지향하는 의지야말로 부정의 의지, 의지의 부정입니다. 그것은 반동적인 힘과 결합했고, 이게 인간 역사를 만들어온 2천 년의 과정입니다. 니체는 니힐리즘 개념을 통해 인간 역사의 흐름을 분석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그는 반동적 힘들의 승리 또는 권력의지에서의 부정적인 것이라고 그것[니힐리즘]을 정의했다. 그는 그것을 변모[변신, 생성]와 끊임없이 대립시켰는데, 말하자면 변모란 힘의 유일한 능동이자 권력의 유일한 긍정인 생성이며, 인간의 초역사적 요소인 넘는 인간(슈퍼맨superman이 아니라)인 것이다. 넘는 인간이란 부정적인 것(원한감정과 양심의 가책)이 전복되며, 부정적인 것이 긍정에 자리를 내주는 초점이다. 그가 파악되는 어떤 순간에건, 니체는 장래의 힘들과, 여전히 도래할 힘들과 뗄 수 없는데, 이 힘들은 니체가 소원을 다해 기원하고, 그의 사고가 그려 보이고, 그의 예술이 예시하는 것이었다.” 넘는 인간을 인물로, 미리 형성된 주인 종족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부정적인 것이 긍정에 자리를 내주는 초점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문화의 변신과 넘는 인간의 탄생을 같은 지점으로 본 겁니다. 초점이라는 말을 쓴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카프카가 말했듯, 벌써 문을 두드리고 있는 악마적인 힘들을 진단할 뿐 아니라, 그 힘들에 맞서 투쟁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의 바깥과 안에서 그 힘들을 몰아낼 수 있는 마지막 <권력>을 세움으로써 그것을 쫓아낸다. 니체 식의 ”아포리즘“은 단순한 단편, 사고의 한 조각이 아니다.” 니체의 아포리즘과 시(詩)는 무기라는 겁니다. 하나의 특정한 표현 방법이라는 거지요. “그것은 그것이 표현하는 힘들의 상태와 관련해서만 의미를 띠는, 그리고 그것이 끌어당길 수 있는, “수 있는”(권력) 새로운 힘들에 따라서 의미를 바꾸고, 바꿀 수밖에 없는 하나의 명제인 것이다.” 아포리즘은 읽는 사람에 따라 제각기 해석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읽는 사람의 의지의 상태 내지 유형에 따라, 즉 긍정과 능동일 때, 그리고 부정과 반동일 때, 각각 읽는 방식과 내용이 달라집니다. 니체는 그런 기묘한 명제 사용법을, 언어 사용법을 발명했다는 겁니다. 이게 정감적 측면, 실천적 측면입니다. 그래서 니체의 글을 잘 읽어 보면, 정감적 차원에서 얼마라도 의미를 파악하면, (들뢰즈의 글도 그런 대목이 많긴 한데,) 개념을 꼭 다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니체의 글이 갖고 있는 비판적인 측면은, 같은 문장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부정적인 사고에 갇혀 있을 때는 우리를 깨버리고 긍정적 사고 속에 있을 때는 우리를 더 북돋웁니다. 니체는 그런 묘한 글쓰기 기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던가, 제가 처음 니체를 읽었을 때 바로 그런 느낌이었고요.

 

마지막 문단입니다. “그리고 분명 니체 철학의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의 생각에 대한 상을, [영어로 ‘image of thought’라고 했습니다,] 급진적으로 변형시켰다는 것이다. 니체는 참과 거짓이라는 요소에서 사고를 떼어낸다. 그는 사고를 해석과 평가, 힘들의 해석과 권력의 평가로 나눈다.” 권력의지의 두 자기 질은 긍정과 부정이었고, 힘의 두 가지 질이 능동과 반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의지에서 긍정과 부정을 평가하고, 힘과 관련해서 능동과 반동을 해석하는 게 과제였습니다. [니체와 철학] 2장에서 아주 자세히 보게 될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의 운동-사고이다.” [운동과 사고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정지형 사고가 아니라 역학적인 사고라는 걸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방법을 따르는 사고가 아니라 힘과 관련된 사고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니체가 사고와 구체적 운동을 화해시키려 한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사고 그 자체가 운동들을, 특별한 빠름들과 느림들을 생산해야만 한다는 의미에서도 말이다.” 괄호 건너뛰고요. “그 결과로서 철학은 극(劇), 춤, 음악 등 운동 예술과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된다. 니체는 비록 가장 훌륭한 논문들을, 특히 모든 현대 민족학이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는 [도덕 계보학]을 썼다고는 해도, 철학적 사고의 표현으로서의 담론이나 논문(로고스)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게 독특한 지점입니다. 들뢰즈는 어땠을까요? 들뢰즈는 로고스 쪽에 더 머물러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니체는 과감하게 아포리즘과 시를 동원하고, 직접 음악도 작곡하고, 피아노 연주도 즐겼습니다. 음반도 나왔는데, 한 번 들어보세요. “그러나 [차라투스트라] 같은 책은 단지 현대 오페라로 읽힐 수 있을 뿐이며, 그렇게 보이고 들릴 수 있을 뿐이다.” 철학적인 오페라인 거예요. “니체가 철학 오페라나 알레고리 극을 만들어서가 아니라”, 거기에 독수리와 뱀도 나오고, 원숭이도 나오고, 광대도 나오고, 그림자도 나오고, 별별 존재가 다 나오니까, 일종의 알레고리로 보는 경우도 있다는 건데요, 그런 면모 때문은 아니라는 겁니다, “사고를 경험과 운동으로 직접 표현하는 한편의 극 또는 오페라를 직접 창조했기에.” 들뢰즈는 [차라투스트라]를 현대의 오페라라고 평가하는 겁니다. 현대의 철학 오페라. [차라투스트라]를 읽을 때는 개념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보다 한편의 극이나 오페라를 보고 듣는 것처럼 따라가는 게 우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넘는 인간>은 파르지팔 보다는 보르자를 닮았다고 니체가 말할 때, 또는 <넘는 인간>이 예수회와 프러시아 장교단 둘 다에 관여한다고 말할 때, 이 선언들을 파시스트의 전조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넘는 인간>이 어떻게 “상연”되어야 하는가를 지시하는 감독의 언급들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극이나 오페라로 상연한다 칩시다. 그럴 때, 바그너의 마지막 극에서 성배를 찾는 기독교 영웅 파르지팔이 아니라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바친 르네상스 피렌체의 군주 체자레 보르자 같은 모습으로 연출하라고 지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회는 아주 경건한 조직입니다, ‘청빈, 정결, 순명’과 더불어 ‘선교’를 서원(誓願)으로 삼고 있지요. 그럼으로써 종교개혁의 와중에도 가톨릭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내적이고 영적인 면’을 간직했습니다. 프로시아 장교단은 나폴레옹에게 패한 독일이 강군을 육성하기 위해 당시 청년들 중 가장 우수한 계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잘 훈련되어 있고 규율로 뭉쳐있는 최정예지요. 체자레 보르자도 한편으로는 엄청난 독재자이거든요. 그런데 군주를 말하고 군대 얘기하고 조직 떠올리니깐, 이걸 전쟁이나 파시즘과 자꾸 연결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건 곤란하다는 겁니다. 감독이 연기를 지시할 때,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하는 지시 사항으로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괄호 건너뛰고요. “생각함은 창조함이라는 점, 이것은 니체의 가장 위대한 교훈이다. 생각하는 것, 주사위를 던지는 것..., 이것은 이미 <영원회귀>의 의미였던 것이다.” 이 마지막 문장들은 저로서는 상당히 다가오는 말입니다. 설명하려면 길어지고 복잡하고, 또 어느 정도는 가슴으로 이해하는 게, 받아들이는 게 필요한 말이라고 봅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으로 돌리겠습니다.

 

오늘은 [니체와 철학]의 영어판 ‘서문’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6~7쪽에 수록한 [니체]에서의 발췌는 그걸 보완해줍니다. 물론 [니체와 철학]에 비하면 많이 부족합니다. 한글 번역은 서울대 박찬국 교수가 번역해서 [들뢰즈의 니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는데요. 박찬국 교수는 하이데거 전공자여서 번역에서도 하이데거적인 시각이 좀 들어가 있습니다. 저는 들뢰즈의 입장에서, 들뢰즈의 전모를 훑어본 입장에서, 아주 초기작인 [니체와 철학]을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일 년 갈지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함께 잘 읽어가도록 합시다. 질문사항 있으면 얘기해주세요.

 

질문/답변

<생성의 두 가지 질>

Q. 영원회귀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부정적인 것과 가장 반동적인 것도 생겨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영원회귀는 그런 것들은 회귀하지 않고 좋은 것들, 창조적인 것들, 가장 긍정적인 것들만 회귀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항상 우주 속에는 가장 부정적인 것과 가장 낮은 등급의 것들이 동시에 있을 수 있나요?

A. 그것도 생겨나는 거죠.

Q. 그럼 그것도 영원회귀하나요?

A. 아뇨, 그것은 선별 과정에서 계속 탈락하고 사라져갑니다.

Q. 그럼 그건 위계가 있는 거죠? 그럼 위계는 누가 정하나요.

A. 네, 위계가 있죠. 위계를 누가 정한다기보다는 각각의 위계가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게 굉장히 난해한 검증 과정을 거쳐요. [니체와 철학]의 절반 정도는 그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왜 저열한 자들도 회귀하는가? 구역질을 일으키는 질문, 그걸 해결하는 게 핵심입니다.

Q. 원래는 저열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어떤 관계 속에서 저열한 것으로 평가받는 건가요?

A. 평가받기 보다는 저열하게 되는 겁니다. 생성의 차원은 여러 가지로 구분됩니다. 우선 능동적 생성(becoming active)이 있는데, 가장 낮은 곳에 있어도 ‘능동적’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가장 좋은 데 있어도, 능동적이어도 반동적 생성(becoming reactive)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생성의 두 방향성 문제가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천 개의 고원]에 오면 나무와 리좀의 관계처럼 되는데요, 거기에서는 ‘나무에도 리좀의 발아가 있고 리좀에도 뿌리의 경직화가 있다’고 이야기됩니다. 나무(또는 뿌리)와 리좀은 결국 상반되는 두 경향성의 문제지, 영원한 본성을 지칭하는 건 아니거든요. 생성에도 두 가지 질이 있는 거지요.

<순간과 영원>

Q. 순간이 영원성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순간은 시간적인 의미인데, 영원성은 어떤 성질이나 상태를 의미하는 건가요?

A. 영원성은 ‘시간’은 아닙니다. 그런데 시간성(temporality)과 관련된 여러 용어들이 있잖아요. 현재, 과거, 미래도 있고, 순간, 지속도 있고, 영속, 영원도 있습니다. 다 시간을 둘러싼 개념 군입니다. 순간이나 영원은 시간성과 관련도기는 하지만 흐름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 거죠. 순간 그 자체는 정적인 계기라면 현재는 지나가는 계기거든요. 현재는 매 순간 지나갑니다.

Q. “찰나(札剌)”라는 말이 있는데, 순간이라는 말과 비슷한가요?

A. 그럴 거예요. 번역의 차이일 뿐입니다. ‘모멘트’(moment)라고 하건 ‘인스턴트’(instant)라고 하건 어떤 ‘폭’이 없잖아요, “찰나”는 불교에서 온 번역어일 텐데, 개념의 역사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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