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철학과 문화론

  들뢰즈의 역작 <니체와 철학>(1962)의 강독 강의를 일부 공개합니다. 본래 '대안연구공동체'에서 2013년 11월 5일부터 2015년 6월 2일까지 (중간에 다른 강의도 있었지만) 40주 가까이 진행했던 강의입니다. 200자 원고지 4000매 분량인데,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 방치하고 있는 중입니다. 마음 먹고 시험 삼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드에 묻어 두면 썩을까봐 일부를 공개합니다. (초고라서 오탈자와 비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퍼가는 건 자제해 주시고, 필요하면 링크로 대신하시기 바랍니다. 첫 강의가 파일이 두 개인데, 여기 올리는 건 첫 번째 파일을 정리한 겁니다. 두 번째 파일도 정리되는 대로 공개하겠습니다. 강의 자료는 첨부파일을 참고하세요. C&P로 처리했더니 일부 기호와 강조체가 깨졌네요. 인용과 강의를 잘 구분해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자유롭게 논평해 주세요.

 

  ----------------

 

2013년 11월 5일 니체와 철학 강의록

 

1강. 영어판 서문

 

<녹음파일1>

시작하겠습니다. 당분간 저희가 읽을 책이 [니체와 철학]입니다. 이 책은 들뢰즈의 데뷔작은 아닙니다. 데뷔작은 1953년에 출간한 흄에 대한 책입니다. 그 후 8년 정도의 침묵 끝에 1962년도에 [니체와 철학]을 출간했지요. 우리가 주요하게 참고할 영어판 텍스트는 휴 톰린슨에 의해 1983년에 번역되었습니다. 들뢰즈의 작품치고는 영어로 그렇게 늦지 않게 번역된 셈인데, 아마도 니체라는 철학자의 중요성, 그러니깐 니체 연구의 맥락에서 들뢰즈라는 중요한 주석가라는 관점에서 주목 받았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안티 오이디푸스]는 1972년에 출간됐는데, 1976년에 굉장히 빨리 영어로 번역됐죠. 그것 말고는 대체로 늦게 번역된 편이에요. [천개의 고원]도 1980년 출간됐는데, 1987년에 영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니체와 철학]은 들뢰즈의 저술 중에서 상당히 이른 시기에 번역되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가리키며) 이것이 독일어 번역본인데요, 1985년에 번역이 나왔습니다. 영어본이 나온 직후죠. 여러 차례 출판사를 옮겨가면서 아직도 계속 출간되고 있습니다. 독일어판의 장점은 아무래도 니체 원문을 독일어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번역 과정에서 오류도 좀 있습니다. 어떤 오류냐면, 니체 원문을 인용할 때 불어판에서는 정확히 인용했던 부분을 독일어판에서는 철자도 틀리고 관사도, 전치사도 틀리고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 바람에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고요. 들뢰즈가 인용한 니체 원문 판본과 독일어 번역자가 인용한 원문 판본이 달라서 생긴 문제입니다. 그건 제가 조사한 적이 있으니깐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다음엔 한국어판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번역된 책인데(그 전엔 [니체, 철학의 주사위]라는 제목으로 1980년대 후반에 영어판을 기초로 해서 번역된 게 있었습니다), 불어판에서 1998년에 번역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한국어 번역을 많이 참고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문제점은 번역자가 니체를 전혀 모른다는 거예요. 니체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고 얘기할 정도입니다. 근거를 보겠습니다. ‘일러두기’를 보면, 예를 들어 14쪽 6번을 보면, “이 책에 나오는 니체 저술의 인용은 들뢰즈가 사용한 불어판의 약호를 따랐고, 약호와 함께 쪽수를 표기하였다. 쪽이란 말은 표기 생략. 예를 들어 GM3-3은 [도덕 계보학] 3부 3쪽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GM3-3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도덕 계보학]은 체제만 잠깐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세 편의 독립적인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니체는 거의 모든 책에서 한 문단으로 이루어진 한 개의 아포리즘 형태로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가며 서술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경우는 예외가 되겠고, 다른 몇 개의 예외도 있습니다만, 대개의 경우 하나의 아이디어를 한 문단으로 번호를 부여해서 서술했습니다. 따라서 GM3-3은 [도덕 계보학] 세 번째 논문의 세 번째 절을 가리킵니다. 니체 연구자에겐 기본 상식입니다. 그런데 역자가 이런 심각한 오류를 그것도 일러두기에서 언급한다는 건 굉장히 유감이고, 니체에 대한 이런 몰이해 때문에 생긴 불가피한 오역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셔야 할 겁니다. 제가 강의를 진행할 때는 불어판을 중심으로 영어판과 대조해서, 영어판에 오류가 있으면 바로잡는 형태로 하면서, 한글본도 참고하고, 원문 인용된 부분은 독일어판도 보면서, 최대한 준비해 와서 함께 이야기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오늘 첫 시간입니다. [니체와 철학]의 본문으로 가기에 앞서 두 개의 자료를 볼 겁니다. 들뢰즈는 영어판에다가 다른 말은 안 붙이고 “서문”(1983년)이라는 제목으로 몇 페이지에 걸쳐 글을 씁니다. 오늘 살펴볼 첫 자료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눠드린 자료 1쪽에서 5쪽까지입니다. 다음 자료는 들뢰즈가 [니체](1965년)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소책자의 일부인데, 이 책에는 니체 사상의 짤막한 요약과 프랑스어로 번역한 원문 발췌본이 들어 있습니다. 그 안에 힘과 의지를 다룬 대목이 있는데, 바로 그 대목을 번역해 놓았습니다. 여기에는 힘, 의지, 권력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보는 걸로 했습니다.

 

첫 문장을 보면 거의 21년 만에 다시 책에 서문을 다는 데 대한 감회가 느껴집니다. “프랑스책이 영어로 번역된다는 것은 항상 선망할 만한 모험이다. 수년이 지난 후에, 아주 가까운 동시에 아주 멀게 느껴지는 불특정 독자를 대신해서 그 책이 받아들여졌으면 했던 방식으로 꿈꾼다는 것은, 저자에게 기회임에 틀림없다.” 이 레토릭은, 그 책이 이렇게 읽혔으면 했던 내용을 자기가 한 번 더 얘기할 수 있게 돼서 상당히 기쁘다는 얘기로 읽을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들뢰즈는 “아주 가까운 동시에 아주 멀게 느껴진다”고 했는데, 이 표현에서 “가깝다”는 것은 다음 문단에 나와 있듯이 니체가 굉장히 영국적 마인드, 즉 영국적인 경험주의랄까 프래그머티즘이랄까, 이런 걸 갖고 있었기에 가깝다는 말이며, 동시에 “아주 멀다”는 건 프랑스 책을 영어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영국 독자는 항상,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가 그렇듯이, 거리감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런 양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문단. “니체의 사후 운명에는 두 가지 모호성이 얹혀졌다. 그는 이미 파시스트적 생각의 선구자였는가? 그리고 이 생각 자체는 정말 철학이었는가, 아니면 너무나 폭력적인 시 작품, 너무나 변덕스러운 아포리즘들, 병리적 단편들이었는가?” 그러니까 둘 중 하나였다는 거죠. 파시스트 사상의 선구자이거나, 아니면 (뭔가 강력하긴 한데 파시스트 사상이면 곤란하니까) 진짜 철학은 아닌 문학이라거나,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안게 되었다는 겁니다. “필경 이런 오해들은 영국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영어 번역자] 톰린슨이 귀띔하기로는 니체 철학이 맞서 싸운, 니체가 맞닥뜨린 주요 주제들, 가령 프랑스의 이성주의[한국에서 이성주의는 “이성론”, “합리론”이라고도 번역하지요]와 독일 변증법은 결코 영국 사고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했던 적이 없었다.” 여기서 두 가지 주된 적수가 거론됩니다. 그 하나는 이성주의로, 데카르트에서 시작해서 칸트 또는 헤겔에서 정점을 이뤘다고 할 수 있고요, 다른 하나는 변증법으로 당연히 헤겔을 지칭합니다. 이성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어떤 선험적인 것, 선험적인 관념, 어떤 타고난 것에서 앎(지식, 인식)이 유래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최소한 확실한 지식, 참인 지식은 이성 안에서 온다는 게 이성주의의 핵심입니다. 니체는 이런 생각과 맞서 싸우려고 했고, 들뢰즈도 같은 싸움을 했습니다. “영국인들은 경험론과 실천학을 이론적으로 이용했는데, 이것들 때문에 그들에게는 양식(良識)[프랑스어로 ‘bon sense’(봉상스)니까 영어로 ‘good sense’(굿센스)죠]에 대항하기 위한 니체를 통한 우회로가, 니체의 아주 특별한 경험론과 실천학을 통한 우회로가 무용해졌던 것이다.” 경험론은 대표적으로 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만, 그리고 로크, 버클리 같은 철학자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러셀이 있습니다. “실천학”이란 말은 제가 “프래그머티즘”을 옮긴 말입니다. “실용주의”라고 많이 옮기는데요, 이렇게 옮기고 나면 워낙 오해의 여지가 많아서 아예 “프래그머티즘”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지금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저는 “실천학”이 적절하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양식(良識)”이라는 말을 쓴 사람은 데카르트죠. 모든 사람에게는 양식이 있기 때문에 진실, 진리, 참을 자연스럽게 바란다는 겁니다. 양식은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퍼져있다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양식은 또 상식(common sense)이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1968)에서 조금 말장난도 합니다. 상스(sens)는 프랑스어에서는 ‘의미’뿐 아니라 ‘방향’(direction)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봉상스” 하면 ‘좋은 방향’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나쁜 방향’으로 가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특정한 길, 방법에 충실한 생각과 접근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미 “봉상스”라는 말을 쓰면서, 자기 정당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아무튼 영국인들은 니체를 굳이 겪지 않아도 그들 나름의 철학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요점입니다. 단순히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고, 실제로 들뢰즈는 영어권 철학, 문학, 예술에서 많은 자원을 끌어다 씁니다. “따라서 영국에서의 니체의 영향은 소설가들, 시인들, 극작가들에게 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철학적이기보다는 실천적 정감적 영향이며, 이론적이기보다는 서정적인 영향이었다.” 방금 전 문장에서 “철학적이기보다는 실천적 정감적”이고 “이론적이기보다는 서정적” 영향이었다고 말했지만,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영향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뒤에 언급되겠지만, 이런 실천적, 정감적, 또는 서정적 차원이 니체의 문체에 들어 있는 하나의 국면, 양상이기 때문에, 이론적, 개념적, 철학적인 측면과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후자를 더 강렬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참고로 들뢰즈는 이 두 양상의 효과를 잘 발휘한 사람으로 스피노자를 언급합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정의, 공리, 명제, 증명 등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특히 주석 부분에서 서정적이고 정감적인 그런 면모를 십분 발휘했다는 겁니다. 니체의 경우에는 전면적으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아포리즘과 시를 통해 글을 썼으니까요.

다음 문단. “그렇지만 니체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또 그는 철학의 이론과 실천 둘 다를 바꾼다. 그는 사고자를 <자연>이 쏜 화살에, 즉 다른 사고자가 그것이 떨어진 곳에서 다른 곳으로 그것을 쏘기 위해 주워드는 화살에 비유한다.” 이 화살의 비유는 개념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철학자가 어떤 개념을 만들었어요. 만들어진 개념은 다른 철학자에 의해서 전유되면서 다른 철학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재구성되고 재창조될 수 있죠(re-fomulate). 니체는 사고자, 생각하는 자(thinker)자를 그런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문장이 조금 더 이해가 잘 될 것 같아요. 철학자는 ‘개념을 만드는 자’로 이해되고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그에 따르면, 철학자는 영원하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으며 “반시대적”, 항상 반시대적이다.” “반시대적”이라는 표현은 니체의 두 번째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건 영원하지도 않고 역사적이지도 않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이 맥락에서 역사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 시대의 주류에 동참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항상 해당 시대와 접선처럼 만난다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접선 아시죠. 어떤 곡선과 90도로 만나면서 살짝 비켜가는 겁니다. 수학에서는 이 접선들의 집합을 “도함수(derivative)”라고 부르고, 도함수를 구하는 작업을 “미분”이라고 하지요. 자기 시대(원함수)와 더불어 반시대성(접선)이라는 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철학자는 반시대적이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매번 바뀌어야 합니다. 시대마다 반시대성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 시대를 가장 꿰뚫고 있으면서도, 그 시대에 물들거나 빠져버리거나 함몰되지 않는 특성, 그것을 “역사적”이라는 말과 대비해서 “반시대적”이라고 명명한 겁니다. 그것이 “영원”하지 않은 건, 개념도 변하고, 철학자가 살고 있는 시대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시간 안에서는 보존된다, 하지만 시간 밖에서는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이해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끝 문장입니다. “니체는 선배가 거의 없다. 그는 아주 옛날 소크라테스 앞 시대 철학자를 제외하고, [주로 헤라클레이토스를 많이 얘기합니다만,] 유일한 선배 스피노자만을 인정한다.” 스피노자와의 공통점은 니체가 직접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습니다. 할 얘기가 많지요.

 

내용 부분으로 들어갑니다(자료 2쪽 첫 부분입니다). 여기부터가 흥미롭습니다. “니체의 철학은 두 개의 큰 축에 따라 조직되어 있다. 그 하나는 힘, 힘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일반 기호론을 형성한다.” 첫 번째 축은 힘(force)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잠깐 2쪽 맨 밑에서 두 번째 줄을 보면, “두 번째 축은 권력(puissance)과 관련되어 있으며, 윤리학과 존재론을 형성한다.” 니체의 철학은 크게 두 축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힘이고 하나는 권력입니다. 이건 확실히 들뢰즈의 구분법입니다. 힘을 가리키는 ‘포스’(force)와 그다음에 권력을 가리키는 ‘퓌상스’(puissance), 두 낱말은 프랑스어에서 분명히 구분되는 말이고, 영어에서는 ‘포스’(force)와 ‘파워’(power), 니체가 사용한 독일어로는 ‘크라프트’(Kraft)와 ‘마흐트’(Macht)에 각각 대응합니다. 우선 번역에 있어 문자 대 문자 대응의 일관성을 지킨다는 원칙, 특히 개념의 경우에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원칙, 가령 마흐트를 어떨 때는 포스로 번역했다 어떨 때는 퓌상스로 번역했다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일은 분명 필요합니다. 가끔 문맥상 이상하더라도 이렇게 하는 게 더 정합적일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독자가 읽을 때 개념 체계를 어그러뜨리지 않고 따라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니체가 이 부분을, (제가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았고 분명 확인해 봐야 할 대목인데요,) 마흐트와 크라프트를 조금 오락가락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니체가 그 둘이 완전히 다른 뜻이라고 했다는 건 아니고, 개념을 사용할 때의 경향성이 문제입니다. 니체는 대체로 퓌상스에 해당하는 마흐트라는 말을 쓸 때, 크라프트라는 뜻으로도 쓰고, 폭력이라는 뜻의 ‘게발트’(Gewalt)도 쓰고, 또 경우에 따라 크라프트 대신 마흐트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들뢰즈의 해석을 따라 크라프트와 마흐트를 경향성에 따라 대략 구분하는 건 괜찮은데, 이것을 전문용어(technical term)로 확정적으로 규정하는 건 곤란한 지점이 있다는 겁니다. 아주 큰 어려움이에요. 많은 니체 연구자들은 들뢰즈가 이 두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데 대해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들뢰즈는 포스와 퓌상스를 니체 철학의 “두 축”이라고 할 정도니, 이 둘이 얼마나 중요한 차이를 보이는 개념이겠습니까. 니체한테서도 정말 그랬을까요. 이게 문제지요.

제가 볼 때는 한국의 책세상판 니체 전집에서 사용하는 방식, 그러니까 마흐트와 크라프트를 둘 다 힘이라고 옮기는 것은 더 이상하지 않나 싶어요. 최소한 이 둘의 구분을 번역어에 분명히 반영하는 게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마흐트가 우주 전체에 관련되는 존재론적 개념이니까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 “권력”이라고 하면 안 되며, 그걸 우주 삼라만상에 들어 있는 힘, 우주를 움직이게끔 하는 힘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도 덧붙습니다. 그러면서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라는 번역어를 제시하는데, 이 번역에서 “에의”라는 말은 지향을 나타내며, 어디어디를 향한다는 것까지는 분명한데, 여전히 이 표현에서 “힘”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물론 내용으로는 ‘의지는 항상 힘을 추구한다’고 이렇게 해석합니다만, 넓은 의미에서 힘이 없을 때 의지가 무언가를 추구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힘에의 의지”. 이런 번역이 과연 니체의 원래 뜻을 잘 살리고 있냐 하는 게 논란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논란거리는 계속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논란은 뒤로 하고, 책을 읽는 동안에는 가능한 한 들뢰즈의 해석에 충실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그렇다면 힘이 뭔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로 둘째 줄에 “일반 기호론”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요. 이 말은 프루스트의 기호 이론과 같은 의미의 기호론입니다(다른 강의에서 다룬 [프루스트와 기호들] 참조). 기호론은 기호학과 구분됩니다. 기호학은 ‘세미올로지’(sémiologie, 영어로 semiology)를 옮긴 말인데, ‘세미오틱’(sémiotique, 영어로 semiotics)과 구별됩니다. ‘기호학’은 소쉬르적인 언어학을 일반화한 겁니다.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의 결합체를 기호라고 이해하면서 다루는 게 기호학입니다. 대표적인 기호학자로는 롤랑 바르트가 있고, 라캉도 기호학자이고, 사실은 정신분석이 기호학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기호학은 구조주의, 소쉬르에서 기원한 구조주의가 기호와 언어를 다루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그에 반해 들뢰즈가 일반 기호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기호 이론’(theory of sign)입니다. 근데 여기서의 기호는 언어학적 기호(linguistic sign)가 전혀 아닙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기호입니다. 당분간은 기호에는 언어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정도까지만 언급하고 가겠습니다. 기호론이 기호의 이론이라고 했으니까, 기호가 무엇인지 바로 설명이 나와야 하겠지요, [니체와 철학] 첫 쪽에도 같은 얘기가 나옵니다. 보겠습니다. “현상들, 사물들, 유기체들, 사회들, 의식들, 마음들은 기호들, 아니 차라리 징후들이며, 그것들은 스스로 힘들의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 열거된 여섯 가지는 결국 우주 삼라만상이에요. 이 모든 것들은 기호들이고, 또한 징후입니다. 기호와 징후는 니체에게서는 같은 의미입니다. 들뢰즈가 볼 때는, 기호 또는 징후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는 무엇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촉발한다, 생각하게 자극한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실을 찾아 나서도록 촉발하는 것들, 그게 다 기호였어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이 마들렌 과자의 맛에서 ‘아 이게 뭐지?’ 하고 생각하게 촉발되었죠. 그래서 어린 시절 추억으로 돌아가지요. 그렇게 자극한 마들렌 과자 그것이 기호이고 징후입니다. 기호는 투명하지 않습니다. 기호 자체가 감추고 있는 어떤 진실이 있습니다. 그 진실까지 도달해야 해요. 그 과정을 들뢰즈는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의미 해석. 기호가 우리를 자극할 때, 그 진실을, 그 의미를 추적하는 작업을 해석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게,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1962)을 먼저 썼고, [프루스트와 기호들](1964)은 다음에 썼어요. 그러니까 지금 논의되는 기호 이론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적용한 거지, 프루스트의 기호 이론을 니체에 적용한 건 아닙니다. 들뢰즈는 해석은 독해고, 해독이고, 결국은 창조라고 말합니다. 발견(discover or find)이 아니라 결국 만들어내는 거(invent or create)라는 얘기지요. 해석은 결국 창조 작업입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기호의 의미, 그리고 진실 또 본질은 거의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들을 [니체와 철학]에서는 힘들이라고 말합니다. 힘들의 정체를 해석하는 것, 그것이 관건입니다. 현상들, 사물들, 유기체들, 사회들, 의식들, 마음들, 이런 것들은 “기호들” 또는 “징후들”이며 “힘들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니체와 철학] 2장 맨 앞인데, ‘몸 또는 물체’를 정의하는 대목을 잠깐 보겠습니다. 프랑스어로 ‘코르’(corps), 영어로 ‘바디’(body)입니다. “몸[體]이란 무얼까? 우리는 힘들의 장(un champ de forces, a field of forces), 다수의 힘들이 서로 다투는 배지(培地)라고 말하면서 몸을 정의하지 말아야 한다. [...] 상호 “긴장 관계에 있는” 힘의 양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 몸을 정의하는 건 지배하는 힘들과 지배되는 힘들 사이의 이 관계이다. 힘들의 관계 전체가 하나의 몸을, 즉 화학체, 생물체, 사회체, 정치체를 구성한다.”(NP 45; 영어 39~40) 몸 또는 물체란, 들뢰즈의 해석에 따르면, 힘들의 관계이고, 그게 곧 기호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힘들의 관계로서의 현상, 사물, 유기체, 사회, 의식, 마음 등인데, 이런 것들은 힘들의 관계고, 그 힘들의 관계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거죠. 방금 읽은 이 문장은 상당히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고, 들뢰즈도 본문에서 많이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로부터 “생리학자와 의사”로서의 철학자라는 착상이 나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생리학자와 의사는 징후를 분석해서 정체가 뭐냐, 진실이 뭐냐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기호론자로 불려도 상관없겠지만, 이게 “생리학자와 의사”라는 말을 쓸 때, 니체가 뜻하는 바입니다. “어떤 사물이 주어질 때, [그러니까, 어떤 현상이, 사물이, 유기체 등이 주어질 때,] 그것은 어떤 외적 내적 힘들의 상태를 전제하는가?” 현상을 현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는데, 현상 자체가 힘들의 관계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 힘들의 관계의 “본질”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니체에게는 본질이라는 게 분명코 있습니다. 본질은 뭐냐면, 그 힘들의 관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힘들입니다. 여러 힘들이 모여서 사물이건, 상태건, 뭔가를 이뤘을 때, 가장 지배적인 거, 그 사물, 현상, 상태들이 그것에 의해 이름 붙여지는 것, 그것이 그 순간에 본질입니다. 제가 왜 “그 순간에”라고 표현했냐면, 우연 속에서 다른 힘들과 만나니까 힘들의 상태는 매 순간 변하거든요. 이 화이트보드와 마커는 어떤 힘들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바디를 이루고 있어요. 여기 있는 이 마커의 본질은 뭐일까요. 일반적으로 칠판에 쓸 때는 ‘필기도구’가 본질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힘들의 관계는 제가 쥐고 이 강의실에서 적는 것이 이 마커를 구성하는 힘들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면, 그러나 이 본질은 이것을 다르게 쓸 경우 또 다른 힘들의 관계 속에서 달라집니다. 다른 힘들의 관계에 돌입하게 되면, 의미가 달라져요. 지금 이 강의실에 불이 나서 다른 물건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유리를 부수는 도구로 쓰면, 이 마커의 본질은 그 순간에는 ‘망치’입니다. 사람한테 던지면 ‘흉기’이고요. 그러니까 힘들의 관계가 뭐냐, 어떤 힘들의 관계가 표출되느냐에 따라 본질이 바뀝니다.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니체에게 본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해당 순간에 가장 지배적인 힘이 본질이라고 규정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동하는 힘들, 그래서 관계를 이렇게 저렇게 맺는 힘들일지라도 매 순간의 상태가 있는 겁니다. 니체에게는 본질 따위는 없다는 입장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철학자인 이상 본질을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본질은 변한다는 게 흥미로운 거죠. 그래서 들뢰즈는 힘들의 상태를 분석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능동적 힘들, 작용된 힘들, 반동적 힘들을 구별하고 그 힘들의 다양한 조합들을 분석하는 하나의 유형학 전체를 구성하는 일은 전적으로 니체의 몫이었다.” 힘들의 분석은 아주 난해하기 때문에, 지금은 넘어가겠습니다. [니체와 철학]의 2장이 온통 이 분석에 바쳐져 있습니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reactive force, 반동적인 힘이거든요,] 고유하게 반동적인 힘들의 유형을 지정한 것은, [이런 게 반동적인 힘들의 유형이다, 라고 지정한 것은] 니체 사고의 가장 독창적인 점 중의 하나를 이룬다. 이 책은 그 상이한 힘들을 정의하고 분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일반 기호론은 언어학, 아니 차라리 그 한 분야로서의 문헌학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어떤 명제 자체는 말하는 자의 존재방식, 실존양태를 표현하는 징후들의 집합,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자신 및 타자들과 유지하고 있거나 유지하고자 애쓰는 힘들의 상태이기 때문이다(이점에서 접속사들의 역할이 있음).” 자, 여기 어떤 명제가 있습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문장이 있어요. 그 문장은 말하는 자의 존재방식 또는 실존양태를 표현하는 징후들의 집합이래요. 명제는 징후들의 집합이니까, 아까 말한 기호죠. 그럼 뭘 나타내는 기호냐? 말하는 자의 존재방식(way of being) 또는 실존양태(mood of existence)을 나타낸다는 겁니다. 라틴어로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라고 합니다. 삶의 양식, 어떤 명제 또는 말은 바로 말하는 자의 삶의 양식을 표현하는 징후라는 겁니다. 이 경우에 파악해야 될 것은 명제를 통해, 명제라는 기호 내지 징후를 통해, 말하는 자의 삶의 양식입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3+2=6”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 예를 가지고,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고 문제제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방법을 잘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집니다. 니체와 들뢰즈가 봤을 때는, 이런 주장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중요한 게 뭐냐, 저 철학자가 철학자랍시고 뭘 얘기하려고 하나, 이런 “악의적이고, 인위적이고, 기괴한”(NP 120; 영어 105) 가정을 통해 말하려는 게 뭐냐, 하는 점을 파악해야 합니다. [니체와 철학] 3장 15절에서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이런 주장에서는 “저열한 사고방식”이, 오류보다 훨씬 더 심각한, 진실을 주장하고는 있지만 사소한 진실만을 주장하는, 그럼으로써 사고 자체를 가로막는 “어리석음”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는 방식이 어리석기 때문에, 그 말들, 명제들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건 어리석음, 저열함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건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서도 아주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 및 타자들과 유지하고 있거나 유지하는 관계들, 살아가는 방식이 드러날 뿐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지점에서 푸코의 “실존의 미학”이 만나죠. 실존의 미학은 사실 니체에서 유래한 거죠. 고대인들의 에토스는, 자기가 자기와, 그리고 자기가 타자와 맺는 관계를 어떻게 잘 만들 것인가에서 성립했었죠.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명제는 항상 실존양태, 하나의 “유형”을 가리킨다.” 들뢰즈가 볼 때, 이 실존양태를 니체는 두 가지로 나눈 겁니다. 주인과 노예, 또는 고귀함과 저열함. 니체의 여러 형용사는 결국 유형의 문제입니다, 어떤 유형이냐, 주인 유형이냐 노예 유형이냐. [니체와 철학] 4장 14절에 보면 아주 큰 도표가 나와요(NP 167, 영어 146). 그 도식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유형(type)입니다. 능동적 유형과 반동적 유형이 있습니다. 능동적 유형은 ‘주인’이라는 말로 대변되고, 귀족, 고귀함 등도 다 거기로 분류됩니다. 그리고 반동적 유형은 ‘노예’로 대변되고, 평민, 저열함 등이 그리로 갑니다. 둘이 구분돼요, 딱 나뉘어요. 어떤 유형에 속하느냐가 가장 일차적입니다. 그에 따라 같은 명제도 완전히 다른 뜻을 가집니다. 대표적인 게 도덕입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I am good)라는 동일한 발언이, 주인 유형의 명제라면 ‘나는 힘이 세고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뜻인 반면, 노예 유형이면 ‘재는 힘이 세서 날 자꾸 괴롭혀. 난 쟤랑 반대야. 나는 아무 힘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아무도 괴롭히지 못하지만 평화를 사랑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명제라도 어떤 유형을 드러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는 게 [도덕 계보학]의 첫 번째 논문의 발견입니다. [도덕 계보학]이 탐구하는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어떤 경위로 어떤 말이 어떤 유형을 드러내는 말에서 다른 유형을 드러내는 말로 바뀌었는가. 예를 들면 ‘좋다, 선하다’는 말은 고대에는 주인도덕을 대변하는 말이었어요. 그 동일한 말이 어느 순간부터는, 니체가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라고 부르는 사건 이후부터는 정반대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나쁨’(schlecht, bad)과 대립되는 의미에서 ‘좋음’(gut, good)이었던 것이 ‘악’(böse, evil)과 대립되는 의미에서 ‘선’(gut, good)으로 바뀐 겁니다. 좋고 나쁘고, 우월하고 열등하고를 나누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이 마커가 잘 써질 때, 좋다고 하고, 잘 써지지 않을 때 나쁘다고 합니다. 기능 면에서 판단한 자연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같은 판단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상황이 꼬이게 됩니다. 인간에게 ‘자연적 사실’은 무엇이고 ‘기능 면에서의 판단’은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요? 어려워집니다. 어쨌건 니체는 도덕에 있어서 ‘자연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연주의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에서 도덕적 당위나 의무를 끌어내는 입장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 문제는 책에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더 볼까요. “어떤 명제가 주어질 때, 그것을 표명하는 자의 실존양태는 무엇인가? 그것을 표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실존양태를 가져야만 하는가? 실존 양태는 그것이 기호들이나 징후들에 의해서 표현될 수 있는 하나의 유형을 형성하는 한에서 힘들의 상태이다.” 이제 “힘들의 상태”라는 게 “유형”이라는 개념과 만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힘들의 상태는 결국 두 가지 유형으로 진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문단. “니체가 “진단한” 두 개의 커다란 반동적인 인간적 개념은 원한감정과 양심의 가책이라는 개념이다. 원한감정과 양심의 가책은 인간에서 반동적 승리를 표현하며, [그 다음이 참 섬뜩한 내용인데요,] 심지어 반동적 힘들에 의한 인간의 구성, 즉 노예-인간을 표현한다.” 반동적 힘들에 의한 인간의 구성(la constitution de l’homme par des forces réactives, the constitution of man by reactive forces; DRF 189, NP 영어 x)! 인간이 뭐냐? 반동적 힘들의 구성체. 인간 자체가 이미 반동적 힘들이 승리를 거둔 역사의 소산이기 때문에, 인간은 모두 반동적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니체에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말은 가장 부정적인 비판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넘는 인간”(Übermensch)이 요청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넘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지질하고 저열한 지금의 삶의 방식의 완전한 혁신 없이는 얘기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혁신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사회 전체의 변화, 우리가 딛고 있는 문화 전체의 변화를 요청할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니체의 넘는 인간 개념은 엄청난 규모의 역사철학, 사회철학, 정치철학 개념입니다. 니체가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세세하게 정치철학을 개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하는 바를 들여다보면 정치철학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니체의 정치철학과 문화 이론은 들뢰즈에게 오면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엄청난 기획으로 이어집니다. 현재 우리의 삶의 조건을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공략할 지점을 찾아보고 탈출구들과 도주선들을 최대한으로 뚫어 보고 제시하는 작업 말입니다. 니체는 인간 자체를 “노예”라는 말로 지칭하고, 현존하는 인간은 노예 유형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무서운 발언입니다. “이것은 니체의 노예 개념이 운명이나 사회 조건에 의해 지배당하는 누군가를 꼭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즉 노예제 사회에서의 노예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배체제가 능동적 힘들이 아닌 반동적 힘들을 통과하는 이상 [그러니까 우리 현존하는 사회 체제의 지배적 측면이 반동적 힘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상,] 피지배자 못지않게 지배자의 특징이기도 하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안티 오이디푸스]에도 명시적으로 나옵니다. 자본가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예다, 자발적으로 자기를 노예로 놓는 그런 노예다, 라고 얘기합니다. “전체주의 체제는 이런 의미에서 노예들의 체제이다.” 최고 지배자도 노예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는 그 체제가 예속시킨 민중들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세운 “주인들”의 유형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주인”에 따옴표를 친 것은 유형으로서의 주인이 아니라 주인을 참칭하는 사이비 주인일 뿐이기 때문이죠. “유대교 사제 및 기독교 사제에서 시작해서 현행의 세속 사제에 이르기까지, [들뢰즈가 보기에 현행의 세속사제로는 대표적으로 정신분석이 있습니다,] 원한감정과 양심의 가책의 세계사는 니체의 역사적 관점주의에서 본질적이다(부당하게 반유대적이라고 주장된 니체의 텍스트들은 사실상 사제의 독창적 유형에 대한 텍스트들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독창적”이라는 표현, 또는 “창조적”이라는 표현은 가끔 ‘노예도덕’, ‘노예 반란’, ‘사제권력’에 대해서도 쓰는데, 이런 경우에는 긍정적인 가치평가를 배제한 용법입니다. 보통 “창조적이다”라고 하면 좋은 뜻에서 하는 말이지만, 니체가 사용할 때는 그게 아니라 전에 없던 유형을 만들어내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독창적”이라는 말도 유례없는 역사적 형성물을 만들었기 때문에 쓴 겁니다. 가끔 니체가 ‘노예도덕도 창조적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잘못 이야기되는데,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관점주의”라는 개념이 나왔는데, 지금 설명하기는 그렇고, 나중에 본문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료 6쪽을 잠깐 볼까요. 첫 줄입니다. “모든 해석은 어떤 현상의 의미의 규정이다.” 자, 현상은 뭐였지요? 기호지요. 해석은 바로 이 현상의 의미를 규정하는 겁니다. 이게 뭐다! 그러니까 해석은 의미 규정, 본질 규정과 같은 뜻인 겁니다. “의미는 정확히 힘들의 관계 안에 있는 데, 그 관계에 따르면, 어떤 복잡하고 어떤 위계화된 집합체 안에서, 어떤 힘들은 작용하고 어떤 힘들은 반응한다. 어떤 현상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우리는 정복과 제압이라는 능동적이고 일차적인 힘들과 적응과 제어라는 반동적이고 이차적이 힘들을 잘 구별한다. 이러한 구별은 양적일 뿐만 아니라 질적이고 유형학적이다. 왜냐하면 힘의 본질은 다른 힘들과의 관계에서 성립하며, 그 관계 안에서 힘은 자신의 본질 또는 질을 얻기 때문이다.” 능동적 힘은 기본적으로 정복하고 제압하는 힘입니다. “반동적”은 reactive, 즉 active한 것에 re 응해서 반응을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반동적 힘은 적응, 제어라고 규정됩니다. 양적으로 큰 힘 작은 힘이 만날 때, 큰 힘이 작은 힘을 제압하죠. 그랬을 때, 큰 힘이 능동적 힘이고 작은 힘이 반동적 힘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반동적”이라는 말과 “반응적” 또는 “반작용적”이라는 말은 조금 구분됩니다. reactive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에서처럼 active한 힘과 만나서 reactive한 힘으로 규정되지만, ‘아, 나는 쟤보다 힘이 약하다, 힘의 크기가 작다’고 할 때 그걸 ‘반동적’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 관계를 긍정할 때는 reactive해도 완전히 부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여기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그렇다면 어떻게 센 놈이 약한 놈한테 지냐?’라는 문제입니다. 규정상, 양적으로 크고 강한 힘이 능동적인 힘이요, 양적으로 작은 힘이 반동적인 힘인데, 어떻게 힘에 있어 큰 놈이 작은 놈에게 지냐? 이런 의문입니다. 니체의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작은 힘이 커져서 큰 힘을 이기는 게 아니라, 큰 힘을 쪼개버려 작은 힘이 이긴다는 겁니다. 큰 힘이 할 수 있는 바의 끝까지 발휘되지 못하게 하는 대표적인 장치가 원한감정과 양심의 가책입니다. 이기는 방식이 아주 비열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보면 파리를 쫓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파리 쫓는 일에 힘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쌀쌀한 고지로 왔다는 말도 합니다. 저는 파리와 모기를 싫어하는 데, 혹시 좋아하는 분 계세요? 파리와 모기가 하는 일은 바로 자기네보다 강한 자의 힘을 쪼개서 약하게 만드는 겁니다. 힘이 있더라도 뭔가를 할 수가 없어요. 집중할 수가 없어요. 병원체들이 하는 일도 비슷합니다. 걔네들은 자기들이 세져서 이기는 게 아니라 상대편을 약하게 만들어서 이기는 거예요. 여기 계신 분들 중에 공부를 하거나 뭔가 자기 작업을 하는 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누가 옆에서 큰 소리를 내거나 층간 소음 같은 게 들리면 힘이 분해되지요?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어 왔다고 니체는 해명합니다. 노예 도덕의 반란도 그런 식으로 떼거리를 형성해서 강자의 힘을 꺾음으로써 성공했다고 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중요한 건, 어떤 상황이건 간에 현상의, 기호로서의 현상, 징후로서의 현상에서 의미와 본질을 해석해내는 일이, 그리하여 유형을 파악하는 일이 생리학자와 철학자로서의 일차적인 임무라고 니체가 말한다는 겁니다. 잠시 쉬고 계속 보겠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안티 오이디푸스" 1쇄 중 수정사항 정리 (2015년 2월 2일) 철학자 2015.02.09 807
공지 나쁜 독서와 아예 읽지 않는 것 중 어느 것이 가치가 더 나은지 알지 못한다 철학자 2014.12.08 909
공지 들뢰즈 국제학술대회 및 캠프 안내 (최종버전) 철학자 2016.06.09 918
공지 박사학위논문 통과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2] 철학자 2013.01.17 128404
공지 김재인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파일) 철학자 2013.04.17 135610
479 '우발의 세계사' 또는 '우발의 유물론' 철학자 2017.07.12 226
478 들뢰즈 사상에서 plan의 번역 문제 철학자 2017.07.06 275
477 <천 개의 고원>의 11고원에서 몸, 경도, 관계, 위도, 정감 철학자 2017.07.06 105
476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 (서평) 철학자 2017.07.04 99
475 들뢰즈의 affect 이론 철학자 2017.06.19 29
474 사고의 세 가지 커다란 형식: 예술, 과학, 철학 철학자 2017.05.30 49
473 무의식의 생산 철학자 2017.05.22 27
472 나를 견디게 해 주는 아이들 철학자 2017.05.22 22
471 욕망과 쾌락의 사슬을 끊어라 철학자 2017.05.22 26
470 들뢰즈가 인용한 신라 선사 철학자 2017.04.19 496
469 A how to live and how to make live in escaping from fascism 철학자 2017.03.30 32
468 들뢰즈의 루소 강의 (1959-1960) [1] secret 철학자 2017.03.25 0
467 일본의 들뢰즈, 과타리 연구 동향 (이득재) 외 철학자 2017.02.19 87
466 들뢰즈, [[영화]] 단상 (updating) 철학자 2017.02.18 70
465 들뢰즈, [니체와 철학] 강독 강의 2 철학자 2017.02.16 884
» 들뢰즈, [니체와 철학] 강독 강의 1 [1] file 철학자 2017.02.10 1903
463 [안티 오이디푸스]와 자본주의 비판 강의안 및 녹음 (철학아카데미 2015.1.31) file 철학자 2017.02.09 85
462 2016 들뢰즈 국제학술대회 및 캠프 안내 (버전3) 철학자 2016.06.05 958
461 들뢰즈 국제학술대회 및 캠프 안내 (버전2) 철학자 2016.05.31 1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