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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자본주의와 분열증 '유목주의'와 '자율주의'를 넘어서 (펌)

avid 2005.10.06 01:22 조회 수 : 3261 추천:29

http://sesk.net/board_up_bookreview/content.asp?num=52&RC=51&page=1&block=0'유목주의'와 '자율주의'를 넘어서 /오길영 | 책읽기 2005/08/29 13:10  

http://blog.naver.com/stupa84/100016652932

몇 권의 책을 중심으로 '유목주의'와 '자율주의'에 비판적 문제제기를 한 글이다. 몇 달전에 쓴 글이지만 지금 읽어도 약간의 (이론적) 시의성은 있으리라 믿는다. 주로 다룬 책은 이진경 <노마디즘>, 조정환 <아우또노미아>, 고미숙외 <들뢰즈와 문학기계>, 그리고 네그리/하트 <제국> 등이다.

원론적 문제제기에 그친 것이 스스로 아쉽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비판적 성찰 없이 '소비'되고 있는 걸로 보이는 들뢰즈/가타리, 네그리 등의 사상을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를 고민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그들이 사용한 몇 개의 개념을 끌어다 쓰는 것으로 그들의 사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믿는 '나이브'한 태도는 이제는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의 핵심적 문제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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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주의와 자율주의를 넘어서
-- '자명한 것'들과의 제대로 된 '결별'을 위한 시론

[1] 자명한 것들과 결별하기?

얼마전 출간된 어느 평론집에서 읽은 눈에 띄는 구절 하나. 저자는 책제목인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이라는 일견 단호해 보이는 제목을 얹"[주1]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책의 제목에는 자명한 것들과 결별했다는 과거형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결별하고 있다는 현재형, 결별하고 싶다는 원망형, 심지어는 결별해도 좋을까 하는 유보형까지 두루 들어있다고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김명인 5). 둔감한 독자의 판단이지만 나는 저자가 토로한 주저함이 비평가들이 처한 상황의 정확한 진단이라고 본다.

지금 어느 비평가가 자신의 발언에 자신만만할 수 있을까. 있다고 믿었던 비평적 좌표는 상실되었다. 그리고 대안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그러니 혼돈스러움을 혼돈스럽다고 인정하는 게 새로운 비평적 사유의 출발점은 되지 않을까. 다시 묻자. 과연 의심받게된 "자명한 것들"이란 무엇일까. 몇 가지 단어들이 떠오른다. 문학의 가치와 위엄, 한국문학 장(場)의 주도적 담론이었던 민족문학이나 리얼리즘의 유효성. 그간 당연시해온 이런 "자명한 것들"은 이제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

"자명한 것들"을 뒤흔드는 힘은 무엇보다 문학이 처한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나온다. 문학의 위기니 민족문학의 시효상실 등의 논의는 사실 이제 진부하다. 하지만 진부한 개념들의 "자명성"의 문제를 재론할 필요는 아직 있겠다. 왜냐하면 문학의 죽음을 과연 누가 비통해하고 있는지가 불명확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점이 명확해져야 이 글에서 논의하려는 새로운 비평담론인 유목주의나 자율주의를 과연 지금 논의할 가치가 있는가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결론을 당겨 말하자. 문학의 죽음은 두 가지 뜻을 함축한다. 첫째, 문학의 영향력, 혹은 대중성 상실의 문제. 둘째, 아날로그 문화의 대표격인 문학의 '문학다움'의 상실이라는 문제. 첫 번째 시각에서 바라본 문학의 위기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럽다. 하지만 두 번째 문학의 위기론은 다르게 논의되어야 한다. 먼저 문학의 의제설정기능이나 대중적 영향력의 위축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거역할 수 없는 대세는 인정할 도리밖에 없다. 가령 요즘 책의 시대를 주도했던 소설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늙은 장르로 전락하고 있다는 한탄을 많이 듣는다. 쓸데없는 한탄이다.

근대문학의 대표장르인 소설이나 서정시가 늙은 장르가 된 것이나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복고조의 한탄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자조에 불과하다. 아마도 지금 문학의 위기를 한탄하는 이는 문학으로 밥벌이하는 이들밖에 없으리라. 역시 진부한 논의지만 전자영상매체와 인터넷이 공론의 장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아날로그 문화의 대표선수인 문자예술인 소설이 주변부로 몰리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그래야 한다. 그것이 예술의 역사가 보여준 장르 소멸과 탄생의 냉엄한 진실이 아니던가. 그러니 소설이나 서정시를 대표주자로 하는 문학의 영향력은 대략 30대내지 40대 정도 독자를 그 하한으로 급격히 약해질 것이다. 이 세대보다 아래 세대들은 문학에는 애당초 별 관심이 없다. 진정한 한국문학의 독자층은 점점 협소해진다.

문학의 영향력의 약화는 한탄할 문제가 아닌 냉엄한 현실이다. 아마도 진짜 문제는 본격문학의 진수를 즐기고 비판해줄 본격독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작품이 아주 적다는 점이리라. 그리고 글의 말미에서 좀더 언급하겠지만 문자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과 그런 작품을 기꺼이 찾아 읽고자 하는 소수의 독자를 연결해주는 재미있는 비평이 별로 없다는 것이리라. 섣부른 진단인지 모르나, 나는 앞으로 한국문학에서 소위 예술성과 대중성의 행복한 결합을 충족시켜줄 작품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다.

오히려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막연한 대중성이 아니라 작품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해줄 소수의 독자들에게 만이라도 '컬트'처럼 읽히는 작품의 생산이다. 듣기로는 요새는 작품 읽기가 본업인 비평가들조차 창작품이나 비평을 잘 읽지 않는다고 한다. 짐작컨대 작품과 비평 읽기에 들이는 수고에 비해 별 재미가 없고 배우는 바가 없기 때문이겠다. 나는 문학이 자신의 죽음을 유예하는 길은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거나 몸을 파는 애매한 대중성 확보의 길이 아니라 아날로그 문화의 정수로서 자신의 본분, 즉 문자예술의 핵심적 성격에 부응하는 작품과 비평의 생산에 달려 있다고 본다. 죽을 때는 죽더라도 위엄 있게 죽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주2]

문학의 위엄 있는 죽음이나 소생은 디지털 매체에 몸을 파는 전략으로는 불가능하다. 슬퍼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문학은 점점 힘을 잃어간다. 하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문학만이 지닌 아날로그 문화의 위엄을 잃어서는 안 된다. 문자예술로서 문학의 고유한 자리를 지키는 것, 그리고 설사 그 영역이 앞으로 점점 위축되고 언젠가는 영영 없어질 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영토를 지키며 자기의 본성에 충실한 활동을 해야지 새로운 지배자인 디지털문화의 논리에 아양을 떨거나 몸을 파는 짓은 오히려 문학의 죽음을 재촉할 뿐이다.

문학의 죽음은 지금까지 행사해온 영향력이나 대중성 상실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의 고유한 힘, 문학의 문학다움 혹은 "식물성의 저항"능력을 점점 상실하는 데 있다. 아마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으리라. "자명한 것들"로 여겨져 온 문학의 가치, 민족문학이나 리얼리즘 등의 담론적 유효성이 점점 없어져 갈 때 그 쇠퇴의 과정을 냉엄하게 분석하고 새로운 문학의 소생, 혹은 위엄 있는 죽음을 맞이할 방도를 고민하는 것. 이런 고민이 부족하다는 것이 문학위기론의 핵심은 아닐까.

그러니 되풀이 말하건대 지금 어떤 문학적 입장을 견지하든 자신의 견해에 회의하지 않고 자신만만한 비평가가 있다면 그것은 주관적으로는 소신일지 모르나 객관적으로는 오기이기 십상이리라. 지금 필요한 것은 문학적 소신으로 포장된 오기가 아니라 상황의 변화와 그에 따른 혼란스러움을 인정하고 그 혼란 속에 자기를 맡기는 것, 그래서 그 안에서 어떤 탈출구를 찾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간략히 살펴보려는 유목주의나 자율주의는 그런 출구 찾기의 시도이리라. 물론 그 시도가 성공했는지는 냉철히 평가할 문제겠지만 그런 시도가 지닌 문제의식은 온당히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유목주의나 자율주의가 한국문학 혹은 비평계의 문제의식 심화에 어떤 긍정적 접점을 형성할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 이 글의 논제이다.


[2] 유목주의/자율주의 '이론'의 한국적 수용

비단 평론계만이 아니라 현단계 인문학적 담론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름은 들뢰즈/가타리로 대표되는 유목주의이다.[주3]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탈근대철학의 수용은 들뢰즈/가타리에 와서 정점에 이른 듯하다. 그러나 이론을 수용하는 우리 지식계의 태도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모든 이론이 그렇듯이 지금 성가를 올리는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나 네그리의 자율주의도 나름의 이론적 유효성을 지니고 있다.

마땅치 않은 것은 이론수용의 입장이다. 이론은 지나치게 진지하게 수용된다. 마치 그들이 수용하는 이론이 현실을 모두 설명해주기나 할 듯이. 그런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을 들뢰즈의 후기주저라는 『천 개의 고원』의 해설서를 자임하는 『노마디즘』[주3]을 읽으면서 찾아보겠다. 이진경을 비롯한 유목주의자들에게 들뢰즈의 이론은 내가 보기에 거의 '성경'처럼 읽힌다. 들뢰즈의 '탈주의 철학'이면 현실을 온전하게 해명할 수 있으리라는 당찬 자신감의 정체는 무엇일까.[주4]

물론 나름의 변명도 가능하다. 이 책은 비판적 연구서가 아니라 『천 개의 고원』의 소개서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해설의 정확성 문제는 잠시 논외로 하더라도 그런 집필 의도가 들뢰즈를 성경처럼 받드는 유목주의자들의 태도에 대한 온당한 변명이 될까. 철학의 존재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되 분명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대상에 명료한 표현을 주는 것. 철학은 개념의 발명이라는 들뢰즈의 발언에 나는 동의한다. 난삽한 철학의 개념들은 현실의 명료한 설명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노마디즘』은 반대의 방향을 취한다. 들뢰즈의 현란하나 난삽한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현실의 익숙한 예들이 동원된다.

드는 질문. 철학이 현실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현실이 철학을 위해 존재하는가. 예컨대 이런 대목. "몰적 선분성 안에서 정의된 바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사람들에겐 안정과 출세를 위한 규범이나 척도로 보이겠지만, 그러한 방식의 성공과 실패에 무관심하거나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자신의 삶을 절단하여 바치게 되는 파괴의 과정"(이진경 1권 621). 이것이 유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탈주의 삶이겠다. 근대적 삶의 억압에서 탈주하여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자율'적인 삶. 그러나 이런 주장을 위해 굳이 "몰적 선분성"이니 "자신의 삶을 절단"이니 하는 생경한 개념들이 동원될 이유는 무엇일까.

유목주의자들은 이런 어려운 개념들이 현실의 명료한 설명을 위한 고민의 결과라고 주장하리라. 그런데 과연 그럴까. 자본주의 현실에서 자신의 삶을 억압하지 않고 자율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대중 혹은 자율주의자들의 표현을 쓰자면 다중도 몸으로 느낀다. 문제는 거기서 탈주하는 것의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점을 다루지 않고 탈주의 삶, 탈주의 철학을 되뇌는 것은 멋있어 보이나 공허한 포즈에 그치기 쉽다.

『노마디즘』에는 숱한 유목주의적 개념이 소개된다. 탈주, (재)영토화, 탈영토화, 공리계, 리좀, 유목주의, 자율주의, 기계, 탈지층화, 지층, 몰적 선분, 선분적 삶, 탈주선 등. 꼼꼼히 저자의 설명을 따라 가다보면 대략 무슨 개념들인지 감은 잡힌다. 그런데 과연 이런 개념들이 현실을 해명하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가. 한가지 예로 탈주의 개념에 대해. 어디로부터 무엇을 위한 탈주인가. 자본주의적 삶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탈주. "소수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분쇄고 사회주의의 재정의 (중략) 대중의 분자적 욕망에 기초하여 계급적 운동과 계급혁명을 재정의하는 것, 그리고 대중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욕망에 기초하여 당이나 당적 운동을 재정의 하는 것" (이진경 1권, 703면).

많이 들어본 주장이다. 문제는 이런 현란한 개념의 구체성이다. 가령 "대중의 분자적 욕망"에 기초한 "계급혁명의 재정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대중의 욕망에 기초한 "당이나 당적 운동의 재정의"가 가능한가. 이 지점에서 유목주의는 그것의 정치적 표현으로 보이는 네그리 등이 주장하는 자율주의와 연결된다. 아마도 "대중의 분자적 욕망"은 자율주의에서 말하는 다중이리라. "다중개념은 노동을 포함하는 복수적인 삶의 활력들 위에서 정초하려는 방향으로의 일정한 관점이동을 표현한다."[주5]

무엇이 "복수적인 삶의 활력들"인가. 노동의 중심성을 해체하고 다양한 저항의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율주의이다. "자율, 즉 아우또노미아란 전위당과 중앙집권에 반대하고 지역 그룹들의 자율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했다"(조정환 32면). 이것이 "당이나 당적 운동의 재정의"의 정치적 해석이다. 근대적 개념인 "전위당과 중앙집권"에 반대하고 다양한 소규모 지역조직들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 그러나 이런 태도는 여전히 이분법적이다. 근대정치를 국가권력의 쟁취와 동일시하는 것, 근대정치를 탈근대적 미시정치와 서로 대립시키는 것.

이런 이분법적 태도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국가권력, 특히 민족국가권력의 힘과 역할을 소홀히 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주6] 자율주의 정치론은 계급구성을 재해석하면서 그것을 근대적인 "부정적 양상들"과 자율주의적인 탈근대적인 "긍정적 양상들"로 나눈다. "계급구성은 사보타지, 파업, 노동거부, 등의 부정적 양상들 속에서만이 아니라 탈주, 공동체 구축, 소통, 덕행, 생산적 협력, 욕구, 사랑 등의 긍정적 양상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된다"(조정환 148). 자율주의는 이런 다양한 "복수적인 삶의 활력들"을 아우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새롭지 않다. 계급정치와 다른 사회적 투쟁들의 접합(articulation)을 고민하자는 것은 낯익은 논리이다. 이제는 진부해진 주장의 되풀이가 아니라 실내용을 풍부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자율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계급정치의 "부정적 양상들"과 "긍정적 양상들" 사이의 접합을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네그리의 계급구성론은 노동의 힘을 패배 속에서도 죽지 않는 활력"이라는 낙관적 지평에서 사고하도록 자극"(조정환 149)한다는 말은 구체적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듣기 좋은 레토릭에 불과하다. 제국이든 다중이든 현란한 개념을 끌어온다고 개념의 힘이 입증되지는 않는다. 이런 개념의 힘이 얼마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입증되는가. 그런 구체적 조건에 관한 구체적 분석이 문제이다.[주7]

탈주의 삶의 구체적 조건은 무엇인가. 유목주의적 설명을 보자. 탈주의 삶을 살려면 소수자가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삶의 논리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자율적 삶을 고민하는 소수자의 삶. "사상이나 이론, 예술, 과학은 물론, 운동과 삶의 방식에서 국가주의적이고 다수적인 방식과, 그에 반하는 소수적이고 생성적인 방식, 그래서 고착과 고체가 아닌 흐름과 액체, 변환과 변이를 통한 방식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진경 2권, 465). 역시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구체적이지 않다.

"소수적이고 생성적인 방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흐름과 액체, 변환과 변이를 통한 방식"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모습을 말하는가. 그것이 수신의 철학, 무아의 철학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수신의 철학이나 소수자들의 연대가 어떻게 기존의 "국가주의적이고 다수적인 방식"을 '탈영토화' 할 수 있는가.[주8] 자율적 삶은 "자신의 삶과 운동, 사유와 연구에서 유목주의를 실행하는 것" (이진경 2권, 466)이다. 누구인들 자본주의의 산문적 삶에서 탈주하여 자율적인 삶, 시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대중은 그렇게 못산다. 그렇다면 왜 탈주의 삶을 살기가 어려운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수신의 철학이나 새로운 삶의 윤리를 제시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를 '탈영토화'하는 힘이 탈주자들의 주관적인 탈주 욕망의 표현이나 다음과 같은 자율적 공동체의 소수자적 코뮌으로 가능할까.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찾아내고,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풀어가고자 하는 것, 공동의 규율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그것으로써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공리계와 다른 삶의 방식을, 그런 삶의 지대를 만들어 가는 운동을 자율주의라고 정의"(이진경 2권, 599).

과연 "자본주의적 공리계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소수자들이 이루는 "공동의 규율"에 따른 집단은 자신이 시도하는 탈주의 기획조차대부분 포획 혹은 영토화하는 "자본주의적 공리계의 해체"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그런 "삶의 지대를 만들어 가는 운동"이 자칫 그들만의 자족적인 코뮌이 될 위험은 혹시 없을까.[주9] 유목주의나 자율주의에서 구상하는 코뮌주의의 기획에 다음의 질문을 다시 던져 본다.

유목적 혹은 자율적 코뮌주의는 "사상의 공동성에 근거한 인텔리의 연구공동체"인가? 혹은 "그 이전에 그[이진경]의 '코뮌주의'는 사회 전체의 개조를 위한 매크로 기획인가? 아니면 거기서 빠져나온 몇몇 '탈주자'들을 위한 마이크로 기획인가."[주10] 물론 "매크로 기획"과 "마이크로 기획"의 이분법이야말로 전형적인 근대주의적 사유방식이라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개념에 얽매이는 것만큼이나 섣불리 탈근대론을 내세우는 것도 역시 또 하나의 편향은 아닐까. 문제는 이런 양자를 넘어서는 새로운 (탈)근대의 기획이 아닐까.

이론의 수용은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수용의 자세이다. 자기성찰의 자세. 지금 내가 빠져 있는 이론이 아무리 매혹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을 내가 서 있는 현실의 힘, 가령 "자본주의적 공리계"와 견주어서 냉철하게 성찰하는 태도. 자신이 화두로 붙들고 있는 이론에 애정과 동시에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할 때 이론은 현란하지만 공허한 포즈에 그친다. 유목주의든 자율주의든 여기서 예외는 못된다. 이제는 철지난 사상으로 창고에 처박힌 루카치의 조언은 지금도 새겨들을 만하다. "맑스주의는 철학적 개념의 히말라야산맥이지만 히말라야에서 뛰어 노는 꼬마 토끼가 계곡의 코끼리보다 더 크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자신을 "계곡의 코끼리"보다 더 크다고 믿는 꼬마토끼, 유목주의 토끼, 자율주의 토끼. 그러나 그 토끼들이 매혹된 이론의 히말라야 밖에는 방대한 현실의 세계가 있다. 따라서 주제 파악 못하는 "꼬마 토끼"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노는 곳, 내가 부리는 이론의 유효성과 한계를 동시에 성찰해야 한다. 결국 "문제는 들뢰즈+가타리의 긍정적 사유를 어떻게 자신의 역량으로, 우리의 역량으로 만드느냐이다"(김재인 441). 이론들을 경전으로 떠받드는 것이 아니라.


[3] 바꾸고 바뀌는 문학의 가능성

유목주의와 자율주의는 현단계 문학연구나 비평적 문제의식의 심화에 어떤 접점을 (못)맺고 있는가. 이 질문은 서두에서 언급한 "자명한 것들과 결별"이라는 화두에 연결해 수정되어야 한다. 유목주의와 자율주의의 문학론은 "자명한 것들" 즉 문학이나 비평의 가치,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의 유효성과 제대로 된 "결별"이나 변모를 하는 데 어떤 접점을 (못)맺는가. 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문학연구나 비평에서도 유목주의나 자율주의의 현란한 개념들을 작품이라는 데이터에 적용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가령 근대적인 문학과의 "결별"이라는 문제에 대한 유목주의의 대안. "문학은 삶이라는 장 안에서 다른 종류의 삶을 창안하는 것, 그런 삶으로 우리를 촉발(affection)하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변용하며, 그럼으로써 이미 다른 삶을 사는 활동이다."[주11] 이런 지적은 문학을 단지 인식과 관조의 대상으로 삼아온 근대미학의 인식론주의 비판으로는 의미가 있다.[주12]

문학을 포함한 예술작품은 단지 비평적 평가나 관조 혹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좋은 문학은 분명 "다른 종류의 삶을 창안하는 것, 그런 삶으로 우리를 촉발하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변용"한다. 예술은 우리에게 자신을 닮은 삶, 자신의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가꾸는 존재미학의 삶을 살라고 권한다. 따라서 "모방/반영과 재현이란 관념을 벗어나서 문학이나 예술을 사유하고자 하는 것"(『기계』 17)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문제의식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미학의 핵심개념들인 모방/반영이나 재현개념을 손쉽게 근대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릴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떤 문학-기계가 갖고 있는 효과의 잠재성, 문학-기계로서 작품 자체의 탈영토적 능력"(『기계』 36)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가령 "문학-기계가 갖고 있는 효과의 잠재성"이나 "작품 자체의 탈영토적 능력"이란 무엇이며 왜 모방/반영이나 재현론으로는 이런 "능력"들을 제대로 해명할 수 없는지를 밝혀야 한다.[주13]

따라서 "결별"해야 할 "자명한 것들"의 하나인 민족/민중문학을 재해석하면서 민중문학을 "민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문학, 다른 종류의 삶의 방식으로 민중을 촉발하고 변용하는 문학이다"(기계 29)라고 규정하는 것도 조금은 안이하다. 나도 이제 민족문학/민중문학 개념은 결별해야 할 대상이라고 믿는다. 아니 적어도 그것들이 과연 자명한 것들이지는 되물어야 한다고 공감한다. 그리고 이런 과제는 단순히 주관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이제 더 이상 작가나 비평가들은 민족문학, 민중문학을 말하지 않는 듯싶다. 이들 개념은 담론적 유효성을 거의 잃었다. 그리고 그 상실은 단순히 '문학권력' 싸움의 결과가 아니다. 변화하는 현실이 그런 유효성의 상실을 강제한다. 그러니 이 경우에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은 그래야 한다. 하지만 민족문학이나 민중문학도 자율주의에서 주장하는 "민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문학, 다른 종류의 삶의 방식으로 민중을 촉발하고 변용하는 문학"을 역시 주장해왔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유목주의적 민중문학론이 종래의 담론과 다른가를 역시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단지 자율주의의 낯선 개념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유목주의 문학연구자들이 애용하는 개념이 '되기'라는 개념으로 보인다. "나나 우리라는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하면서 접속 가능한 모든 것에 자신을 여는 삶을 향한 모든 노력들"(『기계』 26). 이른바 '되기'의 정치성. 그런데 나의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하면서 접속 가능한 모든 것에 자신을 여는" 일이 얼마나 가능한가. 과연 나와 다른 존재로 '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주14]

따라서 D.H. 로렌스의 작품을 유목주의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꼴을 이루지 않는 미분화된 流體로서의 기관없는 신체는 어떠한 삶에 대해서도 열린 가능성, 로렌스의 표현에 의하면 위대한 혼돈의 무한한 가능성과 접속할 수 있다"(『기계』 284). 과연 "기관없는 신체는 어떠한 삶에 대해서도 열린 가능성"을 갖는가. 그게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 물음의 한계를 먼저 고민해보는 게 필요하다.

이런 문제는 '동물되기'에 대한 입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진정한 동물-되기는 블록을 이루는 것이며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그래서 비평행적이고 비환원적인 흐름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를 짧게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성은 일종의 모험으로서 새로운 강렬도를 생산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자신의 영토로부터 벗어나는 탈영토화의 운동이기도 하다"(『기계』 380-381).

앞서 이런 식의 개념사용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을 언급했지만[주15]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그래서 비평행적이고 비환원적인 흐름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를 짧게 형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하는 것이 필요하다. 백석의 시 「석양」을 꼼꼼하게 분석하면서 어느 비평가는 '동물되기'의 구체적 설명을 내놓는다.

"동물되기는 인간과 동물의 굳어진 경계를 무너뜨리는, 즉 인간이 경계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경계를 넘어서는 생성의 힘을 지닌 존재임을 보여주는 일을 한다. 따라서 이 시가 구현하는 것은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다. 동물인지 인간인지가 구분이 되지 않는 어떤 차원, 동물이기도 하고 인간이기도 한 어떤 차원이다."[주16]

그런데 "동물인지 인간인지가 구분이 되지 않는 어떤 차원, 동물이기도 하고 인간이기도 한 어떤 차원"은 과연 문학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인간이 지닌 어떤 힘, "경계를 넘어서는 생성의 힘"이 그 답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힘은 탈주에 성공한 시인만이 갖고 있는 걸까. "고정된 것을 용해하는 방향으로 일어나는 '되기'"(정남영 280)는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까. 앞서 지적했지만 인간이 지닌 "생성의 힘"을 '되기'로 연결하는 관점이 바로 탈주에 관한 잘못된 견해의 결과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되기는 생성의 욕망을 지닌 이들만이 얻는 탈주의 경로가 아니다. 물론 문학은 생성의 욕망이 펼쳐지는 유력한 장이다. "문학은 늘 새로운 것을 탐구"[주17]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란 불가능한 것이며 "불가능의 추구란 멈추지 않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변혁의 변혁이고 생성의 생성이"(정남영 2005, 14)기 때문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스스로 바뀌고 생성되는 사람들의 일이며, 그런 의미에서 미래의 일"인 미래의 민중의 생성과 관련되는 그런 되기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문학이 우리에게 권하는 새로운 존재되기의 삶은 과연 탈주자들만이 가능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듯이 살아있다는 것은 이미 도주에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고정된 삶/영토화된 삶과 탈주의 삶/ 탈영토화의 삶의 이분법은 잘못된 설정이다. 모든 삶은 이미 도주에 성공한 삶이다. 다시 말해 민중은 미래의 민중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있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도주에 성공하고 있다. 동시에 도주는 언제나 포박의 위협에 놓여 있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문학은 도주의 이런 양면성에 주목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성, 탈주, 되기라는 현란한 개념을 되뇌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러므로 자율주의자들이 애용하는,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며, 행위의 원리를 내부의 기쁨에서 찾는"(『기계』 282) 스피노자의 윤리개념 혹은 그에 빚진 니체의 '힘의 의지' 는 조심스럽게 재해석되어야 한다. 이 점은 들뢰즈/가타리 사상을 탈주가 아니라 도주의 철학으로 재해석하는 것과 깊이 관련된다. 살아있는 존재는 이미 도주에 성공한 것이며 생기를 지닌다. 김지하의 시적 표현을 빌리면 삶의 생기는 "내 몸 속에 깊이 박힌/생명의 외침"[주18] 이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이미 "깊이 박힌 생명의 외침"을 지닌다. 이것이 삶과 도주 사이의 관계이다.

이런 생기의 힘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라 말한다. 코나투스는 자율주의자들의 오해와는 달리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코나투스는 "자신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라는 의미를 갖는 스피노자의 개념. 개체뿐만 아니라 인류도 자신을 보존하려고 한다. 이 노력은 공통적인 것을 창조하는 영원한 운동이다"(조정환 482). 그런데 이진경은 이 개념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어떤 상태를 지속하게 하는 힘, 따라서 생존을 비롯한 모든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특정한 양태로 제한하여 반복되도록 재생산하는 힘--불자라면 '업'이라고 부르고 스피노자라면 '코나투스'라고 부를 그 힘"(이진경 1권, 436).

그러나 코나투스는 단지 자기보존의 힘, "어떤 상태를 지속하게 하는 힘"이 아니다. 되풀이 말하면 자기를 보존한다는 것은 이미 도주에 성공했다는 말이다. 자기보존-탈주의 대립구도는 잘못 설정된 틀이다.[주19] 탈주-보존의 이분법이 탈주의 철학의 문제점이다. 네그리의 스피노자 해석은 좀더 설득력이 있다. 네그리는 스피노자가 사용한 개별적 코나투스 개념을 재해석하여 집단적 코나투스를 지칭하기 위해 '다중의 활력'이라는 개념을 만든다. 여기서 활력 혹은 힘(puissance)은 단지 자기보전의 부정적 힘이 아니라 "죽은 활력으로서의 권력(pouvoir)을 비판할 근거"이며 "세계를 새롭게 재구성할 주체성의 힘"(조정환 40)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에 빚진 니체의 '힘의 의지'도 어떤 주체의 의지나 욕망, 가지면 좋고 그렇지 못하면 나쁜 주관적 선택지가 아니다.

'힘의 의지'의 '힘'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갖고 있는 내재적 힘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 힘을 행사한다는 것이며 이미 도주 중이라는 말이다. 도주 못한 존재는 자살한다. 살아 있는 것은 도주 중이며 코나투스, 혹은 힘의 의지를 행사한다. 따라서 "힘의 의지는 마치 의지가 어떤 동기로 인해서 권력을 원하기나 하는 것처럼 심리학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힘의 의지는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가 아니라 <각각의 힘 안에 있는 의지> 혹은 <힘이 지닌 한 측면>이라는 점이다"[주20] 들뢰즈/가타리 사상이나 이들의 사상적 뿌리 중 하나인 스피노자는 더 깊이 있는 읽기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4] 결론에 대신하여: 재미있는 비평의 기대

지금까지 논의를 요약하자. 유목주의나 자율주의의 수용은 사상적 측면에서나 비평의 원용에 있어서나 아직까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런 결과는 재미없는 비평으로 나타난다. 비평의 재미란 무엇일까. 재미있는 비평이 단지 유려한 문체나 그럴싸한 작품해설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진정한 재미는 유목주의든 자율주의든 어떤 이론이든 이론의 적용이 작품 읽기를 넘어선 세상 읽기와 연결될 때 우러나온다.

재미있는 비평의 요구는 잘 읽히는 비평을 쓰라는 말이 아니다. 서두에 지적했듯이 아날로그 문화의 주인공인 문학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그러니 더 이상 비평을 읽지 않는 것도 탓할 일은 못된다. 문화지형의 변화를 거치면서 더 이상 문학비평은 시대의 담론을 주도하는 중심담론이 아니다. 지금도 문학비평의 중요성을 믿는 비평가도 개중 있겠으나 그것은 그이들의 주관적 소망충족(wishful thinking)의 표현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화지평의 변화만이 현재 비평계가 겪고 있는 위기의 근원일까. 이런 질문의 몇 가지 답은 이미 나온 바 있다. 엄정한 비판이 사라져버리고 작품 팔아먹기에 바쁜 주례사 평론의 문제, 혹은 이미 권세를 잃은 것이 분명한 문학권력과 그에 대한 비판 등. 그러나 더 핵심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문학평론을 읽지 않아도 이제 시대의 징후를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 시대를 읽는 깊이 있는 안목을 지금 비평은 점점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단지 요즘 각광받는 비평관인 작품의 충실한 '내재적' 읽기로 풀릴 수도, 유목주의나 자율주의 등의 이론을 끌어들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문제는 비평정신 혹은 "분석정신의 해이"를 극복하는 것이다.[주21] 좋은 비평은 좋은 창작 읽기가 그렇듯이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과 깨달음을 준다. 그것이 진정한 비평의 재미이다. 삶과 세계의 새로운 통찰을 조금이라도 독자에게 '써비스' 해주는 비평.[주22] 재미있는 비평은 단호한 주장에서가 아니라 그런 주장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비평가의 고뇌와 성찰에서 나온다. 독자는 그런 비평을 읽고 싶어한다. 섣부른 정답을 내세우는 비평이 아니라.

비평가는 무슨 객관적이며 초월적인 독자가 아니다. 여러 현대 비평 이론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자신의 상황을 초월한 읽기와 해석은 가능하지 않다. 몇 해전 작고한 어느 탁월한 문학이론가가 지적했듯이 모든 읽기나 해석은 상황적(circumstantial)이고 세속적(secular)이다. 읽기에 있어 '객관성'이나 '보편성'의 가치는 비평가가 선험적으로 주장하고, 어떤 그럴싸한 이론을 끌어들인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비평가 자신의 읽기가 사실은 분명 하나의 주관적 읽기이되 다른 이들의 주관적 읽기와 얼마나 생산적 대화를 할 수 있는가, 그런 상호 열림의 깊이에 따라 객관성과 보편성은 사후적으로 서서히 형성된다.

작품이든 비평이든 정답을 제공하려고 애쓰는 글은 재미없다. 독자를 끌어당기는 글은 정답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글쓴이의 고뇌가 치열하게 드러나는 글이다. 독자는 그런 글에 생산적 대화의 유혹을 느낀다. 이것이 비평의 대중성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 단 한 명의 독자에게라도 이런 재미를 주는 비평이 좋은 비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독자의 욕망의 정체를 밝혀주는 글, 비평 읽기에서 조금이라도 뭔가를 배우는 비평. 비평가 당신에게만 의미 있는 글이 아니라 독자인 내게 깨우침을 주는 재미있는 비평. 이런 것이 나같이 점점 비평 읽기에서 멀어져 가는 독자들이 우리시대 비평가에게 바라는 요구가 아닐까.

당신은 왜 비평을 쓰는가. 다시 이런 근원적 질문에 비평가는 맞서야 한다. 유목주의든 자율주의든 이런 근원적 질문을 성찰하지 못할 때 현란하지만 공소한 비평, 잘해야 현란한 지적 체조에 머무는 비평을 낳을 뿐이다. 우리 시대 비평은 말의 참된 의미에서 분석정신과 세속성을 회복할 때가 되었다.
(이 글은 <문학수첩> 2005년 여름호에 게재되었음.)

----------- 각주

) 김명인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 창비 2004, 5쪽.
2) 문학의 위엄 있는 죽음 혹은 소생의 가능성은 앞으로 "식물성의 저항" 전략으로만 가능할 것이라는 진단은 우울하지만 나는 그 진단에 공감한다. 이인성 『식물성의 저항』, 열림원 2000, 186쪽 참조.

3) 들뢰즈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노마디즘(Nomadism)을 유목주의로 옮긴다. 들뢰즈 철학을 유목주의나 탈주의 철학으로 요약하는 경향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는 김재인 「『천 개의 고원』이 『노마디즘』에게--이진경의 들뢰즈론 비판」, 『문학동네』 (2004 여름) 참조. 이 글은 유목주의로 들뢰즈 사상을 정리하는 입장의 문제점을 개념번역의 차이, 이론해석의 구체성과 실천성 등의 시각에서 날카롭게 분석한다.

4) 들뢰즈 후기 철학의 핵심개념인 '탈주'(fuite)에 대해 김재인은 다른 해석을 시도한다. 탈주가 아니라 도주가 맞는 번역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지 개념 번역의 차이가 아니라 들뢰즈 철학의 핵심적 쟁점으로 이어진다. 부정성을 넘어 생성의 삶으로 간다는 것의 의미를 둘러싼 해석의 전투.

"도주가 벌어지는 상황은 부정적이며, 도주 자체도 부정적이다. 도주가 위험을 내포한다면 바로 이런 점에서다. 우선은 잡히거나 도주가 실패할 위험이다. 그러나 위험은 이것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도주가 순수한 도피가 된다면, 그리하여 앞서 동물들이 행한 것과 같은 새로운 정복과 창조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정적인 운동으로만 남게될 것이고, 그 끝은 자살이다. 그리고 자살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살아남는다. 살아서 다시 올라온다!"(김재인 449-450).

따라서 "도주는 내적으로 위험성과 부정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극단까지 가져가 그 위험과 부정성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이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인 것이다"(김재인 453). 따라서 도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주를 발생시키는 상황의 구체적 조건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탈주는 탈주의 주관적 의지나 욕망만 강조하는 '포즈'에 그치기 쉽다. 도주는 주관적 욕망의 표현이기보다는 도주를 생성시키는 상황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도주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지 못할 때 "그 끝은 자살이다." 유목주의자들이 애용하는 탈주의 개념은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5) 조정환 『아우또노미아』, 갈무리 2003, 377쪽.

6) 이 점이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을 둘러싼 핵심적 논쟁지점이다. 유목주의자들에게 들뢰즈/가타리의 저작이 성경이듯이 『제국』을 비롯한 네그리의 자율주의적 정치사상은 비판적 시각 없이 주해를 달아야 할 코란인 셈이다. 조정환에 따르면 『제국』은 "현대 자본주의 질서의 특이성과 그것이 산출하는 새로운 주체성을 20세기의 그 어느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원대한 시야와 정교함으로 그려내고 있다"(조정환 249). 격찬이다.

문제는 이런 수사가 아니라 새로운 대안의 실내용이다. 과연 지금은 제국주의가 아니라 제국의 시대인가. 과연 자율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제국에는 "어떤 중심도 없고 어떤 외부도 없"는가. 과연 "제국은 외부를 갖지 않으며 미국이 그 중심이 아"닌가 (정성진 「『제국』: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마르크스주의 연구』, 한울 2004, 79쪽). 핵심 논점이 여기 있다. "『제국』은 민족국가에 의지한 제국주의적 기획이 지구적 지배의 중심적 무대에서 퇴장했다는 판단하에서 전지구적 권력 네트워크인 '제국'적 주권의 발생을 설명"(조정환 248)한다.

과연 "민족국가에 의지한 제국주의적 기획"은 "퇴장"했는가. 과연 민족국가-제국주의의 시대는 끝나고 "탈영토적인 질서, 총체적인 질서, 주권들의 합성체인 제국의 시대"가 열렸는가. (조정환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마르크스주의 연구』, 23쪽). 얼마나 현실에 부합하는 설명인가. 『제국』이 내세우는 새로운 정치, 유목주의적으로 표현하면 "대중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욕망에 기초하여 당이나 당적 운동을 재정의 하는 것"은 민족국가 개념의 해체, 그리고 국가권력이나 계급정치가 아닌 다른 정치를 전제한다.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항하는 국가의 자립성과 자립적 국가들의 연대를 대안으로 사고하면서 그것을 노동계급에 의한 국가권력 장악에서 찾는 것," 다시 말해 "민족국가를 무기로 하는 반지구화, 즉 민족국가가 세계분할의 초점이 되는 시대로의 역행이어서는 안된다"(조정환 2004, 30). 내가 보기에 이것은 공허한 급진주의이다.

왜냐하면 "하트. 네그리가 결론에서 제안하는 이른바 제국에 대한 세 가지 대안, 즉 1.세계시민권, 2. 사회적 임금수령권. 3. 지식정보공유권은 실제로는 이들이 부정하는 국민국가를 전제 혹은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도 없는 것들이다. 무엇보다 이들 요구는 제국에 전혀 무해한 체제내적 요구들이다"(정성진 90면). 자율주의 정치는 "일종의 초좌익 아나키즘과 더 가깝다"(정성진 91).

문제는 현란한 새로운 개념의 창안이 아니라 그 개념들이 과연 얼마나 현실에 부합하는가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실사구시적 관점이다. 그 점에서 나는 "민족주의와 국지적 정체성이 억압성을 내재하고 있고 국제주의와 대항지구화라는 지구적 연대에 장애가 될 수 있지만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여 국지적인 것을 방어하는 반지구화투쟁은 그 나름의 진보성을 갖고 있으며 진보진영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손호철 「반세계화(지구화) 투쟁은 역사적 반동인가」, 『마르크스주의연구』, 69쪽)는 견해에 동의한다.

7) 이 점에서 언제나 개념의 사용을 구체적 상황의 구체적 분석에 연결해 강조한 들뢰즈 자신의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미메시스에 대한 가능한 비판은, 가령 인간과 동물의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만 한다. 따라서 당신에게 말할 게 딱 하나 있다. 구체적인 것을 잃지 말고 항상 구체적인 것으로 돌아가시오. 다양체, 리토르넬로, 감각 등은 순수 개념 속에서 전개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들은 하나의 구체적인 것에서 다른 구체적인 것으로의 이행과 뗄 수 없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어떤 한 개념을 다른 개념들보다 우위에 놓는 일은 피해야만 한다"(Jean-Clet Martin, Variations. La Philosophie de Gilles Deleuze (Editions Payot & Rivages, 1993)에 붙인 들뢰즈의 서문-편지(1990) 8면; 김재인 447-448에서 재인용).

8) 실천과 생산의 철학인 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유목주의자들이 부정적 허무주의 철학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다음의 비판에 나는 동의한다.

"『노마디즘』에서는 프로이트와 전혀 무관한, 동물학적인 의미에서 거세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가타리 등의 '긍정의 철학'이 가장 니힐리즘적이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른바 '무위의 철학', 그러나 '긍정의 철학'은 무엇보다 '인위'와 인공의 철학이며 '실천과 생산의 철학'이다. (중략) 정치와 실천은 사라지고, 위대한 정치라는 이름아래, 현실정치는 초월된다. 그러나 니체가 말한 불교의 니힐리즘은 바로 이 경지를 가리킨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무를 의욕한다.' 불교나 노자가 지닌, 상식 속에 뼛속까지 스며있는 권위에 의존하면서, 이진경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 한다"(김재인 457).

9) 자족주의의 위험은 자율주의에서 구상하는 코뮤니즘에서도 확인된다. "코뮤니즘은 더 이상 이념이나 정치적 실천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삶의 수준에서 직접적으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 즉 코뮤니즘은 곧 '코뮤니스트로서 사는 것'과 동의어에 다름아니라는 주장"((조정환 48). 혹은 "운동 자체를 풍부한 소통, 자유로운 창조적 생산성, 대안적 사회로 긍정하고 그 자신의 공간들을 창출하고 통제한다는 전망"(조정환 39). 물론 "자본주의적 공리계"안에서 "다른 삶의 방식"을 실천하며 그런 이들이 모인 코뮌의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리라.

문제는 "삶의 수준에서 직접적으로 실행"되는 자율적 코뮌들이 "자본주의적 공리계"에 얼마나 실제적인 위협과 탈영토화의 힘이 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자율주의적 미시정치의 위험성은 이들이 국가권력이나 민족국가의 역량을 이미 시효를 다한 근대적인 기획으로 치부해버리는 데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태도와 자족주의 사이는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예컨대 자신들의 연구공동체가 자율적 코뮌의 좋은 예라고 자부한다는 어느 학술집단의 경우처럼 말이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찾아내고,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풀어가고자 하는 것, 공동의 규율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그것으로써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공리계와 다른 삶의 방식을, 그런 삶의 지대를 만들어 가는 운동"이라고 자임하는 것은 뭐라고 할 일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가능한 객관화시켜 성찰하는 능력이다. "운동을 풍부한 소통, 자유로운 창조적 생산성, 대안적 사회로 긍정하고 그 자신의 공간들을 창출하고 통제한다"고 주장하는 자율적 코뮌이 얼마나 현실적인 저항의 힘이 될까 하는 자기성찰 말이다.

10) 진중권 『폭력과 상스러움』, 푸른숲 2002, 113쪽.
11) 고미숙외 지음 『들뢰즈와 문학기계』, 소명 2002, 15쪽. 이하 『기계』로 줄임.
12) 근대미학의 인식론주의와 존재미학을 지향하는 탈근대미학의 차이에 관한 분석으로는 졸고 [탈근대미학과 존재미학의 가능성], 『크리티카』 (근간예정) 참조.

13) 따라서 어느 비평가의 지적처럼 "현실을 바꾸는 일을 재현을 넘어서는 언어, 재현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와 연관시키는 과제"(정남영 「바꾸는 일, 바뀌는 일 그리고 김수영의 시」 『살아있는 김수영』, 창비 2005, 20쪽)는 중요하다. 이 점에서 재현의 근거인 원형 혹은 근거에 대한 들뢰즈의 문제의식, "재현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를 궁구하는 그의 문제의식은 깊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

들뢰즈는 근대미학에서 최상의 동일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 원형의 모델을 해체한다. "플라톤이 원형과 모상을 구분하고 심지어 대립시키기까지 하는 것은 오로지 모상과 허상들simulacres 사이의 어떤 선별적 기준을 얻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점은 분명하다"(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558쪽). 들뢰즈는 이런 근거지움의 근거를 해체한다. "허상 안에서 비난받고 있는 것은 바다같이 자유로운 차이들, 유목적 분배들, 왕관을 쓴 무정부주의들의 상태이고, 원형의 개념뿐 아니라 모상의 개념에도 항거하는 이 모든 짓궂음이다"(들뢰즈 559).

근거는 이미 자신의 근거지움을 해체하는 저 너머의 세계, 재현을 허락하지 않는 무-바탕으로 휘어져 있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라 미학의 문제의식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는 진중권 『현대미학강의』, 아트북스 2003, 186-225쪽 참조.

14) 이 문제는 여성론이나 탈식민주의를 비롯한 현대비평이론의 뜨거운 쟁점 중 하나이다. 과연 해석주체는 자기와 다른 상황에 놓인 다른 존재를 얼마나 재현할 수 있는가. 혹은 자율주의식으로 표현하면 얼마나 그런 타자들이 될 수 있는가. 주체는 나와 타자를 나누는 성, 계급, 민족, 인종, 세대의 차이를 넘어서 어느 정도로 타자가 될 수 있는가. 그러니 '되기'라는 말도 그렇게 손쉽게 쓸 일이 아니다.

15) 주 8번 참조
16) 정남영 「형상과 그 너머」, 『창작과 비평』 (2003년 여름), 277쪽.
17) 정남영 「바꾸는 일, 바뀌는 일, 그리고 김수영의 시」 『살아있는 김수영』, 창비 2005, 13쪽.
18) 김지하 『유목과 은둔』, 창비 2004, 49쪽.

19) 이런 오해는 놀이와 유목의 관계에 대한 오독을 낳는다. 들뢰즈에게 유목은 니체식으로 필요하면 주사위 놀이이다. (들뢰즈 590-595 참조) 들뢰즈의 유목이나 탈주는 단지 주어진 기존 법칙, 혹은 공통감에 저항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런 법칙이나 공통감의 근거를 해체하며 가로지는 것, 다시 말해 역설의 감각을 배우는 것이다.

20) 서동욱 『들뢰즈의 철학』, 민음사 2002, 112쪽.

21) 이런 점에서 20여년전에 나온 다음의 진단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유목주의나 자율주의 등의 이론의 원용이 "비평정신의 해이"를 막는 처방이 될 수 있을까. 문제는 이론을 대하는 입장의 깊이가 아닐까. "이론을 밖에서 주어지는 체계라고 생각할 때 자료는 그 이론의 연습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 새 이론에 대한 맹목적 추수가 생겨나는 것은 바로 그때"라는 지적의 의미를 이 시대의 비평가들은 다시금 곱씹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런 비평계의 모습과 관련하여 내 생각으로 제일 중요하게 제기돼야 할 문제는 분석 정신의 해이이다. 분석 정신이란 자료를 모아 그것을 분석 정리하는 정신을 뜻한다. 이론은 그 분석 정신의 자료 이해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론은 자료의 밖에서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이해하고 분석 종합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이론이다. 이론을 밖에서 주어지는 체계라고 생각할 때 자료는 그 이론의 연습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 새 이론에 대한 맹목적 추수가 생겨나는 것은 바로 그때이다.

그러나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분석 종합하는 과정 자체가 이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료밖에 있는 이론이란 참고사항이지, 절대적인 설명체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분석 정리하는 것은 단순 노동적인 작업이 아니라, 바로 그 이론 자체이기 때문에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정리하는 데 게으른 정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실과 동떨어진 이론을 내세우기가 쉽다." (김현 [문학은 소비상품일 수 없다](1982), 『김현문학전집 14: 우리시대의 문학/두꺼운 삶과 얇은 삶』, 문학과지성사 1993, 291쪽).

22) 세상 읽기와 단절되고 사소한 것에 매몰되는 창작, 그리고 작품의 내재적 해설에 자족하는 비평은 과연 문학일 수 있을까. 가라타니 고진은 이 시대의 문학하기는 오히려 그런 자족주의에 빠진 창작이나 비평이 아니라 그런 류의 문학을 버리는 데 있다고 말한다. 경청할 지적이다. 그는 이런 새로운 문학하기의 예로 아룬다티 로이와 김종철을 꼽는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로이는 자기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소설을 쓰지는 않으며 쓸 것이 있을 때에만 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한가롭게 소설 따위를 쓸 수는 없다고도 했습니다. 로이의 말과 행동은 문학이 수행했던 사회적 역할이 끝났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요? 문학으로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던 시대가 끝났다면, 그리고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도 소설가로 존재하는 것도 더 이상 불가능하다면, 소설가는 단순히 어떤 직업을 나타내는 직함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로이는 문학을 버리고 사회운동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을 정통적으로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말」, 『문학동네』 (2004 겨울), 439쪽).

그래서 김종철이 비평 쓰기를 그만둔 이유에 가라타니 고진은 공감한다. "문학을 했던 이유가 문학이 정치에서 개인까지 온갖 것을 포함하고 또 해결 불가능한 모순까지도 포함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문학이 지극히 협소한 것만 다루게 되었고, 문학이 그런 것이라면 자기에게 그것은 문학이 아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가라타니 고진 436면).

창작이든 비평이든, 싸이드(E. Said)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자신이 처해있는 세속성의 문제를 등한시 할 때 "지극히 협소한 것만 다루게" 된다. 하기야 지금은 문학이 "지극히 협소한 것만 다루"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주장이 비평의 이름으로 부끄러움도 없이 운위되는 시대가 되었지만 말이다. 바로 이 점이 현단계 비평이 처한 위기의 핵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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