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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자본주의와 분열증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 들뢰즈 커넥션 오역추가.(로쟈님)

불그스레한 망토 차차 2005.09.26 23:55 조회 수 : 10455 추천:32

<들뢰즈 커넥션>의 맨마지막 문장은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239쪽)이다. 원문은 [T]he whole problem is to believe in a world that includes them[=fools]."(142쪽) 지난주에 거의 한달이 걸린 책읽기를 끝냈다. 다른 일들과 겹치기도 했고, 원서와 꼼꼼히 대조하며 읽은 탓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시간이 걸린 셈인데, 이 글은 그 '책떨이'쯤 된다. 다른 일들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도 얼마간의 마무리는 필요할 듯하다.

'바보들'은 다소 뜬금없을 듯한데, 이 마지막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마지막 문단에서 라이크만이 얘기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아리아드네, 즉 통제사회에 맞게 적응해서, 전자 뇌-도시 속에서 그것과 더불어 작용하며, 우리의 실존에서 낯설고 독자적인 것에 '긍정'을 말할 수 있고, 예술과 예술의지, 새로운 감각과 감각의 구성을 향한 취향을 불어일으킬 수 있는 아리아드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핍하고 있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우리는 그것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 차라리 생성하고 있을지 모르는 것에 대한, 그것이 우리 자신 안에 현실화되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에 대한, 우리들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이런 믿음이다. 들뢰즈는, 그것이 바보들을 웃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하의 원문은 이렇다: "For what we lack is not communication (we have too much of that), but rather this belief in what we may yet come, and in the peculiar time and logic of its effectuation in ourselves and in our relations with one another. That may make fools laugh, said Deleuze - the whole problem is to believe in a world that includes them." 여기서 우리에게 부족하다고 한 '믿음'의 세 가지 대상은 (1)(우리가) 생성하고 있을지 모르는 것(what we may yet come) (2)그것이 우리 자신 안에 현실화되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the peculiar time and logic of its effectuation in ourselves) (3)우리들 서로간의 관계(our relations with one another) 등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믿음이 '바보들 웃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어떤 세계(=하나의 세계)를 믿는 일이다?

원문의 'them'을 <들뢰즈 커넥션>의 역자는 'fools'로 봐서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 문제의 모든 것(the whole problem)이라고 했다. 이때의 바보들은 '성스런 바보(holish fools)'라도 되는 걸까? 뭔가 심오한 얘기를 하는 것도 같으며, 마지막 문장으로서의 여운도 남긴다. 하지만, '상식적인 논리'에 기대면 좀 이상하다.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 나의 (허술한) 문법 지식은 them=fools가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나의 직관은 이 '시적인' 문장을 신뢰할 수 없도록 한다. '그것들'이란 앞에서 믿음의 대상으로 나열한 세 가지가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그래야 상식적인 논리상 말이 되는 거 아닌가?). 적어도 그렇게 읽는 쪽이 내가 그 문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나 같은 '바보'는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란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오직 '심오한 바보'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가령, 나 같은 '바보'가 더불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들뢰즈 자신이 몸의 조건(phystic condition)이 그를 덮치자 마자"(238쪽)에서 'phystic'이란 이상한/희귀한 원서의 단어를 나는 그냥 'physic'의 오타라고 생각한다. 역자도 그렇게 생각했음 직한데 굳이 'phystic condition'이라고 병기해주는 이유는 뭘까?(이런 게 역자의 '공'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233쪽에서도 '비조직적 판(anorgniezed plan)'라고 '희한한' 원어가 병기돼 있는데, 이건 'anorganized plan'(138쪽)의 오타이다. 물론 나는 'anorganized'도 'unorganized'의 오타라고 생각하며, (원서에서의) 그 정도 실수는 이해해줄 수 있다고 본다. 하니, 그냥 '비조직적 판'이라고 옮겨주면 될 것을 굳이 오타를 그것도 또다른 오타까지 보태서 'anorgniezed plan'라고 병기해주는 이유는 무엇인지?(역자가 한번이라도 다시 읽어본 것일까?) 예컨대, 129쪽에서 '르루아 구랑(Leroi-Gouhran)'이란 인명은 원서의 '르루아-구롱(Leroi-Gouhron)'이란 오타를 교정한 것이다. 그런 정도의 '상식적인 교정'이 왜 다른 사례들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은 것인지?

하여간에 이 번역서에는 그런 식으로 무성의해 보이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역자가 오역들에 대해서는 '상시교정'하겠다고 하니까 추이를 지켜볼 일이지만, 정말로 뒤늦게 '외양간 고치는 일'을 피할 수 없었는지는 의문이다. 역자가 '이 책의 백미'라고 적극 추천하고 있는 6장에서도 오역들(혹은 '이견들')은 튀어나온다. 216쪽에서 "그것은 '비밀'을 통해 숨겨진 후 드러내지는 것이 아닌 어떤 것이다."란 문장은 "something that, though 'secret,' is not hidden and then disclosed."(127쪽)이며 역자는 'though secret'(비록 '비밀'이더라도)를 'through secret'로 잘못 보았다. 같은 쪽에서 "'강렬'과 관련해서 현대작품에서 일어나는 일은..."은 "What happens in the modern work, regarded as 'intensive'..."를 옮긴 것인데, 역시나 'regarded as'(-한 것으로 간주되는)를 'regards as'(-에 관련해서)로 잘못 읽었다.

223쪽에서 현상학에 대해 들뢰즈가 이의를 제기하는 대목. 들뢰즈는 베이컨적인 '고기(meat)'와 대비하여 현상학의 '살(flesh)'은 부드럽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현상학이 여전히 분별하려 노력하는 세계의 초월적 개념에 둘러싸이지 않을 때에만, '하나의 삶'의 가능성이 현상학적 '삶의 세계'에서 해방되고 지각을 조건짓는 데 이바지하는 방식에서 해방될 때에만, 감각은 충분히 실험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원문은 "For sensation becomes fully a matter of experimentation only when it is no longer enclosed in the transcendental conception of the world that phenomenology still tries to discern - when the possibilities of 'a life' are freed from the phenomenologial 'life-world,' and the ways it serves to condition perception."(132쪽).

문제는 굵은 글씨로 표기한 'serves'의 주어인 대명사 'it'을 무얼로 볼 것인가 하는 점. 번역문에서는 "'하나의 삶'의 가능성(들)"이 주어처럼 돼 있지만, 그건 복수 명사이므로 당연히 serves의 주어가 될 수 없다. it은 문맥상 바로 앞에 나오는 'life-world'를 받으며 이 현상학의 용어는, 역자도 알겠지만, 관례상 '생활세계'로 번역한다. 해서 강조된 문장을 다시 옮기면, "'하나의 삶'의 가능성들이 현상학의 '생활세계'에서 벗어나게 될 때, 그리고 그 생활세계가 지각의 조건으로 소용되는 방식들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정도이다.  

224쪽에서, "들뢰즈의 실험주의적 미학의 문제는, '미학적 의미에서의 가능성'에 대한 조사가 항상 맞대결하는 '질식(suffocation)'의 의미다. 그리고 이 의미가 주어지는 기본적이 정감은 우울증 또는 스피노자가 '슬픈 정념'이라 부른 것이다." 원문은 "The problem in Deleuze's experimentalist aesthetic is the sense of 'suffocation' against which the search for 'possibility in the aesthetic sense' is always directed."(132쪽) 의견 차이일 수 있는데, 일관적으로 '의미'라고 옮겨진 'sense'가 이런 대목들에서는 내가 보기에 '느낌'이나 '감(感)'이란 뜻을 강하게 갖는다. 해서, '질식의 의미'보다는 '질식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적어도 같이 병기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조사'라고 옮겨진 'search'는 '탐구'가 더 타당할 것이다('조사'는 보통 'research'를 가리키니까).

같은 쪽 각주33)에서 프린트상으로 엉겨나온 글자들은 부주의한 교정의 결과일 터이다. 오역에 해당하는 것은 그 다음: "비록 라캉이 (...) 자신의 카톨릭교를 통해 법과 그것의 명령에 앞서는 즐거운 지식으로까지 밀어붙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대목의 원문은 "as though Lacan were pushing through his Catholicism to a gay science prior to the law and its Order..."(165쪽)이다. 굵은 글씨로 표시했지만, 역자가 양보절로 옮긴 이 문장은 가정법 문장이다. 희한하게도 역자는 가정법 문장들을 거의 제대로 옮기지 않았다(설마 못한 것일까?). 가령 51쪽 각주12)에서 "로티가 이끌렸던 '대담이론'에 대해서 듀이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는 "듀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로 옮겨져야 한다(듀이는 1952년에 죽었고, 로티는 1931년생이다. 안면도 없었을 대학생 로티에 대해서 듀이가 무슨 생각을 했을 리 만무하다). 또 84쪽에서 "들뢰즈는 (...) 철학이 정말이지 아테네에서 플라톤과 더불어서보다는 다른 곳에서 출발했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고 돼 있는데, 원문은 "Deleuze says that philosophy might well have started elsewhere than in Athens and with Pato."(40쪽)이며,  "들뢰즈는 철학이 아테네에서 플라톤과 더불어서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에서 출발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그건 또다른 철학사의 잠재성이었다(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갖게 된 출발점은 그리스철학이다).

시간관계상 하나만 더 지적한다. 237쪽에서 "왜냐하면 그런 믿음, 그런 '아이스테시스'가 있을 때면..."의 원문은 "For when there is no such belief, no such 'aisthesis..."(140쪽)이다. 단순한 건데, 역자는 'no'를 빼먹음으로써 부정문을 긍정문으로 바꿔서 옮겼다. 불성실이 아니라면 이런 허술한 실수가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하기 곤란하다. 내게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다른 대목의 오역들도 마저 지적하겠지만, 그건 나중에 필요할 경우의 일로 미루어둔다(이런 게 유쾌한 일은 결코 아니므로).  

개인적으로 나는 라이크만의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와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 그리고 들뢰즈의 대담 <디알로그>(동문선), 세 권에 대한 간단한 리뷰를 애초에 기획했었다. 그래서 <들뢰즈 커넥션>과 함께 <질 들뢰즈>를 읽었고(<질 들뢰즈>는 두 챕터 정도를 남겨놓았는데, <들뢰즈 커넥션>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이다. 비록 일부 번역어에 내가 동의하지 않으며, 문학작품들에 대한 역자의 '무지'가 옥의 티이긴 하지만), <디알로그>를 읽고 있다. '간단한 리뷰'를 기획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때에 실행되지 않은 것은 물론 불어난 일의 견적 때문이며 대부분은 쉽게 읽을 줄 알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들뢰즈 커넥션> 탓이다. 내가 이 번역서에 갖게 되는 '감정'은 부분적으로 거기에 기인한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너희가 들뢰즈를 아느냐'는 식의 만듦새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가령 원서에도 미주로 돌려진 들뢰즈 원전의 인용문 주석이 굳이 각주로 옮겨진 이유는 무엇인가? 국역본이라곤 역자 자신의 번역서들까지도 깡그리 인용되지 않은 각주가 일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더구나 각주의 원서명들은 번역도 안 해놓았으면서). 게다가 무슨 학술논문도 아니면서 첫 페이지부터 '들뢰즈(Deleuze)'라고 '명찰'을 달게 하더니(자기 집에서 이름표 달고 있는 꼴이다), '플라톤(Platon)'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라고 국적불명('Aristoteles'는 정말 그렇다)의 표기를 병기해놓는 건 또 뭔가? 들뢰즈를 읽는 독자가 설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누구인지 모를까봐 걱정이 되었을까? 원서에 그냥 'Ethics'라고 돼 있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Ethica in Ordine Germetrio Demonstrata'라고 장황하게 라틴어 원저명을 병기해놓은 '깊은 뜻'은 무엇일까? 이걸 '세심한 배려'로 읽어야 하나? 그런 배려가 일차적으로 지향했어야 하는 것은 그런 류의 '티내기'가 아니라 오역을 최소화한 '성실한' 번역이었다.

역자가 재번역하고 있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는 이런 투정을 부릴 일이 없기를 기대한다...

05. 0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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