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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http://blog.empas.com/moozakey/어느 들뢰즈 연구자의 현실인식에 대해




-Schubert, Piano Sonata in A major D.959, 2악장-


물론 내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들뢰즈 연구자나 들뢰즈주의자가 아니다. 돌이켜보니 들뢰즈의 사유에 대해 촐싹대듯 몇 마디 했던 내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들뢰즈의 철학보다는 내가 봤던 어떤 들뢰즈 연구자 혹은 들뢰즈 애호가들이 문제다..'


I.

김재인이라는 들뢰즈 연구자의 글과 관련해서 내가 말했던 것을 새로 가다듬으면 이런 것이 되겠다.

"하나. 사유와 이론의 측면에서 철학은 가장 심오한 메타 차원의 것이다. 철학은 세계 자체를 직접 사유한다기보다는 세계와 직접 접촉하는 사유나 이론들의 근거를 캐묻고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철학의 개념들로 사회적 현실(reality), 더 나아가 나날의 현실(일상생활)에 대해 직접 발언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심지어 그것은 폭력적인 것이 될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둘. 이와 관련해서, 들뢰즈 철학이 사회적 현실에 대해 발언을 하려 할 경우, 반드시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적 차원을 도입해야 한다. 분명히 (물론 확률에서의 대수의 법칙과 같은 평균적 의미에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고, 그러한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합이 되는 사회적 차원이 있으며, 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서 실천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내 생각은 한때 '들뢰즈 전도사'로 불렸던 이정우의 '욕망의 세계사'라는 글(<인간의 조건>에 수록)을 읽고 난 후의 어떤 막연한 느낌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그후 진보누리 게시판에서 만난 어떤 '들뢰즈주의자', 그리고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번역한 김재인의 홈피에 있는 글 몇 개를 읽고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생각은 물론 들뢰즈 연구자에 한한 것이 아니다. 철학 공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정치.사회이론 등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해당된다.

이중 김재인의 경우를 살펴보자.

들뢰즈의 개념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 하나를 놓고 꼼꼼히 따지는 그는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당시 탄핵반대를 외쳤다. 그는 노무현 지지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까지도 노무현 지지자일 것이다.) 그때 어떤 눈팅(들)은 노무현을 지지해서 그의 탄핵을 반대하는 김재인에게 이렇게 빈정거렸다.

"참나 들뢰즈 가타리를 말하면서 노무현이나 지지하다니.." (웃겨서)
"노무현의 국가주의를 어떻게 리좀에 가깝게 만들겠다는거죠?" (엥)

이에 대해 김재인은 이렇게 자신을 변명했다. (굵은 글씨 강조는 무정유.)

"자꾸 국가주의 운운하시는데, 반국가주의나 비국가주의나 탈국가주의를 현실적으로 어떻게 입안할지 생각해보셨는지요? 국가주의를 지향할 필요는 없지만, 딛고 있는 터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국가를 지우거나 없앤다고 국가가 없어지기라도 합니까? 들뢰즈 가타리는 프랑스에 살지 않았습니까? 참, 나, 이상주의나 해탈주의와 싸우기란 너무 힘드는군요. 이상주의자가 너무 많아서, 쩝-_-;;"  (김재인, 어느 쪽글 중에서.)

그렇다! 들뢰즈와 가타리도 프랑스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프랑스에서 살았다는 그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하나. 아니 그들은 그 사실을, 자신들의 현실을 어떻게 봤을까? 그들의 철학에도 프랑스가 나오는가? 반국가주의나 비국가주의나 탈국가주의를 현실적으로 어떻게 입안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가?

그런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자체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내가 <들뢰즈와 욕망> <들뢰즈, 마르크스, 사회적인 것> 등에서 말한 것이 맞는 것 같다. 즉 학문 중에서도 가장 메타 차원에 속하는 철학을 직접 사회적 현실의 표면에 들이대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차원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철학이든 사회과학이든 공부 혹은 학술의 현실(reality)은 나날의 삶의 현실로 '번역'(이는 많은 요소들에 의해 매개되거나 중첩결정된다)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이 결핍돼있으니 김재인은 어느 눈팅에게 이렇게 핀잔을 얻어먹는 것이다.

"지식이 방대하면 뭐하나. 현실 속에서 그 지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는데. 현실논리에 갖혀서 노무현 지지를 택하는 것은 리좀이 불가능하니 수목을 택하는 것과 무에 다른가! 이러니 지식인들이 욕먹는게야." (웃겨서)


II.

미리 말하지만, 내가 문제삼으려는 것은 김재인이 탄핵을 반대한 행위 그 자체가 아니다. 나 역시 탄핵반대를 주장했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했다(내가 어느 신문게시판에 쓴 글이 노하우 대문에 실린 적도 있다). 그후 대오각성해서^^ 지금은 민주노동당 비판적 지지자가 됐지만. 사실 이는 내가 진보/좌파 쪽으로 기울었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원래 그런 성향이 다분했고, 진보/좌파정당이 사실상 민주노동당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김재인을 문제삼는 것은 그의 머리로 작동하는 들뢰즈적 현실과 그의 몸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현실간의 그 괴리에 대한 것이다. 그의 들뢰즈적 현실이 머리로 작동한다 해서, 머리 속에서 포말처럼 이는 거품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의 독서, 말하기 및 글쓰기, 출판 등을 통해서 신체화하고 물질화한다. 그러한 신체적인 행위와 물질적인 생산은 주변 사람들을 촉발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다 거대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로 들어가고 그에 대해서 말하는 순간, 그의 들뢰즈적 현실, 들뢰즈적 탈주/도주는 온데간데없어진다. 즉, 문제는 현란한 개념적 배치를 보여주는 들뢰즈의 극한의 사유를 공부하는 그가 어이없게도 조야한 '현실주의'로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현실주의는 지금 여기의 현실을 고정시키고, 그대로 인정하고 따르는 사실상 현실추수주의이고 현실합리화주의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 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김선일 씨가 참수된 직후 김재인은 비통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는 심정을 피력하는 장문의 글을 쓴다. 그는 우선 부시에게 화살을 돌린다.

"이번 불행한 사건을 계기로, 파병 철회와 전쟁 반대, 그리고 부시 낙선에 이르는 일련의 과업이 달성되어야 하겠습니다." (김재인, <비통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라크 파병이 다 부시 때문인가? 이라크 파병 문제는 분명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의 요청에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먼저 정치권과 국민에게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도 김재인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오히려 이 문제에 관한 한 최악은 한나라당이라고 말한다.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는 이유로 그가 드는 것 중에 노무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과 정당과세 노력이 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김재인은 이렇게 말한다. (굵은 글씨 강조는 무정유.)

"제가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고 기대를 거는 까닭은, 역사적으로 볼 때 현 정권에서 시민사회의 발언권이 가장 클 수 있다는 대단히 현실주의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는 아직도 파병 찬성이 주류를 이루고......탄핵을 집도한 세력이 거의 과반에 육박하는 표를 얻고 있는 사회입니다. 조선일보가 아직도 '일등'을 자처하고 있고 재벌신문 중앙일보가 저 조선일보보다 우위를 점한다고 이야기되는 그런 사회인 것입니다. 학자들은 산술적인 잣대로 티비의 탄핵 방송에 대해 심판을 가하고, 다수당 국회의원은 '조폭두목' 대통령의 '졸개행동대원'인 양 행동하는 것이 우리 사회입니다. 솔직히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우충좌돌 아무리 싸우고 또 싸워도 상황은 아주 느리게만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거의 세월의 힘으로만 세상이 바뀌는 듯합니다.......이런 국면에서는 어떤 정권에 대한 지지냐 비판이냐 하는 문제가 모두 술안주거리로 전락하는 느낌마저 있습니다. 이런들 저런들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더더욱 고집을 부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재인, 앞의 글.)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된 지금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 자체에는 딴지 걸고픈 맘이 없다. 사실 김재인의 저 말은 일종의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져 있다. 그것은 노무현(정권)이 옳다는 것을 은연중에 단정(전제)하고, 그래서 나쁜 세력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좋은 노무현을 지지한다는 그런 논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볼 때 현 정권에서 시민사회의 발언권이 가장 클 수 있다는 대단히 현실주의적인" 판단은 어디에서 오늘 걸까?

더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무의미한 것이기에 좀 그렇지만, 한나라당이나 민주노동당이 집권을 했다면(물론 불가능한 가정입니다), 사태는 더 나빴을 겁니다. 민노당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민노당은 저의 포지션과는 합치하기 어렵습니다. 저야 뭐 잘 아시겠지만,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개혁당 정도의 포지션에 해당합니다."  (김재인, 앞의 글.)

이것도 역시 순환논리, 그것도 뒤틀린 순환논리에 다름 아니다. "나는 민주노동당과 맞지 않습니다(나는 민주노동당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민주노동당이 집권했다면 사태는 더 나빴을 것입니다."->"그래서 민노당은 저의 포지션과 합치하기 어렵습니다."

김재인은 들뢰즈니 뭐니 다 집어치우고, 최소한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이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인식론'이나 처음부터 가다듬는 게 시급해 보인다.


III.

김재인은 '차선'의 선택으로서, 때론 최악 한나라당에 대한 '차악'으로서 노무현 정권에 대한 자신의 기대와 지지에 대해 들뢰즈의 개념까지 구사하면서 말한다. 그 자신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참여정부에 기대할 역량의 '잠재태'만이 아니라 '현행태'까지 갖추고 있는지 의문을 표시하면서, 김재인은 따라서 노무현-열린우리당 밖에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고 말한다. 또 그는 "들뢰즈적 접근법"과 '분자적' '그램분자적'과 같은 들뢰즈적 개념을 끌어들이면서 원전폐기물 처리장 건설을 둘러싼 부안 사태는 구체적(분자적) 접근의 문제인데, 부안 사태가 분명 노무현 정권의 실책이긴 하지만 그것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총체적인(그램분자적인)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만큼 결정적인 잘못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대안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지금 당장 여기의 현실에서 다른 대안이 없다면서, 그래서 주어진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사람은 주어진 것으로서 고정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게 왜 어떻게 해서 차선이 되는지도 지극히 자의적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야말로 들뢰즈의 사유와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한다. '생성'이니 '되기'니 하는 말은 엿 바꿔 먹어버렸을까. 들뢰즈주의자 혹은 들뢰즈 연구자가 이럴 때 그런 핵심적인 들뢰즈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뭐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볼 때 (사회적으로) 현실적인 것이란, 서로 다른 나-현실과 너-현실을 우리-현실로 합성해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한 '합성'을 생성이라고 해도 좋다. 따라서 나는 김재인 같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 사회적 차원, 사회적 현실에 대한 시각이 결핍돼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런 시각이 결핍됐기 때문에 그의 현실적인 인식과 실천은 조야한 현실주의로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현실, 즉 사회적 현실의 가장 밑바탕에 놓여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기본적으로 평등한 물질적 생존/생활을 영위해나가기 위한 합리적인 사회적 하부구조를 구축해야할 필요성이다. 한마디로 기본적인 욕구(인간적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넓은 의미의 먹고사는 문제)를 평등하게 충족한 바탕 위에서 뭔가를 하더라도 하자는 것이다. 그러한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하부구조가 경제에 국한된 문제인 것은 아니다. 반전평화, 남녀평등, 환경 등도 포함된다. 이런 차원을 '욕구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욕구의 현실 위에 '욕망의 현실'이 있다. 욕구의 현실은 합리적으로 구축되어야 하고, 따라서 강제가 필요한 영역이지만, 욕망의 현실은 탈주/도주하는 자유의 영역이다. 물론 그 두 현실이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고, 상호침투하고 가로지르는 그러한 것이리라.

(내가 말하는 '욕망'은 라캉의 것과도 다르고 들뢰즈의 것과도 다른 것이다. 라캉의 '욕구/욕망'에서 힌트를 얻은 그것은 차라리 사회[학]적인 것이다. 욕구는 인간적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반면 욕망은 그러한 욕구의 사회적 충족방식인데, 갈수록 자가발전하면서 증식되고 증폭된다. 그에 따라 사회적 현실도 증식되고 증폭된다.)

현실정치는 기본적으로 욕구의 현실(다시 말하지만, 인간적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광의의 먹고사는 문제)을 합리적으로 구축하고 조직하려는 권력의 현실인데, 문제는 그러한 권력은 다시 권력-욕망, 지배욕망, 착취욕망과 같은 사회적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현실정치를 허물거나 재배치하려는 다른 욕망들이 있다. 그런 저항 욕망은 탈주하고 탈영토화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욕구의 현실을 새롭게 합리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노무현-열린우리당 정권은 부시가 세계인의 평등한 생존 및 생활을 위한 사회적 하부구조를 무너뜨리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데 저항 한번 해보기는커녕 비정규직 개악입법을 추진함으로써 그에 장단을 맞추려 하고 있다. 김재인 같은 지지자들은 사실상 그런 노무현-열린우리당에 장단을 맞추려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IV.

그런 노무현-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김재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회의가 드는 것이다. 도대체 철학을, 그것도 그 대단하다는 들뢰즈의 철학을 배워서 뭐 하려는가? 심지어 들뢰즈에 대해 한마디하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경우는 '보통사람으로서 안전하게 살아가면서' 들뢰즈의 노마드 철학을 무슨 애완동물 기르듯 하는 이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들뢰즈의 철학은 위대한 철학이라는 것을. 하지만 또 나는 알고 있다. 들뢰즈의 철학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걸. 진실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하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회적 차원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에 따른 사회적 실천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사회적 현실(Reality)이 무수한 현실들(realities)이 층층이, 겹겹이, 첩첩이 포개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또 너의 현실과 나의 현실은 다르다는 것, 하지만 사회적 현실의 새로운 배치를 실현시키려면 우선 너-현실과 나-현실을 우리-현실로 합성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복하면, 나에게 '현실적인' 것이란 바로 그러한 합성능력을 뜻한다.

그러한 합성을 하려면 너와 나, 우리의 신체가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너와 내가 각자의 신체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 연결된 문제라는 것, 그래서 기본적으로 평등한 물질적 생존 및 생활을 위한 사회적 하부구조를 합리적으로 구축하고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선 깨달아야 한다. 그 다음 어떻게 우리 현실을 그런 방향으로 바꿔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실천적 합의를 도출해내야 한다. 이것도 하나의 생성이며, 비록 소수자-되기는 아니지만, 아니 그러한 소수자-되기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일종의 사회적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다수자-되기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욕망의 현실에서 우리는 소수자-되기를 향해 탈주해야겠지만, 욕구의 현실에서 우리는 다수자-되기를 위해서 서로 어깨동무를 해야 한다. 소수자-되기는 오직 다수자-되기를 배경으로(against) 해서만 의미가 있다. 현실은 그러한 두 현실, 그 두 수레바퀴가 서로 밀고 당기며 그렇게 서로를 가로지르면서 동시에 영원한 평행선을 그으면서 굴러가는 것이다.

이게 현실에 대한 내 이미지다. 그러한 이미지에서 들뢰즈, 푸코 등의 철학은 하나의 수레바퀴(욕망의 현실)일 뿐이며, 심지어 일관성의 평면을 무제약적으로 질주하려는 들뢰즈적 욕망마저도 인간적 신체의 존재를 전제해야 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반드시 다른 수레바퀴(욕구의 현실)에 의해 보완되어야 하는 것이다. 흠, 개똥철학 끝!


無情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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