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접속은 “생산하기, 생산물, 생산하기와 생산물의 동일성”의 형태로 진행되는데, 여기에 ‘반(反)생산’으로서의 ‘기관 없는 몸체’라는 “미분화된 거대한 대상”이 등장한다(AO, pp. 13-14). 그것이 반생산인 까닭은 생산을 도루묵으로 만들기 때문이며, 거대한 만리장성처럼 이어지는 생산의 사슬에서 다시금 벽돌들을 떼어내기 때문이다. 기관 없는 몸체가 죽음으로 묘사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하지만 기존의 생산물이 그대로 멈춰 고착되어서는 더 이상의 연결접속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기관 없는 몸체는 새로운 생산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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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o
2005.07.05 23:08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
똘이
2005.09.17 11:16
이런 식으로 글 쓰면서 자아도취에 빠지는 거죠. -
juliana
2005.11.11 05:58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결론인 '카오스에서 두뇌로'와 <천 개의 고원> 의 결론 첫 부분인 '지층과 지층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는 카오스의 자살적 위험과 그 반대인 더 굳어진 지층(지층화)의 변화 불가능한 암적 위험을 염두에 둔다면 이 토막글을 좀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물론 더 많은 참고 텍스트들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연결 접속'이 위의 두 가지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들뢰즈/가타리의 일종의 '전술' 혹은 '실천' 또는 '실천 정식('연결하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좀 더 들어가자면, 들뢰즈/가타리는 지층 혹은 지층화 쪽으로 가기 보다는 오히려 카오스 쪽으로 가는 편을 택하는데요. 왜냐하면 카오스 편도 만만치 않게 위험하긴 하지만,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우주적 생명 세계 혹은 물질 세계와의 만남이 필연적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기관 없는 몸체도 이런 의미에서 카오스라고 할 수 있지요) 다른 각도에서는 모든 창조 작업(철학, 과학, 예술, 문학 등등의)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물질세계('재료'라고 부르는)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기관 없는 몸체는 말하자면 카오스를 만나고 있는 몸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도루묵>일 수 있는 것은, 기관들을 유기적으로 코드화 시키는 '유기화' 또는 그렇게 코드화된 '유기체'를 해체 또는 파괴하여, '매끈한 공간(표면)'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 <기존의 생산물이 그대로 멈춰 고착>된 상태, 즉 더 이상의 변화가 불가능한 '암'이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즉, 그런 상태는 스스로 <더 이상의 연결 접속이 불가능>한 상태, 다시 말해 새로운 것의 창조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죽음>이지요. 이렇게 보면 왜 들뢰즈/가타리가 기관 없는 몸체를 새로운 생산의 출발점으로 보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