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철학과 문화론

  3절. 주체와 향유


  세 번째 종합: 접합접속 종합 또는 소비의 생산

  <과정>이란 말의 뜻에 따르면, 등록은 생산을 달게 받아들이지만, 등록의 생산 자체는 생산의 생산에 의해 생산된다. 마찬가지로 소비는 등록의 뒤를 잇지만, 소비의 생산은 등록의 생산에 의해 그리고 이 속에서 생산된다. 그래서 기입의 표면에 주체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이 눈에 띄게 된다. 그것은 이상한 주체이다. 고정된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고, 기관 없는 몸체 위를 헤매 다니며, 언제나 욕망하는 기계들 곁에 있고, 생산물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몫에 의해 정의되며, 특히 생성이나 화신에 있어 우선권을 얻고, 자신이 소비하는 상태들로부터 태어나며, 또 각각의 상태에서 다시 태어난다. <따라서 그것은 나다. 따라서 그것은 내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괴로워하는 것마저도 자기를 향유하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욕망하는 생산은 이미 즉각적으로 완수요 소비이며, 따라서 <쾌감>이다. 하지만 어떤 주체에 대해서는 아직 그렇지 않다. 주체는 등록의 표면의 분리접속들을 통해서만, 각각의 나눔의 잉여들 속에서 눈에 띄게 될 수 있다. 법원장 슈레버는 언제나 이 점을 가장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다. 우주에는 향유의 일정률이 있어서, 신은 슈레버가 여자로 변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슈레버가 향락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향락 중 법원장이 체험하는 것은 그의 고통의 보수 또는 그의 여자-되기의 보상으로서 잔여의 몫뿐이다. <이 향락을 신에게 바치는 것은 내 의무이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관능적 쾌락이 조금 나에게 굴러 떨어진다면, 몇 해 전부터 내 운명이었던 지나친 괴로움들과 궁핍들에 대한 약간의 보상으로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하다고 나는 느낀다.> 생산의 에너지로서의 리비도의 일부가 등록의 에너지(누멘)로 변형된 것과 마찬가지로, 후자의 일부는 소비의 에너지(볼룹타스[Voluptas])로 변형된다. 무의식의 세 번째 종합, 즉 <따라서 그것은 …이다>의 접합접속 종합 또는 소비의 생산을 가동시키는 것은 이 잔여 에너지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종합이 형성되는지 또는 어떻게 주체가 생겨나는지 고찰해야 한다. 우리는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 없는 몸체의 대립에서 출발했다. 이 양자간의 밀어냄, 근원적 억압의 편집병 기계 속에 나타났던 바와 같은 밀어냄은 기적을 낳는 기계 속에서 하나의 끌어당김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끌어당김과 밀어냄 사이에는 대립이 지속된다. 효과적인 화해는 <억압된 것의 회귀>로 기능하는 새로운 기계의 층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듯싶다. 그런 화해가 실존하고 있거나 실존할 수 있다는 점은 모든 것이 증언하고 있다. 전기(電氣) 편집병 기계들의 뛰어난 디자이너였던 로베르 지이(Robert Gie)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보다 더 정확한 말을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를 괴롭혔던 이 전류들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강력하게 그것들 편을 들어, 그것들의 전적인 승리, 그것들의 압승의 형태로 그것들을 그리는 데 열중했던 것 같다.>1) 프로이트는 더 정확하게 슈레버의 병의 전기, 즉 슈레버가 자신의 여성-되기와 화해하고 자연=생산의 동일성(새로운 인간의 생산)으로 그를 인도하는 자기-치유의 과정에 들어가는 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슈레버는 자기가 실제로 치료되고 자신의 모든 능력을 되찾은 바로 그 때에, 사실상 여장남자의 태도와 장치 속에 꼼짝 못하게 갇혀 있게 된다. <나는 가끔 상반신은 나체로, 여자처럼 리본들, 가짜 목걸이 등을 걸치고 거울 앞이나 딴 곳에 서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내가 혼자 있을 때에만 일어난다…….> 편집병 기계와 기적을 낳는 기계 다음에 오며,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 없는 몸체 간의 새로운 결연을 형성하여 하나의 새로운 인간 또는 영광스런 유기체를 탄생 시키는 이 기계를 가리키기 위해 <독신 기계>란 이름을 빌려오기로 하자. 주체는 욕망하는 기계들 곁에서 잉여로서 생산된다는 것과 주체는 이 제3의 생산 기계 및 이 기계가 행하는 적여의 화해와 다름없다는 것은 결국 같은 소리이다. 이것은 <따라서 이것은 그것이었다(C'était donc ça)>라는 놀라운 형식을 띤 소비의 접합접속 종합이다.


  독신 기계

  미셀 카루주(Michel Carrouges)는 문학에서 발견한 몇 개의 환상적인 기계들을 <독신 기계>란 이름 아래 고립시켰다. 그가 내놓는 예들은 아주 다양하여, 얼핏 보면 같은 범주에 들어갈 수 없어 보인다. 뒤샹(Duchamp)의 󰡔벌거벗은 신부󰡕, 카프카(Kafka)의 󰡔유형지󰡕의 기계, 레이몽 루셀(Raymond Roussel)의 기계들, 쟈리(Jarry)의 󰡔초남성󰡕의 기계들, 에드거 포(Edgar Poe)의 몇몇 기계들, 빌리에(Villier)의 󰡔미래의 이브󰡕 등.2) 여기서 각각의 예마다 중요성은 다르겠지만 통일성을 부여해주는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우선 독신 기계는 그 체형(體刑)들, 그 그림자들, 그 옛 등으로 옛 편집병 기계를 증언한다. 하지만 그것 자체는 편집병 기계가 아니다. 그 톱니바퀴 장치들, 견인차, 끌들, 바늘들, 자석들, 광선들이 서로 다르다. 독신 기계는 그것이 주는 체형들 또는 죽음에서까지도 새로운 무언가를, 태양과 같은 역량을 드러낸다. 둘째로, [여기서 일어나는] 이 변모는 그 기계가 은닉하고 있는 기입으로 말미암아 띠게 되는 기적을 낳는 성격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비록 그 기계는 가장 높은 기입들을 효과적으로 은닉하고 있기는 해도 말이다(󰡔미래의 이브󰡕에서 에디슨(Edison)이 행한 등록들을 참조할 것). [거기에는] 이 새로운 기계의 현실적 소비, 즉 자기-성애적 또는 차라리 자동적이라 할 수 있는 쾌락이 있으며, 여기에서 마치 기계의 에로티즘이 다른 무제한의 역량들을 해방시키기라도 하는 듯 새로운 결연, 새로운 탄생, 눈부신 황홀의 혼례가 맺어지는 것이다.


  물질, 알[卵], 그리고 강렬함들: 나는 느낀다

  물음은 이렇게 된다. 독신 기계는 무엇을 생산하는가? 그것을 통해서 생산되는 것은 무엇인가? 내포량(=강렬한 양)들이 답이 될 듯싶다.3) 순수한 상태의, 거의 견딜 수 없는 지점의 내포량들에 대한 분열증적인 경험이 존재한다. 즉 최고도로 체험되는 독신의 비참함과 영광이 있어서, 그것은 마치 삶과 죽음 사이에 매달린 아우성, 강렬한 이행의 감정, 형태와 형식을 빼앗겨버린 순수하고 날것인 강렬함의 상태들과 같다. 사람들은 종종 환각들과 망상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환각의 소여(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와 망상의 소여(나는 ……라고 생각한다)는 좀더 깊은 데 있는 ‘나는 느낀다’를 전제하며, 이것은 환각들에 대상을 주고 생각4)의 망상에 내용을 준다. <나는 내가 여자가 된다고 느낀다,> <내가 신이 된다고 느낀다> 등은 망상이나 환각이 아니며, 다만 환각을 투영하거나 망상을 내면화하게 된다. 우선 강렬함들, 생성들, 이행들만을 체험하는, 참으로 일차적인 정서에 비하면 망상과 환각은 이차적인 것들이다. 이 순수한 강렬함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들은 그것들에 앞서는 두 개의 힘, 즉 밀어냄과 끌어당김, 그리고 이 두 힘의 대립에서 온다. 강렬함들은 서로 대립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중립적인 상태 둘레에서 평형을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기관 없는 충만한 몸체를 가리키는 강렬함=0에서 시작해서 모두 플러스 값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것들의 복잡한 관계를 따라 또 그것들의 원인이 되는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비율에 따라 상대적으로 떨어지거나 상승한다. 요컨대 끌어당기는 힘과 밀어냄의 힘의 대립은 모두 플러스인 강렬한 요소들의 열린 계열을 생산하며, 이 요소들은 결코 한 체계의 최종적 평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주체가 지나가는 무수한 준안정적 정지상태들을 표현한다. 칸트의 이론은 그 깊이에 있어 분열증적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5) 내포량들은 다양한 정도에서 공백 없이 물질을 채우고 있다. 법원장 슈레버의 설에 의하면, 끌어당김과 밀어냄은 다양한 정도로 기관 없는 몸체를 채우는 강렬한 신경 상태들을 생산하며, 슈레버라는 주체는 이 상태들을 지나면서 여자가 되고 또 영원 회귀의 원을 따라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이 되기도 한다. 법원장의 벌거벗은 상반신 위에 있는 젖가슴들은 망상도 아니고 환각도 아니며, 무엇보다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 위에 있는 강렬함의 한 지대, 강렬함의 한 지역을 가리킨다. 기관 없는 몸체는 알이다. 그 알은 축선들과 문턱들, 위도들, 경도들, 측지선들이 가로지르고 있다. 또한 그것은 생성들과 이행들, 거기서 발전되는 것의 목적지들을 표시하는 구배들이 가로지르고 있다. 여기에 재현적인 것은 전혀 없으며, 모든 것은 삶이고 체험된다. 젖가슴들이 체험하는 정서는 젖가슴들을 닮지 않으며, 젖가슴들을 재현하지도 않는다. 이는 마치 알 속의 한 예정된 지대가 거기에 들어설 기관을 닮지 않은 것과 같다. 거기에는 강렬함의 지대들, 포텐셜들,6) 문턱들, 구배들밖에는 없다. 이것은 비통하고 너무나 감동적인 경험으로, 이를 통해 분열자는 물질에, 물질의 강렬하고 생생한 중심에 가장 가까이 있게 된다. <이 정서는 정신이 그것을 찾는 특정한 지점 바깥에 있다……. 이 정서는 정신에게 물질의 아주 놀라운 소리를 들려주며, 영혼 전체는 거기로 흘러 그 작열하는 불 속으로 들어간다.>7)


  역사상의 이름들

  분열자를 현실에서 분리되고 삶에서 절단된 무기력한 자폐증 환자로 그려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던가? 더 나쁜 일인데, 어떻게 정신의학은 그를 임상적으로 이런 무기력자로 보고 죽어 버린 기관 없는 몸체의 상태에 환원시킬 수 있었는가? 그는 정신이 물질과 접촉하여 물질의 각각의 강렬함을 살고 그것을 소비하는 저 견딜 수 없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 물음을 다음과 같은 겉으로는 아주 다른 하나의 물음과 관련시켜야 하지 않을까? 즉, 어떻게 정신분석은 이번에는 신경증 환자를 아빠-엄마만을 영원히 소비하고 다른 것은 일체 소비하지 않는 불쌍한 피조물로 환원시켜 버리는가? 어떻게 <따라서 이것은 그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나다!>라는 접합접속 종합을 <따라서 이것은 내 아버지다, 따라서 이것은 내 어머니다……>라는 오이디푸스의 영원하고 서글픈 발견으로 환원시킬 수 있었는가? 우리는 아직 이 물음들에 답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순수한 강렬함들의 소비는 어떤 점에서 가족의 모습들에 낯선지, 그리고 <따라서 이것은 …이다>라는 접합접속적 직조는 오이디푸스의 직조에 얼마나 낯선지를 볼 뿐이다. 이 삶의 운동 전체를 어떻게 요약하랴? 첫 번째 길(짧은 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기관 없는 몸체 위에 있는 분리접속의 점들은 욕망하는 기계들 둘레에 수렴원들을 형성한다. 이렇게 되면 기계 곁에 잔여물로서 생산된, 즉 기계에 인접해 있는 부속물 또는 부품으로서 생산된 주체가 그 원의 모든 상태들을 통과하며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이행한다. 주체는 기계가 점유하고 있는 중심에 있지 않다. 주체는 가장자리에 있으며, 고정된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고, 항상 탈중심화되어 있으며, 자신이 지나가는 상태들에 의해 귀결된다. 그리하여 그 원들은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서 묘사된 고리들과 같은데, 그것들은 <왈츠를 추듯 때로는 급작스럽고 짧으며 또 때로는 포물선처럼 폭넓으며,> 머피(Murphy), 와트(Watt), 메르시에(Mercier) 등을 자신의 상태로서 가지고 있지만, 가족은 거기에서 아무런 관련도 없다. 아니면 더 복잡한 다른 길이 있지만, 결국 이것도 앞의 것과 마찬가지이다. 편집병 기계와 기적을 낳는 기계를 가로질러, 기관 없는 몸체 위에서의 밀어냄과 끌어당김의 비율들이 독신 기계 속에서 0으로부터 시작하는 일련의 상태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주체가 그 계열의 각 상태마다 태어나며, 어떤 순간에 그것을 결정하는 다음 상태로부터 항상 다시 태어나서, 자신을 태어나게 하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이 모든 상태들을 소비한다(이 상태를 사는 주체에 비하면 체험되는 상태가 일차적이다).

  이것은 클로소프스키(Klossowski)가 니체 주석에서 훌륭하게 보여 준 점이다. 그는 가장 높은 사유와 가장 날카로운 지각을 구성하는 물질적 정서로서의 기분(Stimmung)의 현존을 보여주었다.8) <원심력들은 결코 중심에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중심에서 다시 멀어지기 위해 새로이 중심에 접근한다. 이렇게 격렬하게 진동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개인이 자기 자신의 중심만을 찾고 그 자신이 일부를 이루고 있는 원을 보지 못하는 한 그 개인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이 진동들이 그를 뒤죽박죽으로 만든다면, 그 까닭은 그 진동 하나하나가, 발견할 수 없는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그가 믿는 것과는 다른 어떤 개인에게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이란 본질적으로 우연한 것이요, 이 개인 또는 저 개인의 우연성이 그들을 모두 필연적인 것이 되게 하려면 일련의 개인성들이 각 개인에 의해 주파되어야만 한다.> 끌어당기는 힘과 밀어냄하는 힘, 비상하는 힘과 퇴락하는 힘은 기관 없는 몸체를 가리키는 강렬함=0에서 출발하는 일련의 강렬한 상태들을 생산한다(<하지만 독특한 점은 그저 이러한 부재를 의미하기 위해서일지라도 거기에 하나의 새로운 쇄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문헌학 교수인 니체-자아란 없다. 즉 갑자기 이성을 잃고 낯선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니체의 자아란 없다. 일련의 상태들을 통과하는, 또한 역사상의 이름들을 이 상태들에 동일시하는 니체-주체가 있을 따름이다. 역사상의 모든 이름들, 그것이 나다……. 주체는 자아가 그 중심을 버리고 떠난 원의 원주 위에 펼쳐진다. 중심에는 욕망의 기계, 영원 회귀의 독신 기계가 있다. 이 기계의 잔여물 주체, 즉 니체-주체는 그 기계가 돌게 하는 모든 것, 독자가 니체 작품의 단편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든 것으로부터 행복에 넘치는 보상(볼룹타스)을 끌어낸다. <니체는 이제부터 한 체계의 실현이 아니라 한 프로그램의 적용을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 이는 니체의 담론의 잔여물이라는 형식을 띠는데, 이것들은 이를테면 그의 어릿광대짓의 레퍼토리가 된다.> 자신을 [역사상의] 인물들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이름들을 기관 없는 몸체 위에 있는 강렬함의 지대들과 동일시하라. 그러면 그때마다 주체는 <이것은 나다, 따라서 이것은 나다!>라고 외친다. 지금까지 분열자만큼 역사를 이용하고 또 그가 역사를 이용한 방식대로 이용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단숨에 보편적 역사를 소비한다. 우리는 분열자를 자연인으로 규정하면서 시작했는데, 이제 최종적으로 역사인(Homo historia)으로 규정해야 하겠다. 전자로부터 후자로 가는 이 긴 길은 횔덜린(Hölderlin)에서 니체에 이르는, 점점 가속되는 길이다(<니체에게 있어서 행복감은 횔덜린의 명상적 소외만큼 오래 연장되지 못할 것이다……. 니체에게 허락된 세계관은 [횔덜린의 경우처럼] 약 40년에 걸쳐 제법 한결같이 이어지는 풍경들이나 정물들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건을 다시 기억하는 패러디이다. 단 한 사람의 배우가 한나절에 그것을 흉내 낸다. 왜냐하면 단 하루 안에 모든 것이 말해지고 다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 하루는 12월 31일부터 1월 6일까지 지속되어야 했지만 말이다. 이 때의 하루는 보통 달력을 넘어 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안티 오이디푸스" 1쇄 중 수정사항 정리 (2015년 2월 2일) 철학자 2015.02.09 1106
공지 나쁜 독서와 아예 읽지 않는 것 중 어느 것이 가치가 더 나은지 알지 못한다 철학자 2014.12.08 1685
공지 들뢰즈 국제학술대회 및 캠프 안내 (최종버전) 철학자 2016.06.09 1194
공지 박사학위논문 통과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2] 철학자 2013.01.17 128947
공지 김재인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파일) 철학자 2013.04.17 136425
공지 들뢰즈에게 궁금한 것들 [46] 철학자 2011.08.17 27958
270 부산강연 녹음 1 (강연) - 볼륨 수정 편집 [1] 김재인 2004.08.31 3076
269 부산대 강연 후기 [2] eudike 2004.08.27 3041
268 강연 원고 [5] 김재인 2004.08.26 4511
267 들뢰즈의 철학, 부산 강연 안내 [2] 김재인 2004.08.23 3219
266 [re] 이진경 교수의 흥미로운 반론 ^^ [1] 미선이 2004.08.05 4123
265 회복하는 자 [2] 김재인 2004.07.27 3034
264 단백질의 주름(fold/pli) [1] 스타벅 2004.07.21 3412
263 이진경 교수의 흥미로운 반론 ^^ [9] 김재인 2004.07.17 10976
262 천개의 고원을 읽다가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질문드립니다. [1] 독자 2004.07.14 3053
261 [re] 그리스인은 천을 걸치고 다녔다지요. 도둑고양이 2004.07.11 3196
260 이진경 씨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 대한 또다른 서평입니다. 2004.07.03 3010
259 들뢰즈 사상의 진화 (갈무리 출판사 보도자료) [2] 김재인 2004.07.03 3193
258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비판 서평 (문화일보) [2] 김재인 2004.07.03 3266
257 ‘자율주의’ 낳은 들뢰즈 ‘차이의 존재론’ (서평기사) 김재인 2004.07.03 2885
256 두근... 권정숙 2004.06.25 3119
255 훌륭한 들뢰즈 개론서가 곧 출간됩니다 (예고) [8] 김재인 2004.06.22 5344
» 우선 원문 번역 초고입니다(퍼가지마세요) [3] 김재인 2004.06.22 3271
253 세상 모든 사람처럼 있기 [9] 김재인 2004.06.20 2885
252 왜 들뢰즈인가 김재인 2004.06.18 128
251 '좌파' '진보'적 지식인의 '진보'- 그 끝은 어디인가? 샐러리맨 2004.06.18 3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