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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John Rajchman, The Deleuze Connections, MIT Press, 2000
"들뢰즈 커넥션"(가제), 현실문화연구 출판사를 통해 올해 여름중에 출간됩니다. 안티오이디푸스보다 먼저 시작된 작업인데, 이제서야 끝이 보이네요.
들뢰즈에 대한 개론적 소개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간결한 이해와 소개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들뢰즈 철학의 첫 단계(흄에 관한 책)에서 마지막 단계(비판과 진단)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전모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국내 독자들이 편협하거나 지엽적인 개론서를 통해서만 들뢰즈를 접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간혹 훌륭한 개론서가 있긴 했으나, 들뢰즈의 전모를 다룬 개론서는 흔치 않았습니다. 이 책은 그의 '실천철학'의 핵심을,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르크시즘의 핵심을 들뢰즈가 어떻게 수용하는지의 문제까지도 잘 다루고 있습니다.
번역자로서보다는 들뢰즈 연구자로서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커밍순~

목차:
1. 연결접속들
2. 실험
3. 사유
4. 다양체
5. 삶
6. 감각


<아래는 책의 한 대목입니다. 복제나 무단 전재를 하지 맙시다. (강조나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들뢰즈가 “철학의 비철학적인 이해”라고 불렀던 것에 관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들뢰즈를 철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대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지도이다. 그러나 이 지도는 “포스트모더니즘”, “탈구조주의”라는 오늘날 갈수록 더 쓸모없는 지도들, 또는 대륙철학 대 분석철학이라는 낡은 구분법으로 이미 자리를 잡고 이미 분류된 채 무장한 식자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이 지도는 사유방식이나 정체성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해석학적 나침반을 내던지고 자신의 담론을 남겨둔 채 떠나는 그런 종류의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 종류의 여행을 위해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모토를 가져왔다. ‘진짜로 꿈을 꾸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증명하고자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다.’ 달리 말해, 이것은 고정된 좌표들로 미리 규정된 판 안에서 자신을 위치시키거나 재인식할 수 있는 지도가 아니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철학적 “방향설정”을 하자고 호소한다. 이 지도는 정확히 완전히 규정되거나 위치시키지 않은 지대들, 사물들이 예견되지 않은 방향들로 나아가거나 규칙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작동할 수 있는 지대들을, 전통 철학적인 논리와는 다른 논리의 “의미”를 다루고자 한다. 들뢰즈는 전통 논리적 의미와는 반대로, 대부분의 조직 형식들에 비밀리에 수반하는 그러한 비결정 지대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사유가 이 지대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유한다는 것은 실험한다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판단(=심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이성의 법정에 있는 판사라는 저 위대한 칸트 철학의 형상으로부터 나오는 출구는, 칸트 철학의 기초가 되는 논리적, 윤리적, 미적 “공통감”이라는 전제로부터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마 칸트 자신도, 그가 그토록 어렵게 한계를 세웠던 바로 그 인식능력들의 비규제(unregulation)를 꿈꾸었던 마지막 순간에, 그 공통감이라는 전제를 되돌리는 방법을 암시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점들의 위치를 지정하는 것과는 구별되는 연결접속들의 지도는 공통감이라는 전제를 통해 주어진 것이 아닌 “우리”를 위한 지도이며, 길 잃은 사람, 이미 거기에 없는, 공사의 구별 속에서는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는, 그리고 대부분 “바깥”으로부터 온 사람을 위한 지도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은 장악하지 못한 공통적이지 않은 새로운 힘들의 견지에서 뭔가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지도이며, 미지의 것에 대한 취향, 즉 역사나 사회에 의해 아직 규정되지 않은 것에 대한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지도이다. 무엇이 도래할지 이미 알고 있는 “진보주의”뿐만 아니라 “골동품”인 역사에 대한 향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실험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연결접속의 몇 가지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1. 연결접속은 “경험주의” 또는 “실천주의”라 불릴 수 있는 사유 스타일을 요구한다. 이것은 실험을 존재론 앞에 놓고, “그리고(et)”를 “있다(est)” 앞에 놓는다. 이러한 실천학의 원리는 󰡔천 개의 고원󰡕의 첫 문장들에서 제시된다. 거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양체란 논리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만들거나 행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만들거나 행함으로써 배워야만 하는 어떤 것이라고 선언한다. “다양, 우리는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우리는 항상 연결접속들을 만들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이 들뢰즈가 이미 흄에게서, 즉 “그 항들에 외부적인 관계들”로 이해된 연합(associations)에서 발견한 경험론적 원리이며, 결과적으로 연합이 사회적 “편파성”의 폭력에 앞서는 “관습”의 법리학에 이르게 되는 방식이다. 이처럼 흄은 칸트와 “가능성의 초월론적 조건들”에 대한 탐구의 막다른 골목 이후에 올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흄은 공통감의 경계들 또는 틀들을 교차시키고 공통감에 앞서는 관계들과 연결접속들을 만들어내는 개념적 실험가의 유형을 예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계들의 실험적 교차 작업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 희망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믿음이나 신뢰, 다시 말해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belief-in-the-world)이다. 연결접속한다는 것은 따라서 이미 주어진 가능성이 아닌 다른 가능성들을 갖고서 작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토피아적이란 말은 그런 다른 가능성들을 표현하기에 딱 맞는 말은 아니다. 유토피아적이란 말은 여전히 조직화와 발전에 대한 꿈의 일부이거나, 연속성을 중단하기 위해 요구되는 “비동일성”이라는 신비적 메시아니즘의 일종인 것이다. 들뢰즈는 가능성의 논리 전체를, 가능성과 허구와 실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 자신과 우리 세계 안에서, 우리가 앞으로 그 존재를 믿게 될, 흄의 의미에서의 어떤 고안물(artifice)을 다시 발견한다. 그것은 낙관적이냐 비관적이냐, 라는 문제이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기획이나 프로그램들에 이미 담겨 있는 것이 아닌 새로운 힘들에 대해, 그리고 그 힘들에 수반하는 사유 방식들에 대해 실재론적 접근을 하느냐(realistic),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연결접속들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지식이나 확실성, 또는 심지어 존재론도 필요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아직 무엇인지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하더라도, 무엇인가가 산출되리라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흄은 데카르트의 확실성을 믿음의 확률(=개연성)로 대체했다. 그러나 들뢰즈는 믿음의 문제를, 어떠한 주사위 던지기도 없앨 수 없는 “확률적으로 있을 것 같지 않은 우연”의 지대로까지 밀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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