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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정남영씨 글의 한 부분을 읽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거 사노맹 계열의 [노동해방문학] 이론가로서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을 강력히 옹호했던 정남영. 하지만, 내게는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문학이론입문Literary Theory: An Introduction]의 번역자로 먼저 인식되었던 사람. 그런 그도  이제 들뢰즈와 가따리Deleuze& Guattari를 이야기한다. 박노해씨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고백하면서 '참된 시작'을 노래한 지 벌써 오래인데, 그도 이제 과거 정통 ML주의자([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에서 최근 들뢰즈의 전도사([노마디즘])로 '진보'한 이진경의 뒤를 따라 늦깍이로서 '참된 시작'을 하는 것인가.    


  그런데, 그의 글을 읽어내려가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수언어major language'와 '소수언어minor language'의 개념을 구분해서 소개하는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이다. 들뢰즈와 가따리의 '소수화minorization'개념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모교 스승 백낙청 교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리비스F. R. Leavis를 끌어들이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가 진정 들뢰즈와 가따리를 제대로 잘 읽고 있는가 불안해진다. 엉터리 난해시에서와 같은 '마구잡이식 탈표준화, 탈영토화'와 '창조적 소수화'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라고 자기 혼자 질문을 던져놓고는 그 척도를 제시하는 대신 그 척도란 것이 '만남'의 장소인 의미속에서 개인들이 작품을 놓고 서로 토론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법이라는 말로 은근슬쩍 넘어가다니.....  (이건 제도적 권위와 대충 타협하는 실망스러운 모습이다!) 더군다나, 들뢰즈와 가따리에게 있어서의 pouvoir와 puissance의 의미론적 대립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정남영씨의 표정이 자못 궁금해지까지 했다. 그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권력을 대표하는 조직은 국가이고 (긍정적 의미에서의) 소수자화된다는 것은 하나의 권력에 다른 권력을 맞세우는 차원의 기획이 아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일까. 예전의 그같으면 그런 개인주의적-무정부주의적 차원의 저항은 '쁘띠적 발상'이라고 간단히 거부했을텐데.. 그는 진정으로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들뢰즈와 가타리 추종자로 개종할 수 있었던 것일까.  


  박노해씨를 데뷔시킨 그의 동료 문학이론가 조정환씨도 요즘 안토니오 네그리Negri를 열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ND계열의 사회주의 혁명가에서 '아우토노미스트 이론가'로의 그들의 눈부신 '변신'과 '진보'를 보면서 나는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한편으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그들은 진정 과거에 대해 철저히 반성했는가. 옛날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고자 했던 노동자들과 학생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옛날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책임있는 해명을 하기는 했는가.  이제  그들에게서 과거에 대한 반성의 모습보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메시지를 따라 '창조적 소수자'가 되려는 모습보다는, 어떡해서든 유행에 뒤지지 않고 단번에 유행을 쫓아간 다음 학계와 진보진영 이론가들 테이블 한 구석에 자기 자리하나 마련해보려는 불쌍한 몸부림과 권력욕을 먼저 본다면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일까. 그들의 그런 욕망과 마르크스가 '무한히 자기증식하는 가치'로 정의한 자본의 탐욕스러운 팽창주의적 욕구가 등가물로 보이는 것은 '차이'의 철학에 둔감한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인가. 자기네들만의 지적 '유행'을 구원의 사상으로까지 제시하려 한다고 자꾸만 삐딱하게 바라보려는 나에게는 니체가 말한 '긍정'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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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자체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적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소수 언어’(minor language)와 ‘다수 언어’(major language)의 구분이다. 리비스의 ‘시적 언어사용’과 ‘산문적 언어사용’이 그랬듯이,  ‘소수 언어’와 ‘다수 언어’도 실질적으로 구분되는 별개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고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을 지칭한다. ‘다수 언어’란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들에서 불변적,상수(常數)적 요소들을 추출하여 그것을 통해 언어를 동질화하고 표준화하는 언어사용을 말한다. 이에 반해서 ‘소수 언어’는 언어의 변수들을 계속적으로 변화하고 변동하게 하여 탈표준화하고 탈중심화하는 언어사용 방식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불변적 혹은 의무적 규칙을 갖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선택적 규칙을 갖는데, 이 규칙은 변주 자체와 함께 부단하게 변한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예컨대 사투리와 같은 별개의 ‘소수 언어’를 창출하는 것보다--이는 상대적 ‘다수 언어’를 만드는 꼴이 된다--표준화되고 동질화된 ‘다수 언어’를 소수적으로 사용하는 데, 즉 소수화(minorization)하는 데 더 의미를 둔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언어 영역에서의 창조성이다. 소수화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연속적인 변동의 상태에 놓기’이며, 그 결과물은 ‘변동의 연속체’이다. 연속적으로 변동시킨다는 것은 계속해서 새로운 어휘를 주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과정을 자기 나름의 ‘문체’를 갖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문체’로 어떤 고정된 것을 연상하면 잘못이다. 기존의 언어에서 불변적,상수적 요소로 되어있는 것을 변수로 만들고 그 변수들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체로 만드는 것이 바로 문체이기 때문이다.
  소수적 언어사용은 “더 이상 선행하는 범주들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천 개의 고원], 104면) 언어사용이기에,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예컨대 엉터리 난해시에서 보는 바와 같은 마구잡이 식의 탈표준화, 탈영토화를 창조적인 소수화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비평가인 리비스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리비스의 견해에 따르면 이 척도는 예의 ‘만남’의 장소인 의미 속에서 개인들이 서로 만나는 가운데 그 상호협동의 산물로 생겨난다. 쉽게 말하면 작품들을 놓고 서로 토론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것이다. 이 척도는 따라서 지극히 유동적일 수밖에 없으며, 늘 수정될 가능성에 열려 있다. 이러한 유동성을 포착하는 데 적합한 훈련과 기율을 쌓지 못한 사람이라면 일정한 고정된 척도를 자신의 재산으로 삼은 다음 그것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세련화하거나 아니면 더 고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을 것이다. 물론 유동적인 척도에 대한 감각이 늘 균형있게 열려있기는 힘든 일이지만, ‘다수 언어’가 대표하는 미리 정해진 척도를 경계하는 마음을 풀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다수 언어’를 권력의 언어이자 지배의 언어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들에게 권력(pouvoir)과 생성의 힘(puissance)은 언어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의 다른 영역에서도 대립한다. 권력을 대표하는 조직은 국가이고, 생성의 힘을 대표하는 것은 소수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소수자화된다는 것은 하나의 권력에 다른 권력을 맞세우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작업이 된다. 권력에 권력을 맞세우는 기획은 다수 언어를 다수 언어로 맞세우는 기획과 상응한다.    - 정남영, 리얼리즘재구성강의안총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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