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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자본주의와 분열증 왜 들뢰즈인가

김재인 2004.06.18 20:27 조회 수 : 133

한국 사회에서 왜 들뢰즈인가 하는 물음이 게시판에 올라오고 있네요. 이는 철학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물음과 맞물려 앞으로 더 중요해질 물음입니다. 저는 '장기적인'(서양사상사 전반을 놓고 볼 때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날 학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평생 연구 대상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장기적이라 말하는 겁니다. 그런 학자들 중에는 니체, 마르크스, 푸코, 베이트슨, 스피노자, 흄 등이 더 있습니다) 들뢰즈 연구자로서 마르크스가 재해석되는 한 들뢰즈+가타리는 언제고 다시 재해석되리라고 봅니다. 즉 이들은 한 집합(수학적 개념인 집합)의 원소들로서 다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마르크스가 더 유효한가 들뢰즈가 더 유용한가 하는 물음은 누구를 먼저 접했는가, 전공이 뭔가, 개인적 성향이 어떠한가 등에 따라 지속적으로 논란이 될 것입니다. 가령 들뢰즈+가타리는 마르크스의 주석이라는 둥, 마르크스의 유일한 현대적 탈출구가 들뢰즈+가타리라는 둥 말입니다. 허나 이런 문제야 그들 사상의 현대적 유용성에 비하자면 덜 중요하지요. (물론 위의 집합에는 제가 언급한 사상가들을 포함해 다른 원소들이 더 있다고 봅니다.)

이들 철학의 접근법을 요약하는 표현을 저는 '실천철학'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철학은 단숨에 얘기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지속적인 '따짐' 또는 '비판'의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물음의 끝까지 가는 동시에 각 물음에 대한 답변을 펼치다 보면 결국 방대한 언어가 동원되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체계'라 하기도 하고 '구축(construction, construct)'이라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실천철학'이라는 말은 굉장히 많은 설명을, 또는 펼침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결국 큰 사상의 얼개를 말한다는 것은, 프랙탈 구조를 띤 설명이 되곤 합니다. 부분이 전체를 담고 있고 전체가 부분을 닮았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단순한 상동 관계나 유비 관계가 아니라 들뢰즈가 말하는 접힙과 펼침, 즉 주름의 관계입니다. 제가 남의 글을 비판하면서 너무 지엽적인 데 매달린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만, 사실 부분의 사유와 전체의 사유는 똑같다는 것이 저의 철학적 직관입니다. 이 말 자체도 오해의 여지는 있지만, 아무튼, 철학적 작업, 다시 말해 언어적 작업에서 작은 개념 또는 개념적 디테일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사회적 실천에서 작은 실천 또는 실천적 디테일을 소홀히 한다는 것과 같다는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언어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은 서로 다른 실천의 논리를 갖고 있긴 해도, 그리고 때에 따라서 서로 다른 맥락에서 서로 무관한 채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각각 실천이라는 점에서 실천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즉, 언어적 차원에서 개념적 실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대개는 사회적 실천에서 분자적 실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실천들은 각각 사유의 실천과 또한 나란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부분을 열심히 보다 보면 전체적인 함의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제가 전체적인 함의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요. 결국 우리는 넓게 보면 '하나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천철학을 구호 형태로 정리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make the world! 그러나 이 단순한 말은 굉장히 다양한 맥락에서 해명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차원, 미학적 차원, 인식적 차원, 존재론적 차원, 윤리적 차원 등. 이 각각에 대해, 또한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달리,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정치적 차원을 예로 하면, 정치적 지향도 생각해 볼 수 있겠고 정세와 사회적 힘 관계, 그리고 국제 정치와 경제 문제도 개입할 테지요. 또한 개개인의 가치관과 가정사까지도 주요 요인으로 관여합니다. 나아가 이것들이 계산과 예측이 가능한 확률, 통계의 형태로 정리될 수 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평소 건강 관리를 못하여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각 개인이 또는 집합으로서의 사회가 무엇을 원하는가부터 시작하여 들뢰즈+가타리의 표현을 빌면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장군 없이도 전쟁이 가능한가" 식의 물음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이 게시판에 올라오는 많은 질문들에 답변하기 어렵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물음이 너무 단순하거나 맥락에서 사상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가령 전에 간략하게 들뢰즈+가타리 저술의 번역 상태를 검토해 달라는 물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는 대로 평했는데, 물론 거칠긴 했지만, 그리고 부분적으로 봤기 때문에 (그러다 보면 서너 페이지를 꼼꼼히 대조하여 보다가 결국 번역 상태에 질려서 더 이상 못 보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개괄적으로는 '읽지는 않았지만'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읽지도 않고 어떻게 논평을 하는가?'라고 당장 반문하고 마는 것이지요. 맥이 빠집니다. 이런 일들이 무수히 많이, 개인적 사정에 따라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make the world, 결코 쉽지 않지요.

철학을 한다는 것은 심판관이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심판관의 위치에 서고자 합니다. 편파성을 공개적으로 말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을 말대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민주노동당이 때로 순결주의적 차원에서 자기 입장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양비론을 펼치거나 한나라당과 같은 행보를 보이는 것이 실천 전략에서 옳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나 궁극적으로는 자기 입장과 실천이 있습니다. 침묵도 중요한 실천이고 방관도 실천이며 싸움을 말리는 것도, 구경하는 것도, 방관하는 것도, 조장하는 것도 실천입니다. 민주노동당(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한데) 또는 실명을 거론하자면 박노자, 홍세화, 박노해, 임지현 등은 제가 말하는 의미에서 '실천철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더 편한 말로 표현하자면 반마르크스적이란 말이지요. (동시에 반들뢰즈적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 이 땅에서 들뢰즈 철학은 최우선적으로는 실천에 대한 바른 개념을 세워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실천 개념과 관련하여 많은 선도적 지식집단은 오해를 범하고 있거나 심지어 반동적, 이율배반적, 자살적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저는 김진석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의 문제의식에 동감합니다.)

저를 '노빠'라고 지칭하면서 어떻게 들뢰즈를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설사 노빠라고 하더라도 들뢰즈와 도대체 어떤 모순 관계인지를 저에게 좀 자세하게 말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지지하지만 저는 병역거부를 하지 않습니다. 들뢰지앵이 병역거부를 해야 한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직접적으로 말해 저는 반평화주의자입니다. 평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평화를 학수고대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평화란 완성태이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폭력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예링의 주장에 동조합니다.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지만, 과연 한국군이 이라크에 가지 않게 하려면 여러분은 각자 또 집단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행동하십니까? 각자 자기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또 무엇일까요? 그것을 싸잡아서 발언하는 것을 '그램분자적'이라 하지요. 저는 그램분자적으로는 분명 노빠가 맞습니다. 대선때 노무현을 찍었고, 주변에 찍어달라고도 했으며, 이 게시판을 통해 지지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지요. 좌측에 링크로 서프라이즈 가는 길을 알려놓기도 했습니다. 그럼 이회창을 찍어야 했습니까?

어떤 사람이 현재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판은 비난과는 다른 실천입니다. 제가 이진경을 비판한 까닭은 그가 들뢰즈를 팔아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데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높이에서 저를 비판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제가 행했던 것처럼, 좀 많은 시간을 들여서, 섬세하게 비판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진경을 비판하기 위해 삼십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결국 삶이 다른 것이지요. 들뢰즈는 그것을 '하나의 삶'이라 불렀습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당신은 하나의 삶을 만들고 있나요?

두서없이 몇 자 적었습니다. 당분간 게시판에 관여하지 않으려 합니다. 머지않아 <들뢰즈 커넥션>이라는 짤막한 번역서를 통해 독자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드리면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안티 오이디푸스>보다 먼저 착수했던 일이라서 먼저 마치려 합니다). 6월 말까지 번역 원고를 넘기려는 각오로 작업하겠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장마 잘 넘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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