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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편집 2004.09.03(금) 18:22
  
과학도 역사도 우발성이 지배한다


결정론적 법칙 대신
작은 우연이 거대한 격변 낳는
비평형 물리학으로 세상 보기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를 읽는 일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이론물리학 박사이자 과학전문기자인 저자는 물리학·생물학은 물론, 경제학과 역사학의 심연을 자유자재로 파고든다. ‘격변하는 역사를 읽는 새로운 과학’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지은이는 물리학을 발판으로 역사를 다시 정의내리려는 야심찬 기획을 품고 있다. 역사의 빙벽을 오르기 위해 그가 준비한 ‘비평형 물리학’이라는 외줄은 위태롭지만 팽팽한 긴장으로 과거와 현재,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잇는다.

비평형 물리학의 세계는 모래더미에 모래알 하나씩을 떨어뜨리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어떤 모래알은 단 하나의 모래알을 움직이고 말지만, 또다른 모래알은 무더기 전체를 붕괴시킨다. 두가지 사태의 원인은 동일하다. 바로 모래알 하나다. 여기서 예측가능하거나 규칙적인 일은 없다.

이때의 모래더미는 질서와 비질서의 투쟁이 팽팽히 맞서 무너지기 직전인 ‘임계상태’를 유지한다. 임계상태에서는 아주 사소하고 우연한 일이 격변을 불러일으킨다. 임계상태에 놓인 지구의 지각은 사소한 충격으로 수십만명의 목숨을 뺏는 강력한 지진을 일으킬 수도 있고, 감지되지도 않는 사소한 지진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런 비평형 물리학의 세계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다. 바로 ‘멱함수’다. 무너지는 모래알 수가 두배가 되면 사태는 두배쯤 드물게 일어난다. 강력한 지진은 소규모 지진보다 일정한 비율로 덜 일어난다. ‘프랙털’의 기본 구조도 유지한다. 작은 부분을 들여다보면, 전체의 구조를 닮았다. 전체는 부분을 반복한다. 분자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 생태계 전체에도 적용된다.

개념의 복잡함보다는 그 인식지평의 생소함 때문에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비평형 물리학은 이제 자연과학을 넘어 인간의 역사에 적용된다. 그동안 역사가들은 어떤 결정적 이유를 통해 역사를 ‘일반론’적으로 설명해왔다.

그러나 지은이는 증시 변동과 도시형성, 전쟁 등에 대한 연구결과를 통해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임계상태를 드러낸다. 우발성이 지배하는 임계상태의 인간 사회에서는 작은 우연이 미래의 길을 완전히 틀어놓을 수 있다. 사건의 복잡한 연쇄경로를 설명하는 결정론적 법칙은 없다. 단지 수많은 사건의 연쇄에서 나타나는 통계적 패턴인 멱함수와 프랙털 구조가 발견될 뿐이다. “결정화되는 눈송이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역사 전개의 완벽한 예”라고 지은이가 말할 때, 그것은 비평형 물리학이 역사 전개까지 설명한다는 선언이다.

인식 지평의 근본을 뒤흔든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은 충격적이다. 힘들게 오른 비평형 물리학의 빙벽이 역사에 대한 불가지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혐의도 있다. 어쩌면 지은이는 붕괴직전의 임계상태에 놓인 세계를 향해 모래알 하나도 유심히 지켜보라고 일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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