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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송두율을 위한 변명

eudike 2003.09.29 00:10 조회 수 : 294 추천:23




“냉전이 낳은 경계인, 조국 품에 끌어안아야”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가 이번에 해외에서 오랫동안 망명하며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분들을 초청한 것은 늦었지만 참으로 잘된 일이다.

이번에 귀국한 송두율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독일에서 철학과 사회학으로 학위를 받고 독일의 교수자격 시험을 통과한 석학이다. 그가 서구 68세대와 사고의 궤적을 같이했고 하버마스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진보적 세계관을 공유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선포되자 구미 각지의 유학생들은 각종 선언서와 성명을 통하여 이에 저항했고, 송두율은 앞서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곤경을 치렀던 저명한 작곡가 윤이상 선생과 함께 ‘민주사회 건설 협의회(민건)’를 결성하게 된다. 이것이 그의 고난의 길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명분으로는 독재정권에 반대했으면서도 윤이상 선생도 그러했지만 송두율도 끊임없이 한국 정부와의 전향적인 관계개선을 원했고, 그러한 기대는 우리가 국내에서 민주화 열망이 좌절될 때마다 그러했듯이 실망의 연속이었다. 특히나 광주학살 이후 신군부의 등장은 이러한 실낱 같은 기대마저 완전히 말살시켜 버렸다.

나는 망명자의 심정을 조금은 안다. 그는 서구 사회에서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처럼 하나의 고독한 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가끔씩 잘 알던 친구가 스쳐 지나갈 때에도 전화라도 한 통화 해주면 위안과 슬픔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상대방도 이쪽을 만나면 당국에 까탈을 잡힐까 염려하여 다른 사람을 통하여 안부 정도나 전하고 가기 마련이다. 상대를 이해는 하면서도 세상 인심의 각박함을 절감하게 된다.

더 나쁜 경우에는 망명자에 대한 헛소문이 끊임없이 떠돌기 마련이고 대부분은 과장된 사실들이다. 내가 처음 만났던 송두율은 이런 것에 시달리고 있었고 현지의 유학생들마저 극소수를 빼고는 불신하고 있었으며 같은 또래의 친구도 없었다. 그는 고독하고 소심했으며 언제나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걸쳐 있었다. 그것이 ‘경계지대’라고 미화되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어중간함이 그의 고독이고 운명이었다.

나는 그가 같은 학자들 사이에 독선적이고 오만하다는 평판이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혼자서 일정한 선을 유지하며 살아가려면 그러한 자부심이 없이는 진작에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창작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망명 시절에 그의 학문적 자부심을 언제나 내 쪽에서 인정해 주었고 서로 의지할 수가 있었다.

그는 최근년까지도 부부가 함께 언제라도 귀국할 수 있도록 한국 국적과 여권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해외에 체류한 지 삼십여년이 지나면서 아이들의 진학과 취직을 계기로 국적을 바꾼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세간에 송두율의 주요 혐의사실이 되고 있는 ‘월북 권유’ 문제와 ‘김철수와 동일인이며 노동당 서열 28위의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풍설에 관하여 나도 조금은 실정을 아는 사람으로서 할 말이 있다.

내가 ‘오길남 사건’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처음에 광주항쟁 기록을 쓰고 당국의 외유 권유에 의하여 i겨나다시피 베를린을 방문했던 1985년 무렵이었다. 내가 제3세계 문화제에 참석하고 나서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어 신문을 내고 있던 어느 동포 유지에게서 오길남 사건이 실린 수필집을 받았다. 물론 이것은 오길남이 이후에 치르게 된 인생의 간난신고를 냉소거리로 삼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누가 보기에도 냉전과 분단의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책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다. 그는 고아로 자라나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꿈에 그리던 독일 유학을 거쳐 경제학 박사가 되었다. 유학 시절에 그는 현지 취업한 성실한 간호사 출신의 여성을 만나 결혼하고 그녀의 뒷바라지로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예쁜 두 딸까지 낳았고 미래는 훤히 열려 있었다. 그 무렵에 독일에서 송두율 등이 주도한 ‘민건’이 결성되었고 그는 당연히 별 정치적 판단 없이 여기에 서명하고 입회했다. 이 일로 그는 반체제 인사가 되었고 귀국할 수가 없게 되었다. 80년 광주학살은 많은 지식인들에게 자신의 조국에 대하여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했고 퇴로를 끊긴 그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당시에 구미 동포사회에는 광주 비디오와 더불어 북한 영화와 생활상에 대한 각종 비디오가 넘쳐나는 중이었다. 방황하던 그에게 북한은 새로운 세계였다. 그는 그가 접촉했던 북측 인사로부터 입북하면 김일성대학의 교수로 임용될 수 있다고 회유를 받았다. 오길남은 가족 동반하여 입북할 것을 결정하고 말았다. 재독 동포들은 한결같이 안타까워하면서 말했다. 북한에는 가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리 쉽게 결정을 내리는가. 차라리 혼자서 일단 방문해 본 다음에 나중에 결정해도 되지 않겠는가. 여러 사람들이 말렸다고 송두율을 비롯한 재독 동포들은 말한다.

그러나 오길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입북했고 몇 달이 못 되어 쓰디쓴 환멸이 찾아왔다. 그가 배치받은 곳은 소위 ‘구국의 소리’ 방송이라는 한민전의 사무실이었으며 하루에 삼십분씩 해설을 하는 자리였다. 그는 달걀 하나도 마음대로 구할 수 없었다고 불평하고 있다. 어쨌든 괴로워하던 그에게 부인은 ‘정 못견디겠으면 혼자 먼저 나가라’고 권유했다. 그는 지도원에게 독일에 가면 동반 입북할 학생이 있으니 함께 나가자고 꾀어서 드디어 유럽으로 여행을 나올 수가 있었다. 입북한 지 6개월 만이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 공항에 내렸을 때 그는 북한 여권 사이에 ‘아이 앰 노스 코리안 스파이, 헬프 미’라는 쪽지를 끼워서 내밀었고 현장에서 즉각 체포되었다.

당시 베를린의 안전 담당을 맡았던 연합군 중에 당연히 미국 정보당국이 그를 인수하여 6개월을 조사한 뒤에 가차없이 서독 정부가 관리하는 ‘망명자 수용소’로 넘겼다. 그는 거의 부랑자처럼 떠돌며 북에 남은 가족들을 돌려달라고 사방으로 호소하고 다녔다.

내가 ‘오길남 사건’의 자료를 접했던 85년의 상황이었다. 당시 동포들 사이에는 두 가지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무책임한 선택에 의한 자업자득이다.’ ‘아무리 냉전체제이지만 그의 가족은 인도적으로 되돌려주어야 한다.’ 오길남은 그때부터 송두율과 윤이상 선생에게 하소연하고 때로는 행패를 부리면서 가족 송환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여러 해외동포들이 호소를 하여 나중에 그의 북측과의 접견이 오스트리아의 빈에 있는 북한 공관에서 있었다고 들었다. 북측은 오씨의 귀국시 처벌을 하지 않을 것만을 약속했을 뿐 가족 송환에는 끝내 냉담했다. 오씨가 공화국의 국가적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의 방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족과의 상봉을 그리던 그는 드디어 남한 정보당국과 접촉했고 냉전시대 수많은 월북·월남자들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한 정치적 계절의 선전용으로 사용되고 말았다. 나중에 이 일에 대하여 항의하던 어느 해외동포에게 북측 인사가 해주었다는 대답은 인상적이다. ‘분단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남으로 가고 북으로 가고 하는 게 어디 장난입니까. 우리도 국가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송두율이 오길남의 월북을 권유했다는 것은 재독 동포들이 모두 알고 있다시피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조서에 무책임하게 그렇게 진술되어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가장 중요한 혐의인 ‘김철수’에 관해서는 내가 겪은 일이어서 간단히 해명하고자 한다. 동서 베를린의 장벽이 있었을 때에는 서독에는 테겔 공항, 동독에는 쇠네펠트 공항이 따로 있었다. 당시에 독일에서 북한을 방문하려면 외교관계가 없는 동독으로 가서 북한의 조선민항기를 타야 했는데 동서독 접점인 프리드리히 거리의 전철역에 가서 한국 여권으로 통과하고 나서, 동독 공항에서는 북한측이 따로 마련한 북한의 임시여권으로 비행기를 타야 했고 그때에 여권 이름은 언제나 가명이었다. 나도 내 여권명이 ‘홍철’이라고 되어 있어서 실소를 금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에 또다른 여권 이름을 보았지만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문제는 송두율이 김철수가 자신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 이름으로 초청받은 사실을 한국 관계당국이 포착했다 하더라도 본인은 잊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김철수’가 정말로 당 서열 28위의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인가 하는 점인데, 이것은 남한 당국에 뭔가 큰 선물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던 황장엽씨의 진술이 유일한 단서다. 또한 설사 김용순이 그에게 직접 말을 해주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황씨가 그러한 중대 첩보를 접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초점을 흐리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의 정치권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세히 모르고 더구나 북한에 대해서는 캄캄하다. 그렇지만 인지상정이라는 것이 있다. 북한 사회의 당 서열 28위라는 것은 우리네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권력 서열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위치다. 우리네 1위가 대통령이라 쳐도 북한 식으로 하자면 우리네 재벌 총수 정도가 2위쯤 될 것이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알기로도 중앙정치국 위원은 김일성 부자를 포함하여 다섯 손가락이 채 안 된다. 그야말로 후보위원까지 한 30명 되는 셈인데 핵심 중의 핵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작은 시민단체의 집행부를 조직할 때에도 멀리 지방에 있거나 더욱이 해외에 있는 인사를 논의구조의 중심부에 넣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 테지만 그는 이제까지 대학 도서관의 사서로 일한 부인의 박봉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왔다. 그가 독일에서 차 한 잔, 술 한 잔 값에 호주머니에 넣은 손을 오랫동안 빼지 못하고 망설이던 모습을 보아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서열과 이 가난을 어떻게 결부시켜야 할까. 이런 말까지 하기가 구차스럽지만 나는 북측 인사들이 일본에 있는 총련 의장, 부의장조차도 별로 신뢰하지 못하는 듯한 언사를 무심코 내뱉는 것을 여러번 듣고 보았다. 정말로 유럽에 체류하고 있는 서열 28위의 인사가 있기는 한 것인가.

아아, 나는 답답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송두율은 35년간 그리던 고국에 가족과 더불어 귀국했다. 전범국의 참전 병사가 아니라 작가로서 지난주에 베트남을 방문했던 나는, 냉전의 절대적 질서를 체제화하여 숱한 인간을 희생시킨 세계사의 반인간적인 과거와 현재를 해체하여 인간의 시간으로 되돌려주려는 노력이 한반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은 검찰을 비롯한 관계당국자나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해 왔던 상처였다. 적어도 송두율은 남과 북 사이에서 깊이 고뇌하던 양심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 내가 얼마 전에도 썼듯이 세칭 깐수 사건의 정수일 선생은 세계적인 이슬람학의 권위자로서 지난 몇년 사이에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학문적 업적으로 우리 사회에 기여했다.

송두율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지식인이다. 그를 끌어안는 것이야말로 과거와 결별하는 것이며, 새로운 세대의 공안기관은 물론이요 정치권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황석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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