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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예술과 문화 경계 허물기와 경계의 분별 (2001)

김재인 2002.06.26 03:48 조회 수 : 13212 추천:486

* 이 글은 <동국대 대학원 신문> 2001년 3월호에 발표했습니다. '차이'와 '연대'라는 주제로 청탁을 받은 글이었는데, 전화도 없던 번개가 치던 강원도 어느 MT 방에서 노트북으로 찌릿찌릿 감전되어 가면서 겨우 써서 전화가 있는 곳까지 차를 타고 가서 가까스로 발송했던 기억이 생생한 글입니다.

  경계 허물기와 경계의 분별

  모든 경계를 허물자는 주장이 있다. 잘못된 경계가 생각과 행동을 가로막기 때문에 제기된 주장일 것이다. 가령 성의 경계를 허물자는 주장은 남녀의 사회적 차별을 없애자는 말인 것 같다. 이 주장이 이 정도 의미라면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잘못된 편견과 장벽은 분명 파기되고 파괴되어야 하므로.
  그러나 경계를 허물자는 주장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어찌 보면 경계란 생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분별이란 경계를 인식하는 작용, 나아가 더 정확히는 경계를 그리는 작용이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여러 종류의 분별이 필요하다. 음식과 독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빨간 불과 파란 불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분별에 착오가 생길 때 생명이 위독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경계를 잘 긋는 일이 대단히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스피노자는 ‘적합한 관념’을 갖는 것이라 했다.
  코드란 세상에 존재하는 경계의 총칭이다. 코드 자체는 생에 유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방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지식은 코드이다. 발명과 창조도 코드이다. 코드란 경계이고 길이며 검증된 유용성의 체계이다. 가령 교통질서를 지키는 이유는 생에 유용하기 때문이지 자신이 노예이기 때문이 아니다. 정신이 유치할 때에만 이에 반항한다.
  그렇다면 경계를 허물자는 주장이 거듭 제기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경계의 나쁜 면, 굳어져 장벽으로 작용하는 면만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자기 영역에 안주하면서 자기 이익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두드러진다. 나쁜 의미에서의 집단 이기주의가 득세하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이 경우 경계는 이익을 얻는 측과 손해를 보는 측을 가르게 되며, 이익을 얻는 측이 그 경계를 고집하기 때문에 경계는 사라지기 힘들다. 바로 이 경우에 손해를 보는 측에서 경계를 허물자는 주장을 강력하게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경계의 ‘차별’적 측면, ‘불관용’적 측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항상 불리한 자의 편에서 생각하려 드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따라서 경계의 원래 측면, 좋은 측면도 직시해야 한다. 사실상 경계란 차이의 분별을 표시하는 흔적이다. 차이를 분별하면 차이를 존중하게 된다. 그러나 차이를 분별할 수 없을 때, 차이를 분별할 힘이 없을 때 사람은 오류에, 정치적 과오라는 의미에서의 오류에 빠진다.
  경계를 허물자는 주장이 잘못 이해되면 마치 모든 경계는 악인 양 생각하게 된다. 분명 이는 잘못이다. 오히려 적합한 경계를 분별하자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성의 경계 문제를 보면 핵심은 곧장 드러난다.
  통계적으로, 인구학적으로, 행정적으로 보자면 성은 남녀 양성으로 나뉜다. 어찌 보면 자명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자명함은 현실적으로는 거짓이다. 다수성이란 통계적으로 처리된 표준이다. 이는 남녀 성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남성 또는 여성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할 뿐 실제적으로는 많은 차이들을 감추는 개념이다. 2개의 성이 아니라 어쩌면 사람 수 만큼의 성이 있다는 주장은 이제 낯선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진의를 따져볼 때 성의 경계를 허문다는 말은 성차(性差)를 무시하고 남녀를 무차별적으로 평등하게 대하자는 말은 결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말은 남녀의 고유한 차이에 주목하면서 그 각각을 차등적으로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그 말이 남녀의 차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차라리 그 말은 무수한 성에 대한 온전한 긍정을 함축하며 따라서 분별에 있어서의 무수한 노력과 어려움을 함축한다.
  따라서 경계를 허문다는 말의 진의는 그저 경계를 없애고 무차별적이 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경계를, 모든 차이를 분별하고 그에 따라 걸맞게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경계의 분별은 결코 관념적인 문제만이 아니며 실천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안일한 경계 허물기보다 집요한 경계의 분별이야말로 혁신적이기 때문이다.
  경계 허물기가 경계의 분별에 기반하고 있을 때에만 그것은 긍정적 행위이다.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경계의 또 다른 고착화에만 일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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