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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 이 글은 지금은 폐간된 교보문고 인터넷 웹진 <PENCIL> 2001년 4월에 수록된 글입니다.

  서평: 서양근대철학회 엮음, 『서양근대철학』(창작과비평사, 2001)
  서평 제목: 우리 눈으로 본 최초의 서양 근대 철학사

  철학사는 ‘문제 창조’의 역사이자 사상의 ‘역사’이다. 철학에서 철학사가 필요한 것은 선대인으로부터 오늘날 유용한 사유 도구를 차용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우리에게 역사가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서양 최초의 철학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썼다고 하지만, 본디 철학 그 자체가 일종의 철학사적 작업을 내포한다. 이전 시대의 문제에 대한 검토와 비판은 오늘날의 사유 행위를 더 강력한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양 철학사를 본다면, 그것은 바로 서양 철학사가 유용한 도구함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서양 근대 철학을 한눈으로 보기에 적합한 철학사 책은 거의 없었다(고중세나 현대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아쉬운 대로 렘프레히트가 쓴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의 근대편을 참고하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번역판 철학사 책은 최근의 새로운 관심과 연구 성과를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철학사 책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서양근대철학회에서 엮고 쓴 『서양근대철학』(창작과비평사, 2001)은 한글로 씌어진 최초의 서양 근대 철학사이다. 우선 외형만 놓고 보더라도 집필자만 무려 25명이나 되는, 남한의 근대철학 연구자의 역량이 총 집결된 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구성과 내용에 있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근대의 성격을 주로 그 형성과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서술하고 있다. 르네상스, 종교개혁, 시민사회의 성립, 과학혁명으로 나아가는 초기 근대에 관한 70여 쪽에 걸친 서술은 이 책의 바탕이 된다. 사유가 맨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이상, 사람이 딛고 살아가는 정치, 경제, 기술적 토대는 사유의 발생에 있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 경제, 종교, 기술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일체의 권위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민적 개인의 형성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서술은, 우리 나름의 독자적인 문제의식과 사유가 어떻게 해야 창출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본격적인 근대 철학의 전개 과정은 제2부에서 제4부에 걸쳐 서술되고 있다. 제2부는 데카르트, 말브랑슈,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 ‘대륙 합리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제3부는 홉스, 로크, 버클리, 흄 등 ‘영국 경험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제4부는 ‘비판과 종합’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철학자들, 즉 파스칼, 루소, 리드, 멘 드 비랑, 칸트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본론의 서술을 놓고 볼 때 이 책의 장점은 통속적이고 도식적인 근대 철학 이해를 벗어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 있다. 사실 그동안의 근대 철학사 서술은 헤겔주의 및 헤겔의 영향 아래 있던 유물변증법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그리하여 데카르트와 흄으로 대표되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전통이 칸트에서 종합되고, 나아가 칸트가 극복되면서 헤겔, 마르크스로 이어졌다는 것이 근대 철학사 서술의 골격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편협한 목적론적 서술은 근대 철학을 빨리 훑고 지나가야 할 그 무엇으로 여기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
  반면 이 책의 서술은 근대의 모든 철학자를 망라하지는 못하더라도 중요한 철학자들을 고르게 다루고 있다. 이제야 국내에도 각 철학자의 전공자들이 고루 갖춰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사유의 훈련 도구가 되는 철학사에서는 시각이 대단히 중요한데, 그동안의 시각은 대단히 편협된 것이었다.
  몇 가지 물음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칸트는 근대 철학의 완성자인가? 다시 말해 칸트는 스피노자를, 그리고 흄을 극복했는가? 칸트는 스피노자의 문제의식, 흄의 문제의식을 알고 있었는가? 칸트가 이들을 극복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칸트만 읽으면 되고 이들은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는가?
  적어도 근대 철학사를 읽는 이상, 우리는 각 철학자에게서 이미 극복된 문제를 확인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중요한 여전히 현재적인 문제를 보면서 함께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4부의 구성은 칸트로 마감되기는 하지만, 가령 멘 드 비랑처럼 ‘정신’의 연구에 골몰했으며 나중에 베르그송 등 현대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철학자까지도 언급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사유의 편협함, 사유의 전제들을 비판하고 극복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 나아가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프랑스), 흄(영국), 칸트(독일)를 각 시기의 대표자로 놓고, 각 언어의 한계에 갇힌 채, 변증법적 시각에서 철학사를 보아왔던 관행은 빨리 극복되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이 책에서 시도되고 있는 서술이다.
  사유의 비교는 언어의 비교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다른 언어로 사유한 철학자를 바라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독일에서 이해되는 데카르트와 프랑스에서 이해되는 데카르트, 영국에서 이해되는 흄과 프랑스에서 이해되는 흄, 프랑스에서 이해되는 비랑과 독일에서 이해되는 비랑 등 이런 것들을 알면서 배우는 것이 한국에서 서양 근대 철학에 접근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맥락에서 아쉬운 것은, 이 책이 영어 중심주의에서 탈피해 언어 표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려 노력하기는 했지만, 그래서 가령 데카르트를 ‘데까르뜨’로, 마키아벨리를 ‘마끼아벨리’로 표기하는 등 원어 발음에 충실하려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만, 데모크리토스를 ‘데모크리투스’라고 영어식 그대로 쓴다든지, ‘자연 탐구(natural history)’(historia는 그리스어로 ‘탐구’라는 의미이다)를 관습대로 ‘자연사’라고 한다든지, 케플러의 책 제목을 영어로 표기한다든지 하는 자잘한 착오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너무 사소해서 별것 아니라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옥의 티를 지적하는 것은 책이 더 완전해지라는 바람이지 다른 흑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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