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seoul.co.kr/news/news_view.php?id=842752425§ion=CULTURE&page=2한국판 소칼 어페어’ 김동수씨 이메일 인터뷰
‘한국판 소칼 어페어?’
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와 함께 카를 마르크스는 사라졌다. 그런데 아직 그의 부활을 꿈꾸는 이가 있다. 지난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펴낸 소장학자 이진경(연구공간 수유+너머)이 대표적인 예다. 서문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죽지 않는 사람’임을 믿는다.”고 해, 책을 쓴 이유가 마르크스의 부활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해 포스트모던 사상가 들뢰즈의 시선을 빌려 마르크스의 대표작 ‘자본론(Das Kapital)’을 재해석했다. 이에 대해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진경식 재해석을 탄핵하는 주장이 나왔다.‘자본의 두 얼굴’(한얼미디어 펴냄)을 낸 재야학자 김동수다.
‘우파 중에 국부론 제대로 읽은 사람 없고, 좌파 중 자본론 제대로 읽은 사람 없다.’는 게 김동수의 문제 의식이다. 그래서 자본론 원전을 집어들고 직접 대차대조표를 작성한 작업이 바로 ‘자본의 두 얼굴’이다. 이 때문에 인용문이 줄잇는 600쪽짜리의 버거운 책이 됐지만 이 작업을 통해 이진경식 재해석이 마르크스를 되살리기는커녕 외려 ‘두 번 죽이는 일’이라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한 철 지난 유행가처럼 되어 버린 지금, 그래서 스스로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김동수와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지식 독점자인 양 행동하는 지식인”
이렇게 많은 분량으로, 정면돌파하듯 반박하는 이유는.
-마르크스 왜곡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많다가 90년대 초반 이후 감쪽같이 사라진 이론적 논쟁을 다시 촉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또 지식인이라는 현학적인 사람들이 지식의 독점자인 것처럼 행동하는데 이것은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진경식 재해석의 맹점은 뭔가.
-재해석하면서 고전파와 헤겔을 비난하는데 문제는 그가 고전파와 헤겔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때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왜곡되어 있다. 진보진영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킬 정도다.
이런 주장에 뉴라이트니 하는 움직임은 ‘구좌파’라고 비판하는데.
-‘뉴’,‘네오’,‘포스트’ 등의 수식으로 장식된 이론은 대개 수식을 제외하면 별 내용이 없다. 좌파에 대한 비판은, 어쨌든 사회주의는 망했다는 것인데 이는 논리와는 별개다. 망했으니까 나쁘다면 모든 역사는 나쁜 것의 역사다. 구좌파라는 비판에는 관심 없다. 개인적으로 소련이나 북한에 대해 호의적이지도 않다. 그건 좌파가 아니어도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지금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예전부터 마르크스는 잘 읽히지 않았다. 어렵다, 혹은 방대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저임금 강요와 대량해고, 자본가에게는 제한책임을 묻고 노동자에게는 무한책임을 지우는 주식회사제도의 골간은 바뀌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굳이 ‘새로운’이란 수식어를 달지 않아도 마르크스는 여전히 현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 이론은 여전히 유효
그렇다면 마르크스를 되살리자는 뜻인가, 아니면 비판할 점은 있지만 이진경식 재해석은 안 된다는 말인가.
-이 책의 주제를 벗어나는 질문이다. 그래도 답하자면 일단 혁명이나 변혁의 꿈은 유효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장기적 전망만큼 현실적 대응도 중요하다. 사실 ‘혁명’은 레토릭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진보운동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살펴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민주노총이나 민노당의 주장은 지지자들을 한숨짓게 만든다. 진보진영이 어떤 대안이나 이론이 없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만드는 일에 나서야 한다.
사회주의권 붕괴 뒤 포스트모던이 유행인데 어떻게 보나.
-항상 문제의식은 이론이 아닌 실천에 있어야 한다.‘포스트’ 이론의 문제의식은 좀 심하게 말하자면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무엇을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라고 본다. 이럴 때는 개인적 반항이 저항으로 미화된다.‘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연대’라는 코뮤니즘은 멋있기는 하지만 아나키즘 이상의 의미는 없다. 물론 역사·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폭로는 희망이라는 싹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맹아는 어디까지나 맹아일 뿐이다.
●문제의식은 이론아닌 실천에 있어
그런 주장은 96∼97년의 ‘소칼 어페어’와 비슷한데 그 사건을 어떻게 보나.
-참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소칼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프랑스 형이상학과 같은 유의 서술이 사회적으로는 수구의 기반을 다져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결론난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통쾌하게 생각하고 소칼과 같은 입장이다.
소칼의 경우 또 다른 상업주의라는 비판도 받았는데 같은 비판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나.
-그렇게 보는 걸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런데 이런 책이 얼마나 팔리겠나.
마지막으로 ‘자본의 두 얼굴’이라는 제목에 대해 설명해 달라.
-자본론은 노동자의 중요한 무기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런데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는 재벌 남자 주인공이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 꼽을 정도로 호사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지적 과시, 지식 장사용으로 탁월하다. 그러나 그건 자본론의 박제에 불과하다. 자본론이 이용되는 두 방식을 지적하고자 그런 제목을 정했다.
●소칼 어페어(Sokal Affair)란?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던 사건. 미국 물리학자 앨런 소칼이 96년 최첨단 물리학 이론이 해방이론으로 쓰일 수 있다는 논문을 학술지 ‘소셜 텍스트(Social Text)’에 발표한 뒤 사실 그 논문은 짜깁기 엉터리였다고 고백했다. 포스트모던 이론이 얼마나 겉멋에만 찌들어 있는지 폭로하기 위한 도발이었다. 소칼은 이어 장 보드리야르, 자크 라캉, 줄리앙 크리스테바 등 쟁쟁한 포스트모던 계열 학자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최신 물리학 개념을 아무렇게나 가져다 쓰고 있다는 내용의 ‘지적 사기’를 출간, 유럽 지성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기사일자 : 2005년 01월 27일
‘한국판 소칼 어페어?’
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와 함께 카를 마르크스는 사라졌다. 그런데 아직 그의 부활을 꿈꾸는 이가 있다. 지난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펴낸 소장학자 이진경(연구공간 수유+너머)이 대표적인 예다. 서문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죽지 않는 사람’임을 믿는다.”고 해, 책을 쓴 이유가 마르크스의 부활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해 포스트모던 사상가 들뢰즈의 시선을 빌려 마르크스의 대표작 ‘자본론(Das Kapital)’을 재해석했다. 이에 대해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진경식 재해석을 탄핵하는 주장이 나왔다.‘자본의 두 얼굴’(한얼미디어 펴냄)을 낸 재야학자 김동수다.
‘우파 중에 국부론 제대로 읽은 사람 없고, 좌파 중 자본론 제대로 읽은 사람 없다.’는 게 김동수의 문제 의식이다. 그래서 자본론 원전을 집어들고 직접 대차대조표를 작성한 작업이 바로 ‘자본의 두 얼굴’이다. 이 때문에 인용문이 줄잇는 600쪽짜리의 버거운 책이 됐지만 이 작업을 통해 이진경식 재해석이 마르크스를 되살리기는커녕 외려 ‘두 번 죽이는 일’이라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한 철 지난 유행가처럼 되어 버린 지금, 그래서 스스로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김동수와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지식 독점자인 양 행동하는 지식인”
이렇게 많은 분량으로, 정면돌파하듯 반박하는 이유는.
-마르크스 왜곡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많다가 90년대 초반 이후 감쪽같이 사라진 이론적 논쟁을 다시 촉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또 지식인이라는 현학적인 사람들이 지식의 독점자인 것처럼 행동하는데 이것은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진경식 재해석의 맹점은 뭔가.
-재해석하면서 고전파와 헤겔을 비난하는데 문제는 그가 고전파와 헤겔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때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왜곡되어 있다. 진보진영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킬 정도다.
이런 주장에 뉴라이트니 하는 움직임은 ‘구좌파’라고 비판하는데.
-‘뉴’,‘네오’,‘포스트’ 등의 수식으로 장식된 이론은 대개 수식을 제외하면 별 내용이 없다. 좌파에 대한 비판은, 어쨌든 사회주의는 망했다는 것인데 이는 논리와는 별개다. 망했으니까 나쁘다면 모든 역사는 나쁜 것의 역사다. 구좌파라는 비판에는 관심 없다. 개인적으로 소련이나 북한에 대해 호의적이지도 않다. 그건 좌파가 아니어도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지금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예전부터 마르크스는 잘 읽히지 않았다. 어렵다, 혹은 방대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저임금 강요와 대량해고, 자본가에게는 제한책임을 묻고 노동자에게는 무한책임을 지우는 주식회사제도의 골간은 바뀌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굳이 ‘새로운’이란 수식어를 달지 않아도 마르크스는 여전히 현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 이론은 여전히 유효
그렇다면 마르크스를 되살리자는 뜻인가, 아니면 비판할 점은 있지만 이진경식 재해석은 안 된다는 말인가.
-이 책의 주제를 벗어나는 질문이다. 그래도 답하자면 일단 혁명이나 변혁의 꿈은 유효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장기적 전망만큼 현실적 대응도 중요하다. 사실 ‘혁명’은 레토릭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진보운동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살펴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민주노총이나 민노당의 주장은 지지자들을 한숨짓게 만든다. 진보진영이 어떤 대안이나 이론이 없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만드는 일에 나서야 한다.
사회주의권 붕괴 뒤 포스트모던이 유행인데 어떻게 보나.
-항상 문제의식은 이론이 아닌 실천에 있어야 한다.‘포스트’ 이론의 문제의식은 좀 심하게 말하자면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무엇을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라고 본다. 이럴 때는 개인적 반항이 저항으로 미화된다.‘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연대’라는 코뮤니즘은 멋있기는 하지만 아나키즘 이상의 의미는 없다. 물론 역사·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폭로는 희망이라는 싹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맹아는 어디까지나 맹아일 뿐이다.
●문제의식은 이론아닌 실천에 있어
그런 주장은 96∼97년의 ‘소칼 어페어’와 비슷한데 그 사건을 어떻게 보나.
-참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소칼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프랑스 형이상학과 같은 유의 서술이 사회적으로는 수구의 기반을 다져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결론난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통쾌하게 생각하고 소칼과 같은 입장이다.
소칼의 경우 또 다른 상업주의라는 비판도 받았는데 같은 비판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나.
-그렇게 보는 걸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런데 이런 책이 얼마나 팔리겠나.
마지막으로 ‘자본의 두 얼굴’이라는 제목에 대해 설명해 달라.
-자본론은 노동자의 중요한 무기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런데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는 재벌 남자 주인공이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 꼽을 정도로 호사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지적 과시, 지식 장사용으로 탁월하다. 그러나 그건 자본론의 박제에 불과하다. 자본론이 이용되는 두 방식을 지적하고자 그런 제목을 정했다.
●소칼 어페어(Sokal Affair)란?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던 사건. 미국 물리학자 앨런 소칼이 96년 최첨단 물리학 이론이 해방이론으로 쓰일 수 있다는 논문을 학술지 ‘소셜 텍스트(Social Text)’에 발표한 뒤 사실 그 논문은 짜깁기 엉터리였다고 고백했다. 포스트모던 이론이 얼마나 겉멋에만 찌들어 있는지 폭로하기 위한 도발이었다. 소칼은 이어 장 보드리야르, 자크 라캉, 줄리앙 크리스테바 등 쟁쟁한 포스트모던 계열 학자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최신 물리학 개념을 아무렇게나 가져다 쓰고 있다는 내용의 ‘지적 사기’를 출간, 유럽 지성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기사일자 : 2005년 01월 27일
댓글 9
-
들른 이
2005.01.28 22:27
어떤 맥락에서 이 글을 퍼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철학전공자이고 평소 자본론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던 김재인씨가 이진경씨의 자본론 해석 비판까지 퍼온 것은 이진경씨에 대한 '원한'[니체적 의미에서의]처럼 보이는군요. 안타깝습니다. 김재인씨는 김재인씨의 길을 가는 것이 멋집니다. -
들른 이2
2005.01.29 22:44
윗분 말씀에 동감하고요, 이 기사에서 명시적으로는 아니지만 들뢰즈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선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군요. 기형적인 이론수입때문에 '포스트'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상가들이 뭉뚱그려지는 국내의 현실에서 들뢰즈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명하실수 있으실는지 궁금하네요. -
김재인
2005.01.31 19:36
님들 말씀의 취지는 알겠습니다만 윗분은 들뢰즈와 마르크스의 관계 및 니체적 의미의 '공격성'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것 같고요, 아랫분의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제가 썼던 글이 게시판 어딘가에 있으니 참고해보세요('소칼'이나 '포스트'로 검색하시면 되겠죠). -
깨비
2005.01.31 23:40
들른 이/ 김재인 씨가 퍼 올린 글의 내용이 어떤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은가요? 내용을 슬쩍 비켜 대뜸 '원한'을 들먹이는 님의 의도가 참 더럽다고 생각됩니다. '네 전공이 아니니 조용히 하지'라고 이죽거리고 있는데, 전혀 모르고 있겠지만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의 내용 대부분이 맑스에 관한 것입니다. 부제가 '자본주의와 분열증'이구요. 이미 번역한 '천 개의 고원'의 부제는 '자본주의와 분열증2'입니다. 김재인 씨가 맑스를 잘 모를 리가 없지요. 님은 님의 길을 가세요. -
들른 이
2005.02.01 04:19
김재인씨/ 저도 물론 들뢰즈와 맑스의 관계는 알고 있습니다만, 님께서 퍼오신 글에서 김동수씨는 들뢰즈식 맑스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김재인씨의 펌글을 읽는 저로서는, 글을 퍼온 의도가 대체 김동수씨의 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이 글이 이진경씨에 대한 비판이라서인지 구분이 안가더군요. 전자의 의도라면 무언가 김재인씨의 비판 코멘트가 달려있을 텐데, 그러한 것이 하나도 없기에 후자의 의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진경씨에 대한 비판은 문학동네에서 수행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저 역시 김재인씨가 번역한 '천개의 고원'을 읽은 사람이며, 김재인씨의 문학동네 글에 공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펌글을 보면 씁쓸합니다.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이 글을 비롯한 홈페이지의 몇몇 글들은 이진경씨에 대한 집착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니체적 의미의 '공격성'이 정말로 주유소습격사건식의 '이진경 한놈만 패' 인지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조형하고 형성하며 치유하고 또한 망각할 수 있는 힘을 넘치게 지녀서 자신의 적까지도 오랫동안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도덕의 계보'에 나오는 표현이죠]자세를 김재인씨에게 더 기대합니다. -
들른 이
2005.02.01 04:45
깨비씨/ 님께는 죄송스럽게도 '안티오이디푸스'는 영역판으로, '천개의 고원'은 김재인씨 번역판으로 이미 읽었습니다. 들뢰즈와 맑스의 관계 역시 충분히 잘 알고 있구요. 문제는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김재인씨가 퍼올린 글의 내용이 어떤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가 입니다. 이 글은 이진경 비판이지만, 동시에 들뢰즈비판이기도 합니다. 김재인씨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진경씨와 자신을 함께 겨누고 있는 글을 공격을 위해 퍼온 겁니다. 그리고 김재인씨가 철학전공자이고 자본론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말에 대해 오해가 생긴 것 같은데, 저는 김재인씨께서 맑스에 대해 무지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아닙니다. 제 의도는 이 글의 김동수씨의 작업이나 '자본'의 작업은 맑스의 작업이 위치하고 있는 다양한 영역중에서 '정치경제학'적인 영역의 것인데, 맑스에 대한 김재인씨의 관심과 접근목적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읽지 못한 김재인씨의 글이나 작업물중에 맑스의 정치경제학적 작업에 대한 연구나 언급이 있다면 이것은 제 오해이겠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여태까지 본 김재인씨의 글에서 실천학으로서의 맑스의 '의미'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어있어도, '자본'에 나타난 맑스의 정치경제학적 작업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김재인씨가 평소 들뢰즈 연구와 함께 맑스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셨던 분이라면, 이런 오해(?)는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제가 보기에 이 글은 '이진경 공격'을 위한 것일 뿐이며, 그것이 안타깝다는 겁니다. 저는 김재인씨를 무작정 까대려고 하는 게 아니며, 들뢰즈를 공부하는 데 김재인씨의 작업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만 재능있는 한 학자가, 정작 힘쏟아야 할 곳이 아닌 다른 곳[이진경씨]에 힘을 소모하는 것처럼 보여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전하려던 것입니다. 끝으로 처음에 달았던 제 짧은 답글이 깨비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죽거린다'거나 '더러운' 것으로 느껴졌다면 김재인씨께 사과드리겠습니다. 올해도 김재인씨의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기원하겠습니다. -
깨비
2005.02.01 12:12
기자가 '이렇게 많은 분량으로, 정면돌파하듯 반박하는 이유' 대해 묻자 김동수 씨는 '마르크스 왜곡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많다가 90년대 초반 이후 감쪽같이 사라진 이론적 논쟁을 다시 촉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김재인 씨는 이진경 씨에게 전에 집요하게 말을 걸었다가 심하게 모욕만 당한(서프라이즈 지승호/이진경 인터뷰) 전력이 있습니다. 김재인 씨가 제기한 문제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논쟁하려 들지 않으면서 뒤에서 남을 욕하는 이진경의 학자답지 않은 나쁜 태도가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김동수 씨의 문제제기는 고작 자신의 영향력을 방어하기 위해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이진경을 비롯한 한국의 나태한 학자 일군에게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미 '천 개의 고원' 번역과 문학동네에 발표된 글을 통해 들뢰즈의 여러 중요한 개념에 대한 해석에서 이진경과 김재인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김동수 씨는 이진경을 통한 들뢰즈에 주로 말을 걸고 있구요. -
들른이멋져
2005.04.15 00:45
조선일보가 노무현 깎아내리기 위해 권영길에 대한 호평을 싣는 것과 비슷하다, 뭐 그런 거죠. 김동수의 이진경 비판은 김재인에 대한 비판, 들뢰즈, 네그리 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똥과 된장 못가리는 펌, 이런 느낌이 들 수도 있죠, 공격적으로 말해서 말입니다. 이진경은,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서는 들뢰즈를 잘 이해하고 있고, 들뢰즈주의자 중에서는 마르크스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일 수는 있지만, 문제는 마르크스도 들뢰즈도 제멋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거겠죠. 뭐 창조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내거는 꼬뮌주의 얘기만 보아도 얼마나 한심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만 (네그리의 자율, 다중 이런 것도 별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들뢰즈는 라깡과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나쁘게 말하면, 스피노자 개념의 심각한 오용을 통해 라깡(프로이트)과 마르크스의 진정한 만남의 자리를 의식적으로 피해갔고, 더 나쁘게 말하면 그의 철학은 거대한 소망사고(wishful thinking)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욕망을 생산적으로 보고싶어, 대중을 자율적으로 보고 싶어, 혼자 하는 뻘짓을 창조적인 거라고 믿고 싶어......." 등등등. 욕망이 정말로 생산인가, 대중/다중이 정말로 자율적인가, 혼자하는 뻘짓이 진정한 창조인가, 뭐 그런 것에 대한 자기 비판과 엄밀함이 별로 없어요. 니체가 "literacy"의 힘을 과신한 것처럼 (그는 실제 사회에 대한 놀랄만한 무지와 문헌학에 대한 박식함 사이에서 혼란에 빠져 자위를 하고 있었던 거죠. 책의 세계에서 살았던, 불쌍한 한 지식인.) 말입니다. 들뢰즈에 대한 이런 비판이 좀 지나치다면, 들뢰즈주의자들에게로 화살을 돌리기로 하지요. 부르디외는 "사회학자들이 실제로 읽는 책에 대한 사회학적 조사가 있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는데, 위에서 여러 객들이 "추정"하는 것이 실제로 검증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김재인씨가 헤겔과 마르크스를 "제대로" 공부했을까요? 마지막으로, 소칼 어페어 부분에서는 웃음이 나게 되지요. 소칼은 들뢰즈도 까대지 않았던가요? 소칼이 보기엔 베르그송부터 큰 문제가 있을텐데요. 소칼 어페어에 대해 공감하는 비판자가 이진경 욕하는 걸 들으며 마음이 편해진다면, 김재인씨는 정말로 앞뒤 못가리는 바보? 그런 거에요? 왜 그런 유치한 수준에서 자꾸 머무르세요? 김재인씨가 어릴 때는 성실하고 똑똑한 편이었다고 기억하는데 말이죠. 들뢰즈 철학이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철학이라서 그런 건가요? 그래서 이진경씨나 김재인씨나 치기어린 유치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요? 늘 성과를 보여주기보다는 의도를 떠벌이는 데서 머무르는? "욕망이 결핍? 결핍은 시러시러, 생산이 더 좋아, 이제부터 생산이라고 할래. 앙앙." 김재인씨는 세상을 좀 더 넓게 봤으면 좋겠어요. 김재인이냐 이진경이냐, 이런 질문은 들뢰즈 시장에서나 통하는 선택지죠. 누군가 보기엔 둘 다 별 차이가 없거든요. 그들이 보면 이런 종류의 펌글을 얼마나 비웃겠어요. 안 그래요? -
김재인
2005.04.18 00:45
소칼에 대해서는 충분히 의견을 밝힌 바 있고요(홈피 어딘가에 있으니 검색해보시길), 김동수 vs. 이진경 논쟁은 흥미가 있어 소개한 겁니다. 똥과 된장을 못 가린다는 비아냥도 있는데, 뭐 어쩔 수 없이 듣게 마련인 비판인 것 같습니다. 충분한 해명의 시간이 없으니 말이지요. 언제는 충분한 해명이란 것이 있었겠나 싶기도 하고요. 연인의 사랑싸움이나 부부싸움마저도 충분한 해명의 시간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