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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예술과 문화 글 읽기의 중요성 (최시한)

철학자 2009.05.10 15:46 조회 수 : 10571

◆ 글 읽기의 중요성

최시한

우리는 읽으면서 산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읽는다. 하늘을 바라보며 날씨의 변화를 읽는가 하면 길에서 교통 신호를 읽기도 한다. 글 읽는 일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읽기’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글 읽기는 세상 형편이나 날씨를 읽는 것과 차이가 있다. 글이라는 대상은 그 성질과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글은 그냥 세상 형편이나 날씨 같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 ‘관해’ 필자가 알아내고 생각한 바를 문자로 적어놓은 것이다.

말을 문자로 적어놓은 글(글말)에는 필자가 세상을‘읽어서 ’얻은 결과와 함께 그것을 얻고 전달하는 태도와 과정이 아울러 담기게 되고, 그것을 읽는 동안 독자는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게 된다. 필자의 세상 만물 읽기를 엿보면서 그 방법을 배워 익히는 동시에, 필자가 읽어낸 지식과 지혜를 나누어 갖는 것이다.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과 그로써 얻어낸 지식, 이 두 가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터이다. 공부는 물론이고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본이 되는 그것을, 우리는 글 읽기를 통해 쌓고 기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중요한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글을 별로 읽지 않을 뿐더러 읽어도 억지로, 건성으로 읽는다. 그 구실이야 어떻든, 즐기지 않다 보니 할 줄 모르게 되고 잘 읽을 줄 모르니까 아예 읽는 걸 두려워하게 되어, 책이 아니라 텔레비전에 눈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다. 읽어야 알고 알아야 읽는다. 그런데 읽는 힘과 밑천이 적으므로 글이 조금만 길어도 앞에서 읽은 것을 잊어버리는가 하면, 공부를 해도 이해를 하는 게 아니라 외운다. 필자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맛,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궁리하는 재미는 알지 못한 채 그저 외우려고만 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 것은 활용하기 어렵다. 아무리 외우고 기억해봐야 근본 원리와 체계의 이해 없이 마구 쓸어담은 정보는 한낱 잡동사니에 가깝다. 무엇을 잔뜩 알고 있어보았자,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데 적절히 활용할 줄 모르면 별로 소용이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간에 글 읽는 힘(독해력)의 수준이 생각하는 힘의 수준이요 문화의 수준이라고 할 때, 우리의 이러한‘읽기로부터의 도피 현상’혹은‘읽는 힘의 결핍 상태’는 참으로 걱정스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은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며 성장해 가는 존재이다. 또한 앞사람이 남긴 글을 뒷사람이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 무엇을 써서 보탬으로써 진보를 거듭해왔다. 그런데 읽을 줄 모르는데 무엇을 이해하고 쓰겠으며, 입력(入力)된 게 빈약한 터에 무엇이 출력(出力)될 것인가? 책 속에 길이 있고 스승이 있다지만, 걷는 법을 모르니 어떻게 그 길에서 삶의 뜻을 찾고 질을 높여갈 수 있겠는가? 한 편의 글, 한 권의 책이 개인의 인생은 물로 인류의 역사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 읽기의 단계와 연습

읽기 중심으로만 말하면, 글 읽기의 첫 단계는 종이에 적힌 문자를 올바로 소리내고 해당 사물과 관련짓는 ‘문자 읽기’이다. 소리 읽기라고도 할 수 있는 그 과정은 낱말이나 쉬운 문장을 읽어내는 수준의 읽기로, 말하자면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 단계이다.

문자 읽기 단계를 거치면 글 전체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뜻읽기’, 곧 독해(讀解) 또는 이해의 단계로 접어든다. 그런데 그것은 문자 읽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정신 활동, 곧 느끼고 생각하고 비판하고 상상하는 여러 활동을 요구하며, 그래서 많은 연습이 필요해진다.

어떤 글이든 그 속뜻을 읽고, 나아가 자기 나름대로 소화할 수 있으려면, 그 방면에 대한 관심과 경험,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지식은 시행 착오를 거듭하는 글 읽기 연습과정에서 축적되는 것이다. 아울러 관심과 경험 역시 그러는 과정에서 깊어지고 세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읽기에 관한 한 한국 사회는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예로부터 독서가 곧 공부요, 공부는 바로 교육적인 훈련이게 마련인데도 이런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곤 한다 - 많이 읽다 보면 저절로 잘 읽게 마련이지, 무슨 연습이나 훈련 따위가 필요하냐?

하지만 많이 읽는 게 다름 아닌 연습의 일종이요, 읽는 행동 자체가 곧 값진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읽는 동안 어떤 생각을 하거나 수정하며, 무엇을 판단하고 깨닫는다. 그게 곧 연습이고 실천의 시작이다.

물론 연습이 전부는 아니고, 믿을 만한 연습 방법이 뚜렷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억지 공부를 하다가 공부의 진짜 재미를 잃는 수가 있듯이 지나치게 연습을 중요시하다 보면 정작 글 읽기의 즐거움은 놓쳐버릴 수가 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읽는 연습을 해왔으며, 연습을 할수록 더욱더 잘 읽는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글이 서술되어 있는 것을 올바르고 깊이 있게 읽는(‘있는 것 읽기’)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추리 ․ 상상하면서 읽고’, 자기의 체험과 지식을 동원하여 ‘비판적으로 읽기’도 하며, 나아가 필자와 창조적인 대화까지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체계를 잡아 과학적으로 연습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오해가 있을 수 있다. 글이나 글 읽기에 관한 지식, 말하자면 설명에는 어떤 종류가 있으며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이라는 식의 지식을 많이 알면 글을 잘 읽을 수 있으리라는 오해이다. 물론 그런 지식이야 많을수록 좋겠지만 지식이 곧 능력(힘)은 아니다. 농구에 관해 많이 안다고 해서 농구를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농구를 잘 하려면 농구에 관한 지식을 담은 책을 읽는 것도 좋겠지만 우선 잘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가며 실제로 많이 해보아야 한다.

초급 국어, 중급 국어, 고급 국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상하게도 영어는 초급, 중급, 고급을 따지면서 국어는 그러지 않는다. 같은 언어이므로 부려 쓰는 능력에 급수를 매긴다면 마땅히 국어에서도 엄밀하게 수준을 나누고 그에 알맞은 훈련을 해야 될 텐데 말이다. 글 읽는 힘, 곧 독해력이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정작 깊이‘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은 외국어가 아니라 국어이고, 국어를 못하면서 외국어를 잘할 수는 없는 법인데, 거꾸로 외국어 시간에나 그 말이 애용되고 있다.

이렇게 글 읽는 힘을 아예 중요한 능력으로 치지도 않고, 그것을 고급 수준으로 길러야 한다는 생각조차 품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문자맹(文字盲)은 면해도 뜻 읽기 문맹, 즉 문의맹(文意盲)은 면하기 어렵다. 읽어봐야 그 뜻을 잘 모르는 문의맹도 문맹은 문맹이다. 문맹은 문화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깊고 정확한 사고력과 풍부한 감정을 지닌 교양인이 결코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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