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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철학과 철학사 철학강의 3. 실천으로서의 방법

김재인 2002.07.01 06:01 조회 수 : 3466 추천:55

  3. 실천으로서의 방법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더 어려운 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바로잡는 일이다. 선입견이나 오해는 두 가지 의미에서 위험하다. 우선 그것이 진실에 접근하는 길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더 중요하게는, 자신을 진실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정체를 간파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많은 철학자들은 진실을 추구했지만, 진실을 가로막는 오류와 그것의 원인을 폭로하는 데에도 못지않은 시간을 할애했다. 오류의 가장 큰 원인인 선입견과 오해를 바로잡는 일은 진실에 접근하는 첩경이었을 뿐 아니라 그 일 자체가 이미 진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철학사를 통해 우리는 진실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진실의 일부를 이루는 많은 사례를 볼 수 있다.
  가령 베이컨(Francis Bacon)은 ꡔ새로운 논리ꡕ(Nuvum Organum)에서 우선 ‘우상’을 지적하고 공격했다. 우상은 진상이 아니라 허상[헬라스어로 idola는 ‘그림자’를 뜻한다]이기 때문에, 또한 진상을 가리며 진상을 참칭하기 때문에 나쁘다. 따라서 진실을 알기 전에 진실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네 가지 우상(곧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을 먼저 지적하고 그 힘을 저지하려는 실천이 필요했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도 ꡔ제1철학에 대한 성찰ꡕ(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약칭 ꡔ성찰ꡕ)에서 자신이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과정을 통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여기서 중요했던 것 역시, 이 과정을 통해 마련된 토대(‘생각하는 나’)보다는 이전까지 무심코 받아들였던 믿음들에 대한 파괴 행위 그 자체였다.
  이처럼 철학에 있어 순서상 앞에 오는 것은 진실 자체의 설파도 아니고 진실의 발견도 아니며 오히려 오류와 그 원인을 밝히고 파괴하는 실천의 과정 자체이다. 이러한 실천을 일컬어 방법이라 한다. 가끔 보면 진실 또는 진리와 거기에 도달하는 실천으로서의 방법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양자의 관계를 목표와 수단으로 설정한 까닭이다. 어원을 놓고 볼 때 ‘방법’은 ‘길 다음에 오는 것’(method = meta[다음, after] + rhodos[길])을 뜻한다. 헌데 주의 깊게 생각해보면 길은 따라가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항상 ‘길트기’ 다음에 오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절대 불변의 진리와 같은 그 무엇이 있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이미 나 있는 길을 따라간다는 식의 비유는 적절치 않다. 반대로 진실은 개척의 산물이며 창조의 산물이라고 말해야 한다. 방법은 길트기로서의 실천이며 진실의 일부를 이룬다. 오류를 제거하는 실천이 첫 번째 실천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제 진실과 방법의 통상적인 관계는 뒤집힌다. 그러나 ‘무엇’이 없이 ‘어떻게’가 있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 당장 제기된다. 찾아야 할 그 무엇(‘진실’)도 없이 어떻게(‘방법’) 찾으란 말인가? 그러나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찾아야 할 그 무엇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찾으려 했던 그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찾은 그것이 찾으려 했던 그것과 같은 것인지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본래 모르기 때문에 찾으려 했던 것이므로). 남는 것은 오직 찾으려 했던 것을 찾았다는 확신뿐이다. 그렇다면 방법이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오랫동안 절대불변의 진리를 찾아 왔다. 바로 그것만 포기하면 된다. 이것이 곧바로 모든 지식과 언어의 상대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내용으로서의 진리를 포기하고 형식으로서의 진실을 찾으면 된다. 내가 여기서 내용과 형식의 대립을 말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용은 형식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표현에 대립되며, 형식 또한 내용이 아니라 질료에 대립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추후에 다루기로 하자. 아무튼 절대불변의 진리를 포기하고서도 우리는 진실을 찾는 방법에 대해, 진실을 보호하는 방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가령 지금 세상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를 찾으려 한다고 해보자. 어떻게 찾을까? 그것을 찾을 방법은 무엇인가? 헌데 방금 ‘찾는다’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그 말은 단순히 ‘발견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는 지금 어디엔가 있지만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기록은 늘 깨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여기서 ‘찾는다’는 것은 ‘만든다’나 ‘창조한다’는 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만드는 행위가 발견하는 행위 앞에 오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는 만들어 냄으로써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방법이 도달한 결론이다.
  방법은 이처럼 도구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우선 진리의 ‘발견’이라는 허구를 분쇄하는 일을 하며 이어 진실의 ‘창조’라는 실천을 행한다. 그래서 니체는 ‘망치로 철학하기’를 말했다. 망치란 부수는 도구이자 만드는 도구이다. 철학사를 통해 보자면 이 점은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élix Guattari)는 정확히 지적했다. “플라톤은 이데아들을 관조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지만, 그는 우선 이데아라는 개념을 창조해야만 했다.” 진실과 진리는 방법보다 먼저 있는 것이 아니며, 방법은 창조라는 실천보다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집을 오래 비워 두면 먼지가 쌓이고 때가 타고 집이 상한다. 모든 것을 갉아먹는 시간의 힘은 때로 우리를 무력하게 할 정도로 경악스럽다. 청소를 하고 잘 가꾸지 않으면 집은 그대로 허물어진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집, 그것은 무수히 반복되는 청소와 더불어서만 만들고 유지할 수 있다. 자연과학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닫힌 계 안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엔트로피[entropy는 헬라스어로 ‘쓰레기’라는 뜻]가 증가한다. 세상은 결코 정태적이지 않아서, 도무지 내버려두는 대로 가만히 있지 않고 흩어진다. 세상은 항상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어지럽고 무질서해지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것이 시간의 흐름이요, 자신의 모든 자식들을 잡아먹는 크로노스의 율법이다. 이 경우 집의 진실은 청소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원래부터 있는 아름다운 집이란 시간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베이컨과 데카르트에 관해서 초보적인 독자라면 램프레히트가 쓴 ꡔ서양철학사ꡕ(을유문화사, 1963)의 ‘근세철학’ 편과 서양근대철학회가 엮고 쓴 ꡔ서양근대철학ꡕ(창작과비평사, 2001)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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