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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한완상)


문제 의식은 사건과 문제의 뿌리를 볼 줄 아는 투시력이요, 사건과 현상의 전체 모습과 그 성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파악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근본적이고 총체적 사고를 약화시키거나 마비시키려는 여러 가지 메커니즘이 있다. 사사화(私事化), 순수화, 그리고 정보 흐름의 통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의 작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것의 속셈을 폭로시키려는 의식과 용기 또한 문제 의식이라 하겠다. 이러한 문제 의식은 부당한 양극화 상황에서는 항상 약자와 피해자의 편을 들게 된다.


 가. 문제 의식이란 무엇인가

문제 의식은 지식인을 지식인답게 해 주는 일종의 조감(鳥瞰) 의식이며 통찰력이다. 그러기에 문제 의식 없는 지식인은 전의를 상실한 군인과 같고, 선교열이 식어버린 선교사 같으며, 사업욕 없는 기업인과 같다. 한 시대와 상황에서 살면서 문제 의식 없이 살아가는 자칭 지식인이 있다면 그는 한낱 지식기사에 지나지 않고, 문제 의식 없이 학교에 다니는 젊은 지성이 있다면 그들은 한낱 직장예비군에 불과하다. 문제 의식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그는 한 시대와 한 상황에서 지식인다운 삶을 누릴 수 있고 뜻있는 민중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문제 의식이란 무엇이며, 그 특성은 어떠한 것인가 ?

문제 의식은 어떤 사건의 문제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요 의식이다. 현상의 문제성을 예리하게 파악하는 능력이다. 마치 문제가 없는 것처럼 꾸며져 있는 일상적 세계에서 여기저기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사건들의 문제점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문제 의식이다. 문제되어야 할 사건들이 문제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 사건들의 문제점을 들추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문제 의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 의식의 가장 중요한 성격을 관찰하게 괸다. 일상성의 세계 또는 상식의 세계는 대체로 “물론(勿論)의 세계”다. 어떤 질문을 던졌을 때 그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물론이지요”라고 대답하는 세계가 바로 물론의 세계다. “일부일처제가 옳습니까”라고 물을 때 “물론입지요”라고 대답한다든지 “주권재민의 사상이 옳은 사상입니까?”라고 물으면 “물론 그렇고 말고요”라고 대답할 때 일부일처제와 주권재민은 일상성의 구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일상성의 세계를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까닭에 그것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나 특별한 의심을 품지 않는다. 때때로 그 일상성의 세계는 신성시될 때도 있다. 마치 종교인이 절대자인 신을 의심하여 상대화시키는 것이 끔찍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지듯이 물론의 세계와 당연의 세계도 때때로 신비의 베일로 가리워져 있고, 그것 자체가 신성화되어 버린다. 그래서 감히 아무도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 묻고자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당연하지 않은 것, 이상한 것이 나타나면 대번에 잘못된 것이거나 범죄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그것을 약화시키거나 소외시키거나 제거하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일상성의 횡포다. 이러한 일상성의 세계는 한마디로 문제가 없는 세계다. 문제될 만한 것은 가리워져 있든지 아니면 그것이 드러나면 재깍 없어져 버린다. 그러니까 모두가 일상성에 대해 “지당합니다.”라든지 “물론입죠”하고 합창한다. 여기에서 현상과 사건의 문제성을 꿰뚫어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체로 물론의 세계는 지배 세력이 즐겨하는 세계요, 지배 세력이 직접 간접으로 뒷받침해 주는 세계다. 하기야 그것은 현재의 지배 집단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역사를 거쳐 전통 속으로 침전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 속에서 영글게 된 일상성의 세계는 그때 그때의 집권세력의 이해 관계에 따라 이렇게 혹은 저렇게 윤색되어진다. 지배 세력은 항상 물론의 세계의 물론성을 그리고 당연의 세계의 당연성을 존중하고 크게 부각시킨다. 때로는 그 물론성과 당연성을 신비한 것으로 추켜 오려서 감히 아무도 그것을 회의하거나 부정하거나 그것에 도전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 물론의 세계를 안정된 것으로 튼튼히 구축해 놓고 나서 그 속에 그들이 안주한다. 지배세력은 이렇게 일상성의 세계를 주름잡는다. 그들은 곧 일상성의 세계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지배세력이 득세하기 전부터 존재해 왔던 일상성의 세계를 그들이 지배집단으로 등장하면서부터 일정한 방향으로 얼마쯤 고쳐 나간다. 그들의 기득권을 보수(保守)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그것을 얼마쯤 손질하여 고친다. 고친 후에 그 세계를 방패삼아 그들의 특권을 계속 누리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일상성의 세계는 그들을 보호해 주는 요새가 된다.

이렇게 볼 때 문제 의식은 곧 일상성의 세계를 곧 일상성의 세계를 꿰뚫어 보는 의식이다. 문제가 없는 것으로 모두 알고 있는 그 세계의 껍질을 벗기고 그 속에 잠겨 있는 문제성의 정체와 그 실상을 밝혀보려는 호기심과 그것을 밝히는 의식이다. 모두가 “물론입죠”하고 응답할 때 “글쎄요”라고 회의하면서 현상의 표피를 뚫고 그 내용을 살펴보려는 의식이다. 특히 지배세력이 완강하게 받쳐주고 있는 그 물론의 바탕과 내용을 파헤쳐 보려는 의식이다. 지배세력이 물론의 세계를 신성한 것이라고 내세우면서 모든 민중이 의심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때 “불경죄”로 몰릴 망정 그것을 일단 의심해 보려는 의식과 용기가 바로 문제 의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 의식이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행위에 연결된다는 점을 대번에 깨닫게 된다. 이것이 문제 의식의 두 번째 성격이기도 하다. 허위의식이란 복잡한 현실태(現實態)를 짐짓 단순화시키고, 더럽고 잘못된 현실태를 짐짓 아름답게 꾸며서 그럴듯하게 정리해 놓은 거짓된 현실인식을 말한다. 허위의식은 대체로 아름다운 수사의 낱말들로 꾸며져 있어서 사람을 홀리거나 속인다. 속이 더럽고 부끄러울수록 허위의식은 깨끗하고 떳떳한 낱말들을 동원한다. 이러한 허위의식은 주로 지배세력이 제조하고 개발하고 응용한다. 자유, 발전, 행복, 정의, 평화 등을 앞세워 자유를 제한하고, 전체적 발전을 늦추며, 행복을 깨뜨리고, 정의를 흐리며, 평화를 파괴한다. 이렇게 속과 같이 다를수록 허위의식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결국 권력의 정당성이 약하거나 아예 그 정당성을 상실하고만 지배집단일수록 아름답게 꾸며진, 단순화된 허위의식의 체계를 잘 갖추고 있다.

이러한 때 문제 의식이 요청된다. 문제 의식을 갖춘 사람은 정직이라는 말로 단장된 허위의식의 거짓된 속셈을 꿰뚫어 본다. 문제 의식에 투철한 사람은 자유를 앞세우는 지배세력의 억압행태를 알아차린다. 그는 정의를 큰소리로 외치는 지배세력의 불의를 투시할 줄 안다. 그는 평화를 강조하는 지배세력의 폭력을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관찰하고 있다. 그러니까 문제 의식을 가진 사람은 일상성의 뚜껑을 열어보는 사람이요, 그 일상성의 세계에서 주인 노릇하는 사람들의 추한 속셈을 훤하게 꿰뚫어 보는 사람이다. 주인들의 허위의식을 투시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을 두고 나는 지식인이라 부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참다운 지식인이란 문제 의식을 지닌 사람이다.

문제 의식을 갖게 되면 엑스타시를 할 수 있다. 엑스타시는 황홀경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분자 그대로 “밖에 서는 것”을 뜻한다. 밖에 선다는 것은 일상성의 세계를 떠나서 그밖에  일상성의 세계의 전체 모습을 그리고 실제 모습을 파악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배세력의 허위의식을 물론의 세계 밖에서 조명해 본다는 뜻이다 이렇게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만 황홀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여태껏 그저 당연한 것으로 믿어왔던 세계가 밖에 섬으로써 비로소 요지경으로 새롭게 이해될 수 있다. 이제까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진부하기까지 한 세계가 밖에서 안을 조명해 보니까 너무나 문제점이 많고 또한 흥미로워 “황홀경”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특히 지배세력이 그토록 단단하게 다져온 문제 없는 물론의 세계가 엑스타시의 경험을 가진 후 문제점으로 가득찬 비물론(非勿論)의 세계로 새롭게 인식되기도 한다. 문제 의식은 이렇게 엑스타시의 경험을 갖게 해준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문제 의식은 밖에서 사물과 현실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투시능력이다. 특별히 지배세력의 허위의식을 밖에서 똑똑히 보고 그 속의 추한 것을 폭로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황홀경”에 들어가게 해 주는 의식이기도 하다.

셋째로 문제 의식은 문제의 뿌리를 보는 의식이다. 문제의 가지만을 보거나 그 잎사귀만을 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뿌리까지 샅샅이 살펴보는 능력이다. 사물과 현상 특히 문제의 현상을 진단할 때 부분적인 것의 분석에 그치지 않고 전체의 뿌리나 기반을 파악하는 능력이 또한 문제 의식이기도 하다. 대체로 지배세력은 현실구조의 주인인 까닭에 이 현실구조에서 생겨나는 문제를 국소화시키려 할 것이고, 설령 만천하에 드러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가능한 한 그것을 지엽적이고 말단적인 것으로 간단히 처리해 버리려고 한다. 그러기에 문제 의식을 지닌 사람은 지배세력에 의해 항상 감시를 받게 된다. 지배세력은 문제의 잎사귀만 보도록 강조하는 데 반해서, 문제 의식을 지닌 사람은 문제의 근본부터 캐내려고 한다.

예컨대 이러하다. 오늘의 기독교 교회를 보면 문제가 근본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문제의 가지나 잎만 보고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다. 특히 교회 지배세력이 그렇게 본다. 교회 제도의 일부분을 수리하면 교회가 곧 개혁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뿌리부터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의 교회는 민중의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산층 이상의 특권 집단들의 교회로 변질해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의 유명한 “산 위의 설교”에 따르면, 가장 큰 축복이 하늘나라의 주인이 되는 복이고 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과 박해받는 사람들이다. 오늘의 제도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모형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 절대적인 요청이라고 한다면, 현실의 제도 교회의 주인은 마땅히 가난한 민중들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민중들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민중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예수가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의 제도 교회에서는 민중이 주인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부자들과 강자들과 유식한 자들이 주인 노릇하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개혁은 부분적인 변화에 머물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변화에로 나아가야 하며, 잎사귀의 변화가 아니라 뿌리로부터의 변화라야 한다. 같은 논리를 가지고 우리는 주권재민을 따져 볼 수 있다. 민주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그런데 정말 국민이 주인일까? 만일 그렇지 못할 때 민주국가와 민주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부분적인 손질이나 잎사귀 수준의 개혁만으로는 안된다. 진실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근본적 변화가 요청된다. 그런데 이때 비민주적인 지배세력이 자주 활용하는 허위의식은 “위민사상(爲民思想)”이다. “국민”을 위한다는 표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라는 표현이다. 참으로 국민을 위한다면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즉 국민에 의한 국민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국민을 위한다”는 것이 한낱 허위의식으로 사용되어서 실제로는 국민을 종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자아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에서 요청되는 것은 근본적인 개혁이다.

이와 같은 예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듯이 문제 의식은 문제점을 그 뿌리에서부터 살피려는 자세를 뜻한다. 겉으로 나타난 징후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뿌리를 도려내려는 자세를 뜻한다. 얼굴이나 피부에 종기가 나오면 그것만을 짜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기가 위장 장애에서 온다는 것을 알고 위장을 고치려는 사세와 같다. 그러기에 문제 의식은 문제의 뿌리를 보고 그 뿌리부터 바로 잡아야만 비로소 참으로 바람직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개혁의지로 이어진다.

넷째, 문제 의식은 전체를 볼 줄 아는 마음이다. 뿌리를 볼뿐만 아니라 뿌리를 포함한 전체를 볼 줄 아는 혜안(慧眼)을 말한다. 그런데 사물과 현상의 전체 모습을 파악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마치 문제의 뿌리를 보는 것이 쉽지 않듯이 문제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 이유는 현상이 복잡하고 문제의 성격이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지배세력의 의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곧 지배세력이 사건의 전모나 문제의 전모를 드러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만일 민중이 문제의 전체를 알게 되면 기득이권을 감싸주는 기존질서가 위태로워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상성의 이면(裏面)은 사건과 문제의 전모가 드러나면 저절로 따라서 폭로되기 마련이다. 일상성의 이면이 폭로되면 지배자들의 허위의식의 노력은 크게 감소되든지 사라져 버린다. 그만큼 지배자들의 통치능력은 감퇴되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지배세력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문제와 사건의 전체를 가리려고 애쓴다. 민중으로 하여금 사건의 일부분만 보도록 교묘하게 조종한다. 이러한 지배집단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문제의 전체를 보려는 의지와 또 그 전체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이 곧 문제 의식이다.

이때까지는 사건의 구조적 전체 모습을 파악하는 것에 주목하였다. 사건의 구조적 뿌리나 구조적인 성격을 파악했다고 해서 정말 사건의 전체 성격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의 시간적 맥락과 그 의미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바로 이런 뜻에서 문제 의식은 역사 의식을 포함한다.

즉, 다섯째로 역사 의식이 문제 의식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역사 의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전체로 파악하면서 어떤 역사적 사건을 전체 시간의 맥락에서 살피려는 의식이다. 편리하게 과거의 어떤 사건을 현재에서 분리시켜 강조한다든지 미래의 어떤 부분을 지나치게 미화시키는 것은 역사 의식이 아니다. 역사 의식은 현재 상황의 관심 때문에 과거의 사건들을 재조명해 보려는 의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재의 사건과 문제를 전체 시간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그것의 전체 모습과 특징을 보다 뚜렷하게 이해하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간적 차원에서 사건과 문제의 전체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서 많은 교훈을 배우게 된다. 교훈을 배운다 함은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바로 잡아야 될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컨대, 1930년대에 전염병처럼 유럽에 번졌던 파시스트 운동의 부침(浮沈)을 조명해 봄으로써 오늘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의 의미를 뚜렷하게 깨달을 수 있다. 독일의 히틀러가 어떻게 집권하게 되었으며 어떤 계층이 그의 출현을 도와주었으며, 그이 정치 철학과 구체적인 정책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해서 이윽고 몰락하고 말았는가를 과거의 시각에서 살필 뿐만 아니라, 오늘의 시각에서 다시 살펴보려는 것이 더 중요하며 이것이 곧 문제 의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 의식은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현재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게 해 준다.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시간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문제 의식은 항상 역사 심판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벌어지는 사건이 미래에 어떻게 판정될 것인지를 항 상 겸손하게 질문한다. 현재 사건에 대해 미래에 기록될 판단을 두려워하는 의식이 곧 문제 의식이기도 하다. 오늘의 어떤 특정 지도층의 인물을 그의 과거 행적을 통해 보다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그가 오늘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또 그것의 전체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다 명백하게 깨닫게 된다.


 나. 문제 의식을 흐리게 하는 메커니즘들

여기서 우리는 지배자들이 교묘한 방식으로 사건과 현상의 전모를 가리는 일에 언급할 필요가 있다. 즉, 지배세력이 민중으로 하여금 사건의 일부분과 그 잎사귀만 보도록 조종하는 메커니즘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첫째로 언로(言路)의 통제를 생각할 수 있다. 정보의 흐름을 철저하게 관장해야만 사실과 사건의 전체를 적당히 숨기고 그 중에 일부만을 부각시킬 수 있다. 정보의 독점과 정보의 철저한 관리는 지배세력들이 가장 신경쓰는 문제다. 비민주적 지배집단일수록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에 개입하려 하며 정보의 분배를 장악하려고 한다. 만일 자유로운 언로와 언론을 통해 민중이 현상과 사건의 앞-뒤를 모두 알게 되면, 민중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동원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어디서나 비민주적 권력 엘리트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기 마련이다. 언론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민주적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언로를 마음대로 막아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정보의 흐름을 조작할 때 민중은 사건의 전체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언로를 막고, 언론 자유를 제약할수록 지배집단은 그럴듯한 허위의식을 앞세워서 민중을 속이기 때문에 민중은 그만큼 현상과 사건의 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문제의 전체 성격을 파악하지 못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사화(私事化)라고 하는 메커니즘을 지적할 수 있겠다. 사사화는 문제의 공적 성격과 구조적 성격을 못 보게 하는 작용을 한다. 어떤 구조적인 사건이 터졌다고 하면, 그것을 애써 사사로운 개인의 문제로 돌려버리게 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사사화다. 이렇게 사5건의 공적 또는 구조적 성격을 못 보게 되면 그 사건이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 즉, 사회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컨대 어느 곳에 이혼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고 하자. 전체 기혼자 인구의 약 30퍼센트가 이혼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은 분명히 구조적인 문제다. 사회가치관의 혼란에서 오든지, 가족제도의 약화에서 오든지, 아니면 경제적 불황에서 오든지 간에 구조적 원인에서 이혼 현상이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마치 이혼하는 사람 곧 당사자들의 개인 문제로 부각시킬 수 있다. 수양이 업고 교양이 부족한 덜된 사람들의 개인짓으로 가볍게 볼 수 있다. 이렇게 사사로운 개인 문제로 보게 되면 그 책임이 어디까지나 당사자 개인에게 있는 것이지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구조의 주인 노릇하고 있는 집 엘리트의 입장에서 볼 때 사사화의 메커니즘은 그들의 기득권을 적어도 간접으로 보호해 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청소년 범죄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구조에서 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청소년 개개인의 성격 탓으로 돌리게 되면, 그것이 사회문제가 되지 않고 사사로운 개인의 수신(修身) 문제가 되고 만다. 여러 가지 부정부패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개인의 사사로운 탐욕의 결과로만 보게 되면 그것도 사회문제로 인식할 수 없게 된다. 부정부패를 저지른 사람만 파면하면 문제를 해결되는 것처럼 꾸며진다. 이런 식으로 모든 사회문제를 사사화시켜 버리고 나면, 기존구조는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고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잘못은 개인에 있지 구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잘못은 개개인의 부도덕한 성격과 수신의 실패에 있지, 기존 구조를 눌러타고 있는 지배집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사사화는 현상유지를 시켜 주는 보수적 기능을 담당한다.

이러한 사사화가 활발히 움직이는 사회에서는 민중이 날로 자학적(自虐的) 인간으로 변질되기 쉽다. 모든 잘못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도록 교화를 받기 때문에 민중은 자학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지배세력은 그만큼 타학적(他虐的) 존재가 되기 쉽다. 여기서 지배자들은 정신적 가해자와 물리적 가해자가 되기 쉽다. 민중이 자신을 “엽전”이나 “바지저고리”로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체념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자신하는 지도력에 의해 쉽게 끌려가게 된다. 민중은 자기를 낮게 평가하는 반면에 지배자들은 자기의 우수성을 침이 마르게 치켜올린다. 그리하여 “우수한” 지배자들이 마땅히 “열등한” 민중을 통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사사화의 메커니즘이 널리 번지는 사회에서는 지배-복종의 관계가 더욱 굳어지게 된다. 민중은 교묘하게 계속 눌리고 빼앗기게 되나, 지배세력은 안심하고 민중 위에 군림하면서 민중을 다스려 나갈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사화의 메커니즘이 문제의 전체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자기의 사사로운 잘못 탓으로 문제가 생겼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문제의 뿌리는 말할 것도 없고 문제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셋째로, 문제와 사건의 전체를 못 보게 하는 메커니즘으로 순수화를 들 수 있겠다. 이것은 사사화와 비슷한 기능을 담당한다.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을 일단 갈라 놓고서 모름지기 순수한 것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컨대 문학에는 순수문학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참여문학이 있다고 하자. 현실의 비리와 부정, 그리고 부조리에 시달리는 인간들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문학 활동의 소재로 삼을 뿐만 아니라 작품 활동을 통해 그러한 잘못된 현실 구조를 개선하려고 하는 것이 참여문학이라고 하자. 이때 참여 문학은 문학의 순수성을 상실한 반(反)문학적 또는 반(半)문학적 활동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참여문학은 “불순한” 문학으로 낙인찍히기 쉽다. 이렇게 참여문학을 규탄하는 것은 마침내는 현실구조의 주역들을 옹호해 주는 것과 같다. 그리고 문학을 이른바 “순수성”의 수준에 묶어둠으로써 문학인들의 문제 파악 능력을 줄여 버린다. 즉 “순수성”에 사로잡힘으로써 문제의 전체 모습을 알아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리고 문제의 뿌리를 포함하여 그 전체를 두루 알려고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나무라고 정죄한다. 이러한 순수화의 메커니즘은 현상유지를 옹호해 주는 메커니즘이요, 현상유지를 간절히 바라는 지배세력을 비호해 주는 메커니즘이다.

종교 신앙에 있어서 순수화의 메커니즘은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기야 순수화뿐만 아니라, 사사화도 마찬가지로 종교신앙에서 잘 나타난다. 예컨대, 이렇게 주장하는 지배세력들의 소리를 자주 듣는다. “종교는 모름지기 순수한 인간 개개인의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불순하게 계급 투쟁이나 증오를 가르쳐서는 안되다…” 얼핏 듣기로는 이 말은 지극히 당연한 주장으로 들린다. 그러나 곰곰 따져보면, 여기에 그 어떤 “음모”가 있다. 그것은 종교 신앙의 순수성을 순수하게 강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활동의 범위를 일부러 제한시킴으로써 기존 질서를 공고하게 다져나가겠다는 것을 다짐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다짐이 종교의 선교 특히 기독교 선교의 입장에서 볼 때 잘못된 것임을 밝힐 필요가 있다. 불교도 그러하겠으나 기독교에 있어서는 선교 활동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억울하게 빼앗기고 처참하게 눌리는 사람들, 헐벗고 병든 사람들, 나그네처럼 차별받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그 아픔을 갖다주는 원인들에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는 활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 그리고 병든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축복했으며 그들을 온전케 하였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선교의 참 순수성은 민중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들을 그 고통의 원인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일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은 곧 사랑의 실천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랑을 “순수한 수준”으로 제한시켜서 추상화해 버리려고 한다. 사랑이 추상화되어 버리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뜨겁게 분출되어야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것이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랑은 남들에 대한 것이지 자기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남들 가운데서도 억울하게 불행하게 된 사람들을 향한 뜨거운 교감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니 예수의 사랑은 민중에 대한 사랑이다.

예수의 사랑이 주로 민중에게 겨냥되었다고 해서 예수가 지배계급을 사랑하지 않거나 전적으로 무시한 것은 아니다. 민중을 괴롭히는 지배세력에 대해서도 사랑을 펴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 때는 사랑의 표현 방식이 아주 다르다. 민중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방식으로 지배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세력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며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악을 비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악을 미워하되 악을 저지르는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사랑하기에 그 사람의 악한 짓을 더욱 신랄하게 비판하게 된다. 그러므로 악행을 하는 지배세력의 악한 짓을 비판하는 것은 결코 순수치 못한 신앙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사랑하려는 순수한 신앙 때문이다.

문제는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전체를 못 보게 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는 데 있다. 신앙은 삶 전체와 연결된다. 기독교의 선교도 삶 전체와 연결된다. 총체적 선교는 구원의 전체성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선교는 마땅히 처절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로 피해를 받고 있는 민중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들의 삶의 한복판에서 선교를 펼쳐 나가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문제와 사건의 전체 모습을 반드시 볼 줄 알아야 한다. 예컨대 빈부의 격차가 점차로 더 벌어지는 상황에서 기독교 선교를 담당하는 신앙인들은 근로자의 저임금을 사사로운 개인 문제의 차원에서나 이른바 “순수신앙”의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만일 부당하게 저임금을 받고 있다든지, 억울하게 해고된다고 할 때 그 문제를 근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 부족에서 혹은 개인의 부덕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문제의 뿌리와 전체를 보아서 그들의 아픔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런데 종교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지배세력이든지 아니면 보수적 신앙인이든지 간에 그들 자신이 문제의 심각성이나 전체성을 못 보게 되고 나아가 남들까지도 그것을 못 보도록 한다.

나는 이 글에서 문제 의식의 성격과 그 작용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한 셈이다. 그것은 당연의 세계의 뚜껑을 열고 그 속의 비당연성을 살펴보는 의식이요, 문제없다고 믿어 온 물론의 세계의 껍질을 벗기고 그 속에 있는 비물론성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요, 특히 그 일상성의 세계를 관장하고 있는 지배세력의 화려하고 그럴듯한 허위의식의 정체를 폭로하는 혜안이요 용기이다. 그뿐만 아니라 문제 의식은 사건과 문제의 뿌리를 볼 줄 아는 투시력이요, 사건과 현상의 전체 모습과 그 성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파악 능력이다. 이러한 근본적이고 총체적 사고를 약화시키거나 마비시키려는 여러 가지 메커니즘이 있다. 사사화(私事化), 순수화, 그리고 정보의 흐름의 통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의 작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것의 속셈을 폭로시키려는 의식과 용기 또한 문제 의식이라 하겠다. 이러한 문제 의식은 부당한 양극화 상황에서는 항상 약자와 피해자의 편을 들게 된다. 이런 뜻에서 문제 의식은 곧 민중을 위한 의식임과 동시에 민중의 의식이다. 특히 대자적(對自的) 민중의 성숙하고 날카로운 의식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오늘 이 땅의 문제와 이 시대의 문제와 징후를 전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 징후의 껍질을 벗기고 그 실지와 그 뿌리를 날카롭게 응시해야 한다.

(한완상  <민중과 사회> 종로서적, 1980, 174-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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