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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아직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컨택트"(Arrival)의 원작 소설인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 1998, 김상훈 옮김)는 오랫만에 읽은 수작이다(아마 율리 체의 '형사 실프' 이후 처음 아닐까?). 여러 면을 살필 수 있지만, 나는 딸과 남편과 외계인 헵타포드를 엮어 풀어간 이야기를 먼저 주목할 수 있다. 사상에 몸을 입혀 만든 소설이었다면 이렇게 흥미롭지는 않았으리라. 따라서 이걸 느끼려면 꼭 읽어야 한다.

 

둘째로 여기서 개진된 '인과적 관점/방식'과 '목적론적 관점/방식'의 종합, 그리하여 자유의지와 필연의 종합은 철학적으로 무척 중요하면서도 요긴한 하나의 해석이었다. 이 해석은 스토아철학과 니체의 사상, 그리고 현대적으로는 그에 대한 들뢰즈 철학을 설명할 때 유용할 거라고 본다. 저 유명한, 아모르파티(운명애).

 

개인적으로는 '목적론'에 대한 사색은 조금 더 보완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니체의 계보학이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감은 오는데,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

 

아래는 소설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그런데 페르마의 원리에 관해서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가 이상한데, 그게 무엇인지 꼬집어 말할 수가 없어. 물리학 법칙처럼 들리지 않는다고 할까."

게리의 눈에 재미있어하는 빛이 떠올랐다. "당신이 뭘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 그는 젓가락으로 군만두를 반으로 갈랐다. "당신은 빛의 굴절을 인과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 있어. 수면에 도달하는 것은 원인이고, 그 방향이 바뀌는 것은 결과라는 식이지. 페르마의 원리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 건 빛의 행동을 목표 지향적인 표현을 써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야. 마치 광선에 대한 계명(誡命)의 느낌이랄까. '네 목표로 갈 때는 도달 시간을 최소화하거나 최대화할지어다' 하는 식으로 말이야."

나는 이 말에 관해 곰곰이 생각했다. "계속해봐."

"그건 물리 철학의 오래된 의문이야. 페르마가 1600년대에 그걸 처음 법칙화한 이래 줄곧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지. 플랑크는 관련 저서까지 여러 권 썼어. 문제의 쟁점은, 물리 법칙의 통상적인 공식은 인과적인데 페르마의 원리 같은 변분 원리는 합목적적이고, 거의 목적론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이야."

"흠, 흥미로운 제기 방식인데? 조금 생각해볼 테니 잠깐 기다려봐." 나는 사인펜을 꺼내서 종이 냅킨 위에 게리가 내 칠판에 그렸던 것과 똑같은 도식을 그렸다.

"좋아." 나는 소리 내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그럼 이 광선의 목표는 가장 빠른 경로를 택하는 것이라고 해. 빛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는 거지?"

"그게, 의인화를 통해 확대해석을 해도 무방하다면, 빛은 일단 선택 가능한 경로들을 검토하고 각각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야 해." 게리는 마지막 군만두를 접시에서 집어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광선은 자신의 정확한 목적지를 알아야 해. 목적지가 다르다면 가장 빠른 경로도 바뀔 테니까."

게리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목적지가 없다면 '가장 빠른 경로'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지지. 그리고 해당 경로를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그 경로 중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이를테면 수면이 어디 있는지 등의 정보도 필요해."

나는 냅킨에 그려진 그림을 계속 응시했다. "그리고 광선은 그런 것들을 사전에 모두 알고 있어야 해. 움직이기 전에. 맞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빛은 이전의 지점을 향해 출발한 다음 나중에 진로를 수정할 수는 없어. 그런 행위에서 야기된 경로는 가장 빠른 경로가 아니니까. 따라서 빛은 처음부터 모든 계산을 끝마쳐야 해."

나는 마음속으로 이 사실을 곱씹었다.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무엇을 떠올리게 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게리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고민하던 것도 바로 그거였어." (199-201쪽)

 

게리가 페르마의 원리에 관해 내게 처음 설명해주던 날, 그는 거의 모든 물리 법칙은 변분 원리로 기술될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물리 법칙을 생각할 때 인류는 인과적 맥락에서 생각하는 편을 선호한다. 이것은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운동에너지나 가속도처럼 인류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은 모두 주어진 한 시점(時點)에서 어떤 물체가 가지는 성질이다. 그리고 이런 성질은 순차적이고 인과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어떤 순간이 다음 순간을 낳고, 원인과 결과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연쇄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작용'이나 적분에 의해 정의되는 다른 것들처럼 헵타포드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봄으로써 만족시켜야 할 조건,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207쪽)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의지란 의식의 본질적인 일부인 것이다.

아니, 정말로 그런 것일까? 미래를 아는 경험이 사람을 바꿔놓는다면? 이런 경험이 일종의 절박감을, 자기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면? (210쪽)

 

The rabbit is ready to eat. 이 문장에 관해 생각해보자. 여기서 rabbit을 eat의 목적어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저녁식사가 곧 시작될 것을 알리는 문장이 된다. 그러나 rabbit을 eat의 주어로 본다면 이것은 이를테면, 어린 소녀가 퓨리나사의 애완용 토끼사료 봉지를 열 작정임을 자기 어머니에게 알리는 경우에 맞는 암시에 해당한다. 이 둘은 완전히 상이한 언술이다. 사실 한 가정 안에서 이 두 언술이 공존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타당한 해석이다. 문맥이 이 문장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정할 뿐이다.

빛이 한 각도로 수면에 도달하고, 다른 각도로 수중을 나아가는 현상을 생각해보자. 굴절률의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한다면, 이것은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헵타포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이다.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완전히 상이한 두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언술에 해당된다. 한 가지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인류와 헵타포드의 조상들이 맨 처음 자의식의 불꽃을 획득했을 때 양측은 모두 동일한 물질세계를 지각했다. 하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다. 세계관의 궁극적인 상이함은 이런 차이가 낳은 결과였다. 인류가 순차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킨 데 비해, 헵타포드는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켰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원인과 결과로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지각한다. 헵타포드는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 최대화라는 목적을. (212-213쪽)

 

헵타포드의 경우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었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대신, 그들은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했다. 그렇다. 어떤 대화가 됐든 헵타포드들은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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