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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 이 글은 서울 시립대학교 교지 <대학문화> 1997년 봄(제23호)에 수록되었던 글입니다.


사이버예술의 도전 - 새로운 예술가를 기다리며


     1. 위기론을 누가 말하는가?

  다시금 '문학의 위기'가 얘기되고 있다. 문학이 정말 위기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문학의 위기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그 대안은 정말 대안인가? 이런 물음들이 떼거지로 떠돈다, 유령처럼. 위기의 유령들, 죽음의 유령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위기론을 믿지 않는다. 대부분의 위기론은 그 위기를 말하는 자에게만 의미가 있다. 따라서 매 순간 물음 자체를 다시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남들이 던졌던 문제들을 무조건 풀려고 덤벼드는 것만큼 나쁜 습관은 없다. 그 나쁜 습관은 대개는 학교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생은 문제를 내는 자이고, 학생은 그것을 풀어야 하는 자이다. 우리는, 일단 주어진 문제를 풀어야 하는 학생으로서 길들여져 왔던 것이다. 물음 자체를 물어야 한다는 것은 그 문제가 과연 문제로서 옳은 문제인지를 검토하고 비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자기 스스로가 던진 물음에 대해서만 (겨우) 답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던진 물음에 대해, 그것이 자기에게도 여전히 문제로서 유의미한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이 자기를 정립해 가는, 자기가 자유롭게 되는 유일한 길이므로. 어렵더라도 그 길 말고는 없다.

  그러나 남들이 제기한 물음 중에는, 아직 자기에게 물음으로서 유의미하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중요한 물음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미숙하기 때문에 아직 우리에게 문제로 포착되지 않는 문제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유일한 방식은, 그 물음이 어떻게 발생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물음의 발생학(Genealogie). 누가 어떤 정황에서 그 물음을 던졌는지, 그 물음 속에서 그 작자(作者)가 풀려고 한 것은 또 무엇인지를, 우리가 탐정이 되어 알아내야 한다. 이 작업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유의미한 물음을 던지기 위한 훈련으로서도 굉장히 의미롭다.

  내가 '문학의 위기'에 접근하게 될 방식은 보통 '철학적'이라 불린다. 여기서 '철학적'이라 하는 것은, 문제 자체에 호들갑을 떨지 않으면서 접근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범죄 사건이 일어났다고 치자. 이 경우 철학적 접근을 하는 사람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수사관이다. 그는 그 범죄가 어떤 경위로 일어났는지 알고자 한다. 그는 가장 냉철한 눈으로 범죄 현장을 살핀다.

  나는 문학의 위기와 관련된 논의를 다 검토할 지면도 의향도 없다. 다만 '매체의 변화'와 관련되어 제기된 문학의 위기 논의를 잠시 살펴보면서, 그것이 잘못 제기된 문제임을 밝히고, 따라서 그 대안으로 제시된 '사이버문학' 역시도 잘못된 길임을 보이고자 한다. 그리고 '사이버문학'이 디지탈 매체에 대응하는 예술 형식인 '사이버예술'에 대한 잘못된 명명이었음을 주장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새로운 예술인 '사이버예술'임을 제창하고자 한다.2)



     2. 매체의 변화와 문학의 위기

  문학의 위기에 대한 주장은, 서구의 경우만 봐도, 아주 초기 단계부터 있어 왔다. 예컨대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은 문학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으며, 이 위기 상황에서 곧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 옹호론이 등장했던 것이다.3) 어찌 보면 문학 위기론과 그에 대한 반론은 문학사를 진행시킨 양 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문학'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시'가 오늘날처럼 '문학'의 하위 범주로 다뤄진 것이 아니라 종합 예술로서의 '극예술' 일반을 지칭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결 구도는 실은 문학에만 국한된 논의라기보다 예술 전반에 걸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해 보자. 1) 플라톤이 시인을 국가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매체의 변화와 상당한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 당시는 문자가 처음 등장해서 구비(口碑)적 전통과 대결하던 시기였다. 오늘날 문학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주된 기준인 문자가 당시에는 문학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도구로 동원되었다는 점은 상당한 아이러니이다.4) 문자는 문학의 도구로도 문학을 부정하는 도구로도 쓰일 수 있다. 문자 매체의 양면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2)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당시에는 '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바, 당시에는 서사시, 서정시, 비극, 희극 등을 한데 묶어 줄 '문학'이란 범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 '예술'이라 할 만한 것이 그것들을 묶어 주고 있었다.5) 사실상, 문학을 다른 예술 장르와 구분시켜 주고 문학의 하위 장르들을 묶어 주는 주요한 변별적 자질은 글자였으며, 그것은 상당히 후대에 탄생했다. 역사적으로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문학'이란 말은 글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성립했던 것이다. 문학은 그리 오래 전에 탄생한 것이 아니다. 문학은 시나 희곡보다 역사가 짧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의 위기'와 관련된 논의에서 두 가지 상이한 논쟁점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우선 '문학 장르의 본성과 의의'에 대한 도전이 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예술 장르(예컨대 영화나 TV, 비디오 같은 영상 매체)가 탄생하면서 야기되는 문학 장르의 위축. 한동안 '문학의 위기' 논의에서 이것이 많이 다루어졌다. 여기서는 매체의 차이만이 문제될 뿐(영화냐 문학이냐?), 예술의 존재 의의는 문제되고 있지 않다(둘 다 예술이다). 다른 한편 '문학성' 혹은 '문학의 본성과 의의'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예술성' 혹은 '예술의 본성과 의의'에 대한 도전이 있다. 예를 들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쟁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는 매체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같은 매체더라도 그것을 이용하는 방식이 문제가 된다(예술이냐 아니냐?). 문자는 시를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고 철학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 자체가 도전을 받는 상황은 예술로서는 언제나 겪어야만 했던 상황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좋겠다.6) 그것은 '위기'와 '비판'의 그리스어 어원(KRISIS)적인 동일성과 관련되어 있다.7) 히포크라테스에게서 발견되는 그 말은 '병이 가장 심화되었다가 급전되는 상태'를 지칭한다. '급전'이 없다면 그것은 '끝'일 따름이다. 따라서 모든 위기는 어떤 것의 가장 뿌리깊은 곳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다는 사태 전체를 함축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비판'이란 말의 어원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불안과 위험이 내재함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비판이 없이 긍정적인 것이 창조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독일인들은 나찌의 경험을 통해 비판 정신을 상실했을 때 초래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경험한 바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문학의 위기는 언제나 문학을 살찌우는 동력이었다고 얘기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예술)은 외적인 조건 속에서 위기에 처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항상 위기 속에 있으며 위기 속에서 생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차원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학 위기론은 가짜 문제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매체의 상이함에서 비롯되는 문학 위기론만을 거론하려 한다.



  3. 디지탈 매체의 성격

  나는 사이버문학을 논의함에 있어 매체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누차 주장해 왔다.8)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화가 문학을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였지만 현재는 영화보다 디지탈 매체가 문학을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9)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문학에 도전장을 던진 것은 영화를 비롯한 영상 매체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디지탈 매체의 영향력이 별로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그리 틀린 얘기가 아니었다. 최근 「초록 물고기」(1997)를 만들어 성공을 거둔 이창동 감독도 처음엔 소설을 썼다.10) 그는 상을 받을 정도로 작품성도 인정을 받았던 작가이다. 나는 이런 전업(轉業)을 문제삼고 싶진 않으며, 다만 이런 전업이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영화의 힘이 컸다는 얘길 하고 싶다. 영화가 문학에 가한 도전과 위협은 이렇게 현실화되고 있으며, 그 징후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지금, 대립 구도는 상당히 바뀌어 있다. 문학 대 영화의 대립이 아니라 문학(또는 영화) 대 디지탈 매체의 대립으로. 대체로 문학은 영화와의 대결에서 어느 정도 내성(耐性)을 확보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예전에 비해 문학의 위세가 많이 줄어들었고 영향력이 상당히 감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여전히 (비록 소수로서이긴 하지만) 존재할 수 있고, 영화와 (상당히 사이 좋게) 공존할 줄도 알게 된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디지탈 매체이다. 디지탈 매체는 많은 부분 영화까지도 위협하는―물론 단순히 위협만 하는 건 아니지만―새로운 영역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것이 문학을 위협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럼 디지탈 매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디지탈'이란 '아날로그'에 대립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독립 변수와 함수값이 연속적일 경우 아날로그 신호라 하며, 그 둘이 이산적인 경우 디지탈 신호라 한다.11) 예를 들어, 우리는 목소리를 신호로 바꾸어 저장할 때 아날로그 방식인 LP나 디지탈 방식인 CD를 사용한다. 여기서 하나의 장점은 다른 하나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날로그 신호가 원본의 고유한 아우라(Aura)를 간직하는 반면 디지탈 신호는 규격화를 통한 편리함을 제공해 준다. 바로 이런 특징을 가진 디지탈 매체는 컴퓨터를 통해 모두 연결될 수 있게 되었다. 통신망과 연결된 멀티미디어 컴퓨터가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은 디지탈 매체이거나 디지탈 매체로 전환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이진법적 부호로 된 저장 방식을 통해 여러 디지탈 매체(하드 디스크, 플로피 디스크, CD-ROM, DVD 등)에 저장된다.

  이처럼 컴퓨터 파일의 형태로 저장한 문자, 소리, 그림, 그래픽, 사진, 동영상(動映像) 등은 서로 연결되어 단일한 텍스트의 성격을 갖게 된다. 그것이 이른바 '하이퍼텍스트'이다.12) 이것은 인터넷의 WWW에서 사용되는 텍스트 구현 방식으로, 그야말로 기존의 거의 모든 매체들이 디지탈화되어 결합됨으로써 구현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사진도 보고 글도 읽을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다 디지탈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소리와 그림은 '다른' 매체가 아니라 '같은' 매체가 되었다!

  우리는 이 새로운 매체를 멀티미디어(multi-midia, 다중 매체)라는 말로 부름으로써, 이것을 마치 기존의 여러 매체가 단순히 더해진 매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글자나 소리나 그림이나 동영상 등이 '멀티미디어 텍스트' 속에서 결코 기존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질적인 변화를 겪는다는 점에 유의하자. 우리는 기존의 말들을 동원해서 새로운 것을 설명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편의상 기존의 매체들이 합쳐진 매체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탈로의 변화이다. 따라서 멀티미디어 텍스트를 그것의 잠정적 구성 요소인 문자, 소리, 그림, 동영상 등으로 분해하는 것은 멀티미디어 텍스트의 특성을 드러내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멀티미디어는 기존 매체들의 단순한 합 이상인 것이다. 문자와 소리와 그림과 동영상이 각각 본질적인 차이를 담고 있듯이, 이것들 모두와 멀티미디어 텍스트는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다. 디지탈 텍스트, 멀티미디어 텍스트, 하이퍼텍스트는 기존의 어떤 매체와도 다른 그야말로 새로운 매체인 것이다.



     4. 사이버문학은 진정한 대안인가?

  '사이버문학'이란 용어는 이 새로운 매체의 등장과 함께 등장했다. 처음에는 통신 문학, PC 통신 문학, 온라인 문학 따위로 불렸던 그 말은, 이용욱에 의해 새로운 문학 패러다임으로 제창되면서 새로운 해석을 부여받고 논쟁 중심에 오르게 되었다. 이용욱에 따르면, 사이버문학은 단순히 온라인 상에서 진행되는 문학에 국한되지 않으며 온라인과 종이책 모두를 아우르는 새로운 문학 패러다임이다. 물론 사이버문학의 가능성을 처음 보여준 것은 온라인 문학, 즉 통신 상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이다. 내적 외적 검열이 적음으로써 가능해진 날것의 생생한 힘, 아주 빠른 시간에 독자와의 대면이 가능하다는 점(이를 '실시간성'(real-time)이라 부른다), 독자의 반응과 간섭에 깊이 노출된다는 점(이를 보통 '쌍방향성'(interactivity)이라 부른다), 따라서 일방적인 독자도 일방적인 작가도 있을 수 없으며 누구나가 작가-비평가-독자로서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점, 만화나 추리소설이나 SF나 공포물 같은 주변 장르들이 기존 문단의 권위(보수주의, 엄숙성)에 도전하여 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는 점, 기존 문학 유통 구조를 넘어선 점 등은 통신에서 이루어지는 문학 행위의 특징이자 성과인 것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디지탈 매체와 통신의 발달이다.

  이용욱은 여기에 덧붙여 새로운 상상력과 새로운 미학을 말하면서, 기존의 문학을 아우르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학으로서 '사이버문학'을 제창한다. 나로서는 이 말들에서 '새로움'에 대한 강조만 눈에 들어올 뿐, 새로운 '상상력'이나 '미학'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 게다가 하이퍼텍스트를 문학 안으로 끌어들이는 지점쯤에 이르면 더더욱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은 문자 기반적인 예술 행위이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분류에 집착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바, 예술이라는 큰 분류가 있고 그것은 많은 경우 비예술적인 행위와 변별점을 갖는다. 또한 예술 안에는 많은 하위 장르가 있고,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매체의 차이에 따라 구분된 것이다: 언어(특히 문자)를 사용할 때 문학이 되고, 소리를 사용할 때 음악이 되고, 색과 형태를 사용할 때 미술이 되는 등. 따라서 우리는 '사이버문학'을 얘기할 때, 그것이 여전히 문학인지 아니면 새로운 예술인지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이버'문학'이냐 '사이버'문학이냐?

  이용욱의 사이버문학은 그것이 여전히 '문학'임을 주장한다. 그는 글쓰기 환경이 문자 언어에서 전자 언어로 바뀌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언어적인 행위라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 문제라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글쓰기 환경은 컴퓨터로, 그리고 전화선을 통해 호스트 컴퓨터에 연결된 PC로 바뀌었을 뿐 그 이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4·19 세대인 김병익은 컴퓨터로 글쓰는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토로하면서 그 변화가 문학에 심대한 변화를 야기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13) 이용욱이 바라보는 변화라는 것은 어쩌면 이 4·19 세대의 글쓰기 환경 변화 수용과 같은 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사실 변화는 더 깊은 차원에서 다가오고 있는, 이미 다가와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현금의 변화가 상당 부분 '문학' 너머로의 이동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것은 사이버'문학'이라기보다는 '사이버'문학일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아직 이름을 얻고 있지 못하는, 그래서 잠정적으로 '사이버예술'이라 불러야 할 어떤 것이리라. 그리고 '사이버문학'은 이 '사이버예술'의 잘못된 명명으로 평가되며 사라질 것이다.



     5. 사이버예술의 창조를 위하여

  나는 지금까지 문학의 위기에 대한 주장이 거짓 문제 제기이며 그 대안으로 제시된 사이버문학도 사이버예술에 대한 잘못된 명명이었음을 주장했다. 새롭게 등장한 디지탈 매체에 걸맞는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서 사이버예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나는 사이버문학 논쟁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논쟁에 비유하고 싶다. 즉, 그것은 문학의 이름으로 얘기된 논쟁이지만 실은 예술의 이름으로 얘기되었어야 할 논쟁이라는 것. 그리고 그 논의의 중심에 매체가 걸려 있다는 것. 나는 사이버문학 논쟁이 많은 부분 문학 중심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다른 매체를 통한 예술에까지 문학이란 이름을 붙여야 하는가? 거기에 걸맞는 다른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 아닐까? 이제는 문학으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장 콕도는 시인이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이제까지 문학에 종사해왔던 사람이라고 해서 새로 등장한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말란 법은 없다. 이 새로운 매체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새로운 예술가의 사명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런 문학 중심주의는 단순한 권위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한 위기 의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문학이 죽어버릴지 모른다는 위기 의식. 그러나 그것은 예술 자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문학성'이란 이름 아래 얘기되었던 가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문학은 영화와도 공존(좀 불균형하긴 하지만)을 이루지 않았는가? 이 새로운 예술 역시도 기존의 모든 예술 형태들과 어떤 형식으로든 공존하게 될 것이다. 문학성에 목을 걸었다면, 소수로 남으면 어떠랴. 그것이 더 영광스러운 일 아니겠는가? 그것이 문학의, 예술의 영원한 숙명 아니었던가?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천박화의 경향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매체가 단순히 천박화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미리 단정할 필요는 없다. 천박화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온다. 그것은 많은 부분 사회적인 것에서 온다. 소통을 위해서는 모든 예술에서 이해 가능성의 차원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그 이해 가능성의 지평이 제한되고 갖혀버릴 때 예술은 천박화의 길로 간다. 사실 매체 자체의 한계는 어떤 예술에나 있다. 그러나 예술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데서 힘을 발휘해 왔다. 따라서 매체의 한계가 막바로 소통 가능성의 한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이해 가능성의 한계가 오히려 소통 가능성의 한계로 주어지는 것이다. 내적 외적 검열을 뚫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필요한 일은 무엇인가? 사이버예술을 영화와 비교해 볼까? 영화를 종합 예술이라 부를 때, 그 말에는 영화 안에 기존의 여러 예술 형식들이 녹아 들어왔다는 함의가 짙게 깔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를 그 기존 예술 형식으로 갈갈이 나누어질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사이버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그 매체의 성격이 다 밝혀지지 않았고 그 매체의 가능성이 모조리 실험되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 매체 역시도 예술적으로 이용 가능하다고 본다. 거기에는 기존의 모든 아날로그 매체들이 디지탈화하여 종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매체의 특성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된 바가 없다. 특히 예술적 관점에서는.

  롤랑 바르트는, 문학이란 언어와 (개인의) 역사 사이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체험을 언어라는 매체로 표현한 것이 문학이란 얘기다. 매체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 경우다. 모든 매체는 투명하지 않다. '사이버문학'으로 잘못 명명된 미래의 예술은 디지탈 매체와 (개인의) 역사 사이에서 탄생할 것이며, 그것이 '예술'의 이름값을 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디지탈 매체 자체에 대한 성찰에 기반하여 창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가 그 자신 아닐까? 그의 삶만이, 어떤 환경에서건, 예술을 창조해내는 궁극적 힘일 것이다.14) 우리는 현금의 이 징후적인 사태를 좀 더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



<주석>

1) 물음을 잘 던지는 것이 왜 중요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문제를 잘 제기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1966), 김재인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6, 제1장 참조.

2) 사이버문학의 내용에 관한 자세한 얘기는 이 특집의 앞에 실린 이용욱씨의 글을 보면 된다. 나는 대다수의 독자가 그 사이버문학 옹호론을 읽었다는 전제 아래 이 글을 전개해 나가겠다.

3) 여기에 관해서는, 플라톤의 「이온」(시인 영감론) 및 「국가」 II, III, X권(시인 모방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및 「수사학」을 참조할 수 있다. 플라톤이 언급하는 시가 「이온」과 「국가」의 경우에 약간 상이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는 있다. 전자는 호메로스의 시를 후자는 비극을 각각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4) 실제로는 상황이 더 복잡하지만, 이런 갈등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예술이 사회에 불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5) 「시학」 1장 참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사실은 '시(詩)'나 '문학'에 관한 학문이라기보다는 '예술 제작'에 관한 학문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좋다. 실제 서술에 있어 '문학'이 중심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서술은 많은 부분 '종합 예술'로서의 '연극'에 있었다.

6) 이 문제는 최근에는 '상업주의'에서 발견된다. '상업주의'가 그 자체로는 무해하다 하더라도, 예술과 결합된 상업주의는 통속화되기 쉬우며, 통속화는 많은 경우 질적 하향 평준화를 가져온다. 예술에 있어서의 민주주의는 예술을 죽인다. 예술가로서의 위험한 삶이 뒷받침되지 않을진대, 부르주아적인 보통 삶 속에서 어찌 예술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7) 나는 동일한 맥락에서 '인문학의 위기'란 없다는 논지를 펼친 적이 있다. 서울 대학원 신문에 게재되었던 「인문학의 위기는 없다」라는 글이, 하이텔 대학원동호회(go grad) 및 하이텔 문화담론 연구모임 '이다'(go sg68) 등에 있다.

8) 「사이버문학은 없다」(『버전업』 1996년 겨울호) 및 『버전업』 1997년 봄호 좌담 같은 글에서, 또 하이텔 사이버문학 비평그룹 '버전업'(go sg86) 내 여러 게시판에서. 이 종이책 『버전업』과 온라인 '버전업'은 국내 사이버문학 논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거의 유일한) 자리이다. 당분간 사이버문학 논의의 부침(浮沈)은 이들과 함께 할 것이라 보여진다: 지금까지 3호가 발간되었는데, 편집장 이용욱을 비롯해 김소연, 김영하, 변정수, 신주영, 전사섭, 한정수 등이 편집에 참여했거나 참여하고 있다.

9) 이와 관련해서 정과리, 「문학의 크메르루지즘」(『문학동네』 1995년 봄호) 및 「프리암의 비상구」(『문학과 사회』 1996년 가을호) 그리고 김진석, 「이상 현실·가상 현실·환상 현실」(『문학과 사회』 1996년 가을호)를 참조. 이 필자들에게서 이미 영화와 디지탈 매체의 대립이 주목되고 있다.

10) 『녹천에는 똥이 많다』, 문학과지성사, 1992.

11) 송현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문화 무크지 『이다』 창간호, 문학과지성사, 1996) 참조. 아래 예와 관련된 공학적 설명은 이 글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12) 나는 이 개념의 함정에 반대하여 '히포텍스트(hypotext)'를 주장한 바 있다. 「사이버문학은 없다」 참조.

13) 『새로운 글쓰기와 문학의 진정성』, 문학과지성사, 1997. 저자는 신세대 문학에 대한 4·19 세대(그의 나이 60이다!)의 진지한 고민을 보여주고 있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주목할 점들이 많다.

14) 이와 관련해서 나의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 - 푸코, 들뢰즈, 그리고 대항 문화의 여명 니체」(문화무크지 『이다』 창간호, 문학과지성사, 1996)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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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 [re] 자료1 - 선악을 넘어 19절 번역 [1] 김재인 2006.06.04 7450
408 서울여대 '현대 철학의 흐름' 강좌 기말고사 안내 [4] 김재인 2006.06.16 7231
407 ‘프랑켄슈타인’을 두려워하는 이유/이지훈 김재인 2006.07.27 7096
406 백승영 교수가 책을 내셨네요... [12] 신승원 2005.06.22 6971
405 '힘에의 의지'라는 바보 같은 번역어 [5] 김재인 2006.05.10 6797
404 책세상 판 니체 전집 단상 [7] 김재인 2005.04.17 6772
403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한완상) [펌] 철학자 2014.05.05 6574
402 니체의 종교 평가에 대해.... [3] 한경우 2006.05.01 6493
401 제3세계의 철학 [2] 김재인 2006.05.26 6133
400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 구체성의 사유로 (이전) [3] 김재인 2002.02.02 6070
399 긍정하라, 가고 오고 돌고 도는 삶/이정우 [3] 김재인 2006.04.28 6054
398 이슬람식 복수 메시지 전하는 <친절한 금자씨>(펌) [4] 김재인 2005.08.12 5871
397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 비판 김재인 2002.01.29 5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