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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예술과 문화 지식인 사회부터 돌아보자

김재인 2002.02.18 17:29 조회 수 : 7626 추천:396

최장집 교수 사건, 지식인 사회부터 돌아보자



*  이 글은 <고대학보> 1998년 가을(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네요, 신문을 못 받아봐서...11월 9일쯤)에 '최장집 교수와 조선일보 사이의 논쟁'과 관련해서 지식인의 임무에 대해 쓴 글입니다.



  학자의 고유한 임무는 '폭로'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드러냄"이라고 불렀던 것도 실천적으로 보자면 폭로 행위를 가리킨다. 흔히 폭로는 정치적인 행동으로 여겨지는데,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치의 근본은 '감춤'에 있다.

  폭로는 국지적일 때에는 굴절된 반동적 힘만을 갖는다. 사람은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고 한다. 폭로도 보통 그런 의미로 이해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정치의 영역이다. 그러나 폭로가 무차별적이고 전면화될 때 폭로는 학문 고유의 힘을 탄다. 이 때에는 나의 잘못과 남의 장점마저도 드러난다. 이렇게 폭로의 힘은 인간에 고유한 성역(聖域)을 넘어서므로 비인간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 힘은 일개 학자가 통제하고 감당하기에 때로 너무 버겁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물론 학자의 정치적 편향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두 층위에서 그러한데, 하나는 폭로의 정도를 자기 이익에 관련하여 조절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전면적 폭로와 더불어 자기 실존의 향방을 정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전자는 '학자로서'의 정치적 편향과는 무관하며 그냥 한 개인의 정치적 편향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학자들은 고집이 세다. 그 고집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학자의 실존과 진실의 긴밀한 접속에서 나온다. 그러면 이렇게 고집 센 학자들끼리 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진실에 대한 인정 덕분에.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중요한 것은 이 시점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걸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한 폭 그림의 가치가 물감의 사실성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잉여에서 생겨나듯이 진실에 대한 인정 이후의 잉여에서 학문 내용의 실존적 가치가 결정된다. 이 잉여의 영역이 '학자의' 정치적 편향이다.

  그래서 학자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 이른바 '정치 논리'이다. 비리가 하도 짙어 온 세상에 냄새를 풍기는데도 검찰은 '물증'이 나타날 때까지는 수사에 착수하지 않겠다고 한다 식. 앞서 말한 첫 번째 정치적 편향은 바로 이 '정치 논리'에 의거한 학문 활동이다. 이것은 학문의 타락이자 죽음이다. 물론 폭로의 시기를 결정하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차라리 '미학적' 윤리의 문제이다.

  우리가 속한 판의 성격은 어떨까. 우선 정치 논리의 득세.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정치 논리로만 일관했던 것은 특히 80년대였다. 절박했던 상황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이들의 행태는 학자로서의 행태는 아니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기준 삼아 아군과 적군을 나누고 적군의 얘기에는 일말의 진실도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어찌 학자의 태도일 수 있단 말인가. 좌파/자유주의라는 가짜 편가름뿐 아니라 소위 '좌파' 내부의 분열상은 상대 진영의 연구 성과를 용납조차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학문적 연대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결국 학문은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나아가 정치의 득세로까지 연결되었다. 정치에서는 치사한 사술(詐術)을 써서라도 이기면 그만이다. 한마디로 '이긴 쪽이 우리편'인 것이다. 그리하여 가짜 학자들이 대거 등장해서 진짜 학자 행세를 했으니 대표적인 자들이 바로 여론이라는 이름의 기자들이다. 학문을 선동과 다수결의 장으로 전락시키고 총칼로 진리를 만들었으니 이에 분노하는 학자가 적은 것이 오히려 통탄스럽다. 기자란 대체로 글에 대한 독해력이 빵점 또는 그 이하이고, 따라서 학자의 논의를 소개할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하다. 학자에게는 생명이나 다름없는 것을 왜곡해서 기사로 만드는 기자는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사과 기사를 써야 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학자가 거의 없다는 데에 있다. '학자'는 자신의 이력서에 잠깐 등장할 뿐이며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청춘의 일부일 뿐이다. 지금까지도 추억을 먹고 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시체인 학자는 빨리 자기에게 걸맞는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학문에 있어 정치 논리의 득세라든지 정치의 득세는 좀비 학자들의 자작극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학에서 이들이 빠져나가면 대학은 공동묘지처럼 조용해질지도 모른다.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 것은 기형도이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건 누구나 알고 또 누구나 얘기한다. 술자리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얘기를 한다고 해서 학자를 자임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얘기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학자는 그것을 폭로할 수 있다. 물론 해법을 안다고 해서 답이 바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해법도 모르는 채 답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학자의 작업이 힘을 가지는 것은 그가 자신마저도 폭로할 수밖에 없는 '두려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실존과 함께 모든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는 따로 정치적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글과 함께 모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 실존이 담기지 않은 글을 쓰는 학자들은, 잠시 양심에 손을 얹고 반성한 후, 숙연히 자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