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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예술과 문화 개 인 과 폭 력

김재인 2002.02.02 15:03 조회 수 : 8065 추천:388

* 이 글은 <고대 대학원 신문> 1999년 4월호에 수록했던 글입니다.



  개 인 과  폭 력    


  며칠 전 애인과 지하철을 타고 가던 길이었다. 몹시 피곤했던 두 사람은 하필이면 '경로석'이라는 딱지가 유리창에 볼썽사납게 붙어 있는 3인용 좌석에 앉아서 머리를 기댄 채 정신없이 졸고 있었다. 얼마나 졸고 있었을까, 갑자기 머리통을 '딱!'하고 내리치는 손길에 놀라 채 덜 깬 눈으로 고개를 드니 웬 젊은 노인이 뭔가 웅얼거리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무슨 말을 하나 들어보니 무조건 어서 일어나라는 내용이었다. 얼떨결에 일어나기는 했지만 기분은 상할 대로 상했고 그 무례하고 당당하고 건장한 노인의 자태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밀려들었다.

  나중에 애인은 "경로석에서 그런 식으로 젊은 사람들이 끌려나오는" 광경을 많이 보았다고 했다. 냉정함을 잃지 않고 그 일을 되새김질해볼수록 나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 노인의 행위를 '폭력'이라고 부르고 싶지만 그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노인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법(하지만 무슨 법?)을 지키지 않은 자를 응징하겠다는 정의감? 연인에 대한 질투? 젊음에 대한 적개심? 늙음에 대한 원한? 아니면 혹시 노망? 한편 내가 그 노인과 '대화'를 시도했다면 어땠을까.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대화를 시도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불손하게 여겨졌을 것이고 "새파란 놈이 건방지다"는 식의 비난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훨씬 커다란 폭력이 많이 있다. 그래서 이 사건에 폭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조차 민망할 지경이다. 게다가 잘잘못을 명확하게 가르기란 대체로 어려운 일이기에 커다랗고 가시적인 것에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당연하다. "시시한 것"은 뉴스에도 나오지 않는다. 마음의 허함을 채우기 위해 광경(=스펙터클)을 찾는 것은 이 시대의 주목할 만한 병적 현상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 우리 각자에게 일어나는 일은 신문과 티브이에 나오지 않는 시시한 일이며 우리 각자에게 일어나는 일은 이런 시시한 일밖에 없다. 그러니 공권력 테러나 조직 폭력배를 거론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말기 바란다. 중요한 것은 불특정 다수에 의해 한 개인이 받는 폭력 양태이다. 개인이 맞닥뜨리는 폭력은 언제나 그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왕따' 현상에서 보이는 폭력인 것이다.

  김현의 분석에 의하면 이른바 '왕따' 현상은 인류학적 기원을 가지며 그만큼 보편적인 폭력 양태이다(『김현 문학 전집』, 문학과지성사, 1992 제10권과 제7권 참조). 최근 사회 문제로 부각된 '왕따' 현상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1990년대 말 한국 학교 사회에서 문제되기 시작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문명의 초석 단계에서부터 존재했는데 종교학, 인류학에서는 그것을 '희생양'이라 일컫는다. 김현은 여기에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이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사유를 전개하는데(「증오와 폭력―만인 대 일인의 싸움에 대하여」(1988), 제7권 수록), 문제가 제기되어야 할 올바른 지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논의는 새삼 주목을 요한다.

  만인 대 일인의 싸움에서 일인의 역할을 하는 자는 이방인이나 떠돌이라는 점, 그 이방인은 성격, 신체, 신분에 있어 토박이들과는 다른 표지를 갖고 있다는 점, 또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은 문화 접변기, 가치 혼란기에 일어나며 일인의 희생을 통해 새 문화와 가치가 정립되면서 끝난다는 점은 이제는 상식에 속한다. 김현의 사유는 오히려 다음 대목에서 빛을 발한다. "나는 네가 밉다―이것이 만인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너무 동물적으로 보이니까, 그 일인을 악인으로 만들어, 그에 대한 증오를 합리화한다. 나는 내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그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악인이기 때문에 그를 미워한다. 그쪽이 훨씬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러나 위선적이다." 여기서 특히 "나는 네가 밉다"는 판단이 출발점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김현은 네가 미운 이유는 "너는 내 이익을 줄이려"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 식으로 말해서 '이익'이 단지 의식과 관계된 것일 뿐이라면 무의식과 관계된 '욕망'이 더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김현 자신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미운 진짜 이유를 "너는 내 기쁨과 쾌락을 줄이려 하고 있다"는 판단이라고 읽는다. 단순한 이익이 아닌 기쁨과 쾌락이 문제인 까닭은 불결하다는 생각과 그에 수반되는 두려움이 네가 미운 이유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김현의 사유는 다수가 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 작동되는 장치에 대한 가장 정확한 서술이 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만인의 집단 심리이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집단에 퍼지는 공모 의식이야말로 한 개인에게 폭력을 집중시키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며 그 집단 광기를 밝히는 것이 핵심 과제이다. 그것은 예민한 시선에만 포착된다. 가령 기형도는 그 광기를 이런 식으로 그리고 있다(「안개」, 『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수록).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기형도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는 인식은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을 상징한다. 앞서 살펴본 김현의 분석은 이제 일반화된다. 싸움의 외양은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이지만 개인마다 각기 다른 이방성(異方性)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싸움의 실제는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이다. 누구든지 이방인이 될 수 있다. 누군들 각자이기 위한 이타성(異他性)을 갖고 있지 않겠는가. 또한 누군들 어떤 자를 이방인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지 않겠는가. 누구인들 만인 대 일인의 싸움에서 만인에 속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정치인-종교인의 수사를 뛰어 넘어야 한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은 책임을 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책임을 여러 사람이 나눈다고 해서 책임이 희석되는 것은 아닐 터인데 정치인-종교인은 마치 그런 것처럼 말한다. 거짓 회개, 거짓 참회의 전도사.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정치인-종교인의 설교, 즉 광기가 우리의 실천 상식이 되어 있다. 이제 책임을 질 사람은 없어졌으며 어떻게 해서든 만인의 편에 속하기만 하면 된다.

  이제 다시 구체로 돌아가자.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은 개인 대 개인의 싸움으로 육화(肉化)한다. 예컨대 지하철에서 멋모르고 경로석에 앉은 지친 청년과 그 사태에 분개해 자고 있는 청년을 때리는 노인 사이에서. 노인은 만인의 편에 선 개인이 되고 청년은 일인의 편에 선 개인이 된다. 이 무시무시한 사태는 티브이 뉴스에서 의경이 만인을 대표하고 시위대가 일인을 대표하는 사태와 전혀 다르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이 사태를 받쳐주는 사태이다. 만인의 편에 서게 되면 언제나 정당하다. 이래서 무력과 마찬가지로 다수결이 민주주의가 아닌 이유는 다시 자명하다. 민주주의는 오직 민주화 운동일 뿐이다.

  상식이 광기이고 상식이 폭력일진대,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떤 상식을 따라야 좋을까? 상식을 어떻게 자리잡아야 좋을까? 나는 니체의 제안처럼 임부(妊婦)를 존중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겠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볼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