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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예술과 문화 나무가 되는 법, 나무로 사는 법

김재인 2002.01.29 01:32 조회 수 : 9312 추천:384

*  이 글은 <지성과 패기> 1997년 7-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실패'라는 화두에 실렸지요.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이창기의 두 번째 시집에 대한 서평 형식을 빌고 있습니다만 자유롭게 썼던 글입니다.




나무가 되는 법, 나무로 사는 법



                      제발, 살아 있거라, 멀리 있어도

                       두근거리며

                        ― 「마술은 살아 있다1」에서



    이창기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나무이다. 시인은 나무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통해 우리에게 삶을 보여준다. 「木星에 물 없다」는 나무에 대한 다섯 편의 시를 차용해 왔지만, 그 차용은 오히려 시인의 눈이 나무를 보는 일에 얼마나 열심히였는지를 드러내준다. 그는 나무만 관찰한 것이 아니라 나무를 노래한 시들까지도 너무나 열심히 관찰했던 것이다.

처음에 시인은 살아 있는 것들 안에서 죽음을 본다. 그는 "도처에 살아 있는 것투성이구나!"라고 외치지만 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라는 인식과 만난다(「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 시인이 보기에 삶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시간이다: "오늘 하루/밑지고 판 시간들이/불량하게 길을 막는다"(밤으로의 긴 旅路), 또 "시간은/늙은 여인의 손가락에 늘어붙은 반지처럼 윤택하고/나는 흙더미인 양 무너져/속에서 자꾸 속을 만들며 기어들어간다"(「上院寺 입구가 달라졌다」). 이 인식이 어찌 시인의 인식일 뿐이겠는가. 우리들 역시도 시간 앞에서 상실감을 느끼고 시간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시간 앞에서 존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이 도저한 염세와 냉소 앞에서 시인은 그러나 그냥 주저앉지 않는다. 앞의 시구 후반부를 다시 보자. 시인은 "나는 흙더미인 양 무너져/속에서 자꾸 속을 만들며 기어들어간다"고 했다. 이 지점, "속에서 자꾸 속을 만들"어가는 지점, 김진석이 '소내(疎內)'라 부르는 그 지점에서 시인은 더 나아가려 한다. 그 끊임없는 움직임, 김진석이 '포월(匍越)'이라 부르는 그 움직임 속에서 시인은 나무가 된다. 나무로 생성한 시인은 "나무는/아직 눈앞의 흙을 헤치며 가야 할 길이 멀고"(같은 시)라고 외친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그러나 길이 멀다는 것은 길을 떠나온 자만이 알 수 있고 발언할 수 있다. 길을 떠나지 않은 자는 결코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길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이제 실패는 길을 떠나지 않은 자에게만 속하는 것이 된다. 길을 떠난 자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아직 실패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가고 있을 뿐이다. 길을 떠나 움직여가는 자는 성공과 실패의 단순한 이분법을 가로질러 그 말들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나무는 시인에게서 운동성의 상징이다.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난 시가 「木星에 물 없다」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나무는 움직임 없음의 표상인 것 같다: "말없는 시종들처럼/그들은 서 있었구나/입 감추고 얼굴 감추고/발소리도 감추고/팔만 달고". 그러나 가장 깊은 곳까지 관찰할 때 결코 그렇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라고 왜/밭둑에 버려져 썩어가는 감자처럼/타박타박 길을 걷는 꿈을 꾸지 않겠니!"(「지붕 밑 작은 방」) 나무들은 존재한 대가로서의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그랬구나,/그래서 나무들이/온몸에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두 손 올리고 벌받는 목숨으로 起立하여"), 나무가 전혀 꼼짝도 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순간은 그러나 이른바 정중동(靜中動)의 순간이었으니("그러나/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온 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버티면서 거부하면서 […] 地上으로/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마침내 나무는 "온몸이 으스러지도록/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물 없는 '별' 목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무가 된 시인에게 아직 어려움은 산재해 있다. 하지만 어려움이 아직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의연히 움직여 갈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삶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를 맞이하고 있다: "침식 제공이여!/아직 아무도 잊지 않고 있었구나!"(「침식 제공이여!」). 그것은 심지어 죽음 속에서까지도 그렇다: "나는 네가 살아가는 길을 알고 있다"(「마술은 살아 있다2」). 이제 삶은 죽음 속까지도 파고들었다. 바타이유가 '에로티즘'이라 부른 그것, 죽음 속까지 파고든 삶! 심지어 죽음은 삶의 한 방식으로까지 탈바꿈한다. 그리고 그것이 시인이 나무가 된 비결이었다. 나무는 가장 어렵지만 또한 고귀한 움직임을 사는 존재인 것이다.

  시인은 흙이 되고 나무가 된다. 그는 아주 갑갑한 '무덤 생활'을 하기도 하며(「무덤 생활」 - 얼마나 답답하냐 하면 띄어쓰기조차 안 되어 숨이 콱콱 막힐 지경이다!), 삶의 끝자리 '염전'에서 소금처럼 하얀 뼈만 드러내기도 한다(「上院寺 입구가 달라졌다」 및 「키 큰 女子傳」). 아직 아닌 상태, 완전히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닌 상태, "그래, 조금만 더 밀리면 닿으리라/조금만 더 졸면 닿으리라"(「밤으로의 긴 旅路」). 그러나 그것이 정중동이었음을! "그러나 어둠에 갖힌 내 눈동자는/精蟲처럼 끊임없이 꼬무락거린다"(「어둠에 갖힌 눈동자는 精蟲처럼 꼬무락거린다」). 이제 시인은 나무와 겹치고 나무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나무가 된 시인은 나무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삶의 터전인 산을 버리고 내려온다. 그는 산을 내려오며 생각한다: "왔던 길로 돌아간다/돌아가는 길에는/이상하지, 신비가 없다 […] 내가 피해간 것은 고작/꼼짝도 않고 길을 가로막은/죽은 고양이 같은 사랑/그 길섶 어딘가에/흙투성이 같은 발길질에 차여 두근거리던/나의 뒷모습이 남아 있으리라/나의 그런 뒷모습을 오래 바라본/불발된 포탄의 서늘한 시선이 있으리라"(「下山」). 신비는 사라진 것일까? 멀리 있어도 두근거리는 그 마음은. 사실 그에게는 아직 신비에 닿으려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 노루 사슴 걱정 근심의 불씨여/아직아직 만질 수 없는/지금 내 사랑의/고르지 못한 全裸의 화면이여"(「취한 여자들이 제멋대로 벗어놓은 구두처럼」). 그러나 안타까움이 커질수록, "깨진 손거울/속에 자기 얼굴의 전부를 넣으려고/애를 쓰면 쓸수록 […] 얼굴은 손거울로부터/점점 멀어지"(「창녀의 집」)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안타깝고 또 무척 불안하다. 이럴 때일수록 기억에 회한이 스미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자신의 과거에 미량의 회한이라도 끼여들게 되면 기억은 뒤틀린다. "굽은 나무가 된 뱀 같은 기억"(「어느 날 나 장작인 채로 발견되다」)이 계속 남게 되는 것이다. 그가 "산을 내려가"고 난 뒤의 어느 날 "장작 더미 속에서 장작인 채로 발견"되어 가족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는 그로테스크한 모티브(같은 시)는 어딘가 카프카를 연상시킨다. 그는 자신이 너무 쉽게 해탈하려 한 건 아닌지 불안하다: "물 빠진 갯가에 비스듬히 드러누운/낡은 배 한 척/퉁퉁 불은 몸통과 밑창을 다 드러내놓고/조개 껍질처럼/오래 전 가장 우울했던 기상 개황을 말리며/해탈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배의 죽은 임자를 알고 있다"(「만석동風」).

  이 지점쯤에 시인이 있는 것 같다. 시집 제일 앞에 있는 시 「진술서―검찰에게」에서 "출발 시간에 쫓겨/허겁지겁/폭우가 그친 새벽 산을 내려왔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언젠가는 실수 없이/그 장대하고 아름다운 숲에 묻히기를 바랐습니다"라고 고백한 이유가 그것이다. 이를 일컬어 '세속으로의 해탈'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해도/지는 둥 마는 둥/산새도/나는 둥 마는 둥"(「봉고차 그늘에 누워」) 하다고 느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현재 상태로부터 다시 벗어나고픈 마음이 일기 때문이 아닐까. 나무의 삶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왜, 어떤 이유에서, "출발 시간"에 쫓긴 것일까? 그는 이미 출발하고 있었는데, 그냥 느리게 가면 됐는데, 왜? 시집을 순서대로 읽어가면서, 또 그것이 적절한 시간적 배열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가장 안타까이 물어보고 싶은 물음이 그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