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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예술과 문화 이념의 보수성과 삶의 진보성?

김재인 2002.01.21 07:17 조회 수 : 5087 추천:169

* 이 글은 1998년 가을 고대 대학원 신문에 {지식인 리포트}(민음사 간) 1,2권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발표한 글입니다.

이념의 보수성과 삶의 진보성?

푸코는 어떤 대담에서 자신이 이름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자신이 어떤 책을 내도 사람들이 더 이상 읽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거 푸코가 쓴 거니까' 하면서 다 읽었다는 듯이 찬사를 바치거나 비난을 해댈 뿐이라는 것. 그러니까, 푸코는 만연해 있는 '나쁜 독서' 풍토를 지적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잘 쓰지 못하는 것보다 잘 읽지 못하는 것이 몇 배 더 나쁜 것이니까.

나쁜 독서의 예는 한국의 글 판에도 무수히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풍문에 의한 독서이다. 내가 늘 궁금해하면서도 풀 수 없는 의문. 밑도 끝도 없는 저 소문의 진원지는 과연 누구일까? 그래서 쓸데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한번 꼼꼼하게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그런 소문의 진원지를 추적하는 일이다. 좀 철 지난 예 하나. 도정일 선수의 글을 보면 이른바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나는 그 이론가들이 과연 그런 얘기를 한 적이나 있는지 의문을 품을 때가 많다. 그런데 그 이론가들은, 있지도 않은 허깨비 이론가들은, 무수히 터지고 깨지고, 한마디로 개박살이 난다. 이상한 일이다. 반성도 없다. (내가 이런 비판을 하면서, 글의 서명과 실존인의 이름이 혼동되지 않기를 기대해야만 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도정일 선수에게 강펀치를 날렸던 적이 있는 김진석 선수는 '그나마 그의 글이 제일 정돈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글을 선택했다고 말하는데, 동감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는 말을 사용하는 데서 생겨나는 문제.

나쁜 독서의 원인은 조급함에 있다. 조급함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하나는 불성실함이고 또 하나는 비민주적 상황이다. 문제는 그 두 원인이 종종 혼동된다는 데에 있다. 그 혼동은 개념적인 혼동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는 것이 다급했기 때문에 불성실한 거 꼼꼼히 따질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식. 그러나 그것이 불성실함을 가릴 근거는 되지 못한다. 대체로 '과거 청산'이란 그 불성실함이 어떤 경우에도 존립할 수 없게 만들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이 판에서, 낡았지만 제일 많이 쓰이는 수법은 편가르기. 모든 편가르기는 경찰의 수법이다. 푸코가 든 예를 빌자면, 사람들은 책임을 물을 사람이 필요할 때 지식인을 찾는다.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데 지식인은 어디서 무엇을 하길래 코빼기도 안 보이느냐! 지식인 대 우리 순진한 보통 사람들. 헌데 저들은 원래 지식인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도 잘못은 다, 아니 거의 대부분, 지식인에게 있다. 나는 이런 식의 판단이 못마땅하다. 부정과 원한의 심리학.

물론 토마스 만의 말처럼, 사람이 수상쩍으면 그 사람 말은 들으나 마나이다. 이 정책을 따르면 대개 실패는 면한다. 하지만 어떤 글을 대할 때 남이 분류한 진영의 한 쪽에 집어넣고서 읽는다는 것은 대단히 무책임한 독서이다. 그것은 기본기도 못 갖춘 독서 태도이다. 특히 전문가임을 자처하는 사람에게는. 그러나 무수히 이런 짓이 자행되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지식인 호출이 지식인들 내부에서 일어날 때 발생한다. "지식인 리포트"와 같은 식으로 제출되는 그 호출 현상은, 편집자의 선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저 편가르기 권력을 행사한다. 한때 유행했던, 좌파/자유주의자의 대립도 한 예이다. 좌파니 자유주의자니 하는 양자택일 식 편가르기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정치적 권력 행사이다. 그 있지도 않은 대립에 의거한 편가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숙청을 당했다. 이제 보면, 그 개념들은 이미 80년대적 무게를 너무 많이 담고 있다. 그래서 그 무게를 벗어버리고자 발버둥을 치지만, 개념의 무게란 개인의 노력으로 가볍게 만들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법이다.

러시아 혁명기에 일어났던 딜레마-역설 하나.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은 레닌은 곧 난관에 부딪힌다. 이 소련을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하는가? 고민 끝에 레닌은 기존 체제의 행정 관료들을 거의 대부분 다시 쓰게 된다. 오늘날의 진단. 혁명의 실패는 이들 테크노크라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글 판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발생한다는 데에 있다. 즉 기존의 개념을 개정 없이 계속 사용하게 된다는 것, 또는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 좌파와 자유주의자의 대립이 '없는 대립'이었고 '잘못된 문제 설정'이었다면, 그 개념들은 폐기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조급하게 굴다 보면 자꾸 그 개념들을 사용해야만 한다.

시대가 어려웠다고 변명이나 하지 않으면 그나마 나을 성싶다. 피는 아무 것도 증명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니체였다. 피가 증명하는 것은 그 사람의 열정뿐이다. 십자군 전쟁에서 흘린 무수한 피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증명해주지 않는다. 걸핏하면 반제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 운동을 내세우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 개인의 전유물도 아니고 훈장도 아니다. 입만 살아있는 사람 치고 사기꾼 아닌 사람 별로 못 봤다. 정말 중요한 것은 피가 아니라 힘이다. 힘으로 생성할 수 없는 피는 헛된 피일 뿐이다.

인문-사회과학자의 힘은 실존이 담긴 정확한 얘기를 하는 데서 나온다. 보통 사람이 그 말을 듣건 말건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남들이 듣기 좋은 그럴듯한 말만 골라서 해서도 안 된다. 보통 사람이 자기 얘기를 꼭 들어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학자가 아니라 정치가이다. 정치가는 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치가를 존경하는 딱 한 가지 이유, 그것은 정치가가 망각의 귀재라는 점이다. 정치가는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꽤 오랫동안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자들은 정치가로서만 존재해 왔다.

나는 야당 한나라당의 입론이 이다지도 서툴 수가 있을까 하고 가끔 감탄을 한다. 그것은 논객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확한 얘기를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잘못을)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아는 것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한나라당 식 논리이다. 이것이 소위 '정치 논리'이다. 인문-사회과학은 이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일을 한다. 그러나 정확한 얘기는 아무나 못 한다. 넓은 안목과 분석과 사색의 깊이만이 정확한 얘기를 낳는 법이다.

나는 이른바 '좌파'이건 '자유주의자'이건 인문-사회과학자라면 그런 정확한 얘기를 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많지는 않더라도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정확한 얘기를 하면 누구에게나 동의를 얻거나 욕을 먹기 마련이다. 몇 가지 예를 보자.

오늘날 지식인은 동 서기만큼도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인문학의 위기가 문제가 아니라 실용적인 학문마저 먼저 위기인 것이 문제다. 시인이 대중의 언어를 가지고 시를 써야하는 게 아니라 대중이 시인의 언어를 써야 한다. 철학자는 대체로 회의적 비판적 인간적이기에 일반인들과는 다르다. 박정희 모델의 단기적인 성공에는 중장기적인 몰락의 씨앗이 있었다. 중국과 연대하여 아시아 지역 전체가 모라토리엄을 카드로 버텼어야 한다. 재벌보다 노동자의 힘이 세면 김 대통령이 아니라 노태우나 전두환도 친노동적인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진보 세력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충효를 덕목으로 삼고 대를 이어 충성하고 가부장적이고 혈연 중심적인 유교적 사회주의를 찬양한다. 대학 문제를 얘기할 때 시간 강사 문제를 먼저 꺼내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80년대 운동권의 전향은 내적 필연에 따른 것이었다, 등.

방금의 예들은 {지식인 리포트} 1, 2권에서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얘기들을 몇 가지만 추려본 것이다. 여기에서 좌파와 자유주의자의 표지를 분명하게 짚어낼 수 있겠는가? 요컨대 문제는 정직한 정확함에 있다.

남는 문제는 무엇인가? 소위 좌파의 유연한 시각과 포용력. 그런 의미에서 {지식인 리포트} 2권에 임지현 선수가 쓴 [이념의 진보성과 삶의 보수성]이란 글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거의 500쪽에 육박하는 리포트에서 삼분의 이 가량이 '나무 보기 민망한' 글을 썼다는 점과 대조적이다.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은, 환경 문제를 소리 높여 외치기 전에, 나무를 원료로 만들어지는 종이 사용이나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것. 이런 직접적인 실천만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근본이라고, 나는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