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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 이 글은 1998년 6월 1일자 <이대학보>에 실렸던 글입니다.


    68사상 - 체제 저항의 핵심, 고귀한 욕망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프랑스 전후(戰後) 사상계의 변화는 세대론적 갈등을 주요한 동인(動因)으로 갖고 있다. 엄밀한 구분은 아니지만 1950년대의 실존주의적 현상학, 1960년대의 구조주의, 1970년대의 탈구조주의란 실은 싸르트르의 세대, 레비스트로스의 세대, 푸코의 세대가 실천한 철학의 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세대를 중심으로 철학 사조를 구분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지만, 예컨대 실존주의 사상가 싸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1960년에 나왔다든지 탈구조주의 사상가 데리다의 『기록과 차이』, 『그라마톨로지』 등이 1967년에 나왔다든지 하는 연대기적인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과장되어 뒷세대의 철학이 앞세대의 철학에 대한 단순한 '반대를 위한 반대'로서 등장했다고 여겨져서는 안 된다. 사상의 변화는 결국 문제 의식 및 감성의 변화와 나란히 나아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상계에서 '68혁명'은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해석한 최초이자 기념비적인 저서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1972년에 나온 『안티 오이디푸스』일 것이다. 이 책의 핵심적인 질문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스피노자가 제기했었고 라이히가 재발견했던 다음 문제이다: <왜 사람들은 그들의 예속을 위하여 싸우는가?> 사람들이 더 많은 세금과 더 적은 빵을 위해서 싸운다는 것. 68년에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폭발적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만 동시에 그만큼 빨리 자신들의 자유를 포기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때 대중들이 오해나 착각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서 그렇게 움직였다는 점이다. <아니다, 대중은 속고 있지 않았으며, 그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욕망하고 있었으며, 설명해야 할 것은 이 군중심리적 욕망이다.>

  1968년은 바로 이 욕망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구조'에 따라 움직이지도 않고 '주체'의 의식과 자유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러면 그 이전의 철학은 어떠했는가? 조금 단순화해서 살펴보면, 50년대의 사상인 실존주의적 현상학은 인간 주체의 무한한 자유를 신뢰했다. 인간은 자유를 무기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서 싸운다. 보봐르의 저 유명한 선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질을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60년대의 사상인 구조주의는 이러한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불신한다. 실존주의와는 달리, 구조주의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힘이 구조에 있다고 본다. 각 개인은 제아무리 자유로우려고 발버둥쳐도 구조에 종속되어 있고 또 제약되어 있다. 주어진 코드(code)의 제약 아래에서만 인간은 자유울 수 있지만, 그 자유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68년이 보여준 것은 주체의 자유로운 의식도 구조의 제약도 아니었다. 사태는 보다 복잡하게 진행됐으며, 거기서 발견된 것이 바로 욕망이다. 욕망은 그 자체로 생산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를 가로질러가며 작동한다. 하지만 욕망은 무엇이건 무차별적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대중들은 해방을 바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예속(파시즘)을 바랄 수도 있다. 파시즘이란 근본적으로는 자기 자신과 타인을 노예 상태로 이끌어가는 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68년의 희망과 배신이 보여준 것은 그것이었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분석하고자 한 것은 그러한 '욕망의 사회적 생산'과 '욕망의 작동 메커니즘'이었고, 푸코의 표현을 빌자면 '비파시스트적인 삶'의 방식을 위한 제안이었다. 따라서 이 욕망의 '질(質)'을 판별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욕망은 무차별적이지만 욕망이 작용하고 생산하는 것은 본성상 차이가 나는 두 가지 방향성을 따라서이다. 그 두 방향성의 이름이 '자유'와 '예속'이다.

  프랑스 사상계의 니체 활용은 이 맥락에서 납득될 수 있다. 사실 68년 이후 세대의 철학을 특징짓는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니체의 적극적 수용이다. 탈구조주의 진영의 주요 사상가들(푸코, 들뢰즈, 데리다, 료타르, 바르트, 코프만, 이리가레이 등)은 모두 니체를 화살촉으로 사용했다. 권력, 차이, 예술, 다양성, 긍정 등 68년 이후에 부각된 주요 철학적 주제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니체와 관련을 맺는다. 그래서 심지어 마르크스마저도 니체적 독법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런 해석은, 예컨대 니체를 히틀러와 무솔리니적인 파시즘의 원류에 놓고 마르크스의 해방적 사상과 대립시키는 루카치의 해석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니체는 마르크스보다 더 해방적인 사상가로 평가 받기에 이른 것이다.

  68년 이후 세대에게 있어서는 진리마저도 그 자체로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 니체를 따라서, 이들에게도 진리란 '진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리라고 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저열한 진리나 자잘한 진리들로 구성된 어리석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는 진리냐 아니냐에 따라 나뉘지 않는다. 오히려 가치의 구분은 이 '고귀함'과 '저열함' 사이에서 나온다. 고귀함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puissance)을 끝까지 발휘하는 데에서 비롯하는 해방적인 삶의 방식이며, 저열함이란 타인의 힘을 쪼개고 약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겨우 유지시켜 나가는 예속적인 삶의 방식이다.

  저열한 삶의 방식은 파시즘으로 나아가게 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삶 속에서 파시즘을 구성한다. 파시즘이란 정치 권력의 문제이기 이전에 자신과 타인을 예속시키고 노예로 만드는 삶의 방식을 뜻하기 때문이다. 가족, 부부 관계, 직장, 학교 등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자행되는 파시즘은 저열함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68혁명' 이후 철학의 중요한 발견이다. 이 발견과 더불어 68년도 이후의 철학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자기 자신 및 타인들과 어떻게 해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삶을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미학적 윤리'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며, '어떻게 고귀한 삶의 방식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묻는다. 우리가 이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면 이들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기 위해서이다. 끝으로 68년 전후로 전개된 독자(獨自)적 사상들에 관한 대단히 좋은 해설서로 크리스티앙 데캉이 쓴 『오늘의 프랑스 철학사상』(김화영 옮김, 책세상)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