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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철학과 철학사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 비판

김재인 2002.01.29 01:26 조회 수 : 5690 추천:54

* 이 글은 1994년 소광희 선생님 수업의 기말 논문으로 제출되었던 글입니다.

리쾨르 비판은 적절하게 수행되었다고 보지만 대안이 되는 시간관에 대한 논의는 많이 부족한 편입니다. 리쾨르는 은유론, 시간론, 정신분석 등의 분야에서 변증법을 가장 철적하게 적용하는 대표적인 현대 철학자입니다. 이 글에서 진행된 리쾨르 비판의 의미는 변증법 비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 에 있어서 시간의 종합 작용 으로서의 이야기의 역할과 그 한계


1.

이 글은 리쾨르의 방대한 저술 {시간과 이야기}(주1)의 이론적 기초를 짓는 부분인 1부: "이야기와 시간의 순환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리쾨르는 그 저술을 통해 다음의 명제를 밝히고자 한다: "시간은 이야기 양태를 통해 분절되는(articulated) 한에서 인간적인 시간이 되며, 이야기는 시간적 실존의 조건이 될 때 그 충분한 의미를 획득한다."(주2) 이 명제에 대한 증명이 1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저술의 전체를 관류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론적 차원의 논의가 1부에서 어느 정도 완결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2부 이하에 대한 검토를 보류하면서 이 글의 범위를 1부에 한정시키고자 한다. 우리는 리쾨르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 실존의 조건은 시간에 의해 끊임없이 파편화되는데, 그러한 분열은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결코 해소될 수 없으며 오히려 예술적 형상화의 차원에서 그 분열이 극복될 수 있다.

리쾨르는 자신의 명제가 명백히 순환적(circular)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야기성과 시간성의 순환은 악순환이 아니라 건전한(healthy) 순환이라는 것을 주장한다.(주3)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와 시간이 진정한 순환 관계에 있는가를 묻고자 한다. 우리의 분석에 의하면 리쾨르에게서 시간과 이야기는 동일한 수준에 있지 않다. 오히려 시간은 이야기 옆에도 있고 이야기 내부에도 있다.(주4) 말하자면 이야기와 함께 행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시간이 있는가 하면, 이야기의 형식적 요건 중의 하나인 시간이 있다. 이때 리쾨르는 그 두 이야기를 별반 구별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이야기1과 시간은 대립적인 것으로 상정될 수 있지만, 이야기2는 시간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필수적인 요소로서 자기 자신 안에 포함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신학적으로 표현해서 리쾨르가 시간과 이야기를 각각 惡과 善의 편에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리쾨르에게 있어서 훨씬 중요한 것은 시간을 자기 안에 갖고 있는 이야기 즉 이야기2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쾨르는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이 점을 본문에서 밝힐 것이다.

그러면 리쾨르가 시간과 이야기의 대립을 이런 식으로 - 적대적 관계로 - 설정한 것은 어찌 된 연유인가. 우리는 그것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잘못 제기한 물음을 리쾨르가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데서 원인을 찾는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영원과의 대비 속에서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을 끝까지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대비가 리쾨르에게 있어서도 계속 각인되어 있음을 우리는 그가 시간에 대해 보이는 부정적 평가로부터 알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 11권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내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잘 알지만,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서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대답을 못하고 만다." 왜 그는 그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가? 거기에는 하나의 아포리아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현재는 지나가고 있으며,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것은 측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존재/비존재의 아포리아, 시간 측정의 아포리아를 풀고자 한다. 시간이 무엇인지 대답하기 위해서는 그 아포리아를 푸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아포리아가 진정한 아포리아인지를 검토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물음의 목적이 시간에 대한 평가절하와 영원에의 갈구를 이끌어내는 데 있음을 보일 것이다.


2.

"시간은 이야기 양태를 통해 분절되는 한에서 인간적인 시간이 되며, 이야기는 시간적 실존의 조건이 될 때 그 충분한 의미를 획득한다." 이 주장의 기초를 닦기 위해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11권에 나오는 '시간 경험의 아포리아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에 나오는 '플롯 짜기'(mythos, emplotment)를 차례로 검토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두 개의 상이한 출발점을 놓는다. 리쾨르가 이 두 저자를 선택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주5) 첫째로 그 두 저자는 상호 독립적으로, 다른 편의 주제에 관한 언급 없이, "시간의 역설"이라는 문제와 "이야기의 可知的 구성"(intelligible organization of narrative)이라는 문제를 깊이 성찰했는데, 이러한 점이 리쾨르의 명제가 갖는 순환성에 따로이 접근하는 두 길을 열어 주리라는 것이다. 둘째로 그 두 저자는 서로의 이면(inverted image)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아우구스티누스의 분석이 "영혼의 본질 그 자체를 형성하는 조화(concordance)에의 갈망을 부조화(discordance)가 끊임없이 침해하고 있다"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보여주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은 "플롯의 통합형상화 작용(configuration) 속에서 부조화에 대한 조화의 우위(dominance)를 설립"하고 있다. 이를 통해 리쾨르는 시간의 부조화적 특성이 이론적인 방식의 해결을 볼 수는 없으며 단지 예술적(poetic) 형상화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과 이야기의 순환성을 건전한 순환으로 만들기 위해 리쾨르는 '모방/모방행위'(mimesis)라는 말을 매개자로 도입한다. 리쾨르에 의하면 미메시스에는 세 가지 의미 또는 양태가 있다: "우리가 행위 질서에 대해 갖는 친숙한 선이해에 대한 지시"(즉 prefiguration, mimesis1), "시적 구성의 영역으로의 돌입"(즉 configuration, mimesis2), "선이해된 행위 질서의 시적 재형상화를 통한 새로운 통합형상화"(즉 refiguration, mimesis3).(주6)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분석에서 취한 이 확장된 의미의 모방/모방행위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리쾨르가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전통'이라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전통은 혁신(innovation)과 침전(sedimentation)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된다."(주7) 전통 속에서는 양립 불가능한 듯 보이는 혁신과 침전이 '변증법'적으로 화해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세계(지평) 속에서 창조적 행위를 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後世에 줄 수 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선대의 행위의 산물을 우리의 조건으로 전수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행위가 가해진 새로운 산물을 후대에 새로운 조건으로 전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이 반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상승-발전하는 목적론적인 반복이다. 이것을 전통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우리는 세계 또는 지평은 시간(역사)이 흐름에 따라 점점 확장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리쾨르가 미메시스의 나선형적-상승적 순환이라는 측면을 강조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이러한 부분이다. 말하자면 미메시스2를 거쳐 미메시스1이 미메시스3이 될 때에는 뭔가 창조적 변화가 첨가되며 이렇게 변화된 미메시스3이 다시 미메시스1의 자리로 오고 그것은 새로운 미메시스2를 통해 새로운 미메시스3이 되고... 이러한 과정이 계속 반복되리라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리쾨르가 미메시스의 세 단계의 순환성, prefiguration - configuration - refiguration의 순환성, 전통 내에서의 혁신과 침전의 순환성, 전통 과정에서의 세계 또는 지평의 확장 등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순환성은 시간과 이야기의 순환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야기라는 말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리쾨르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이야기"라는 말을 定義 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리쾨르가 이야기라는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몇몇 개념(플롯짜기, 미메시스)을 재규정해서 사용함으로써 도입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주8) 우선 중요한 것은 플롯 짜기라는 개념인데, 그것의 기능적 측면을 리쾨르는 이야기라는 용어로서 사용하려고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롯 짜기'라는 용어는 리쾨르에 의하면 '행위의 모방'(mimesis praxeos) 및 '사건의 조직'(organization of events)과 거의 동의어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살펴야 할 것은 "mimesis praxeos"라는 표현에서 목적적 소유격으로 등장하고 있는 '행위'라는 말이다. 리쾨르가 파악하기에 행위의 세계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이른바 행위가 갖는 의도성의 측면, 규범적 질서의 측면, 시간내부성의 측면이다.(주9) 이 각각은 志向性을 갖고 있는 人間, 상징적 분절 능력을 갖고 있는 言語(이야기1), 분산되는 경험 형식으로서의 時間의 다른 표현이다. 여기서 우리는 리쾨르가 말하는 '행위'가 어떤 구체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일종의 형식적 규정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리쾨르는 행위가 행위인 한에서는, 다시 말해 행위가 행위일 수 있기 위해서는, 행위 안에 '인간적', '언어-규범적(이야기1적)', '시간적' 측면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리쾨르가 이야기라는 용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 짜기 또는 미메시스에서 빌어왔다고는 하나 그 용어는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행위의 구성 요소라는 의미에서 행위의 내부에 속하는 '언어-규범적' 측면이다(이야기1). 이때 이야기는 그것이 이야기되건 되지 않건 행위가 존재할 때는 반드시 존재하는 무언가가 된다. 즉 행위의 행위성을 규정하는 한 요소이다. 이를 좁은 의미의 이야기(이야기1)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야기는 행위를 모방하는 것으로 이해된다(이야기2).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즉 플롯 짜기나 미메시스)는 행위의 일부이기를 넘어서서 행위를 포괄하는 무엇이다. 이를 넓은 의미의 이야기(이야기2)라 할 수 있다. 이야기를 이렇게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하게 되면, 다시 말해 행위가 이야기(미메시스)의 대상이자 동시에 이야기(미메시스) 그 자체가 일종의 행위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행위와 이야기(미메시스)를 순환적 관계로 이해할 수 있으며, 형식적 규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을 동의어로 취급할 수 있다. 미메시스가 미메시스의 세 양태를 아우르는 포괄개념이듯이, 이야기도 두 양태의 이야기 행위를 아우르는 일종의 포괄개념이자 동시에 행위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 우리는 리쾨르한테서 플롯 짜기, 미메시스, 행위, 이야기가 거의 동의어적으로 교환 가능하게 쓰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이해했을 때, 시간과 이야기의 순환은 진정한 순환이 아니다. 진정한 순환은 미메시스 내부에, 행위 내부에, 다시 말해 이야기(특히 이야기2)의 내부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것 내부에 분열을 낳는 요소로 존재한다. 시간은 이야기(이야기1)의 타자이지만, 이야기(이야기2)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가 아니라 이야기(이야기2)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나쁘거나 악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야기의 존립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시간은 부정성을 지닐 이유가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존립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수적으로 요청되기 때문이다.

인간 행위는 시간에 의한 분열과 이야기에 의한 종합의 과정이다. 전통 안에 혁신과 침전의 운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 안에도 혁신과 침전의 운동이 있는데, 이 운동의 作因이 시간과 이야기1이다. 즉 시간(성)은 파열, 분열의 계기이며 이야기1은 조직화, 종합의 계기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행위라는 계열을 따라서 상승운동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쾨르가 말하는 시간과 이야기의 순환이라는 것은 행위 그 자체의 순환적 발전이라고 얘기할 수 있으며, 이는 이야기의 자기 순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앞에서 우리는 리쾨르가 시간의 부정성과 이야기의 긍정성을 대비시켜 말하고 있음을 보았다: 시간은 인간 실존에 주어진 부정적 조건이고 이야기는 그 부정성을 그때그때 극복하는 수단이다. 시간에 대한 이런 부정적 평가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 부정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에 대비되는 이야기의 긍정성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대비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과 영원의 대비에서 나왔다고 본다. 신적인 영원에 대비되지 않는다면 시간은 부정적으로 평가될 이유가 없다. 리쾨르도 지적했듯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시간에 관한 물음, 시간의 아포리아를 영원이라는 테두리(limit) 안에 위치시켜 다룸으로써 그 부정성을 부각시킨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나쁜 부정적인 것으로서 인간 실존에 주어져 있기 때문에, 신의 세계를 갈망함으로써 그 속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백} 11권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사실을 조금 살펴보도록 하자.(주10)

그 과정을 잠시 되살펴보자.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현재는 지나가고 있으며,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시간의 존재/비존재의 아포리아를 낳는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오직 현재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와 미래가 어디 있든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 즉 과거와 미래가 어디 있든 거기에 있어서 그것은 미래도 아니오 과거도 아니며 현재라는 것입니다. 사실 거기에 있어서도 미래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기에 아직 없고, 또 만일 거기에 있어서도 과거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기에는 이미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 무릇 있는 것은 오직 현재로서만 있습니다."(주11) 이처럼 현재가 강조되는 것은 신적 상태인 영원에 가장 근접한 것이 현재이기 때문이다: "오직 현재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시간이 아니라 영원인 것이다."(주12) 그런 다음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존재/비존재 아포리아를 풀기 위해 과거, 현재, 미래를 현재적인 것으로 만들어 영혼 안에 위치시킨다.(주13) "엄밀한 의미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하게는 세 개의 시간은 과거의 것에 관한 현재, 현재의 것에 관한 현재, 미래의 것에 관한 현재인 것입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의식(anima) 속에 있으며 의식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과거의 것에 관한 현재는 기억이며, 현재의 것에 관한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것에 관한 현재는 기대인 것입니다."(주14)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시간은 처음과 끝이 있는 유한하고 한정된 것이다.(주15) 다시 말해 처음 이전과 끝 이후가 無에 의해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와 종말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대전제였기 때문에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찬송가의 암송 예(주16)에서도 잘 보이는데, 거기서는 유한한 크기의 전체 찬송가를 암송할 때 늘어나는 과거와 줄어드는 미래와 현재적 암송 상황이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영혼이 어느 한 계기로 집중(inetntio)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다른 계기는 분산(distentio)을 겪는다. 영혼의 집중과 분산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분산은 결코 막을 수 없는 것이며, 영원과 대비할 때 그 분산성은 단순환 확장의 의미를 넘어서 분열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에 대해 갖고 있는 전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른바 통속적인 시간관이다. 그것은 시간을 點적인 순간의 합으로 생각하며, 과거-현재-미래의 계열성(seriality)을 상정하는 시간관이다. 이 시간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 "시간은, 마치 직선이 점들의 집합이듯이, 현재라는 점들이 무한히 앞뒤로 연속으로 늘어서서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 지금 있는 현재는 아직 현존하지 않는 미래의 점이 밀려와 새로 현재가 됨으로써 과거로 밀려나게 되고, 따라서 저 현재가 된 미래도 또 다른 현재가 될 미래에 의해 밀려나고 다시 과거가 되며, 이 현재가 된 미래도 다시 또 과거로 밀려나게 되고, 비슷한 과정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시간관."(주17) 이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관 아래 놓인 전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전제는 잘못된 것이다. 이 점은 뒤에서 검토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시간의 존재와 비존재가 과연 아포리아인지 점검해보자. 우리의 대답은: 시간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다(Time is neither being nor non-being), 혹은 다르게 말하면 시간은 존재이기도 하고 비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존재/비존재는 아포리아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현재는 지나가고 있으며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포리아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순간에 존재성을 특권화시킴으로써 그 아포리아를 해결하려 한다. 이때 현재의 존재성은 神的 영원의 징표로서 의미를 지닌다.

엄밀하게 고려해 볼 때, 현재는 순수 생성의 순간이며 그렇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과거와 미래는 엄밀한 의미에서 생성의 순간이 아니며 이처럼 생성하는 현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항상(aei)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은 순수 생성의 순간인 현재와 존재의 계기인 과거, 미래를 함께 불러 시간이라 하고 있다. 이처럼 존재의 계기와 생성의 계기가 함께 있는 것이 시간이라 할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아포리아는 진정한 아포리아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시간은 단일한 계열을 따르지도 않으며 그 계기들 모두가 - 과거, 현재, 미래가 - 같은 양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그 아포리아에 대한 이론적인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리쾨르의 견해가 맞을지도 모르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아포리아는 진정한 아포리아가 아닌 가짜 아포리아이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는 물음을 다시 물음으로써, 그 아포리아가 나오게 된 배경 및 그것의 전제를 성찰함으로써, 올바른 방식으로 문제를 다시 설정해야 해결을 볼 수 있게 된다. 잘못 제기된 문제를 예술적 형상화를 통해 푸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 비록 예술적 형상화 그 자체는 의미 있는 것일지라도.

이제 시간 계기들이 연속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존의 관계에 있다는 우리의 논의를 조금 더 살펴보자. 과거, 현재, 미래는 우리의 상식적 이해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연속되는 계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공존의 계기이다. 이에 관해서는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분석이 도움이 되겠다. 두 개의 긴 인용은 각각 시간 사유에 있어서 베르그송과 니체가 가져온 혁명적 의의를 서술하는 자리에서 등장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현재'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우리는, 현재는 다른 현재가 그것을 대체할 때에만 지나갔다(est passé)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해보도록 하자: 만약 옛 현재가 그것이 현재인 동시에 지나가 버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새로운 현재가 나타나겠는가? 만약 현재가 현재인 동시에 지나가 버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어떤 현재이건 지나갔겠는가? 만약 과거가 무엇보다도 그것이 현재였던 것과 동시에 구성되지 않았었다면, 어떠한 과거도 구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시간의 근본적인 지위와 기억의 가장 심오한 역설이 있다: 과거는 그것이었던(a été) 현재와 동시간적(comtemporain)이다. 만약 과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만약 즉각 그리고 지금 과거가 지나갔던 것이 아니라면, '과거 일반'은 존재하는 것이 결코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이 과거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즉각 구성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저편에 있는(ultérieur) 현재에 기반해서는 더더욱 재구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과거가 현재 - 이 현재의 과거가 되는 저 현재- 와 공존하지 않았다면, 그 과거는 구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어지는 두 계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두 계기를 지칭한다; 그 하나가 현재인데 그것은 끊임없이 지나가고, 다른 하나는 과거인데 그것은 끊임없이 존재하며 그것을 통해 모든 현재가 지나간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순수 과거가, 일종의 '과거 일반'이 존재한다: 과거는 현재를 뒤따르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그것 없이는 현재가 지나갈 수 없는 순수 조건이라고 상정된다. 바꿔 말해, 각각의 현재는 과거로서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간다(chaque présent renvoie à soi-même comme passé)."(주18) - 또, "어떻게 과거가 시간 중에서 구성될 수 있는가? 어떻게 현재가 지나갈 수 있는가? 지나가는 순간은, 만일 그것이 이미 현재인 동시에 과거가 아니라면 또한 현재인 동시에 미래가 아니라면, 결코 지나갈 수 없을 것이다. 만일 현재가 그 자체로 지나가지 않는다면, 만일 현재가 지나간 것[과거]이 되기 위해 새로운 현재를 기다려야 한다면, 과거라는 것은 결코 시간 중에서 구성되지 않을 것이며, 이 특정한 현재는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기다릴 수 없으며, 순간이 지나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다른 순간들을 위해 지나가기 위해서는) 순간은 현재인 동시에 과거이고 현재인 동시에 미래여야만 한다. 현재는 과거 및 미래로서의 자기 자신과 공존[병존]해야 한다. 한 순간과 다른 순간들과의 관계를 정초하는 것은, 순간이 현재 과거 및 미래로서의 자기 자신과 갖는 종합(적) 관계이다. 따라서 영원 회귀는 [시간의] 지나감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존재하는 무언가의, 하나의 또는 동일한 무언가의 회귀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영원 회귀'라는 표현에서 동일한 것의 회귀로 여길 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회귀하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 회귀 그 자체는 생성과 지나가는 것을 긍정하는 한에 있어서 존재를 구성한다. 회귀하는 것은 하나(l'un; hēn, 一者)가 아니며, 회귀 그 자체는 다기함과 다양함을 긍정하는 하나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영원 회귀에서 동일성(identité)은 회귀하는 것의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차이를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회귀가 필요하다는 사실(le fait de revenir pour ce qui diffère)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영원 회귀는 하나의 종합으로 생각되어야만 한다: 시간과 그것의 차원들의 종합, 다기함과 그것의 재생산의 종합, 생성과 생성을 긍정하는 존재의 종합. . ."(주19)


4.

우리는 본문에서 두 가지를 검토했다. 우선 시간과 이야기의 순환성은 진정한 순환성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시간은 이야기의 옆과 내부에 있기 때문에 순환은 특정한 의미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살폈고, 다음으로 시간성이 영원성과 대비되면서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는 기독교적 편견은 통속적 시간관과 결합되어 시간성의 의미를 폄하시키는데 이는 잘못된 전제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글을 마치면서 리쾨르의 '변증법'적 경도를 지적하고 싶다. 변증법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목적론적-종말론적 사유이다. 변증법 안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결국 無化되는데, 그 이유는 끝(telos, eschatos)에 가면 모든 것이 화해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유일한 끝을 향한다. 그렇기에 - 모든 것은 헛되도다. 그러면서도 변증법적 사제는 그 헛됨, 무상함을 生 속에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일을 하는 일종의 의사를 자처한다. 그 의사는 니체의 지적대로 "상처에서 오는 고통을 가라앉히면서, 동시에 상처에다 독을 뿌린다."(주20) 이런 의미에서 리쾨르는 부분적으로 변증법적 사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글에서는 리쾨르의 시간에 대한 부정적 평가 부분에 초점을 맞춰 그것을 비판-극복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의 긍정성을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리쾨르의 성찰에 의미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적 원천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리쾨르의 저술 속에는 예술적 경도도 또한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변증법적 성격마저도 극복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의 형식인 변증법과의 대결에서 예술은 얼마만큼 힘을 빼앗긴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리쾨르라는 한 개인의 사유 궤적을 들여다보는 일은 니체가 말하는 생의 부정과 생의 긍정이라는 싸움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1994년 6월)




<주석>

1) Paul Ricoeur, Temps et Récit , 1권(1983; 영역 - Time and narrative , 1984), 2권(1984; 영역, 1985), 3권(1985; 영역, 1988). 이상 불어본은 Paris: Editions du Seuil에서 영어본은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에서 출간됨. 이 글은 영역본을 텍스트로 하고 있다.

2) Ricoeur, 앞의 책, 1권, 52쪽. 또 이와 비슷한 구절이 3쪽에도 언급된다: "시간은 이야기의 방식을 좇아 조직되는(organized) 한에서 인간적 시간이 되며, 이야기는 시간적 실존의 특징들을 모사하는(portray) 한에서 유의미하다."

3) Ricoeur, 같은 책, 3쪽.

4) 편의상 前者를 이야기1로 後者를 이야기2로 부르기로 하겠다.

5) Ricoeur, 같은 책, 3 - 4쪽 참조.

6) Ricoeur, 같은 책, xi 및 1부 3장: "시간과 이야기: 삼중의 미메시스" 참조.

7) Ricoeur, 같은 책, 68쪽.

8) Ricoeur, 같은 책, 1부 2장: "플롯짜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읽기" 참조.

9) 리쾨르는 이들을 각각 행위의 구조적, 상징적, 시간적 특징이라 부르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Ricoeur, 같은 책, 54 - 64쪽.

10) 이에 대한 극히 섬세한 논의가 Ricoeur, 같은 책, 1부 1장(5 - 30쪽)에서 다뤄지고 있다.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시간관 즉, 시간의 부정적 성격을 그대로 수용해서 그것을 심화시키고 정교화한다. 리쾨르는 철학사를 뒤져 가며 시간에 관해 중요한 說을 남긴 사람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후설,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의 시간론을 검토하고 있는데, 그 결과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시간관의 비관적 재해석에 그치고 만다. 이런 맥락에서 시간의 부정성을 극복하기 위해 이야기(récit, narrative)의 긍정성을 도입하려는 리쾨르의 전체 기획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방대한 기획(리쾨르의 Time and Narrative는 3권 4부로 되어 있다)은 신학적 작업의 성격을 지닌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적 세계로의 구원을 얘기했다면, 리쾨르는 이야기 세계로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부정적 성격이 워낙 강조됐기 때문에, 리쾨르의 시도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도와 비슷하게도) 이야기의 긍정성을 시간의 부정성에 함몰시키는 결과를 갖는다.

11) 아우구스티누스, {고백} 11권 18:23절.

12) 소광희, [시간과 시간의식 - 아우구스티누스와 후설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논문, 1977, 13쪽.

13) 현재(present)의 어원인 'prae-esse'는 '(영혼) 앞에 있음'을 의미한다. 소광희, 같은 글, 23쪽 참조.

14) 아우구스티누스, {고백} 11권 20:26절.

15) 소광희, 같은 글, 18 - 19쪽 참조.

16) 아우구스티누스, {고백} 11권 28:38절 참조. 리쾨르는 이 부분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Ricoeur, 같은 책, 16 - 22쪽 참조.

17) 김진석, [포월의 예술, 영화], 세계의 문학 1994년 여름호, 315 - 316쪽. 이 글 이외의 여러 곳에서 전개되는 김진석의 시간에 관한 사유는 대단한 주목할 필요가 있으나, 그것을 검토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며 또 다른 작업대를 요한다.

18) Gilles Deleuze, le Bergsonisme , Paris: PUF, 1966, 53-54쪽. - 이 책은 김재인 옮김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베르그송주의}(1996년)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19) Gilles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 Paris: PUF, 1962, 54-55쪽. - 이 책은 이경신 옮김으로 민음사에서 {니체와 철학}(1998년)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20) 니체, {도덕의 발생학} III 1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