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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철학과 철학사 문제는 니힐리즘이다

김재인 2002.01.21 07:58 조회 수 : 7684 추천:100

* 이 글은 <세계의 문학> 1999년 가을호에 수록된 글의 초고 입니다.  잡지에 수록될 때 부분적으로 손질되었습니다. 그러니 혹시 인용을 하실 때에는 잡지에서 인용하시기 바랍니다. 글을 올리는 과정에서 강조는 지워졌습니다. -_-;



문제는 니힐리즘이다

  
  1. 문제는 니힐리즘이다

  110년 전 이태리의 북부 도시 토리노 거리에서, 한 사내가 채찍으로 맞는 말을 보고 그 말 모가지를 붙든 채 미쳐버렸다. 그 사내는 "니힐리즘이 문 앞에 서 있다" 1) 고 말했거니와, 이미 1세기가 지난 지금 그 말은 이 땅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는 듯하다. 그 사내는 "다음 2세기의 역사"와 더불어 그 속에서 "필연성 자체"로 작동하고 있는/있을 니힐리즘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2)

  그러면 지금이 니힐리즘의 시대일까? 몇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 듯하다. 문명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노하우(Know-How)는 있어도 노화이(Know-Why)는 없다. 아니 그 이전에 왜라는 물음(Ask-Why)조차 없는 것 같다. 패배주의와 무기력이 팽배해 있고 기껏해야 냉소 정도가 있을 뿐이다. 도시에는 빨간 십자가만이 무덤을 만들어가고 있다. 니체가 니힐리즘을 탐구한 것도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각에서였을 것이다. 좀 더 예민하고 치밀한 감각에서.

  니체가 말한 니힐리즘을 우리의 화두로 삼는 것은 우리 문명의 답답함을 최소한 제대로 바라볼 수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그/이야기는 미쳐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급한 사람은 그/이야기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먼저 묻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성급히 대답할 필요는 없다. "니힐리즘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조차 제대로 물어지고 검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1] 지고의 여러 가치가 그 가치를 박탈당하는 것, [2] 목표의 결여, [3] "왜/무엇 때문에(Warum)?"에 대한 대답의 결여를 니힐리즘의 의미로 제시한다. 이 셋은 동일한 사태의 서로 다른 얼굴이다. 니힐리즘과 더불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함께 따라가 보자.



  2. 의미의 논리: 의미는 힘이다

   우리의 상식은 니힐리즘이라는 말을 '허무주의'라고 번역하면서 그 말에 부정적인 의미만을 부여한다. 그리고 니체의 니힐리즘 역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곧 가치 판단이 뒤따른다. 즉 니힐리즘은 나쁘다는 판단이. 그러나 누가 니힐리즘을 허무주의라고 했는가? 오로지 상식, 상식만이 그런 해석을 했을 뿐이다. 상식은 늘 완고하다. 그 완고함은, 정말, 꺾기 힘들다. 따라서 그 완고함을 꺾는 것이 아니라 그 완고함에 꺾이지 않으면서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말해보자.

  무엇보다도 '니힐리즘'을 단일한 의미로 상상하는 짓부터 중단해야 한다. 니힐리즘뿐 아니라 모든 것은 단일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언제나 섬세한 뉘앙스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뉘앙스의 파악은 힘이 든다.

  우선 의미의 논리와 관련한 일반적인 패러독스 하나를 살펴보자. 어린 시절 누구나 읽거나 보았을 법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한 약물을 먹고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그렇다면 앨리스는 커질 때 커지기만 했는가? 작아졌을 때 작아지기만 했는가? 그렇지 않다. "내가 '앨리스가 커진다'고 말할 때 나는 앨리스가 이전보다 더 크게 된다고 말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거기서 앨리스는 지금의 그녀보다 더 작아진다. 물론 앨리스가 더 큰 것과 더 작은 것이 동시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앨리스가 그렇게 되는 것은 동시적이다. (…) 앨리스는 작아지지 않고서는 커지지 않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양식(良識)은 모든 것들에서 결정할 수 있는 방향(sens)이 있다는 것에 대한 긍정이다. 하지만 패러독스는 그 두 방향에 대한 동시적인 긍정이다." 4) 들뢰즈의 이 말에서 '결정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한 긍정이 우리의 양식을 구성한다는 지적은 대단히 중요하다. 양식은 또한 좋은 상식이기도 하니까. 그것이 앞서 언급한 완고함이며 우리의 또 다른 완고함은 패러독스에 대한 긍정이다. 니힐리즘의 의미 또한 이런 패러독스를 품고 있다.

  이제 이 패러독스를 염두에 두면서 들뢰즈가 정리한 니체의 의미론을 들여다보자. 좀 길지만 찬찬히 다음 인용을 따라가자. 5)



[1]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을 전유(專有)하고 그것을 이용하고 그것을 독점하거나 그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인간적 현상, 생물학적 현상, 또는 물리적 현상조차도)의 의미를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2] 모든 힘은 다수의 현실에 대한 전유, 지배, 이용이다. 지각조차도 그것의 다양한 양상에 걸쳐 자연을 전유하는 힘의 표현이다. 그것은 자연 자체가 하나의 역사를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한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독점하는 힘들의 연속이고 그것을 독점하기 위해 투쟁하는 힘들의 공존이다.



[3] 동일한 대상, 동일한 현상은 그것을 전유하는 힘에 따라 그 의미를 바꾼다. 역사는 의미들의 변주이다. 말하자면 역사는 "다소 폭력적이고 서로간에 다소 독립적인 예속화 현상들의 연속"이다.



[4] 따라서 의미는 복합적인 개념이다. 즉 의미의 복수성, 성좌(星座) , 연속들 및 공존들의 복합체가 존재하며, 이것은 해석을 하나의 기술로 만든다. "모든 정복, 모든 지배는 하나의 새로운 해석과 등가(等價)이다."



[5] 니체는 소란스러운 "위대한 사건들"을 믿지 않고, 각각의 사건들의 의미의 조용한 복수성을 믿는다. 의미가 다양하지 않은 그 어떤 사건, 현상, 말, 생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그것을 독점하는 힘들(신들)에 따라서 때로는 이것이고 때로는 저것이며 때로는 더욱더 복잡한 어떤 것이다.



[6] 하나의 사물이 여러 의미를 가진다는 다원론적 생각 속에서, 동일한 것에 대해 여러 가지 것, '이것 그리고 저것'이 존재한다는 생각 속에서, 우리는 철학의 가장 고귀한 쟁취, 참된 개념의 쟁취, 그것의 성숙을 본다.



[7] 처음에 이미 어떤 대상을 점령한 앞선 힘들의 가면을 쓸 때에만 비로소 어떤 새로운 힘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그 대상을 제 것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해석의 복잡성이 드러나게 된다. 가면이나 속임수는 자연의 법칙이며, 따라서 그것은 가면이나 속임수 이상의 어떤 것이다. 처음에 생명은 단지 그것이 [존재] 가능하기 위해서 물질을 모방해야만 한다. 만약 어떤 힘이 그것이 맞서 투쟁하는 이전의 힘들의 얼굴을 우선 빌리지 않는다면, 그 힘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니체와 들뢰즈는 의미를 힘의 견지에서 이해한다. 6) [1'] 의미의 파악은 어떤 사물, 현상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힘을 파악하는 일과 같은 일이다. [2'] 그리고 한 사물, 현상의 역사는 그것을 소유한 힘의 역사이다. [3'] 따라서 동일한 사물, 현상은 그것을 지배하는 힘에 따라 의미를 바꾼다. [4'] 의미가 복합적인 개념이며 해석의 기술이 필수적인 까닭이 그것이다. [5'] 그래서 니체는 소란스러운 "위대한 사건들"을 믿지 않고 침묵 속에서 진행되는 조용한 사건들의 의미의 복수성을 본다. 그것은 계보학자, 발생학자의 시선이기도 하다. 화학자가 시료의 변화를 관찰하듯이 변화의 뉘앙스를 파악하기. 그 시선 아래에서만 힘들, 즉 의미들이 포착된다. [6'] 이것이 다원론, 곧 경험론이며, 이것이야말로 철학과 개념의 위대한 쟁취이다. [7'] 그런데 새로운 힘들은 기존의 힘들의 가면을 씀으로써만 자신을 보존하고 또 성숙할 수 있게 된다. 가면과 속임수는 자연의 법칙이어서 단지 가면과 속임수 이상의 어떤 것이다. 7) 전통적 분류에서 인식론에 속하는 영역은 이제 실천론으로 변형된다. 왜냐하면 의미 파악은 고정 불변의 대상에 대한 인식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의미 해석임이 드러나며, 나아가 해석은 대상을 지배하는 기존 힘의 변형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미를 힘으로 이해할 때 니힐리즘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검토할 수 있게 된다. 니체는 앞으로 2세기에 걸쳐 일어날 사건으로서 니힐리즘을 얘기했다. 그것은 니체 당대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하지만 이미 필연성 자체로 진행되고 있던 사건이다. 그 사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다시 말해 니힐리즘을 지배하는 힘을 파악하는 것이 니체의 과제였다. 니힐리즘의 의미는 아직, 언제나 아직 결정 되지 않았다는 것이 니체의 가장 깊은 통찰이었다.



   3. 니힐리즘의 두 얼굴

  유럽 최초의 니힐리스트이긴 하지만, 니힐리즘 자체를 그 자신의 내부에서 종말까지 극복한 니힐리스트로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도대체 왜 니힐리즘의 도래가 지금이야말로 필연적인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지금까지의 여러 가치 자체가 니힐리즘 가운데서 그 최후의 귀결에 도달하기 때문이며, 니힐리즘이야말로 우리의 위대한 여러 가치나 여러 이상에 대해 철저하게 고안된 이론이기 때문이다. 이들 '여러 가치'의 가치가 본래 무엇이었는가를 간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니힐리즘을 먼저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언젠가는 새로운 여러 가치를 필요로 한다." 8)

  이 짤막한 구절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우선 니힐리즘은 기존의 가치들과 이상(理想)들의 바탕이라는 점. 그리고 기존 가치들과 이상들은 니힐리즘에 의해 붕괴될 것이며 새로운 가치들과 이상들이 니힐리즘을 통과해서 창조되어야 한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니힐리즘은 "하나의 중간 상태" 9) 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니힐리즘의 두 번째 국면은 그 동안 좀처럼 주목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들은 그 가치를 박탈당하고 무의미에 빠져버리게 되었다. 니체가 이 사태에 부여한 이름이 니힐리즘이다. 1880년대 니체의 모든 작업은 이 주제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가치 박탈과 무의미가, 즉 니힐리즘이 커다란 사건으로서 갑자기 도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니힐리즘은 인간 실존의 근본 사건이다. 이 점을 철저하게 분석한 글이 『도덕의 발생학』 세 번째 논문인 「금욕주의적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니체는 그 논문 서두에서 "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적을 필요로 한다 . 인간의 의지는 아무 것도 의욕하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무(無) 를 의욕한다." 10) 라는 아포리즘을 제시한다. 단순한 듯 보이는 이 명제는 그러나 너무나도 깊은, 거의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의미를 갖고 있다.

  니체는 위의 아포리즘을 해석하면서 금욕주의적 이상의 의미를 밝힌다.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초월적 이상이요 죄의 관점에서 생을 해석하려는 관점이다. 니체는 그러한 이상 말고는 인간이라는 짐승은 이제껏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고 본다. 이 분석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1] 출발점은 세계에 대한 에누리없는 직시로서의 염세주의이다. 인간 실존에는, 그리고 자연의 실존에는 궁극적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 "지상에서 인간의 실존은 어떠한 목적도 지니고 있지 않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인간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대답 없는 물음이다. 인간과 땅을 위한 의지 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11)



[2] 그런데 인간은 괴로움은 참을 수 있을지언정 무의미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고 해명하고 긍정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 문제로 괴로워했다 . (…) 인간은 주로 하나의 병든 짐승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느냐?'라는 물음의 울부짖음에 대한 대답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가장 용감하고 가장 괴로움을 잘 견디는 짐승인 인간은 괴로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괴로움의 의미 , 괴로움의 목적 이 제시된다면 인간은 괴로움을 원하고 괴로움을 찾기까지 한다. 이제까지 인류의 머리 위로 만연해 있던 저주는 괴로움이 아니라 괴로움의 무의미성이었다."



[3]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인간에게 의미를 주는 무엇인가를 발명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금욕주의적 이상이다. " 그런데 금욕주의적 이상이 인간에게 하나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 그것이 이제까지 유일한 의미였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보다는 어떻든 하나의 의미가 있는 것이 낫다. 어떻게 고찰해보건 금욕주의적 이상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으로서는 탁월한 ' 궁여지책 (faute de mieux)'이었다."



[4] 그리하여 자살(이것이 무에 대한 의지의 한 형태이다: 자살적 니힐리즘)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실존을 죄라고 생각하는 형벌을 짊어지게 되었다. "이 이상 속에서 괴로움이 해석 되었다. 섬뜩한 공허(空虛)는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모든 자살(自殺)적 니힐리즘 앞에 있는 문이 닫혔다. 이 해석은 의심할 여지없이 새로운 괴로움을 가져왔다. 그것은 보다 깊고 보다 내면적이고 보다 유독(有毒)하며 삶을 좀먹는 괴로움이었다. 이 해석은 모든 괴로움을 죄 의 관점 아래로 가져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 되었고 하나의 의미 를 가지게 되었다. (…) 인간은 이제 무엇인가를 의욕 할 수 있었다. 어디를 향해서,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써 의욕하는가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 ."



[5]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죄 역시도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발명해 낸 초월적이고 피안적인 그 무엇이다(이러한 느린 자살에 대한 지향 또한 무에 대한 의지의 한 형태이다: 지친 니힐리즘, 수동적 니힐리즘). 12)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이 정해진 저 모든 의지가 도대체 무엇 을 표현하는지는 도저히 숨길 수 없게 되었다. (…) 감히 파악해 보고자 하건대,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에 대한 의지 이며, 생에 대한 혐오(Widerwillen)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의지 이며 하나의 의지 인 채로 남아 있다! … 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다시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 것 도 의욕하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무 를 의욕한다…."



  니체는 위의 아포리즘을 해석하면서 금욕주의적 이상의 의미를 밝힌다.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초월적 이상이요 죄의 관점에서 생을 해석하려는 관점이다. 니체는 그러한 이상 말고는 인간이라는 짐승은 이제껏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고 본다. 이 분석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여기까지가 니체가 말하는 니힐리즘의 첫 번째 국면이다. 흔히 니힐리즘 하면 기껏해야 이 정도까지만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철저한 니힐리즘이란 승인되고 있는 최고의 여러 가치가 문제일 때 생존을 유지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확신이다." 13) 이러한 확신은 저런 애매한 니힐리즘에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힘있게 더 밀고 나아간다. 이 경우의 염세주의는 세상의 덧없음을 직시하는 힘 이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그리스인에게서 발견한 에토스이다. 그리스인은 염세주의 토양 위에서 비극을 만들어냈다. 14) 그리스인은 "분노를 품고서가 아니라, 반대로, 이 응시를 홀로 끝내 감내할 수 있으리만큼 충분히 강하게" 15) 살아낸 자들이며, 이런 의미에서 철저한 니힐리스트이다.

  니체는 이러한 니힐리즘에 "능동적 니힐리즘" 16) 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앞 절에서도 암시했듯이 그것을 전유하는 힘에 따라 니힐리즘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능동적 니힐리즘과 수동적 니힐리즘. 그리고 니힐리즘의 선행 형식은 염세주의였다. 17) 따라서 염세주의에도 두 가지 질이 구분된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대구를 이룬다.



[1] 강함으로서의 염세주의 vs. 쇠퇴로서의 염세주의. 18)



[2] 정신의 상승한 권력의 징후로서의 니힐리즘, 즉 능동적 니힐리즘 vs. 정신의 권력의 쇠퇴와 후퇴로서의 니힐리즘, 즉 수동적 니힐리즘. 19)



[3] 나는 약화시키는 것, 초췌하게 만드는 것 모두에 대해 아니오(das Nein)를 가르친다. / 나는 강화하는 것, 힘을 저축하는 것, 힘의 감정을 긍정하는 것 모두에 대해 예(das Ja)를 가르친다. 20)



여기서 두 항 사이의 위계를 낳는 기준이 "강함과 약함"혹은 "강화와 약화"임은 명백하다.



여기서 강함과 약함의 문제가 생긴다. 즉,

  1. 약자는 이것으로 파멸한다.

  2. 비교적 강한 자는 파멸하지 않은 것을 파괴한다.

  3. 가장 강한 자는 심판할 가치를 넘어선다.

이들이 합하여 비극 시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21)



  이제 이런 표현에서 다시금 문제가 되는 것은 강함과 약함이라는 대립이다. 상식은 이들 개념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해왔다. 그 극단적인 경우가 루카치의 해석이다. 강함에 대한 옹호는 자칫 파시스트나 악마의 형상을 불러온다. 그러나 꼼꼼히 읽어간다면 이 개념에는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다. 우선 니체가 강함이라고 생각한 예를 하나 보고, 그 다음에 강함과 약함을 대비하며 든 예를 하나 더 보자.



[1] 이제까지 나를 가장 기분 좋아지게 만든 것은, 나이든 행상 할머니들이 포도송이들 중에서 가장 달콤한 것을 나에게 찾아 모아주기 전에는 마음이 편치 못하다는 것이다. 22)



[2] 유능한 직업인이나 학자가 자신의 기술에 긍지를 가지고 흡족한 눈길로 바라볼 때에는 훌륭하게 보인다. 이에 반해 구두 수선공이나 교사가, 사실 자신은 좀더 나은 일을 하려고 태어난 것인데 하며 괴로운 표정으로 알리려 하는 것을 목격할 때보다 애석한 일은 없다. 손에 익은 일보다 더 나은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손에 익은 일이란, 무언가 유능함을 몸에 배게 하고, 그것으로부터 창조하는 것,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어의 의미에서 덕(virtù)을 가리킨다. 23)



강함과 약함은 단순히 가진 힘의 많고 적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물론 독재자는 강하고 억압받는 민중은 약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짜 강한 자는 최선을 다하는 자, 열심히, 더 열심히 사는 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다 하는 자이다.

  강함과 약함에 대한 분석은 힘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니체가 힘을 고찰한 유명한 대목은 『도덕의 발생학』 첫 번째 논문 13절이다.



어떤 양(量)의 힘이란 사실 그것과 같은 양의 충동, 의지, 활동이다 ― 아니 오히려 그것은 이 충동 작용, 의지 작용, 활동 작용(Wirken) 자체에 불과하지만, 모든 활동 작용을 하나의 작용자, 하나의 "주체"에 의해 제약된 것으로 이해하고 오해하는 언어의 유혹(그리고 언어 속에 화석화된 이성의 근본 오류) 아래에서는 그것은 달리 보일 수도 있다. 즉 민중이 번개를 섬광과 분리하여 섬광을 번개라 불리는 주체의 행위 (Thun)와 작용으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도덕은 강함을 강함의 표출에서 분리하여 강함 뒤에 자유자재로 강함을 표출할 수도 있고 표출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중성적인 기체(基體)가 있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그런 기체란 없다. 행위, 작용, 생성 뒤에는 어떠한 "존재"도 없다. "행위자"는 단지 행위에 상상해서 덧붙여진 것이다. 행위가 전부이다. 번개가 번쩍거린다고 말할 때 민중은 근본적으로는 행위를 중복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행위이다. 그것은 동일한 현상을 한번은 원인으로 놓고 다시 한번 그 원인의 결과로 놓는 것이다.



  니체는 강함과 약함을 힘들 상호간의 관계로 보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독재자의 힘은 강하고 민중의 힘은 약하다는 이해는 오해에 불과하다. 힘의 약하고 강함은 차라리 절대적인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자기 역량을 다 발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힘의 강하고 약함이 결정되는 것이다. 24) 앞서 들었던 예를 보면 가장 달콤한 포도를 골라주려고 애쓰는 노파는 강한 자이다. 반면 자신의 처지를 불평만 하는 교사는 약한 자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만 니체의 주인과 노예가 이해될 수 있다. 주인은 자신의 역량을 다 발휘하는 자유인인 반면 노예는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기를 멈추는 자이다. 니체의 주인은 현실 세계에서의 지배자가 아니며 노예는 현실 세계에서의 피지배자가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주인의 한 예는 철학자와 예술가, 즉 "자유 정신"이다.

  다시 니힐리즘의 문제로 돌아오자. 니체는 파멸되는 자와 파괴하는 자의 구분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니체는 거기에 "심판할 가치를 넘어서는 자"를 덧붙인다. 그 자는 가장 강한 자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초법적 권력을 가진 황제인가? 아니, 그는 차라리 아이이다. 니체가 보기에 아이만이 단지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25) 아이야말로 디오니소스이며 '넘어가는 인간'이다. 26) 이렇게 해석할 때에만 니체의 능동적 니힐리즘은 비로소 제 빛을 발하게 된다.



  4. 극복되는 니힐리즘: 영원 회귀와 넘어감

  니체는 니힐리즘의 극단적 형식으로서 '영원 회귀' 사상을 말한다. 영원 회귀는 일종의 시금석이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즐거운 학문』의 끝에서 두번째 절인 341절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근본 사상(즉 영원 회귀의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27) 『즐거운 학문』의 그 절은 흔히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이 최초로 명료한 형태를 띠고 등장하는 곳이라 일컬어진다. 그 절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최대의 무게 - 어느 날 또는 어느 밤, 한 다이몬이 가장 적적한 고독 속에 잠겨 있는 네 뒤로 살그머니 다가와서 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인가. "너는 지금 네가 살고 있고 그리고 이제까지 살아온 이 삶을 한 번 더 그리고 수없이 더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삶에는 아무런 새로운 것도 없으며, 모든 고통과 모든 기쁨과 모든 생각과 탄식 그리고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너의 삶의 사소함과 위대함이 너에게 다시 돌아와야 한다, 모두 동일한 순서와 차례로 - 이 거미도 나무 사이의 이 달빛도, 그리고 이 순간과 나 자신까지도. 실존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언제까지나 다시 회전하며 - 그리고 미세한 모래알에 불과한 너 자신 역시도 그것과 더불어 다시 회전할 것이다!" - 너는 땅에 엎드려 이를 갈며 그렇게 말하는 다이몬을 저주치 않으려는가? 아니면 그 다이몬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할 그런 기괴한 순간을 한 번 체험한 적이 있는가. "너는 신이다. 나는 이보다 더 신적인 것을 듣지 못했노라!"라고. 이러한 사상이 너를 지배하게 된다면 그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너를 변화시킬 것이고 아마도 분쇄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 하나하나에 대하여 "너는 이것을 한번 더 그리고 수없이 의욕하느냐?"라는 질문은 최대의 무게로 네 행위 위에 가로놓일 것이다! 아니면 너는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그 이상의 어느 것도 원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너 자신과 삶에 좋게 되어야(gut werden) 하는가? -



  니체는 다른 곳에서 위의 사상을 산문 형태로 간결하게 제시한다. "우리는 이 사상을 그 가장 무서운 형식으로 생각해 보자. 말하자면 의미나 목표는 없으나 무(無) 가운데로의 하나의 종국을 갖는 일도 없이 불가피하게 회귀를 계속하고 있는 그대로의 실존, 즉 '영원 회귀'를. / 이것이 니힐리즘의 극한적 형식이다. 즉 무('무의미한 것')가 영원히!" 28) 이처럼 영원 회귀 속에서 무의미의 반복은 그 극한에 이른다. 영원 회귀 앞에 서면 앞서 언급한 "수동적 니힐리즘"은 꼬리를 내리며 사라진다. 남는 것은 능동적 니힐리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 회귀는 니힐리즘 중의 니힐리즘으로 남게 된다. 영원 회귀라는 시금석을 통과해서 가게 되는 이 갈래길이 중요하다.

  니체는 곳곳에서 두 갈래 길을 제시한다. 파괴되어 사멸하지 않으려면 견디고 창조하고 생성하라. 한 예로 다음의 유고는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하여 생기는 것일까? (…) 니힐리즘의 극한적 형식은, 어떠한 믿음도, 참이라고 굳게 믿는 어떤 것도, 필연적으로 거짓이라는 통찰이리라. 왜냐하면 참 세계인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관점주의적 가상이며, 그 근원은 우리 내부에 있다. (…) 우리가 철저하게 몰락하는 일이 없이, 가상성(假象性)을, 빈말의 필연성을 어디까지 승인할 수 있는가는 힘의 정도에 달려 있다. 29)



인간은 지구가 우주 공간에 떠 있듯 허공에 떠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베드로가 예수를 의심했을 때 물에 빠졌듯이, 우리가 우리 믿음을 의심하면 무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초능력자이며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조자이다. 단지 그 의미와 가치가 어떠하냐에 있어서 차이가 날 뿐.

  여기에서 제기되는 것이 '넘어감'의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넘어감은 '초월'의 방식으로 제시되어 왔다. 다시 말해 금욕주의적 이상론. 그러나 니체가 잘 밝혔듯이 그것은 지친 니힐리즘에 불과하며 생에 독을 섞는 기술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넘어감의 방식이 존재하는가? 니체 이후의 철학에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예를 본다. 들뢰즈의 도망론이 그 하나이고 김진석의 포월론이 다른 하나이다. 30) 여기에 공통된 것이 견딤 이라는 주제이다. 이 견딤은 단순한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삶의 가상을 창조하는 적극적 행위이다. 그것은 젊은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실존은 미적으로만 정당화된다"고 선언했을 때의 태도와 동일한 태도이다. 그것은 '즐거운 학문(la gaya scienza)'을 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견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시절이다. 그러나 기쁜 견딤도 있는 법이다. 알베르 카뮈는 자살은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자살이 아니라 창조가 니힐리즘의 부조리를 견디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고 냉철하되 아름답고 기쁜 삶을 만들기! 이것이 하나의 모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행동 지침은 가장 니체적인 의미에서 "열심히, 열심히, 나 참 열심히 한다, 그런 생각이 들 때까지"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는 듯싶다. (*)



(각주/미주)



1) Friedirch Nietzsche, Nietzsche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Giorgio Colli & Mazzino Montinari(편), Walter de Gruyter & Co., 1967ff), VIII 18 [12]. 니체 문헌의 인용은 이 전집으로부터 한다(KGA로 약칭). 니체는 "1880년대의 유고"로 불리는 방대한 노트를 남기고 있다. 1960년대 시작된 '니체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학자 콜리와 몬티나리가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쉴러 문서 보관소의 니체 노트를 일일이 검토해서 발표한 일과 나란히 나아간다. 이들은 곧 니체 전집 출간에 착수했으며, 이 전집은 현재 전세계 니체 연구자가 참고하는 판본으로 확립되었다. 이 전집은 기존의 전집들과 한 가지 중요한 차이를 갖는다. 즉 니체 사후에 출간된(특히 1911년판) 『권력 의지』를 철저히 해체해서 니체의 노트 순서대로 유고를 정리해 놓았다는 점. 지금까지 가장 많이 인용된 『권력 의지』는 니체의 구상에 의거한 편집자의 임의 편집도 문제였지만, 위작도 포함하고 있어 니체를 파시스트로 해석하게 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니체 자신이 출간한 책의 분량에 맞먹는 방대한 양의 유고를 포함한 새로운 니체 전집 출간이 국내에서도 긴히 요청되고 있는 상황이라 하겠다.

2) KGA, VIII 11 [411].

3) KGA, VIII 9 [127].

4)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 Les Editions de Minuit, 1969, p. 9. 불어의 sens(쌍스)라는 말에는 몇 가지 뜻이 있다. 감각, 의미, 감(感), 앎[識], 방향 따위가 그것이다. 들뢰즈는 그 모든 뜻을 적절하게 배합하며 사용하는데, 방금 인용한 구절의 마지막 문장도 그렇다. 의미는 또한 방향이기도 한 것이다. - 이 책 『의미의 논리』는 이정우 번역으로 한길사에서 곧 출간된다.

5) Gilles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 P.U.F., 1962, pp. 3-5. 중간에 나오는 인용은 니체의 『도덕의 발생학』 II 1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I "위대한 사건들", 『도덕의 발생학』, III, 8, 9, 10에서 한 것이다. 이 책 『니체와 철학』은 이경신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20-23쪽). 기왕에 나왔던 『니체, 철학의 주사위』(신범순 외 옮김, 인간사랑)이 영어 중역과 불성실한 번역으로 악명이 높던 차에 나온 새 번역은 기존 번역에 비해 많은 장점을 지닌다. 하지만 단순한 실수로 보이지 않는 오류가 책 본문에 들어가기도 전에 나오고 있어 이 책을 읽을 때 전반적으로 독자의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판본은 2쇄이며, 따라서 아마도 적어도 몇 천 부가 독자의 손에 있을 것이다. 번역본 14쪽 '일러두기' 6번을 보자. "이 책에 나오는 니체 저술의 인용은 들뢰즈가 사용한 불어판의 약호를 따랐고 약호와 함께 쪽수를 표기하였다(<쪽> 표기 생략). 예를 들어, GM , III, 3은 『도덕 계보학』, 제3부, 3쪽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일반적으로 니체 저술의 인용은 약어와 함께 장 또는 부를 라틴 숫자로 표기하며 그 다음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절의 번호를 적는다. 예컨대 GM , III, 3은 『도덕의 발생학』(Zur Genealogie der Moral) 세 번째 논문인 「금욕주의적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Dritte Abhandlung: was bedeuten asketische Ideale?)의 세 번째 절을 가리킨다. 본격적인 서평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지적은 생략하겠으나, 니체에 관한 책에서 발견되는 니체에 대한 초보적인 실수는 이 새로운 번역의 의의를 반감하는 요소라 하겠다. 따라서 인용은 필자가 원문에서 직접 옮겼다. 여기에 국역본의 쪽 수를 병기한다. 그리고 인용문의 [1], [2] 등은 필자가 서술의 편의를 위해 삽입한 것이다.

6) 이 주제는 브라이언 맛수미(Brian Massumi)가 자신의 책 A User's Guide to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Deviations from Deleuze and Guattari , The MIT Press, 1992, 특히 1장 「의미는 힘이다」(meaning is FORCE)에서 채택한 견해이다. 맛수미는 의미를 힘의 견지에서 해석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철학자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그에 따르면 알튀세르, 데리다, 크리스테바, 보드리야르 등은 프리고진, 바흐친, 베르그송,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과 다른 편에 속한다(90-92쪽 및 177-178쪽 참조). 한편 앨런 슈리프트(Alan D. Schrift) 역시 데리다와 들뢰즈의 차이를 니체 독해와 관련하여 제시하면서 맛수미의 구분과 유사한 구분을 도입한다( Nietzsche's French Legacy. A Genealogy of Poststructuralism , Routledge, 1995, 3장 참조). 이런 구분이 영어권 연구자들에게만 흥미로운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필자 역시도 이 입장에 동의하면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한 보다 섬세한 구별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싶다. 다른 예로, 데리다와 푸코의 차이는 그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통해 식별되는데, 필자는 미간행 원고인 「강제로 처넣어라 - 광기의 역사 는 과연 가능한가?」라는 글에서 이 논쟁을 살핀 바 있다. 김현과 김진석에 의해 소개된 적 있는 논쟁을 다시 언급한 것은 1992년 푸코의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 출간 30주년을 기념하여 벌어진 세미나에서 데리다가 다시 죽은 푸코를 공격한 사건이 아직 주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프로이트에게 공정하기": 정신 분석학 시대의 광기의 역사」, 『광기의 역사 30년후』, 자크 데리다 외 지음, 박정자 옮김, 시각과 언어, 1997에 수록).

7) 이 주제는 탁월한 니체 해석자인 김진석이 개진한 "'탈'의 놀이"라는 주제이기도 하다(『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문학과지성사, 1992). '탈'의 놀이, 초월에서 포월(匍越)로(『초월에서 포월로』, 솔출판사, 1994 및 『니체에서 세르까지』, 솔출판사, 1994), 소외에서 소내(疎內)로(발표되었던 글들과 새로운 글들이 묶여 곧 출간된다) 같은 김진석의 연이은 주제는 그가 니체 연구자가 아니었다면 나오기 힘든 착상이다(그의 학위 논문은 『니체에게서 권력 의지로서의 해석학』(Hermeneutik als Wille zur Macht bei Nietzsche)이다). 이 문제는 '초월' 및 '넘어감'의 문제와 관련하여 더 자세히 분석될 수 있으나, 그 작업은 지면의 한계상 다른 자리로 넘길 수밖에 없다.

8) KGA, VIII 18 [12].

9) KGA, VIII 11 [100].

10) 『도덕의 발생학』 III 1. 두 번째 문장은 28절에서도 다시 반복된다.

11) 『도덕의 발생학』 III 28. 뒤에 이어지는 인용도 모두 같은 곳에서 한 것이다. 또한 다음의 유고를 참고할 것(KGA, VIII 5 [71]). "니힐리즘이 현재 드러나 있다는 것은 (…) 실존 가운데 있는 '의미'가 일반적으로 신뢰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 마치 실존 가운데에는 어떠한 의미도 전혀 없기라도 한 양, 마치 모든 것이 헛수고(Umsonst)이기라도 한 양 여겨지는 것이다. (…) 이 '헛수고'는 현대의 니힐리즘의 성격이다." 또한 "실존의 성격은 '참'이 아니라 거짓이다…. 참의 세계가 있다고 자신을 설득할 근거는 더 이상 없게 된다…. 요컨대 우리가 세계가 가치를 부어넣어 온 '목적', '통일', '존재'라는 여러 범주는 다시금 우리에 의해 뽑혀 버려지고 이제 세계는 무가치한 것으로 비쳐온다…."(KGA, VIII 11[99]).

12) "지친 니힐리즘", "수동적 니힐리즘"이란 표현은 KGA, VIII 9 [35]에 나온다. 이러한 니힐리즘에 사제 권력 이 작동하고 있다는 통찰은 니체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이다.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이 니힐리즘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신 그 자체가 "니힐리즘의 탈"(김진석, 「니체, 탈현대의 웃음」, 『철학과현실』, 1992년 가을호, 125쪽)이었던 것이다. 땅을 벗어난 이상을 말하는 자들은 생에 독을 섞는 자이다.

13) KGA, VIII 10 [92].

14) 이 과정에 대한 분석이 『비극의 탄생』의 주제이다. 그는 책의 제목을 『음악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에서 바그너적 요소를 빼고서 『비극의 탄생. 그리스 정신과 염세주의』으로 수정하기에 이른다.

15) KGA VIII 10 [53].

16) KGA, VIII 9 [35].

17) "염세주의는 니힐리즘의 선행 형식이다"(KGA, VIII 10 [58]). 또한, 염세주의라는 명칭은 "니힐리즘에 의해 대치되어야만 한다"(KGA, VIII 17 [8]).

18) KGA, VIII 9 [126] 참조.

19) KGA, VIII 9 [35] 참조.

20) KGA, VIII 15 [13].

21) KGA, VIII 9 [107].

22) 『이 사람을 보라』 III 2.

23) KGA, VII 34 [161].

24) 들뢰즈는 능동적이고 작용적인 힘과 반동적이고 반작용적인 힘을 구분한다(『니체와 철학』 2장 참조). 이때 능동/반동 혹은 작용/반작용의 구분은 여기서 말하는 강함/약함의 구분과 동일한 기준을 따르는 구분이다. 이 구분은 스피노자 해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스피노자에게서 "역량(potentia, puissance)"은 그것이 다 발휘될 때 신적인 힘이 된다. 반대로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노예적인 힘에 불과한 것으로 남는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Les Éditions de Minuit, 1968) 및 『스피노자. 실천 철학』(Spinoza. Philosophie pratique, Les Éditions de Minuit, 1981, 개정 증보판) 참조. 뒤의 책은 『스피노자의 철학』(박기순 옮김, 민음사)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으며, 앞의 책의 내용의 일부는 필자의 홈페이지에 번역되어 수록되어 있다(http://sh.hanarotel.co.kr/~armdown 참조).

25) 이 주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의 「세 가지 변신에 관하여」에서 가장 잘 표명되어 있다. 정신은 기존의 모든 가치를 짊어지는 낙타가 되었다가, 다시 "너는 해야만 한다"라는 당위에 맞서 "나는 하고자 한다"를 외치는 파괴자인 사자가 되고,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아이가 된다. "아이는 무구(無垢)하며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이며 놀이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고 신성한 긍정이다." - 필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새 번역에 착수했으며 그 과정과 성과물은 필자의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되고 있다. - 니체와 헤겔의 차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하나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립되는 니체의 '주인과 노예의 탈변증법'이며(『도덕의 발생학』 첫 번째 논문) 또 하나는 헤겔의 '정신 현상학'에 대립되는 니체의 '정신 생성학'(「세 가지 변신에 관하여」)이다.

26) '넘어가는 인간'은 der Übermensch의 번역이다. 물론 Übermensch는 초인(超人)이라는 말로 번역되어온 오랜 역사가 있다. 하지만 이미 김진석은 Übermensch를 '넘어가는 인간'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필연성을 주장한 바 있다(『니체에서 세르까지』의 첫 글인 「'초인'에서 '넘어가는 인간'으로」). 필자는 이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넘어가는 인간'을 '마지막 인간(der letzte Mensch)'과의 짝/대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설을 중심으로 씌어진 미간행 원고 「차라투스트라가 하산한 그 첫 날」 참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두 핵심 주제인 '넘어가는 인간'과 '마지막 인간'은 '니힐리즘' 혹은 '영원 회귀' 사상 속에서 정점에 이르며 완숙기 니체의 많은 유고들은 이 이정표를 참조했을 때에만 바로 해석될 수 있다. - 『권력 의지』라는 제목으로 편집된 유고집의 경우 그 제목에서부터 이러한 구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한계를 갖는다. 니체 자신이라면 분명 다른 제목을 선택했을 것이다. 예컨대 그의 마지막 구상은 1888년 가을의 것인데, 현재의 체제와는 분명 다른 구성을 취하고 있다. 책의 제목도 "모든 가치의 가치 전환"으로 되어 있으며 마지막 권은 "디오니소스. 영원 회귀의 철학"으로 되어 있다(현재 판본의 제4권인 '훈련과 육성'의 세부 목차는 '제1장 위계' '제2장 디오니소스' '제3장 영원 회귀'이다). 분명 니체가 권력 의지를 중요하게 여기긴 했지만 그것은 그의 최대 과제였던 새로운 가치 창조를 니체적으로 표현하는 말로는 미흡한 데가 있다. 아마도 생성의 신 디오니소스가 가장 제격이며 니체가 제목으로 택하기에 가장 적합했으리라.

27) 『이 사람을 보라』, "Also Sprach Zarathustra", 1절 참조. 한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타난 영원 회귀 사상 연구는 필자의 논문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 연구 - '생성', '시간', '에토스'를 중심으로」(1995,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논문) 제5장을 참고할 수 있다. 또한 영원 회귀 사상에 관한 일반적 연구로 들뢰즈, 『니체와 철학』 및 김진석, 『니체에서 세르까지』를 참고할 수 있다.

28) KGA, VIII 5 [71].

29) KGA, VIII 9 [41].

30)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 2권』에서 도망을 적극적 윤리로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를 '힘을 그리기'와 '도망'이라는 문제틀에 의거해서 서술한다. 한편 김진석은 『초월에서 포월로』 및 『니체에서 세르까지. 초월에서 포월로 둘째권』 등에서 땅 위에서의 넘어감이라는 주제를 '포월'의 이름으로 천착하고 있다. 이 주제들은 원래 이 글에서 함께 다루려고 했었지만 지면 관계상 차라리 독립적인 글에서 다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