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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철학과 철학사 실재(實在)와 현실(現實)

철학자 2009.10.13 20:02 조회 수 : 14588

실재(實在)와 현실(現實)은 모두 영어의 reality의 번역어지만, 그 의미나 함축은 상당히 다르다. reality는 라틴어 res(존재, 실재, 사물)에 기원하는데, 문제는 어원이 아니라 '무엇이 진짜 있는 것이냐?'에 대한 답변에 있다. 우리말에서는 '실재'보다는 '현실'이 일상어에 가깝다. 그 의미를 앞의 물음과 연관시키자면, '실재'는 진짜 있는 것이요 진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과 구별되는 말로 쓰이는데, 가령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것이 그러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현상의 세계인데, 이는 이데아의 모방 또는 복사이기에 완전하지 않다. '실재'는 서양 근대철학에서는 데카르트를 통해 회의라는 극단적 검증을 거쳐 살아 남는 것 곧 '코기토'로 정립되며, 칸트에서는 '현상계'와 구별되는 '사물 자체'에 자리한다. 아마도 쇼펜하워가 이 구도를 극복한 최초의 철학자이리라. 한편, '현실'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어떤 현실?'이라는 식으로 되묻게 된다. 가령 심리적 현실, 사회적 현실, 경제적 현실 등. 들뢰즈 식으로 표현한다면, 이 각종 현실들은 '존재의 일의성'과 관련되며, 결국 정도(degree, Grad)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모두가 단 하나의 현실, 또는 단 하나의 현실의 정도들(degrees)이다. 본성의 차이를 지니지는 않되 체제의 차이를 지닌다고 들뢰즈는 종종 언급한다. 일단 reality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되면 라캉의 저 유명한 구분, 즉 상상계(the Imaginary), 상징계(the Symbolic), 실재계(the Real)라는 구분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앞의 둘은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은 오직 '현실'뿐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각종 등급과 정도를 구분하는 일이리라. 우리가 들뢰즈의 the real 또는 reality를 번역할 때 '현실계'나 '현실'을 선호하는 것은, 들뢰즈 사상의 본류에 충실을 기하기 위해서일 뿐, 그밖의 어떤 의도도 포함하지 않는다. (라캉의 종래 번역자들에게는 유감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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