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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예술과 문화 닫혀진 에덴 동산, 폴리스

김재인 2002.02.24 16:48 조회 수 : 8902 추천:489

* 이 글은 키토의 {그리스 문화사}(탐구당)를 읽고 '그리스'란 무엇인가를 정리한 것이다. 미숙하던 시절에 썼던 글이지만 내용의 중심은 동일한 곳에 있기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닫혀진 에덴 동산, 폴리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그 까닭은 불이 모든 빛의 영혼이며, 또 모든 불은 빛 속에 감싸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영혼의 모든 행위는 의미로 가득 차게 되고, 또 이러한 이원성 속에서도 원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영혼의 모든 행위는 하나같이 의미 속에서, 또 의미를 위해서 완결되는 것이다. (…) 철학이란 본래 [고향을 향한 향수]이자, [어디서나 자기 집에 머물고자 하는 충동]이라고 노발리스는 말한 바 있다."(루카치, {소설의 이론} 1부 1장, 반성완 역)

앞의 문단은 몇번인가 읽은 바 있는 {소설의 이론} 도입부이다. 읽을 때마다 멋있기는 한데 너무 이상적이라서 도대체 그런 적이 과연 있었던 것일까 의문을 품곤 했었다. 현실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세인들이 단지 추측해서 꾸며낸 유토피아(u-topia)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키토 교수의 {그리스 문화사}를 읽으며 보다 생생한 현실감뿰解키??)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쀀?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 그리스인들의 입을 통해 직접인용한 글들은 저 서양 낭만주의자들의 동경을 이해하게 해 주었고, 동양인인 나에게도 그 고전기 그리스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의 그 열정을 다시금 환기시켜 주었다. 과연 그리스의 어떤 요소가 나를 사로잡았는가.

"이성에 대한 신뢰, 강한 형식감각, 조화에 대한 사랑, 창조적 내지 건실한 성격, 선험적 추리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그리스 정신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핀다로스의 싯구처럼 "하루살이와 같은 것, 이것이 인생, / 꿈 속의 그림자와 같은 것."과 같은 인생에 대한 통찰과 넘치는 열정이 결합된다. 즉 인생의 의미와 인간정신의 목적에 대해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접근했으며(그런데 사실 이것은 어느 시기에나 있었다), 더 나아가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냈다는 데 고전기 그리스의 깊은 매력이 있다. 꿈을 꾸지 않은 시대와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단지 그 꿈이 너무 크거나 너무 작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그런 꿈이 불가능했거나, 아무튼 그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현실 속에서 실현되지 못한, 꿈으로만 그쳐야 했던 꿈들이, 저 고전기 그리스에서는 바로 현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폴리스를 통해서였다. 아우타르케이아(autarkeia, 自足)는 내 생각에 가장 멋진 상태이다. 그런데 거기서의 아우토가 근대적 개인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은 결핍된 것을 다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전기 그리스에선 아우토란 폴리스를 의미했다. 따라서 폴리스 내의 한 개인은 다른 개인들에 의해 결핍을 보충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상보적인 관계였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그리고 개인들과 폴리스 사이에. 그러면 쉽게 우리도 그럴 수 없느냐는 질문이 나온다. 우리에겐 불가능하다. 욕망이 너무 커진 탓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사회가 너무 커져서 통제 능력을 이미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인구 천만이 넘는 서울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채 백만이 안되는 성남시의 경우도 그리스인들에게는 상상이 가지 않는 흉칙한 도시인 것이다. 플라톤은 심지어 자신의 이상국가의 시민 수를 오천 명으로 제한했다고 한다. 이는 그 총인구 수를 오만으로 한다는 얘긴데 그 규모란 기껏해야 관악 인구의 두 배 정도인 것이다. 좀 많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한도 관악 인구 너댓 배의 규모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의 평생 생활이라! 뭔가 사람 살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좀 목소리가 크다면 아크로 같은 데 모아놓고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연설을 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처럼 돌아다니며 대화를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대학 내에서의 우리들의 생활이 그런 것처럼 그들의 생활이 폴리스에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느낌마저 든다. 전경이 처들어오면 자위대를 조직해서 막고 중대한 일이 생기면 토론을 거쳐 처리를 하고 하는 따위. 물론 경제적인 면을 비롯해서 차이점도 많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스냅사진처럼 박히는 그리스의 모습이란 약간은 한가로운 대학의 像이다. 만약 우리에게 그 공간밖에 주어져 있지 않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지적, 도덕적, 정신적 생활을 충분히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곳은 바로 그곳 대학(폴리스)인 것이다.

그리스어의 특질인 정확함(잦은 파티클의 사용), 온화한 기후 조건, 호메로스적 유산은 폴리스를 결합할 수 있게끔 했다. 우선 어휘적인 특징을 하나만 살펴보자. 예컨대 칼로스(kalos)란 말은 아름답다는 의미와 좋다는 의미 그리고 칭찬을 받을만하다는 의미 등 여러 의미로 '한꺼번에' 쓰일 수 있다. 그들은 이처럼 종합적인 사고를 했다. 특히 호메로스적 정신은 관념이 표현되는 양식을 찾아나가는 통제성에서 발견된다. 고립되지 않은 사물의 본질,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을 호메로스는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호메로스가 누구이냐가 아니라 호메로스가 무엇이냐이다. 과연 투키디데스도 역사를 통해 쓰고자 했던 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위해'가 아니다) 인간 행위의 본질을 분석, 기술하는 것이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시가 역사보다 보편적인 것을 다루기 때문에 더 철학적이라고 했을 때 시가 칭찬받을 수 있었던 원인이 된 바로 그 요소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이나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투키디데스의 역사나 나아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모두 일관되게 이런 흐름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키토 교수가 호메로스라는 고유명사를 보통명사처럼 사용하면서 말하고자 한 바이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앞에서 인용한 핀다로스의 싯구와 같은 데서 보이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절실한 인식이다. 그러나 인생은 또한 살 만한 것이다. 이것들의 혼합이 비극적 정신이며 그 비극적 정신은 비애나 우울의 감정이 아니었다. 우리가 {일리아스}나 그밖의 대부분의 그리스 문학에서 듣는 비극적 음조는 "인생에 대한 정열적인 희열과 변경할 수 없는 인생의 테두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 사이의 긴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이런 비극적 음조 속에서 다시 아우타르케이아가 등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더 부족함으로써 더 불행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휘브리스와 통하는 면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더 불행해지는 발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서사시와 비극을 통해 끊임없이 환기되었다.

폴리스는 또한 종교와 신들에 의해 결속되었다. 아폴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일년의 사분의 일 동안 디오니소스를 위한 축제가 개최된다. 마치 맛있는 빵을 위해 적당량의 밀가루와 이스트가 혼합되어야 하듯이 그리스인들의 훌륭한 삶을 위해서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적절히 조화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는 현대적(기독교적) 의미처럼 도덕적이지는 않았다. 차라리 상호 독립적이다가 어느 시기 이후에 시인들이나 철학자들에 의해 도덕적 요소가 덧씌워져 변형되었다고 하는 것이 사태에 맞는다.

두서없이 그리스적인 것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그것은 폴리스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개인과 집단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우리는 물론 기본적으로 노예제 노동과 다른 폴리스(혹은 식민지)에 대한 착취에 의거해서 폴리스가 성립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리라고 본다. 그러나 아우타르케이아나 비극적 감정의 생활태도 그리고 의욕적인 창조활동(정신적 창조건 육체적, 물질적 창조건) 이런 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더 중요하리라. 그것의 이유는 키토 교수의 말로 대신하겠다. "사람이 視界를 얻는 것은 산의 정상에서이다. 악한은 어디서나 비슷한 것이다."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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