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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17세기 철학의 용어법을 모르면 연구가 산으로 바다로 놀러 간다. 가령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에 나오는 한 대목을 보자. 마지막 부분에 affection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원문과 번역을 차례로 보자.

 

원문: "Ce detail doit envelopper une multitude dans l’unité ou dans le simple. Car tout changement naturel se faisant par degrés, quelque chose change et quelque chose reste; et par conséquent il faut que dans la substance simple il y ait une pluralité d’affections et de rapports, quoiqu’il n’y en ait point de parties." (출전: Ulrich Johannes Schneider, 2002)

나의 번역: “변하는 것의 세부(detail)는 단일함(l’unité, 단일체) 또는 단순함(le simple, 단순체) 안에 다양성(multitude)을 포함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자연적 변화는, 어떤 건 변하고 어떤 건 남아있는 식으로, 정도(degrés)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단순실체 안에는 비록 부분들이 없다 하더라도 다수의 변용들(affections)과 관계들(rapports)이 있어야만 한다.” (라이프니츠, <모나드론>, 13절)

 

나는 3종의 한글 번역과 다수의 영어 번역을 비교해 봤는데, affection이 제대로 옮겨진 경우가 별로 없어서 무척 실망했다. 대개 17세기 철학의 용법을 간과한 결과로 보인다. "상태의 움직임"(정종 1984), "성향"(배선복 2007), "특성들"(윤선구 2010), 영어본은 다 열거하지 않겠지만, affections를 그대로 옮긴 소수 판본(Leroy E. Loemker, 1989;  Lloyd Strckland, 2014)을 제외하면, "properties", "impressions", "conditions" 등이 눈에 띈다. 사정은 독일어 판본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Ulrich Johannes Schneider, 2002만 Affektionen으로 옮겼다).

 

17세기 철학에서 affection의 의미에 대해서는 내가 최근에 발표한 글의 일부를 옮긴다. ("들뢰즈의 '아펙트' 개념의 쟁점들 : 스피노자를 넘어", <안과밖 - 영미문학연구> 제43호, 2017년 하반기, 135~136쪽) 라이프니츠의 용법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대목이 있는데(라이프니츠에게 사실상 모나드 외부란 존재하지 않는 셈이므로), 그럭저럭 라이프니츠가 이 개념을 사용한 맥락은 추정할 수 있게 해 주리라 본다.

 

"이제껏 주목된 적은 없지만, 들뢰즈가 affect 개념을 처음 논한 것은 초기인 1962년 『니체와 철학』(Nietzsche et la philosophie)에서 니체의 ‘힘’(force, Kraft)과 ‘권력의지’(volonté de puissance, Wille zur Macht) 개념을 분석하면서다. 여기서 들뢰즈는 명사 affect보다 동사 affecter에 주목한다(대응하는 영어 동사는 affect, 독일어 동사는 affizieren). 이 동사는 라틴어 afficere에서 유래했는데, ‘~를 향하는’을 뜻하는 ad와 ‘행하다’를 뜻하는 facere가 합쳐진 말로, ‘~에 작용을 가하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라틴어 어원에 주목해야 하는데, 스피노자가 구분한 라틴어 명사 affectio와 affectus는 모두 이 동사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이 동사는 한국어로는 대체로 두 낱말로 번역된다. 스피노자의 맥락에서는 ‘변용시키다’, 칸트의 맥락에서는 ‘촉발하다’.

한국어로 ‘변용(變容)’은 ‘용모가 바뀜, 또는 그렇게 바뀐 용모’를 뜻한다. ‘변용하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수동의 의미를 담고 있다(‘변용되다’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그래서 affecter가 갖는 능동의 의미를 담으려면 ‘변용시키다’라고 쓰는 게 맞다. 스피노자는 두 물체가 만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작용을 가한다고, 즉 상호 변용시킨다고 보았다. ‘변용’은 구체적인 만남에서 가하는 국면(‘능동’)과 당하는 국면(‘수동’)을 필연적으로 내포하며, 따라서 ‘변용시키다’와 ‘변용하다’는 각 물체에게 동시에 벌어진다. 이 두 국면을 가리키는 명사가 affection(변용)이다. 한 물체는 다른 물체를 변용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변용하며, 이런 일은 만남 속 모든 물체에서 벌어진다. 한편 칸트에 서 이 말의 용법은 사태의 한 국면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축소된다. 칸트는 사물 자체가 인간의 인식능력에 작용해서 인식 가능한 대상이 되는 국면을 가리키기 위해 ‘촉발’이라는 말을 쓴다. 촉발은 인식 주체의 수동성 또는 일방적 수용성과 관련된다. 주체는 인식 대상을 일정하게 틀 지우긴 하지만 대상이 주체를 촉발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다. 들뢰즈는 affecter를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만물에 통용되는 원리로 삼는 스피노자의 용법을 따른다."

 

뭘 좀 하나 알아보려 하면, 결국은 처음부터 내가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될 때(그렇지 않을 때보다 그럴 때가 더 많다),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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