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철학과 문화론

부조리는 항상 연결되어 있다.

 

김승섭 지음,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2017 짧은 독후감

 

지난여름 내내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를 쓰느라 아파진 몸을 추스르며, 어떻게 해야 이 아픔이 길이 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유례없이 긴 추석 연휴를 틈타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었지만, 이런 아픔과는 다른 아픔을 다루는 책이었다, 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는데...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내가 결코 쓸 수 없는 종류의 책이다. 자신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어쩌면 자신을 말해 본 적이 없어서 더욱 말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문을 틔워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데이터를 쌓는 그런 포근함이 내겐 없다. 막연하게는 그러리라 짐작하고 있지만 실증적 증거는 제시하기 힘든 주제와 관련해 필요한 데이터를 만드는 법을 설계할 인내가 내겐 없다. 다행히도 김승섭 교수는 포근한 감수성과 꼼꼼한 인내로 내가 알고 싶어 하는 데이터를 가려 한 권의 책으로 묶어주었다. “저는 그들[세월호 생존 학생들]을 친구가 아니라 연구자로서 만나고 있었고, 제게는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게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머리를 차갑게 하고 귀를 계속 열고 준비한 질문을 말해야 했습니다. 저는 기록해야 했으니까요. 그 기록은 무겁고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163~165)

 

푸코가 정신병이나 감옥을 연구한 결과물을 들뢰즈가 이어받아 발전시켰듯이, 이 책은 앞으로의 내 연구에 좋은 데이터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아픔에 대한 역학epidemiology 연구라는 중요한 1차 자료를 제공해 준 김승섭 교수께 깊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내가 이 짧은 독후감의 제목으로 삼은 부조리는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책 183쪽에 나온다. 지은이는 4장에서 우리는 연결될수록 건강하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데 바치는데, 나는 삐딱하게도 반대되는 표현에 눈길이 갔다. 우리가 연결되지 못하게끔 하는 원인을 부조리로 칭할 수 있다면, 그 부조리의 연결을 폭로하고 타개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일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연구 태도는 두 가지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보건의 관점에서 치료보다 예방이 중요하다는 관점. “순수과학과 달리 공중보건에서 판단을 미루는 것은 여러 위험 요소로부터 현재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을 뜻합니다. 적절한 데이터나 과학적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을 핑계나 변명으로, 더 나아가 특정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80)

 

둘째, 아픔을 야기한 사회적 원인(“병의 원인의 원인”)이 해소되어야 참된 치료가 이루어진다는 관점. “트라우마에 대한 많은 연구는 인간의 몸에 상처를 남기는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초래한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사건의 의미가 해석되고 재생산되는 사회적 환경이 외상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라고 말합니다. 그 고통을 초래한 사회적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때 트라우마는 더욱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지요.” (175)

 

지은이가 살핀 아픔의 범위는 암, 심장병, 당뇨 합병증 등 몸이 직접 앓는 병 말고도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불안장애 등 정신질환, 나아가 사망률, 기대수명 증감, 자살 같은 현상까지 포괄한다. 연구가 향하는 지점은 분명하다. 사람이 아픈 원인을 추적하면 개인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이 있는데, 지금까지 개인적 요인에 초점을 맞춰 진단과 치료가 행해졌다면, 그에 못지않게, 또는 더 중요한 사회적 요인을 주목해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라스베이거스 총기 사건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한 다음 진술은 시사적이면서도 시의적절하다. “살인사건 하나하나는 개별적인 배경과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시카고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비해 살인을 방관 혹은 조장하는 공동체입니다.” (276) 총기 규제가 이루어지 않는 사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예견이다.

 

나는 4장에 언급된 로세토마을 사례가 중요하다고 본다. 1935년에서 1964년까지 이 마을은 다른 조건은 거의 같았던 인근의 방고마을에 비해 공동체의 힘이 작용해서 심장병 사망률이 절반도 안 되었다. 공동체가 개인을 보호해준다는 믿음이 건강에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미래를 로세토 마을 사례에 기반해 설계할 수 있을까? <오래된 미래>라다크는 어떨까? 사실 로세토 마을은 1965년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자본주의 침투, 개인 삶 우선시, 젊은이들의 이탈 등) 심장병 사망률이 방고와 비슷해졌다. “로세토 사람들은 1940년에 비해 심장병 사망률이 1970년에 대략 2배 가까이 증가”(295)했다.

 

그렇게도 살기 좋던 로세토도 라다크도 자본주의화 또는 미국화의 흐름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어떤 대안을 만들 수 있을까? 사회역학은 정치적 해법을 찾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런 해법은 국내 상황의 변화를 통해 얼마간 찾아볼 수 있다. 허나, 자본주의는? 국가와 정부를 가로지르며 힘차게 뚫고 들어오는 그 부조리의 연결망은? <아픔이 길이 되려면>, 건강을 찾기 위해 현 단계에서 우리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문제와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발상을 해내야만 돌파할 수 있는 문제를 함께 보여준다.

 

사실 지난겨울의 촛불혁명과 봄의 정권교체가 아니었다면, 나는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일련의 사회적 문제들이 풀려가는 (현재 진행 중인) 과정에서 개인적인 스트레스의 정도는 급감했고, 나는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사실 나도, 내 식구도, 주위의 지인도, 어떤 아픔을 함께 겪었고,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우리가 그렇게 겪은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성취이다.

 

----

 

아래는 내용 중 일부와 관련된 메모.

 

2장 중 [위험한 일터는 가난한 마을을 향한다](111~120)에는, 자본주의와 기업이 주체로 기능한 대목과 국가와 정부가 주체로 기능한 대목이 뒤섞여 서술되고 있는데, 사실 잘 구별되지 않는 면이 있지만 자본주의와 기업쪽에 책임이 있다고 파악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듯.

 

265~266쪽에 언급된 프레이밍햄 연구와 관련해 두 가지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것 말고도 사회적 관계망 대부분이 부모, 형제, 자녀 등의 일촌 관계였다면 유전적 특질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비만 정도가 공유된 것은 아닌지 하는 궁금증이 어떻게 해소될지?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고문살인의 전말 (김동렬 펌) [5] 철학자 2009.05.24 253143
공지 애도 노무현 [3] 철학자 2009.05.23 285758
공지 He will and should and must be back [5] 철학자 2009.04.18 258913
공지 그 때는 우리가 참 강했다 철학자 2008.02.22 275020
507 좋은 아빠가 되는 100가지 방법 100 Ways to be a Better Father [5] 철학자 2011.12.20 51380
506 바칼로레아(프랑스 고등학교 졸업자격시험) 시험문제 일부 철학자 2012.04.16 44390
505 애도 김대중 철학자 2009.08.18 36629
504 그라넬의 초기 맑스 존재론에 대한 벨리니의 정리글 철학자 2012.04.04 34250
503 니체 "환영과 수수께끼" 새 번역 [1] 철학자 2011.12.13 34098
502 베르그손의 스크린 우주론 철학자 2012.10.01 32480
501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K. Marx) [1] 철학자 2011.07.25 32173
500 맑스 "포이어바흐 테제" 새 번역 철학자 2011.12.13 31330
499 '번역어 성립사정' 관련 논평(펌) 철학자 2011.10.13 25907
498 Xenophanes of Colophon (Ξενοφάνης ὁ Κολοφώνιος ; 570 – 480 BC) 철학자 2011.01.30 25359
497 영어 to의 어원 철학자 2008.08.28 23763
496 ad Feuerbach 철학자 2011.05.02 22277
495 대중, 계륵 또는 늪 철학자 2011.01.03 20832
494 김재인의 철학사 [2] 아무것도 아닌 자 2010.08.18 20629
493 사유를 생각하라 철학자 2010.05.29 20296
492 abduction 가추법 철학자 2008.02.22 19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