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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철학과 철학사 김재인의 철학사

아무것도 아닌 자 2010.08.18 02:15 조회 수 : 20629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세계

 

 

 짐승의 가죽을 걸친 아무개가 무리와 함께 동굴로 들어서자 동굴 속 무리들이 달려들어 짐승의 가죽을 매만진다. 동굴 벽 여기저기에 짐승의 무늬와 닮은 긁고 새긴 자국들이 뚜렷하다. 뚜렷한 자국들을 흉내 내어 무리 가운데 하나가 이번에는 동굴 바닥에 무늬를 새긴다. 까닭없는 그 짓을 하다 문득 생각난 듯 무리들이 모인 자리로 가서 고기 한 점을 집어 입 속에 넣고 질걸질겅 씹는다. 간혹 무리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지만 이내 머리를 튼다. 무리의 눈 속을 아무도 들여다 본 일 없고, 어디에도 무리의 얼굴은 없다. 무리가 거듭하는 일은 사냥과 번식과 깊은 잠뿐이다. 대지는 아직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리에게 있어 사냥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존재 증명이 아니라,  삶 그대로였다. 사냥의 부정적 매개인 사냥 도구와 기술이 지닌 권력은 아직 드러난 바 없다. 단지 하나보다는 여럿이 뭉치고 사냥하는 것이 무리를 오래도록 살게 하였다. 무리의 어미 아비가 주먹돌로 딱딱한 껍질 속 열매를 깨어 먹을 무렵부터 그렇게 무리는 무리 지어 살았다. 그러나 돌을 쪼개어 짐승을 사냥할 무렵에는 몸체의 크기와 힘의 세기로 드러나는 짐승의 위계는 아무 소용 없었다. 사냥 도구를 지닌 힘이 약한 아무개들은 어미 아비 때와 달리 무리 지어 힘센 아무개를 공격했다. 힘이 약한 여럿의 아무개들이 무리에서 쫓겨나는 일은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암컷 무리가 동시에 거부하는 수컷 아무개는, 수컷 무리가 찾지 않는 암컷 아무개와 함께 번번이 생겨났다. 암컷 무리에게 버림받은 수컷 아무개는 암컷 무리의 따돌림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무리를 떠나지도 버림받은 암컷을 찾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몇몇의 암수를 빼면 무리는 짝을 바꿔 수시로 씹좆을 맞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동굴 속은 무리의 기쁨이 땀범벅된 야릇한 냄새가 떠나지를 않았다* 무리는 그 냄새가 짐승의 피냄새보다 좋았다.

 새끼를 낳고 기르는 일은 무리 모두의 몫이었으므로 제 뱃속으로 낳은 새끼를 따로이 챙기는 것은 오히려 사소한 보살핌에 지나지 않는다.  암수 몇몇을 무리가 피한 것처럼, 무슨 까닭에서인지 핏줄끼리의 씹질*은 드물었다. 그것은 먹을 수 있는 열매와 먹어서는 안 될 열매를 가리는 것만큼 쉬워 보였다. 비가 온다il pleut, 밤이다il fait nuit.* 피에 굶주린 사냥꾼의 시간은 잠들고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태초의 사랑으로 가득한 하나의 몸체들로 동굴 속 이곳저곳은 그늘 속 빛띠처럼 부시다. 어느 몸체의 어울림이 아름다울까, 어느 몸체의 울림이 먹구름 저편 꿈꾸는 별자리에 닿을까. 동굴 속 아득히 백치들의 보석같은 질투가 숨죽인 별빛보다 환한 불꽃 되어 타오른다. 긴 밤으로 타오른 불꽃의 따스함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이면 이제는 젖달라 보채는 새끼들의 울음소리로 동굴 속은 다시 한 번 소란 속이다. 갓난새끼들 또한 나름 달라서 자주 보채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쉽게 다룰 수 있는 무리도 있었다. 물론 제법 자라서도 젖을 떼지 못하고 수시로 보채는 별난 새끼들도 눈에 띈다. 무리의 어미 아비들은 그러나 새끼들 아무개 하나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날 때부터 뭔가 달라 보이고 따돌림을 당하게 되는 아무개도 무리에게는 쓰임새가 있었다. 암컷에게 따돌림을 당한 수컷 아무개는 동굴 벽에 짐승의 무늬를 새기는 일이 잦다. 짐승의 무늬는 무리가 보기에 좋았다. 수컷이 찾지 않는 암컷 아무개는 창끝에 돌칼을 잘 엮었다. 수컷 무리는 암컷 아무개의 창 만드는 솜씨를 기쁘게 여겼다. 무리는 무리의 아무개들을 똑같이 귀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무리의 한 몸체를 위해 아무개의 몸체는 힘껏 움직였다. 무리가 시킨 것도 아니고 뜻한 바 아니었으나, 아무개의 자그마한 움직임은 곧 무리의 몸체가 움직이는 듯한 큰 힘을 펼쳤다. 10만 년 전, 슬기로운 무리가 태어난 그 때를 가리켜 우리는 도구적 구석기라 부른다.* 도구의 다룸을 넘어, 갖가지 도구를 만들고 부려, 낳아준 자연과 맞서던 시기였다.

 무리가 만든 도끼들 보자. 그것은 이전의 사냥 도구와는 다른 쓰임새를 가진다. 사냥 따위에 머물고 마는 도구의 일차적 이용이 아닌, 도구를 사용한 도구의 이차적 생산이 가능하다. 나무를 찍고 다듬어 동굴 밖 목책을 만든다. 이리떼의 습격으로부터 보다 안전해졌다. 또한 도끼의 잦은 사용으로 인한 갖가지 나무의 알맞은 쓰임새를 찾았다. 박달나무는 조금만 다듬으면 매끄럽고 단단하여 목책의 기둥으로 모자람이 없다. 목책의 얼개는 목책 기둥 사이에 등껍질이 미끈한 감나무로 성글게 보를 엮고 싸리나무로 촘촘하게 메운다. 박달나무는 한창 무더운 날들 버드나무 시냇가를 끼고 걷다 마주한 두 그루의 앵도(앵두)나무를 맛있게 먹는 자리에서 따갑게 눈 돌렸던, 반짝반짝 빛나는 은사시나무 언덕으로 곧장 올라 거기서 가장 큰 봉우리 쪽으로 내처 가면 나오는 박달나무 숲에서 구할 수 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햇살 가득한 날들 끝에서 겨우 살 것 같은 찬바람 들던 날 서둘러 털가죽을 걸치고 철없이 나선 아무개가 감따러 올랐다가 미끄러져 다리를 부러뜨린 그 곳, 감나무는 굴참나무 숲 아래의 그 구릉으로 가면 많다. 거기서 지나온 앵도나무 시냇가와 은사시나무 언덕 만큼의  거리를 더 가면 밤나무 숲이 있어 맛있는 밤이 지천으로 널렸다. 수컷 아무개가 밤을 한 움큼 주워 와 암컷 아무개에게 건네자 암컷 아무개가 받아 쥐고는 헤벌레 웃는다. 수컷 아무개는 따라 웃다 냉큼 다른 쪽 손아귀에 쥔 밤까지 몽땅 건넨다. 암컷 아무개는 다음 날인가  다음다음 날인가, 아무튼 어느 날에 밤을 준 수컷 아무개에게 짐승의 가죽 쪼가리와 싸리나무로 엮은 발싸개를 건넸다. 수컷 아무개가 헤벌쭉 웃었다.*

 

 

 

 몸체의 탄생

 

 -몸체, 김재인을 따라서 나는 그를 존재의 일의적 내용 전부라고 말한다. (김재인의 몸체론, 김재현, 2027, 철학과 문화론.)

 

 

 대지는 47퍼센트의 산소와 28퍼센트의 규소 등으로 이루어진 무기염류의 몸체이고, 인체는 63퍼센트의 수소와 25퍼센트의 산소에 약간의 탄소 결정체(당, 단백질, 지질)가 합성된 유기화합의 몸체라고 하면 정신(영성)을 제외한 과학적 인간 몸체의 정의는 성립하는가. 김재인(의 들뢰즈)이 말하는 몸체corps*는 자연이라는 몸체, 대지라는 몸체와 만나는 신체라는 인간의 몸체가 몸체들의 화학 작용 끝에 합성된 생산하는 주체 혹은 세계 자체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겸손하기에 지난한 무한의 구성주의는 성립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자가 당의 구성 성분과 구조, 글리세르알데히드와 리보소의 분자 구조까지를 입에 담을 필요는 없다. 다만 더 잘(쉽게) 말하기 위해서 세세한 그것까지 알아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차후 아리스토텔레스 편에서 상세하게 다루자.) 우선은 신체라는 인간 몸체가 어떤 구조로 합성되고, 나아가 외부 몸체와 어떻게 만나 정신과 신체라는 하나의 몸체를 구성하게 되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무리의 암컷 아무개가 오랜 시간에 걸쳐 21세기의 지적인 몸체로 거듭났을 때, 그럼에도 무리의 암컷일 때와 같은 행동 양식들이 발견된다면 여자라는 특이성의 뇌구조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여자라는 특이성 자체를 합성한 여자: 사회- 기계(절단된 기계들의 구성이 또한 몸체다)의 구성 계기를 살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밥짓고 옷짜고 노래하고 춤추며 시 읊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 몸체는 처음부터 그런 상태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갖가지 사회 기계들의 합성으로 인한 여자라는 구성적 계기로써 몸체화하였을 것이란 점이다. 바로 뇌구조란 그런 구성적 계기에 의해 합성된다. 예컨대 아마조네스의 전사들이 오늘에도 살아서 이라크 전장을 누비고 다닌다면, 그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과연 여자 몸체의 그것에 가까울 것인가. 오히려 '여자답지 못한' 별종의 특이성을 발견할 것이며, 겉만 여자인 이상한 몸체라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아마조네스의 몸체는 여자 몸체가 아닌 제 3의 별종인 몸체의 탄생인가. 여기에는 철학적 음모와 함정이 숨겨져 있다. 김재인의 몸체론을 가볍게 따르면 제 3의 별종인 아마조네스의 몸체는 독자성*을 지닌 기쁜 만남(합성)의 몸체가 된다. 반면 김재인의 실천적 계기라는 구성주의에 따라 복잡하게 따지면 여자라는 본디 좋은 몸체를 잃고(버리고), 타고난 여자 몸체와 원한져 남성 몸체의 희망이라는 과도기적 지향의 슬픈 몸체(부정적 제 3의 몸체; 긍정적 제 3의 몸체는 없다. 타고난 힘을 원하는 힘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긍정이다)가 엿보인다. 지향은 욕망(무의식적)의 자연스러운 합성을 거부하고* 공리계axiomatique*의 주체적 산물(권력은 남성 황제에게- 남자에게 힘을! 따위)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몸짓에 불과하다. 몸체의 욕망을 끝까지 건전하게 이어가지 못한 자가 공리계에 갇혀 당연한 듯 선택하는 것이 몸체의 초월을 말하는 정신 혹은 종교라고 본다.* 정신의 저 먼 초재超在에 갇힌 자들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단 한 번도 긍정해 본 일이 없다. '욕망의 무의식적 수련'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세계로 돌아가 보다 심층적으로 몸체라는 자연스러운 합성의 탄생 과정과 몸체가 어떻게 종교와 권력이라는 초월적 공리계에 포획당하는지를 지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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