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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오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많은 논란을 빚고 있는 이른바 "위장전입"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숟가락을 얹어 볼까 한다. 아직까지 별로 논의되지 않은 몇 가지 지점을 짚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1. 일단 "위장전입"은 공식 용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주민등록법 위반"이라 해야 맞다. 임명직이건 선출직이건, 공직자 또는 공직 후보자에게 실정법 위반은 중대한 결격 사유이며, 따라서 쟁점으로 삼을 만하다. 그런데 더 먼저 짚고 가야 할 사항은, 틈만 나면 "인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이들조차, 정작 "주민등록법"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이 법의 입법 취지는 개인을 국가의 일원인 국민으로 포획하여 통제하고 행정의 편의를 도모하는 데 있다. 내가 보기에 개인이 어디에 살건 간에 그걸 국가에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으며, 따라서 그런 의무 조항을 설정하고 위반시 '처벌'해야 한다는 발상에는 동의할 수 없다. 주민등록법은 주민감시...를 위해 시작되었고, 나는 독재의 잔재로 간주한다.

 

물론 개인과 국가 간에 맺을 수 있는 계약 형태는 다양할 수 있고, 개인이 국가에게 각종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 어떤 계약 내용을 담아야 할지는 근본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주민등록법" 같은 법이 ("국가보안법"과 비슷한 수준에서) 꼭 지금 형태로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는 주민등록번호 제도라는 문제와도 일맥상통한다. 미국 같은 나라도 주민등록법이나 주민등록번호 같은 제도는 없다고 알고 있다. 행정편의주의나 국민통제의 도구로 이용되는 법이라면, 폐지하고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2. 야당의 행태에 분노를 감추기 어려운 건 그들의 잣대가 항상 예외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들 자신. 과거에 그들이 어땠는지 들추어 비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뻔뻔함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기에, 약효는 별로일 것이다. 따라서 선출직 최고 공직자인 그들 자신에게까지 적용할 수 있는 일관된 기준을 제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들을 선출한 유권자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 가령 안철수에게 표를 줬던 유권자들도 안철수의 "위장전입"에 정치적 연대책임을 지는 식이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대한민국 구성원 거의 모두의 책임으로 확산될 것이 분명하기에, 이 접근은 애초에 기각될 것으로 본다. (많은 관념론자-근본주의자는 이런 접근을 선호할지 모른다. 모두 죄인이다, 회개하라!)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접근을 먼저 꺼낸 건, 사람들이 '법'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국회의원은 정치인이고, 정치인은 법을 만들 권력을 갖고 있다. 이들이 실정법을 엄중하게 여기기도 하고 가볍게 여기기도 하는 이유는 이 입법 권력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니 '국민적 지지'니 하는 말들은 사실상 입법 권력으로 수렴되기 때문에, 이들은 법을 갖고 놀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야당이 "위장전입" 문제를 제기하는 건, 이들이 비양심적이고 무지하고 파렴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본래' 정치인이 갖고 있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들도 '국민'의 대표이고, 선거를 통해 국민이 일정 기간 권한을 몰아주었고, 중간에 그 권한을 뺏는 건 무척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니 어떤 선거건 선거를 잘 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치인에게 법의 문제는 지키고 아니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폐지하고 제정하고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자주 놓치는 지점이 이곳이다.

 

그렇다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결국은 제도를 잘 세팅하는 수밖에 없다. 제도의 집행은 사람이 한다고 하지만, 사람이 재량으로 제도를 운영할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현재의 대한민국 수준에서는 '과도기'나 '탕감'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어느 수준까지 '탕감'하고, 어느 시기까지 '과도기'로 볼지,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저것 찾아 보니 "위장전입"이 왜 중요한 범법행위인지 정당화하는 글이 꽤 눈에 띄었다. 내가 보기엔 대부분 아전인수 격이었다(국가보안법 정당화와 비슷한 논리). 말하자면, 별도의 제도를 통해 지적될 수 있는 불의의 요소를 막거나 견제할 수 있다는 말이며, 주민등록법을 통해 내가 사는 곳을 국가에 보고해야 하는 의무를 지우는 건 부당하다는 말이다. 사람을 위법자로 만드는 법이라면 법을 바꿔 위법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마땅하다. 누군가는 한 공직 후보자가 '리'에서 "위장전입"을 했다고 문제제기를 했다고 한다. 법이 의도보다 행위를 볼 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행위를 통해 의도까지 판단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법 구문을 갖고 일관된 잣대를 들이대어서는 안 된다. 해석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렇게 해서 위법의 경중을 가려야 하고, 그 기준점의 마련은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법감정일 것이다. 국민 수준이 곧 국가의 수준이다.

 

3. 맺음.

두 가지 생각거리를 찾아 봤다. 하나는 주민등록법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점. 둘째로는 실정법 말고도 입법의 관점에서 법의 문제에 접근해야 하고, 그래야 위법과 합법의 의미, 선거의 중요성, 국민 법감정의 실효화 같은 문제도 이해될 수 있다는 점. 더 이상의 구체적 논의는 내 일은 아닌 것 같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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