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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 게시판에 달린 스팸 댓글 때문에 다시 옮겨 적는다.

김재인  (Homepage) 2002-06-26 03:27:07, 조회 : 7,177, 추천 : 383

* 이 글은 1997년 대선 직전에 <황해문화> 겨울호를 통해 발표했던 글이다. 5년 전의 글이지만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유효하다고 보아 이곳이 다시 적는다. 강조와 특수문자는 편집 과정에서 지워졌고, 책에서 일부 표현이 수정되었음을 밝힌다.

 

 

사이버 정치가 곧 정치이다

 

1. 한 마디, 현실 공간에서 사이버스페이스로 들어가는 시점에서

 

대선의 소용돌이가 남한 전역을 휩쓸고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통신상의 몇몇 동호회나 게시판에서는 일찍부터 정치성 짙은 발언들이 오가곤 했다. 그러나 신문의 기사나 정당의 대변인 성명 수준에도 못 미치는 글을 게시판에 올렸다고 해서 구속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보면, 통신인들의 정치 관련 발언은 기본 수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한계를 애초부터 갖고 있다.(주1) 따라서 신문이나 방송에서 떠드는 것처럼 PC통신 공간이 대선의 열기로 달아올라 있다거나 대선 논의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상당한 오해이다. 기자들은 기사를 만들기 위해 언제나 과장하는 버릇이 있다.

그나마 존재하는 통신 공간의 대선 열기가 현실과 얼마나 거리가 있느냐 하는 것은, 권영길 후보가 PC통신 상에서 대선 주자 인기도 2위를 달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실제로 권영길 후보는 가끔 뉴스나 신문 구석에서 기사로 다루어질 뿐, 대부분의 신문․방송 토론회에는 얼굴도 못 내밀고 있다. 심지어는 뒤에 언급될 동아일보 주관 “97 대선 후보 초청 사이버토론회”에도 못 나가는 형편이다. ‘당선 가능성’과 ‘현실적인 영향력’의 관점에서 권영길은 다른 ‘주요’ 후보들과의 경쟁에서 어림도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통신 공간에서는 김대중 후보 다음의 인기를 얻고 있다. 이것이 내가 살펴보고 보고하는 실제 상황이다. 사이버스페이스와 현실 공간 사이의 이 넘기 어려운 장벽, 이것이 97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통신 공간에서의 정치를 볼 때 가장 두드러지는 점이다.

흔히 정치에 관한 첨예한 비판이 PC통신의 각종 동호회나 게시판을 통해 개진되고 있다는 얘기가 신문․방송을 통해 떠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과장된 발언이다. 왜냐하면 드물긴 해도 각종 신문․잡지 매체를 통해서도 같은 정도의 첨예한 비판들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신을 통해 첨예한 비판이 개진된다고 해서 그것이 통신 특유의 장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 ‘통신’과 ‘첨예함’의 결합은 여기서 다분히 우연적인 것이다. 게다가 PC통신 공간 내에서 청와대나 국회를 중심으로 한 현실 정치 관련 게시물의 수는 절대적으로 미미하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술자리에서 그 주제들이 차지하는 비중과 비교해 보더라도 쉽게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이버스페이스의 정치를 미미하다고만 결론 내릴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항상적으로 직접 민주주의가 연습되고 실천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정치에 관해서 지금까지 많은 오해와 남용이 있었다고 본다. 이 글은 그 오해와 남용을 좀 풀어보자는 생각에서 씌어진다. 수년간의 통신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가 이 글이다. 우선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의 방법을 개괄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들뢰즈는 ꡔ철학이란 무엇인가?ꡕ에서 ‘철학이란 판(plan)을 짜고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사이버스페이스에 관해 새로운 판 짜기와 새로운 개념 사용을 제안하고자 한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사이버스페이스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본다.

이 글의 중심 서술 대상은 ‘사이버 정치’지만, 그 말은 지금까지의 담론 공간과는 다른 판을 요구하기 때문에 섣불리 얘기되어서는 안 된다. ‘사이버 정치’란 일차적으로는 사이버스페이스 내부의 정치를 의미한다. 그것이 현실 정치와 구분되는, 현실 정치의 한 도구라고 순진하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2절의 논지이다. 또한 ‘사이버 정치’이건 ‘정치’이건 그것은 기존의 ‘권력’ 개념과 관련되어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3절에서 논의된다. 나는 ‘정치’에 대한, 그리고 그것의 특권적 영역이라 간주되어 왔던 ‘권력’에 대한 최근의 연구 성과(스피노자와 니체의 통찰을 재발견한)를 수용한 차원에서 논의를 전개시킬 것이다. 그 다음으로 4절에서는 사이버스페이스를 논의할 때 가장 많이 얘기되는, 동시에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virtual reality(또는 약어로 VR)라는 말의 의미를 재검토할 것이다. 일본어 오역인 “가상 현실”이라는 말이 무비판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 말은 실제로는 ‘실제 현실(actual reality)’과 대비되는 ‘잠재 현실’이라는 말로 번역되어야 할 개념사(史)를 업고 있다. 이제 ‘잠재 현실’이라는 말은 사이버스페이스의 독특한 현실성(실재성)을 가리키는 핵심어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5절에서는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의 정체성/동일성을 가리키는 잠정적인 말로 ‘사이버아이덴티티(cyberidentity)’라는 말이 제안될 것이며, 그 주체/행위자가 행하는 정치와 경제가 각각 ‘사이버 정치’(cyberpolitics)와 ‘사이버 경제’(cybernomics)라는 말로 지칭될 것이다. 이 부분의 논의가 확대 심화되어야 하겠지만, 이 글이 성격상 판짜기의 측면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사이버 정치 경제학’은 앞으로의 연구 방향만 간략히 다루는 선에서 그칠 것이다. 미흡한 각론이더라도 판짜기가 잘 된 연후에는 충분히 보완될 수 있으리라 본다.

 

2. 사이버스페이스의 도구적 사용 비판

 

우선 나는 사이버스페이스를 말함에 있어, TV라는 매체를 우선적인 논의 대상에서 일단 제외하고자 한다. 최근에 홍석경은 「텔레비전의 독재와 민주 정치」(주2)라는 글에서, TV를 ‘매체’로 규정함으로써 TV에 대한 단순한 도구주의적 관점을 넘어선 바 있다. 그는 철저하게 ‘매체’적인 관점에서 TV가 갖고 있는 정치적 영향력을 분석하고 있다. 예컨대 그의 접근은 이런 식이다: “텔레비전은 우리가 현실(또는 실재)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의 시공간적 질서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관찰할 시선을 고정시켜준다는 점에서 20세기가 발견한 새로운 원근법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97년 12월 한국의 대선과 관련해서 논의되고 있는 TV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구구한 해석들(TV를 정치에 어떻게 잘 이용할 것인가 따위)을 순진한 도구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하며 “TV가 정치적 과정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TV에 ‘적응’하게 된다”고 지적한 후, 그 구체적인 양상들의 몇몇을 분석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도 이런 접근의 유효성을 십분 인정하는 동시에, 내가 논의할 사이버스페이스와 정치의 관계를 분석하는 지점에서도 그의 접근이 어느 만큼은 설득력 있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이 글에서의 내 접근은 그런 식의 논의와 차별성을 갖는다. 내 접근이 그런 접근과 다른 부분은, ‘멀티미디어 네트워크 컴퓨터 시스템’을 기반으로 형성된/형성될 사이버스페이스(주3)를 논의의 중심에 놓는다는 점(이것은 일종의 소재주의다)에 있다기보다는 정치와 매체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고려해서 매체 내부의 정치를 사유한다는 점에 있다. 이 말은 곧 나의 분석이 역으로 TV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분석에 적용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주4)

사실상 현 시점에서 사이버스페이스와 정치의 관계에서 관심의 초점은, 대선 주자들이 사이버 공간(주로 PC통신과 인터넷)에 나와 TV 토론을 하듯이 질문에 답을 한다고 하는 사태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맞춰져 있을 뿐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현재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등 4대 통신망에서 진행되고 있는, 동아일보 주관의 소위 “97 대선 후보 초청 사이버토론회”이다. 요컨대 동아일보라는 재벌 언론은 사이버스페이스를 대선의 한 도구로 축소시키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기획과 보도의 선정성을 팔아먹고 있다. 그 진행 과정을 더 면밀히 살펴보자.

기획 내용과 진행 방식은 이렇다: 97년 11월 4일~10일 오후 9시, 서울 충정로 동아일보사 18층 강당에다 12월 대선에 출마할 후보들을 하루에 한 명씩 데려다 놓고(실제로는 이인제, 조순, 김대중, 이회창 후보만 나왔다), 패널 토론자를 통해 질문하고 대답을 받아 그 내용을 속기를 통해 PC통신과 인터넷에 생중계한다는 것. 이 과정에서 통신을 통해 즉석 질문을 받아 이를 반영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 패널 토론자의 선정이나 질문 내용 선정에 있어서도 통신인들의 의견 수렴을 거친다는 것. 동아일보는 이에 대해 “전자민주주의의 새 장을 열고 있다”(11/2일자),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최첨단 방식의 토론회”이며 “온라인을 통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10월21일자)이라고 선전한다.(주5) PC통신이나 인터넷을 잘 모르는 사람이 그런 기사를 봤을 때 현혹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뭔가 나는 잘 모르지만 사상 유례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동시에 나는 이 첨단 정보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주눅들기 십상이다. 이것이 선정성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나는 내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과연 동아일보의 보도가 선정적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사실을 보도한 것일 뿐 아닌가? 실상 이 토론회는 기획이나 진행에 있어 거의 TV토론회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TV와 전화의 유사품에 불과한 PC통신망과 인터넷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 말고는. 사실 TV를 통한 대선 토론회가 본격적으로 성사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따라서 대선 토론회에 관한 한 TV 토론회의 모델 역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이유로 통신망을 통한 사이버토론회가 ‘마치 TV 토론회인 것처럼’ 다루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보이며, 사이버토론회를 TV 토론회의 포맷으로 꾸미려고 한 조급함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니다. 따라서 하나의 실험으로써 이번 토론회는 나름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토론회를 신문에서 다루는 방식에 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대선 토론이라는 엄청난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우리 동아일보가 해냈다는 것!(주6) 이 과정에서 대선 주자들이야 밑질 게 없고(자신들의 정보화 이미지 관리에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PC통신사야 광고 해주니 좋고(신문을 통한 홍보가 얼마나 엄청난가), 동아일보는 공치사(우리가 이런 일을 주도한다라는 이미지 홍보) 하기에 좋고 기사거리 만들어 좋은 것이다. 따라서 위의 토론회는 PC통신사와 신문사와 정치인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성사된 일종의 ‘정치 쇼’ 정도로 평가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진짜 문제는, 정보화의 생기초도 모르는 대선 주자들일지라도 ‘정보화’의 첨단을 걷고 있다는 대국민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아, 이들이 이런 데서까지 이런 일을 하는구나!”), 사이버스페이스를 단순히 정치의 도구로만 이해하는 관점이 강화된다는 점, 게다가 정치를 선거로만 축소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다는 점, 이는 나아가 사이버스페이스 내부의 정치를 간과하게 만든다는 점 등이다.

우리는 “시사토론”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이런 식의 토론이 우리를 얼마나 감질나게 하는지를 알고 있다. 중요한 핵심 사항은 언제나 답변 유보되며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자꾸만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문제는 그것이 일시적인 사태가 아니라 늘 그럴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말해 “위대하고 커다란” 일을 하는 정치인들은 그런 사소한 문제에 연연할 시간도 마음도 없는 것이다. 이는 나 개인이 멋대로 내린 판단이 아니다. 선거철만 되면 우후죽순처럼 PC통신과 인터넷에 정치인들의 공간이 만들어지는데, 선거가 끝나면 대부분 폐쇄되는 것이 우리의 실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내부에 들어가 봐도 일방적인 홍보 자료만 그득할 뿐, 핵심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답변 부재로 일관한다. 우리 통신인들은 이미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 통신인들은 대개 그런 ‘정치 쇼’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실제로 사이버스페이스에 거주하며 살고 있는 꽤 많은 통신인(네티즌)들은 그런 토론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별 관심을 갖게 되지도 않는다. 그 무관심의 정도는 관변 행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관심과 별 차이 없으리라. 신문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척 많은 네티즌들의 호응” 어쩌구 하며 떠벌린다. 우리 통신인들은 그런 거짓을 꿰뚫어보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통신인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이다. 통신인들이 구체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들은 그런 쇼나 스펙터클에서 눈을 돌려 오히려 작은 자리, 별로 드러나지 않는 자리, 잘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정치적이 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언로(言路)를 트는 일,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확대시키는 일이다.

 

3. 정치란 일상적 삶의 문제이다

 

사실상 우리는 피해자 또는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일에 너무 익숙해 있다. 그 결과 권력의 담지자가 누구인지 종종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 스피노자와 니체의 적극적인 해석자인 푸코(그리고 들뢰즈)에 따르면 권력은 어디에나 있으며 누구에게나 있다. 문제는 그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느냐 또는 더 정확히 말해 권력 관계(권력 망)를 어떻게 조직하느냐이다. 우리들 각자는 자기 삶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힘(puissance, pouvoir)을 갖고 있다. 그 바탕에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창조하려는 노력과 욕망이 있다. 그 힘과 그 욕망―그것이 우리의 최후의 보루이자 동시에 우리의 삶의 시작점(arche)이기도 하다.

나는, 죽기 얼마 전에 푸코가 행한 인터뷰인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자기 배려의 윤리」에서 얘기되는 바가 논의의 핵심을 짚어내고 있다고 보기에, 논의를 질질 끌기보다는 그것으로 이 부분의 논의를 대신하고자 한다. 좀 길더라도 그의 진술을 직접 들어 보자:

 

나는 거의 “권력”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끔 내가 그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그건 언제나 내가 늘 사용하는 표현인 ‘권력 관계들’의 약어로서이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유형들이 있다: 그러니까 “권력”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권력 구조, 통치, 지배적인 사회 계급, 노예를 대하는 주인 등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내가 “권력 관계들”에 대해 말할 때 생각하는 바가 아니다. 인간 관계들 속에는, 그 관계가 무엇이건―우리가 바로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언어적으로 소통하는 것의 문제이건 애정 관계나 제도적․경제적인 관계이건 간에―권력은 항상 존재한다. 내가 의미하는 관계들이란, 그 관계들 속에서 사람들이 타인들의 행위를 조절direct하기를 원하는 관계들이다. 이것들은 상이한 수준과 형식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관계들이다. 그러니 이러한 권력 관계들은 변화 가능한 관계들인 것이다. 즉 그 관계들은 스스로를 변양modify시키므로 확고히 주어져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나이가 더 많아서 처음에 당신이 겁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대화의 과정에서 바뀔 수도 있으며, 누군가의 앞에서 단지 그가 더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겁을 먹게 되는 게 바로 나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권력 관계는 변화 가능하고, 역전 가능하고, 불안정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주체들이 자유롭지 않다면 권력 관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관찰해야만 한다. 어떤 한 사람이 완전히 타인의 처분에 맡겨져 있고, 그 타인의 소유물이고, 그 타인이 무한하고 무제한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권력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권력 관계가 행사되기 위해서는 양측에 적어도 어떤 형태의 자유가 있어야만 한다. 권력 관계가 완전히 균형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고, 누군가 다른 사람에 대해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을 때조차도, 후자가 여전히 자살을 하거나 창 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상대방을 죽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한도 내에서만 하나의 권력이 다른 사람에 대해 행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권력 관계 속에는 필연적으로 저항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저항―그 상황을 역전시키려는 폭력적 저항, 도피, 계략, 전략―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권력 관계는 절대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만약 사회의 장(場) 도처에 권력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도처에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효과적인 지배 상태라는 게 있다. 많은 경우들에 있어 권력 관계는 영속적으로 불균형적인 방식으로, 자유의 여백이 극히 제한되는 방식으로 고정된다. 확실히 좋은 범례가 될 수 있는 예 하나를 들겠다: 18, 19세기 사회의 전통적인 부부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남성의 권력만이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여성 자신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남편에 대해 불충실하기, 남편으로부터 돈을 빼돌리기, 그와의 성 관계를 거절하기. 그러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그 상황의 역전을 야기시키지 못한 몇 가지 트릭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지배 상태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러한―경제적, 사회적, 제도적, 성적―지배의 경우들에서, 문제는 사실상 어디서 저항이 조직될 수 있는가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예컨대 노동 조합이나 정당을 통해 정치적 지배에 저항하려는 노동 계급일까? 또 파업, 총파업, 혁명, 의회 투쟁 중 어떤 형식으로일까? 그러한 지배 상황 아래에서는 매우 특수한 방식으로, 지배의 종류나 엄밀한 형식의 함수 관계function 속에서 이 모든 문제에 대답해야 한다.(주7)

 

그것, 그 권력을 행사하며 살아가는 자가 과거에는 ‘정치적 인간’이라고 불렸다.(주8) 그리고 앞으로 다시 그럴 것이다.

정치란 선거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문제다. 앞 절에서도 지적했지만 정치를 ‘선거’로 축소시켜 생각하는 것이 ‘정치’를 (그리고 우리의 주제인 ‘사이버 정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이며 ‘정치’의 본질을 외면하는 일이다. 물론 현대와 같은 대의 정치(주9)의 시대에 ‘선거’는 정치의 꽃이라 불릴만하다. 하지만 대의 정치는 적어도 원론적으로는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의 차선책에 불과하다. 사실상 대의 정치가 불가피한 상황에서라도, 일상적인 삶에 문제나 고충이 있을 때 언제나 자신의 대표자(지방의회 의원이나 국회의원)에게 문의하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어 달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상설 창구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얘기이기 때문에, 독자도 이런 얘기를 들으면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으리라. 사실 지금까지는 여러 가지 핑계가 있을 수 있었다. 시간이 없다, 장소가 없다 등등. 그러나 이제 상황이 좀 바뀌었다. 사이버 공간이라는 것이 그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거의 완전히 없애준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그런 변명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선거철에만 잠깐 반짝하라고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늘 있는 공간이며, 일상적인 정치의 장이며, 직업 정치인들이 더 이상 시간․공간 타령을 하면서 변명을 할 여지가 없어졌다는 산 증거이다. 이제 사이버스페이스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정치인들이 어떤 마음 가짐을 하고 있는지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수없이 쏟아지는 질문과 문제 제기와 토론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답하지 않는다면 이제 통신인들은 더 이상 그 정치가를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화살표이다.

 

4. “가상 현실”이 아니라 ‘잠재 현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이버 정치의 전부는 아니다. 사이버 정치를 이해함에 있어 분리의 관점―즉 현실 정치라는 게 있고 사이버 정치라는 게 있다는 관점, 나아가 현실 정치만이 진짜로 존재하고(따라서, 중요하고) 사이버 정치는 현실 정치의 한 부속물 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관점―은 불가피하지만 늘 경계해야 하는 관점이다. 앞 절 말미의 논의도 그런 분리를 전제할 때 얘기될 수 있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사이버스페이스는 허구적이거나 단순 도구적인 공간이 아니라 많은 인간 행위가 일어나는 곳이다. 그 안에서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사고 돈을 주고받고 공부를 하고 정보를 구하고 일을 하고 한다는 얘기가 단순한 비유가 아닌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를 뭔가 허구적이고 상상적이고 환상적인 곳이라고 오해하는 것은 아주 심각하고 치명적인 잘못이다.(주10) 이런 잘못된 관점을 낳은 가장 중요한 계기가 바로 “가상 현실”이라는 말에 있다는 게 내 진단이다. 우리말에서 ‘가상’이라는 말은 분명하게 ‘실상’에 대립된다. 그래서 그 말에서 자꾸만 허깨비나 사이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이버 정치는 ‘사이비 정치’요 없는 거나 다름없는 허깨비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스페이스는 도구가 아니라 매체이자 삶의 장이다. 이 단순한 명제가 우리를 개안케 하리라. 이 명제는 보기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전화나 자동차 없는 현대 생활을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매체이기 때문이다. 매체는 단순히 그것을 가지고서(with) 우리가 살아가는 그 무엇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through) 그것 속에서(in) 사는 그 무엇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비록 최근의 발명이지만 전화나 자동차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이버스페이스의 현실을 “가상 현실”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무식의 소치다. virtual reality는 컴퓨터의 첨단 기술을 동원해 인간의 오감을 창조하는 것이기에(예를 들어 VR 게임이나 사이버섹스도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감을 컴퓨터 기술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빌어 쓴 “가상 현실”이라는 말은 우리말 어감에서는 완전히 틀린 말인 것이다. virtual reality는 분명한 현실(reality)이다. 그 현실이 어떤 종류의 현실성을 갖고 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현실의 두 가지 양태(modus)를 구분하는 철학 이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들뢰즈가 정리한 베르그송의 이론에 따르면, 현실은 ‘실제 현실’과 ‘잠재 현실’로 구분된다.(주11) 이런 구분에서 관건은 ‘실제’와 ‘잠재’의 뜻이 무엇이냐가 되겠다. 복잡한 철학적 맥락을 생략하고 말한다면, ‘실제’와 ‘잠재’는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modus)의 차이를 가리킨다. 동일한 사물일지라도 적어도 두 가지 존재 방식을 갖는다. 그 하나는 그것이 지금 존재하는 바로서의 존재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앞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바로서의 존재 방식이다. 동일한 존재이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물론 보는 주체가 단순히 우리 인간인 것은 아니다)에 따라 다른 존재 방식을 갖는 것이다. 예컨대 도토리는 그것이 묵을 쑬 수 있는 존재로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상수리나무가 될 것으로서 존재하기도 한다. 그 둘 다가 도토리의 실재(reality)이다. 이 때 이 두 가지 존재 방식, 즉 도토리의 두 가지 양태가 ‘실제’와 ‘잠재’의 구분을 분명히 해 준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어느 편이냐 하면 ‘잠재’로서의 존재태를 갖는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는, 모든 현실은 두 가지 양태로서 존재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하나로만 얘기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사이버스페이스를 ‘잠재 현실’이라고 얘기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잠정적으로 그렇게 얘기될 뿐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우리 현실의 ‘잠재’라는 특성을 분명히 밝혀준다는 점에서만 그렇게 얘기될 수 있다는 점도. 사이버스페이스는 지금까지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해 왔던 ‘실제 현실’을 확장시켜서 인간에게 새로운 경험의 장을 제공해주며, 나아가 실제 현실과는 다른 현실 세계를 보여주고, 궁극적으로는 실제 현실 그 자체마저도 어떤 점에서는 ‘잠재 현실’이라는 것까지 드러내준다.(주12)

세계가 ‘잠재 현실’로서 존재한다는 인식은 굉장한 이론적․실천적 함의를 갖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변증법 없이도 세계의 변화 근거를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어떤 실정적(實定的) 현실 앞에서라도 변화의 의욕을 새롭게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변증법의 기본 틀인 모순을 통한 투쟁과 발전이라는 것은 사실은 유치한 말장난이거나 말에 대한 오해에 지나지 않으며 세계와 변화를 바라보는 잘못된 틀이다. 변증법은 세계의 여러 존재 방식을 통찰하지 못한 결과이다. 모순은 원리일 수 없으며, 근거일 수 없는 것이다. 변증법은 실증주의의 후예일 뿐이며, 해가 져야만 날 수 있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인 것이다.

 

5. 사이버아이덴티티와 사이버 정치경제학

 

이제 사이버스페이스의 물적 토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얘기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니 인간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렇지만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의 인간은 필연적으로 변형될 수밖에 없다. 이 변형에 대해 많은 명칭이 부여된 바 있다. 김진석의 ‘의인(義人)’도 그 변형(된/변형되는) 인간에 대한 한 명칭이고 서구에서 많이 얘기되는 ‘사이보그’도 그러하다. 이들, 인간이라고 딱 잘라 얘기할 수만은 없는 ‘변형 인간’이 갖는 동일성/정체성을 “사이버아이덴티티”라는 말로 불러보자.

사이버아이덴티티도 주체화(subjectivisation)의 한 산물이라는 점에서 보통 얘기되는 아이덴티티와 비슷하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아이덴티티가 이미 분명히 분열되 있다는 점에서 아이덴티티의 이미-분열성을 더 잘 드러내 준다. 사이버아이덴티티는 적어도 둘(실제 현실의 자아와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의 ID 자아)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분열상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 분열은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구성하고 실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현실 생활에서는 단 하나의 통합된 아이덴티티를 가질 것이 요구되고 있다면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그 요구가 많이 완화되거나 약화될 수밖에 없다. 여러 일간지가 보도한 대로, 지난 8월 14일 발표된 미국 심리학회의 최근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병적으로 인터넷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정보가 아니라 성적 만족과 사회적 지지, 그리고 현실에서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격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찾기 위해 사이버 공간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이 맥락에서 사이버아이덴티티를 실제 현실의 아이덴티티에 의존하는 것으로 자꾸만 규정하려는 습성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 현실의 아이덴티티도 하나가 아닐뿐더러 사이버아이덴티티도 잠재 현실의 아이덴티티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가능해지는 아이덴티티의 모험이야말로 사이버스페이스가 열어 준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삶은 그렇게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볼륨을 높여라」의 주인공 마크는 실제 현실에서는 “내성적이고 자폐적”인 학생이었지만, 잠재 현실을 통한 실험과 모험 속에서 “작은 생활권에서 커뮤니케이션 혁명을 촉발시킨 작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주13)

그런데 혹시 그것이 마약 아닐까? 만족하며 돌아서려는 사람의 뒤통수에서 질문들이 솟아오른다. 곰에게 사탕을 물려 주고 쓸개를 빨아 먹는 것과 같은 일을 당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 실제 현실과 잠재 현실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성찰이 더 필요한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 들어가기 위해 컴퓨터를 장만하고 통신비를 지불하는 일이 보통 사람들에겐 너무 비싸다는 지적이 있다.(주14) 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기도 어렵겠지만, 이 단순한 문제가 우리에게 던지는 무게는 상당하다. 돈의 문제를 빼놓고서는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직, 더욱,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현재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는 바로 해커들이다. 해커들 또는 사이버 범죄나 사이버 테러는 사이버스페이스의 형성에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기생자이다. 나아가 이 기생자들은 사이버스페이스의 존재론을 구성할 것이다. 1996년 영국의 한 은행에서 시스템의 에러를 일으키는 논리 폭탄(logic bomb)으로 협박한 사이버 테러리스트에게 4억 달러의 돈을 강탈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테러리스트는 은행의 컴퓨터 시스템을 시범적으로 파괴시킨 후 더 큰 시스템 장애를 일으키겠다고 협박하여 돈을 뜯어낸 것이다. 이 상징적인 예가 보여주는 바, 이제는 “내일을 향해 쏴라”가 온라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시대이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현대의 정보전(infowar)에 대비해 중국은 사이버 부대(cybersolder)를 창설했고 미국도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춰나가고 있다. 행정망․은행․병원․군사 시설 등 국가 기관 전산망을 파괴하면 핵(核)도 무용지물이 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허프(HERF. High Energy Radio Frequency) 같은 무기로 움직이는 자동차까지 멈추게 할 수 있으니, 하물며 컴퓨터 하드 디스크쯤을 날려버리는 건 아주 손쉬운 일인 것이다. 정보 통신화가 심화되면 될수록 해커들의 위협은 증대하는 것이다. 해커들은 자본주의를 뿌리채 뒤흔들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정치 경제적인 문제에 직면해서 어떤 대응이 가능한가? 이 차원에서 비로소 시스템의 보안과 안보 문제가 거론된다. 그것은 통제와 검열의 분신이기도 하다. 당신 은행이 해커의 습격을 받아 당신이 순식간에 알거지가 될 수 있다는데 당신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현금보다 부동산이 최고라고? 천만에, 국가 부동산 전산망도 엉망이 된다는데? 이쯤 되면 통제와 검열을 지지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이런 식으로 사이버스페이스 자본주의에서는, 정치의 문제는 경제의 문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주15)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해커들을 다 잡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며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현재까지는 음란물 규제와 정치적 의사 표현의 제한을 이유로 사이버스페이스의 통제와 검열이 자행되곤 했다. 여기에 대해 사이버 시민 민주주의의 절차와 방식에 따른 자정이 가능하다는 데 반론의 초점이 맞춰져 왔다.(주16) 나도 여기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지만,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앞으론 통제와 검열의 문제가 단순히 극복되기 어렵다는 점을 이해한 연후에, 좀 더 폭넓게 사고해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앞으로의 통제와 검열은 그런 식으로 온다. 단순한 해킹과 사이버 테러(사이버 범죄)가 동일한 것으로 포장되고 선전되면서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통제와 검열이 그 강도를 높여갈 것이다. 또한 앞에서 얘기한 ‘논리 폭탄’과 ‘허프’는 아주 다른 차원의 사이버 범죄지만, 그러나 그것이 둘 다 사이버 범죄이기 때문에 통신 검열을 강화해야 한다는 식으로 논리가 개진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뭉뚱그려서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지! 재미있는 지적 하나 하자면, 사이버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잡는 사이버 경찰도 일종의 해커이다. 그만큼 우리의 상식은 이 방면에 대해 무지하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생태학의 문제와 함께 사이버스페이스의 정치 경제 문제가 가장 큰 이슈가 될 것이다. 지금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전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한창이다. 이는 대선 정국이라는 시류와는 거의 무관한 운동이다. 나날의 삶 속에서 사이버스페이스의 자유의 조건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느리지만 지속적인 운동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적 삶의 핵심이며, 사이버 정치의 진짜 실천이다. 그것은 사이버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사이버아이덴티티의 형성은 다시 현실의 아이덴티티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가 추상 명사에 그치는 게 아니라면, 자유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곧 자유의 실천 아닐까? 그리고 이론적인 차원에서의 투쟁은 내가 앞에서 제기한 문제를 풀어가는 실천일 것이다. 명심하자. 자유는 솜사탕이 아니며 사이버스페이스는 디즈니랜드가 아니다. (끝)

 

 

<주석>

1) 94년 터진 천리안 ‘현대 철학 동호회’(go pt) 사건부터 시작해서 작년 8월 나우누리의 한총련 폐쇄 이용자 모임(CUG) 압수 수색 및 폐쇄 사건을 거쳐 최근 유니텔 대선 토론방 게시물 관련 구속 사건까지 굵직한 (정치 관련) PC통신 검열 관련 사건들만 해도 벌써 여럿이며, 국정 감사 결과 작년부터 올해 7월까지 안기부․검찰․경찰․기무사 등 공안 기관이 통신 검열 및 감청을 실시한 사례가 3865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 ꡔ문학과사회ꡕ, 1997년 가을호(뒤에 나오는 인용은 각각 1059쪽과 1061쪽으로부터). TV도 당연히 뉴 미디어에 포함되겠지만, 기존의 논의들 및 본 특집의 다른 글들이 TV와 관련된 문제를 충분히 다루리라 생각해서 나는 TV에 관한 언급은 유보하려 한다.

3) 「사이버문학은 없다」(ꡔ버전업ꡕ 1996년 겨울호), 좌담 「논하다」(ꡔ버전업ꡕ 1997년 봄호), 「사이버예술의 도전 - 새로운 예술가를 기다리며」(서울시립대학교 교지 ꡔ대학문화ꡕ 1997년 봄호) 등에서 나는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부분적인 스케치를 시도했으며, 「나는 지금 거품스페이스로 간다」(ꡔ오늘예감ꡕ 1997년 여름호 - 원래 제목은 「사이버스페이스 오딧세이아」였다)에서는 뉴 미디어로서의 사이버스페이스가 형성되기 위한 매체적-물적 조건, 디지털 매체의 특징, 사이버스페이스의 현황 등을 본격적으로 서술했다. 위의 글들은 하이텔과 천리안의 여러 게시판에서 볼 수 있으며, 특히 하이텔 작은모임 <문화담론 연구모임 ‘이다’>(go sg68)의 1번 게시판에 모아져 있다.

4) 미리 언급하지만 TV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대한 김용호의 분석은 나의 방법이 TV에 적용된 탁월한 실례로 보인다. 김용호, ꡔ몸으로 생각한다ꡕ, 민음사, 1997 참조.

5) 나는 이 글의 일차 자료를 찾기 위해 하이텔 등 PC통신망을 통해 신문과 일부 잡지를 찾아봤다. “사이버”라는 검색어를 입력해서 (본문과 제목을 모두 검색하는 조건으로) 얻은 기사 개수는 모두 1000개였다. 1996년 11월 7일자부터 1997년 11월 6일자까지 꼬박 1년간 중앙 일간지와 전문지 11개(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문화일보, 국민일보, 매일경제신문, 한국경제신문, 전자신문)에 “사이버”란 말이 들어간 모든 기사를 찾아본 것이다. 그밖에 PC라인, 과학동아, HOWPC, 시사저널, IMAZINE 등 몇몇 잡지들의 온라인 버전도 참조할 수 있었다. 그 중 이 글과 관련해서 참고할 수 있는 기사는 (중복된 것을 빼면) A4용지 250장 분량.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발간 날짜나 달이 약간씩 틀리게 표시된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통신망의 각 신문사 란에 가보면 다음날 조간 기사의 일부가 오후에 올라와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인용을 할 때 어떤 날짜를 표기하는 것이 옳을까? 종이 신문의 경우에 전날 저녁에 나오는 수도 있지만 어쨌건 날짜가 찍혀서 나오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는데, 온라인 신문의 경우에는 등록 날짜와 시간이 종이 신문과 다르게 나오기 때문에 인용이 애매한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본문에 인용된 신문․잡지 날짜들이 약간의 애매함을 안고 있다는 것을 언급해두겠다.

6) 분야는 좀 다르지만 조선일보가 선도한 ‘키드넷 운동’도 같은 과정과 효과를 산출했다.

7) “the ethic of care for the self as a practice of freedom”, pp.11~12, in James Bernauer and David Rasmussen (ed.), The Final Foucault, MIT Press, 1988.

8) 통상 그 삶에는 타인과의 만남이 따르기 마련이어서 ‘정치적 인간’은 ‘사회적 인간’이기도 하다. 정치의 희랍적 어원이 당시의 사회(공동체)를 뜻하는 말인 polis에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푸코도 위의 인터뷰에서 그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 배려는 타인의 배려를 함축한다는 것이다.

9) 또는 ‘표상 정치’ 즉 representation의 정치.

10) 내가 이런 얘기까지 할 입장은 못되지만,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각주에서라도 한 마디 보태자면, 그런 잘못된 관점이 우리의 ‘정보 산업화’의 진전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정보 산업화’를 잘 해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일하는 영역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현 상황은 정부, 기업, 민간이 삼위일체가 되어 ‘잘못된 정보화 마인드’를 수용하느라 애쓰고 있을 뿐이다.

11) 다소 무리도 있겠지만, 여기서 “현실”은 réalité의 번역 차용어이며 “실제 현실”과 “잠재 현실”은 각각 réalité actuelle과 réalité virtuelle의 번역 차용어이다. 필자가 옮긴 들뢰즈의 ꡔ베르그송주의ꡕ(문학과지성사, 1996)의 부록에 있는 주요 용어 설명 3항을 참조할 것. 거기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에서부터 시작해서 스피노자나 니체의 주요 개념들이 현실의 양태에 대한 이 중요한 구분과 어떻게 이어지는지가 얘기되고 있다.

12) 지금까지 이와 관련된 많은 논의들은 영화를 중심으로 회전했다. 그러나 영화도 사이버스페이스의 한 부분이라고 이해될 수 있고 또 잠재 현실의 논의 역사(플라톤이 「소피스트」에서 전개한 ‘환상’론 이래로 계속되어 온)에서 가장 최근에 등장한 토포스였다는 점에서, 영화에 관한 몇몇 입론들은 사이버스페이스의 통찰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김진석의 「이상현실․가상현실․환상현실」(ꡔ문학과사회ꡕ 1996년 가을호)은 이 맥락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사점을 안겨준다. 또한 김용호의 ꡔ몸으로 생각한다ꡕ 및 다음 같은 발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현실이 아닌 허구의 대표라고 얘기를 하지요. 저는 영화와 현실, 그 경계를 무너뜨리고 싶었어요. 허구와 현실 사이에 경계가 무너지면 가상 현실이 제3의 결과로 나타나는데, 우리가 생각해 왔던 현실 개념 대신에 ‘가상 현실’이라는 개념으로 우리 현실을 보자는 말이죠. 그렇게 보면 우리가 허구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것이 진짜 허구이기 위해서는 현실성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 부분이 허구적이지 않다면, 현실이 아닌 것이죠. 그래서 양자의 경계를 무너뜨리면 우리한테 새로운 현실 개념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가상 현실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고, 그래서 딱딱하고 객관적인 토대가 있다고 보았던 현실도 사실은 꿈이고 환상인 반면, 환상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도 사실은 굉장한 현실성을 갖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죠.”(김성기/김용호 대담, 「관념의 갑옷을 벗어 던진 지식인 오디세우스」, ꡔ현대사상ꡕ 1997년 가을호, 200쪽.) 김진석이 제시하는 환상현실이나 김용호가 제시하는 가상 현실이 비록 용어는 다르지만 내가 제안하는 ‘잠재 현실’ 속에서 통합될 수 있으리라 본다.

13) 김용호, ꡔ몸으로 생각한다ꡕ, 274-5쪽 참조.

14) 줄리안 스탤러브라스, 「싸이버스페이스의 탐험」(고경하 옮김, 설준규 교열), ꡔ창작과비평ꡕ 1996년 봄호. ꡔ창작과비평ꡕ에서는 이 분야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니시가끼 토로우의 「인터넷의 미래와 공동체」(1996년 가을호)나 류승호의 「싸이버스페이스에서의 자아와 공동체」(1997년 봄호) 같은 글들이 있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필렬․이진광․김형준․정철영이 행한 좌담 「디지탈혁명과 정보민주주의」(1996년 가을호)이다. 이진광의 발언들이 창비의 기조적 담론과 갈라지는 지점들이, 단순히 갈라질 뿐만 아니라 창비의 기조적 담론들에서 이탈하고 그것을 압도하는 지점들이 특히 주목된다.

15) 요즘 많은 문제가 되는 ‘통합 전자 주민카드’는 상황이 이쯤 된다면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 아니겠는가! 최근 TV 뉴스에서 부쩍 ‘주민등록증’과 관련된 범죄가 많이 방송되고 있다. 이런 것들이 ‘통합 전자 주민카드’의 잇점을 말하기 위해 까는 포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와 관련해서 많은 논의들이 나와 있지만, 김기중의 「통합전자주민카드의 문제점」(ꡔ황해문화ꡕ 1997년 봄호)이 핵심적인 얘기들을 망라하고 있다.

16) 진짜 모르면서 하는 얘기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통신 공간의 ‘익명성’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얘기는 아주 잘못된 얘기라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특히 기자들이 많이 퍼트리는 그런 담론은 치명적인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데, 사이버스페이스는 ‘익명’의 공간이 아니라 아이덴티티(ID)가 분명한 공간이다. 공동 아이디나 남의 아이디를 쓴 의견 개진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 그것을 접하는 사람 입장에선 발언에 대한 신뢰도는 상당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만약 ‘익명’이 진짜 가능하다면 ‘제재’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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