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공부하다가 궁금한 점이 있어서 이렇게 메일을 보냅니다.
한번씩 홈페이지를 찾는 사람입니다.
질문은 간단합니다.
시지프스 신화를 보고...
<실존주에서 보면> 삶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마치 시지프스가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올리듯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자신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달려있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제우스에게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신의 선택한 것이 아니라?
상황은 만든 장본인은 시지프스이지만요?
좀 헤갈려서?
죄송하지만 꼭 답변해 주세요.
---------------------------
제게 온 메일입니다.
모든 분들께 답변을 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게시판에 답변을 적습니다.
시지프스(희랍어로는 '시시포스'가 맞답니다, 암튼)가 제우스에게 형벌을 받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어법으로 하자면 시지프스가 이러저러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신에 의한 형벌이 아니라 시지프스가 놓인 상황 또는 처지랄까요.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보시면, 우리가 놓인 상황을 '부조리'라 이름합니다. 우리가 태어난 상황이 그러하다, 우리가 태어나 봤더니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더라, 라는 것이지요. 그 부조리의 의미는 '생에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생에는 원래 존재하는 선험적 의미 같은 것은 부재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창조'입니다. 의미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뭐 이렇습니다.
질문하신 분은 실존주의를 언급하셨는데, 시지프스 신화는 실존주의보다는 카뮈의 사상에서 주로 언급되고요, 하지만 질문하신 내용은 사실 카뮈의 답변뿐 아니라 실존주의(싸르트르, 보봐르 등)에서도 내리는 답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궁극적인 문제의식이 겹친다고나 할까요. 복잡한 내용에 너무 간략히 답변을 드린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일단 이 정도로 답변 마치겠습니다.
한번씩 홈페이지를 찾는 사람입니다.
질문은 간단합니다.
시지프스 신화를 보고...
<실존주에서 보면> 삶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마치 시지프스가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올리듯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자신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달려있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제우스에게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신의 선택한 것이 아니라?
상황은 만든 장본인은 시지프스이지만요?
좀 헤갈려서?
죄송하지만 꼭 답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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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온 메일입니다.
모든 분들께 답변을 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게시판에 답변을 적습니다.
시지프스(희랍어로는 '시시포스'가 맞답니다, 암튼)가 제우스에게 형벌을 받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어법으로 하자면 시지프스가 이러저러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신에 의한 형벌이 아니라 시지프스가 놓인 상황 또는 처지랄까요.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보시면, 우리가 놓인 상황을 '부조리'라 이름합니다. 우리가 태어난 상황이 그러하다, 우리가 태어나 봤더니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더라, 라는 것이지요. 그 부조리의 의미는 '생에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생에는 원래 존재하는 선험적 의미 같은 것은 부재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창조'입니다. 의미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뭐 이렇습니다.
질문하신 분은 실존주의를 언급하셨는데, 시지프스 신화는 실존주의보다는 카뮈의 사상에서 주로 언급되고요, 하지만 질문하신 내용은 사실 카뮈의 답변뿐 아니라 실존주의(싸르트르, 보봐르 등)에서도 내리는 답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궁극적인 문제의식이 겹친다고나 할까요. 복잡한 내용에 너무 간략히 답변을 드린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일단 이 정도로 답변 마치겠습니다.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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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한자
2004.03.13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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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인
2004.03.13 15:48
'우리가 가꾸는 생'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생'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요, 우리가 '가꾸는' 즉 '창조하는' 생에 의미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서술을 오해하신 듯. -
청한자
2004.03.13 19:59
님은 그러니까 '우리가 가꾸는 생'과 '원래의 생'을 구분하시고자 하는군요.
품고 계시는 이 구분의 잣대가 무엇입니까? 원래의 생? 알쏭달쏭 하군요.
어쩌면 이는 님이 위에서 말한 "생에는 원래 존재하는 선험적 의미 같은 것은 부재한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 보입니다만...
이게 이해가 되지 않으니 님이 바로 이어 도출하신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창조' 입니다" 역시 밝지가 않군요. 제게는 말입니다. -
김재인
2004.03.13 21:45
그럼 거꾸로 질문합니다. 태어날 때 생의 의미나 목적이 있었습니까? 있나요? -
청한자
2004.03.13 22:04
님 되던지는 질문이 좀 그러네요...
바로 그래서 소위 '원초적 생'은 부조리다, 이리 말씀하시고자 합니까? 아니 누가 태어나는 아기가 생에 의미나 목적을 둔다 말합니까? 님의 되질문 자체가 부조리하다 보이네요. -
김재인
2004.03.14 02:23
까뮈가 말한 부조리가 거의 그런 의미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주 상식적인 이해이지요. 신학적 사고로만 빠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싸르트르가 구역질을 느낀 것도 거의 비슷한 맥락이고, 보봐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한 것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냥 '내던져진 존재'(=피투성)라는 것입니다. 님의 질문이 더 어려운 답을 원하시는 거라면, 더 깊은 뭔가는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상. -
청한자
2004.03.14 03:22
김재인 님, 철학 하십시오! -
김정훈
2004.03.19 11:53
'청한자'님, 철학이 그렇게 간단한 말 한마디로 요약이 된다고 보십니까?
실존철학에 약간의 관심을 가졌던 저로서는 김재인님의 답변이 부족하지 않다고 봅니다. 적어도 실존철학에 대한 입문자들에게는요. 님의 어투가 너무 거슬려 한 마디 올렸습니다. -
과객
2004.04.01 12:11
원래의 생이라는 것은 존재치 않습니다. 다만 형식적/외양적/상징적 이지요. 이삶은 전체적인것 처럼 삶을 보편화시키지요.물론 거짓된 삶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삶은 국지적이지요.
자신을 전체 즉,보편적인척 하지않습니다. 거짓이 아닌 솔직함이요, 겸손함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삶도 인정하고 용납하지요.즉 이질적인 삶들의 융합체입니다.이러하기 때문에 창조가 가능하지요. 거짓삶은 획일적이기 때문에 창조가 불가능합니다.실존은 실재삶입니다.
실감된 삶이라는 것이지요.본질은 형식적인 것입니다. 오만하지요.거짓된것입니다.
고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할수 있읍니다..눈에 보이는 모든것은 오만입니다.거짓이지요.
실재적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전체적인것을 해체해야 보이기 시작합니다.실재적인것은
이념이 아니고 피와 살입니다. -
청한자
2004.04.01 17:34
김정훈/대답이 많이 늦었죠? 우선 제 말이 귀에 거슬렸다니 송구스럽습니다. 허나 재삼 확인해도 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해명하죠. 제가 김재인 님과 짧으나마 대화를 나누고자 했던 이유는 그 님의 철학적 지식을 듣고자 함이 아니었고, 오히려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열린 자세로 스스로 생각한 바를 교환하고자 했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저 위에서 헤르메스보다는 아폴론이 어떻겠느냐 말한 바고요.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숱한 지식들, 사르트르가 이런 말 했으며 까뮈는 저런 말 했다는 등이 그 자체로서 귀한 가르침이라 해도 듣는 사람 스스로가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다면 무에 소용이 있습니까? 사족입니다만, 제가 말씀드린 철학 하시오란 말은 칸트가 모든 철학자에게 권고했던 말입니다. Sapere aude! 그 말입니다. -
나그네
2004.04.05 11:17
청한자님께/님께서 인용하신 "Sapere aude"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칸트의 호라츠Horaz의 이 표현을 자신의 논문"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맥락에서, 그리고 그 맥락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말은 님의 번역처럼 "철학을 하시오"가 아니라 (칸트적 의미에서-후견인의 지도에서 벗어나 자기의 오성을 활용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철학을 하시오"는 좀 지나친 해석같습니다. 제 경우 특히 철학하기-최인훈씨는 "철학"이란 한자어 대신 "궁리짓"이란 한글어를 쓰더군요-란 정교한 개념을 사용하려는 노력이 그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청한자
2004.04.05 17:38
나그네/ 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그럼 몇 말씀 덧붙입니다. 칸트가 1784년에 발표한 그 논문에서 그 양반 나름대로 짧은 두 단어를 독일어로 번역 했는바, 이를 다시 직역해 보면 "당신 스스로의 이해력을 사용하는 용기를 가지시오!" 입니다. 저는 이를 칸트가 어느 정도 의역을 했듯 조금은 시건방시게 의역을 해 "철학을 하시오!"로 말씀드린 게죠. 물론 뜻은 같습니다. 칸트 스스로 또한 이 말을 했지요.
사족인데, 제 개인적으로 님이 하신 번역 '오성'에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네요. 물론 한국 철학계에서 이리들 하고 있다 들었습니다만 - 아마도 일본 아이들 번역의 답습 - , 아니 우리 일상 생활에서 오성이라는 단어를 쓰기나 합니까? 철학함을 일부러 일상 생활의 외곬으로 몰고 갈 필요는 없겠죠. 좀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래서는 안된다 감히 말씀 드립니다. -
이동혁
2004.05.05 22:12
그대가 그대자신의 삶을 택하지 않았다면 그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떤 수단도 될 수 없는 목적은 언제나 무가치하며 무한가치하다.
그 근거에 대해 말씀을 주셔야지요.
헤르메스만 튀어 나오면 싱겁지 않을까요?
아폴로도 함께 등장해야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