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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철학과 철학사 이글의 출처좀 알수있을까요?

min 2005.05.29 23:28 조회 수 : 3450 추천:18

니체에 관해 알아보다가
이글의 출처를 알고싶더라구요
꼭 알려주세요




1872년에 쓰여진 니체의 ꡔ음악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ꡕ은 그리스 비극과 문화형식뿐 아니라, 모더니즘 예술형식에 대해서도 개관하고 있다. 처녀작이자 대표작이기도 한 이 글에서 그는 비극을 가장 표현력 있는 예술형식으로 여기면서, 비극의 탄생뿐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근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비극은 디오니소스 예술의 본질이다. 비극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나 레싱의 의미에서 카타르시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부정 속에서 삶의 의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극은 주인공의 파멸을 보여주지만, 파멸이 주인공의 의지마저 파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몰락의 고통 속에서 환희의 쾌락을 느끼는 디오니소스의 특성이 도출된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자신을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마지막 제자” F. Nietzsche, Werke, Bd. 2, Götzen-Dämmerung, München/Wien 1982, 1032쪽.
로 지칭하고 있다. 현상 속에 존재하는 것은 몰락의 과정에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은 삶의 의지를 영원하게 존속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가장 강렬한 삶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예술형식이 된다. 그는 유고로 남긴 글에서 ‘디오니소스’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말에 보여지는 “파괴, 변화, 생성에 대한 요구는 미래를 잉태한 넘치는 힘의 표현이다” F. Nietzsche, Bd. 3, Aus dem Nachlass der Achtzigerjahre, 493쪽.
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이 힘을 표현하는 “비극의 본질이란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표명이자 이미지의 비유이며, 음악의 시각적 상징화이며, 디오니소스적 도 피 종 호
취를 드러내는 꿈의 세계로 해석될 수 있다.“ F. Nietzsche, Bd. 1, Die Geburt der Tragödie, 81쪽.
라고 말하고 있다. 신화를 창조하는 음악도 비극처럼 디오니소스 예술의 보편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비극이 음악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은 음악이 신화라는 자유공간 속에서 의지의 언어라는 것을 암시하며, 삶의 몰락과 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각적으로 상징화된 "음악이 신화라는 조형세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고의 묘사수단일 수도 있다” 같은 책, 115쪽.
는 점을 니체는 추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화세계가 시간의 무한성뿐 아니라 공간의 무한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반해, 그의 신화세계가 공간의 가시성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은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의지를 드러내는 디오니소스는 유일자이면서 동시에 모든 곳에 편재하는 자이다. ‘허무주의적’ 예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또한 창조자이면서도 파괴자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이중적 이미지를 지닌다. 니체가 미학이론에서 표방하고 있는 삶의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논제이기도 하다. ꡔ비극의 탄생ꡕ의 앞부분에서 니체는 그의 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ꡕ에서 알레고리로 묘사된 부분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광란의 바다 한가운데 나룻배에 몸을 싣고 표류하면서 개인을 “개체화의 원칙”으로 제시하는 비유이다. 같은 책, 23쪽.
디오니소스 예술의 특성으로 비유된 광란의 바다라는 세계는 영원히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있으며, 영원히 창조하면서 영원히 파괴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고통과 황홀의 세계가 디오니소스의 예술의 영역이라면, 개체화 원칙을 대변하는 예술은 아폴로의 예술이다. 빛의 신인 아폴로의 예술은 꿈과 환상의 세계에서 아름다운 가상을 드러낸다. 디오니소스 예술도 꿈의 세계를 드러내지만, 이는 아름다움의 가상이나 유희가 아니라, 황홀경에 도취된 이미지를 표현한다. 이 이미지에서는 아름다움보다는 고통스러운 것, 추악한 것, 부조화스러운 것에서 미적 황홀을 느끼게된다. 나룻배에 몸을 의지한 개체가 바다라는 현상세계에 놓여있듯이, 니체는 예술에서 아폴로적 요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요소의 한 부분으로 이해한다. 다니체의 신화와 예술이미지
시 말하면 아폴로적 정신은 디오니소스적 정신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술은 미메시스의 특징과 더불어 현실의 고통에 형이상학적인 ‘웃음’을 주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니체의 의미에서 예술은 아이러니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체화된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되고자 할 때, 개체화된 것은 근원적인 모순을 지니면서 고통받는 자가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서 그는 오이디푸스와 괴테의 초기시 「프로메테우스」의 프로메테우스를 들고 있다. 같은 책, 57-60쪽.

이처럼 니체에게 세계이미지를 드러내는 예술충동은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아폴로적 충동으로 나뉜다. 아폴로 예술이 환상에 기초를 두면서 개체화의 원칙을 대변하고 있다면, 디오니소스 예술은 개체화의 원칙을 파괴한다. 이 예술은 “모든 현상의 피안에 존재하며, 어떠한 파괴에도 굴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표현하는” 같은 책, 92쪽.
예술이다. 니체는 아폴로적 예술의 전형적인 예로서 그림, 조형미술, 서사문학을 들고 있다. 쉴러의 의미에서 자연과 일치된 상태에서 현실을 관찰하고 현실적인 것을 모방하는 ‘소박문학’도 이에 속한다. 이에 반해 디오니소스 예술은 인간의 총체적인 격정을 자극시킨다. 이 예술에 본질적인 것은 비극이나 음악에서와 같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변용의 가능성이지, 완전한 묘사나 미메시스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F. Nietzsche, Bd. 2, Götzen-Dämmerung, 996쪽; Vgl. auch Ders, Bd. 1, Die Geburt der Tragödie, 31쪽.

광란의 바다와 같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변용의 이미지로서 니체는 디오니소스뿐 아니라 초인을 들고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지만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역설적인 부제가 있는 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ꡕ에서 초인의 이미지는 “바다”, “번개”, “광기”, 인간에게 삶의 의지를 가르칠 수 있는 “마지막 인간”, 창조하면서도 몰락하는 자 등 비유적으로 나타난다. F. Nietzsche, Bd. 2, Also sprach Zarathustra, 280쪽, 281쪽, 284쪽.
그리고 니체는 이 이미지가 지닌 세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자기의 고뇌에서 눈을 돌려 자기를 잃는 일은 고뇌하는 자에게 도취된 쾌락이다. 도취된 쾌락과 자기 상실이 바로 세계일 것이라고 일찍이 나는 생각하였다. 이 세계는 영원히 불완전한 세계, 영원한 모순의 모사, 그것도 불완전한 모사 - 불완전한 그 창조자에게 도취된 쾌락 - 이것이 바로 세계라고 일찍이 나는 생각하였다.” 같은 책, 297쪽.
디오니소스와도 거의 동일시될 수 있는 초인의 세계는 영원히 모순이 지속되는 모사의 세계이다. 신화와 유사한 세계이면서 신화의 세계와 일치하지 세계의 불완전성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이 세계는 예술적 도취라는 창조의 이미지와 자기상실이라는 몰락의 이미지를 동시에 드러낸다. 이중적 의미의 이 세계는 삶의 의지와 몰락의 의지가 중첩되는 세계이다.
삶에 집착하는 니체는 현실주의적인 니힐리스트이면서도, 디오니소스의 세계가 도래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주의자이다. 그리스인의 비극적 삶과 그러한 삶에 대한 의지는 신화에로 복귀하려는 의지이며, 고통 속에서도 형이상학의 기쁨을 주는 의지이다. 디오니소스의 세계인 고대 비극이 몰락한 원인은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과 아폴로적 예술충동을 따로 분리시켜, 아폴로적 예술충동을 부각시킨 데에 있다. 뿐만 아니라, 학문처럼 합리성과 지식을 앞세우는 소크라테스의 사고를 부각시킨 것도 그 몰락의 큰 이유이기도 하다. 지식과 이성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려는 시도는 신화를 상실하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이성에 토대를 둔 합리주의나 계몽사상에 비판을 가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이해된다. 니체가 주장하는 ‘삶의 예술’은 지적인 것과 이성에 바탕을 두는 필연성의 세계보다는, 이 필연성을 우연성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 또는 아이러니의 세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2. 삶의 예술과 데카당스

비극적 삶과 그 삶에 대한 의지는 니체에게 “삶의 예술”의 근간이 된다. 그에게 예술의 미적 현상이 삶의 능력과 직결된다는 것은 진정한 삶의 이미지가 영원한 변화의 과정 속에 놓여있으며, 그런 점에서 예술의 이미지와 연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삶의 의지가 억눌려지거나 약해진 사회에서 인간을 구원 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이다. ꡔ비극의 탄생ꡕ에서 니체는 “오직 예술만이 두려움이나 현존재의 불합리에 대한 구역질나는 생각을, 사는 보람을 주는 표상으로 바꿀 수 있다” F. Nietzsche, Bd. 1, Die Geburt der Tragödie, 48쪽.
라고 단언적으로 말하고 있다. 예술의 기능은 삶의 의지를 자극하여 그 의지를 극대화시켜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고로 남긴 글에서 니체는 예술은 “삶을 부정하는 모든 의지에 대항하는 힘”, “비극적으로 인식하는 자의 구제”, “행동하는 자의 구제”, 즉 “비극적이며 전투적인 인간인 영웅의 구제“, 삶의 의지에 가득 찬 신적인 고통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보다 더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F. Nietzsche, Bd. 3, Aus dem Nachlass der Achtzigerjahre, 693쪽.
이런 점에서 삶의 의지를 위약 하게 하는 데카당스 예술이나 ‘예술을 위한 예술’은 니체에게 목적을 상실한 예술이 된다.
ꡔ우상의 황혼ꡕ에서 니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정적으로 보는 자신의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논의하고 있다. “예술에서 목적에 대항하는 투쟁은 항상 예술에서 ‘도덕적으로 되는’ 경향에 대항하는 투쟁이며, 예술이 도덕의 하위에 놓인다는 것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도덕은 꺼져버려라!’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적대감은 선입견을 과도하게 드러낸다. 도덕을 전파하는 목적과 인간을 개화시키는 목적을 예술에서 배제시킨다해도, 예술은 목적이 없고 목표도 없으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 예술은 삶의 커다란 자극제이다. 어떻게 예술을 목적이 없고 목표도 없는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F. Nietzsche, Bd. 2, Götzen-Dämmerung, 1004쪽.

심미주의를 대표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은 니체에게 비록 도덕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난 예술이긴 하지만, 사멸해 가는 인간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에 동조하는 예술사조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이외에도 니체가 니힐리즘의 한 유형으로 여기는 낭만주의도 역시 거부의 대상이다. 낭만주의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예술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F. Nietzsche, Bd. 3, Aus dem Nachlass der Achtzigerjahre, 530쪽 과 882쪽.
데카당스의 또 다른 표현인 니힐리즘은 데카당스보다 역사가 깊다. 부정을 주제로 하는 니힐리즘은 예술형식 중 문학에서 먼저 나타난다. 문학적 니힐리즘은 이상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리스 신들의 상실에 대해 비탄하는 비가문학, 특히 쉴러나 횔더린에서 볼 수 있고, 그 후 티크 등 초기 낭만주의에서도 지속된다. B. Hillebrand, Literarische Aspekte des Nihilismus, in: Nietzsche- Studien 13(1984), 91-99쪽.
칸트의 자율성 예술이론을 수용함으로써 형성된 ‘예술을 위한 예술’은 문학과 예술을 사회의 다른 영역과 구별하여 그 독자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와 유사한 성격을 띤다. G. Plumpe, Epochen moderner Litertur, Opladen 1995, 162쪽.

또한 프랑스의 심미주의라든지 데카당스 사조 등 모더니즘 예술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심미주의가 예술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도 예술세계에 몰입하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비판과 연관된다. 이 비판은 지식에 바탕을 둔 소크라테스와 같은 이론적 인간 내지는 문화를 거부하는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데카당스 사조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퇴폐적 몰락 현상을 지칭하는 ‘세기말’ 현상에 포함된다. 당시 유럽에 팽배해 있던 자연주의 예술사조에 대항하는 세기말 현상은 이 예술사조 이외에도 유겐트 예술, 신낭만주의, 청년 비엔나파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여러 예술사조 중에서 니체가 특히 데카당스에 주목하는 것은 이 사조가 유럽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어서 병적인 현상으로 인식하고 모더니즘 예술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당스 예술은 예민한 인지를 바탕으로 하는 “신경과민의 예술”일 뿐 아니라, 저항의 의미를 지닌 극도의 자극적인 예술이다. G. Plumpe, Ästhetische Kommunikation der Moderne, Bd.2, Opladen 1993, 77쪽 참조.
현실 도피적인 이 예술은 현실에서의 고통, 몰락, 죽음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고통 및 불쾌감을 벗어나기 위해 현실을 대치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기를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보들레르와 그의 전형이었던 바그너가 니체에게는 데카당스 문학 및 예술을 대표하는 경우이다.
니체가 전형적인 데카당스의 한 예인 ꡔ바그너의 경우ꡕ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데카당스 예술사조 중 문학적 데카당스는 전체로서의 삶을 부정하고, 원자와 같은 개체들로 이루어진 무정부 상태와 그 개체들의 의지가 해체된 것을 보여주며, 균등하게 분배된 권리를 요구하는 개체들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F. Nietzsche, Bd. 2, Der Fall Wagner, 917쪽.
원자로 나누어진 주체, 개체화된 주체를 요구하는 예술을 니체는 기형적이며 병적인 예술로 간주한다. 그가 자신의 예술론과 대비되는 논자로서 자주 끌어들이고 있는 칸트의 미에 대한 관점이나 ‘물 자체 Ding an sich’ 개념은 원자적 의미인 주체에 근거하기 때문에 거부된다. 예술이 ‘이기적 관심이 없는 쾌락’의 대상이 되면 자율성을 지니게 된다는 칸트의 예술론이 도덕적 합목적성에 일치하는 선험적인 물 자체를 미의 이상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니체는 일체의 도덕에서 벗어난 삶의 의지에 근거하는 주체의 “다양성” 내지는 “허구성” F. Nietzsche, Bd. 3, Aus dem Nachlass der Achtzigerjahre, 473쪽 과 627쪽.
이 드러내는 미를 주장한다.
그러면 도덕의 굴레에서 해방된 삶을 자극시키는 기능을 지녀야 하는 니체의 삶의 예술에서 미의 개념은 무엇일까? 데카당스의 표현인 니힐리즘에 속하는 그의 삶의 예술도 미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미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미” F. Nietzsche, Bd. 2, Götzen-Dämmerung, 1001쪽.
라고 규정한다. 그의 ‘예술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상주의 미학이나 심미주의 미학과는 다른 것이고, 작품의 개념보다는 문화적이며 정치적인 층위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 또는 니힐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하여야 한다. 폭넓은 니체의 미의 개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의 미학은 원칙적으로 인간이 아름답다는 명제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추악한 것이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 몰락하면서도 창조하는 자인 초인의 이미지는 추악한 것을 내포하면서도 삶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예술이미지에 해당한다.
달리 말하면, 초인을 지향하는 니체 자신도 포함하는 데카당스적 삶에는 아름다운 것과 추악한 것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변혁시키는 ‘힘’에의 의지가 충일 할 때, 추악한 것이 쇠퇴하며 그와 동시에 아름다움이 증가한다. 의지의 몰락 또는 원자화된 개체들을 “조직화하는 힘의 몰락”을 의미하는 추악한 것은 “데카당스의 한 유형” F. Nietzsche, Bd. 3, Aus dem Nachlass der Achtzigerjahre, 755쪽.
이다. 다시 말해 데카당스의 양면성 속에서 니체는 삶의 의지로 향하는 힘이 가시적으로 나타날 때 미가 나타나는 것이다. F. Nietzsche, Bd. 2, Also sprach Zarathustra, 374쪽.
따라서 일상적 현실을 파괴시키면서 그 현실에서 이탈하게 하는 디오니소스의 현실은 힘에의 의지를 확고하게 하는 미학적 배경이 된다. 이런 점에서 삶의 예술은 비극적 예술과 동일시될 수 있다. “디오니소스 송가를 짓는 예술가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이미 앞서 존재했던 시인 차라투스트라의 이미지이다” F, Nietzsche, Bd. 2, Ecce Homo, 1112쪽.
라고 니체는 1888년 초인의 이미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상에 빗대어 쓴 책 ꡔ이 사람을 보라ꡕ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미의 개념을 설정하고 있는 삶의 예술은 새로운 의미의 미적 가상을 요구한다. 니체의 가상개념은 전통적인 이상주의적 미학에서 논의하는 가상과는 구별된다. 그의 가상개념은 현실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현실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에는 현실이나 세계는 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한 모두 가상현실이며 가상세계인 것이다. 이와 대립되는 진정한 세계는 삶의 의지를 향한 힘이 모여있는 세계이며, 이러한 수많은 힘을 중심으로 하여 확장되어진 세계이다. 이 힘은 인간일 수도 또는 인간의 몸일 수도 있다. 우연성에 기초하는 주사위놀이에서처럼 수많은 힘들이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 디오니소스의 신화세계와도 같은 진정한 세계는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니체는 “현존재의 거대한 주사위 놀이”를 “관점주의”로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관점주의는 특수성(개체적 존재)의 복합적 형식이다. 모든 개체적 몸이 전체 공간에 주인이 되려고 힘을 뻗치려고 애쓸 때(- 그 개체의 더 큰 힘에의 의지), 모든 몸은 힘을 확장하는데 저항하는 것을 밀쳐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개체의 몸은 다른 몸들의 동일한 노력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마침내는 자신과 친화적인 힘과 하나가 될 것이다. 이렇게 몸들은 더 큰 힘이 되려고 함께 공모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계속된다.” F. Nietzsche, Bd. 3, Aus dem Nachlass der Achtzigerjahre, 704쪽 과 705쪽.
이 인용은 세계의 끝없는 순환성, 세계의 끝없는 유희적 성격과 “현존재의 우연성”뿐 아니라, 같은 책, 같은 곳.
디오니소스와 같은 현존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H. Schmid, Über die Tragweite der Artisten-Metaphysik, in: Nietysche-Studien 13(1984), 439쪽.
현존재의 더 큰 힘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는 개체적 삶이 아니라 전체적인 삶이 드러나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신화에서처럼 끝없이 반복될 수 있는 순환적인 세계이며, 이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미적 유희 또한 무한하다.
관점주의는 한 개체 또는 어느 힘의 중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개체의 현실, 즉 가상세계를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생리학적인” 층위에서 개체적 “행위의 총체적 유희“ F. Nietzsche, Bd. 2, Aus dem Nachlass der Achtzigerjahre, 706과 707쪽.
로 규정할 수 있는 세계는 그 개체가 처해 있는 현실을 기반으로 해서 생성될 수 있는 세계이다. 니체는 1887년에 쓴 ꡔ도덕의 계보학ꡕ의 제 3장 「금욕적 이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서 이러한 예술을 ”예술의 생리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예술의 생리학을 예술의 영역에서 ”여태까지 다루어지지 않았던 조심스러운 문제“임을 지적하면서, ”예술상태의 고유한 감미로움과 충만함은 감각적 욕구에 그 근원이 있을 수 있다“ F. Nietzsche, Bd. 2, Zur Genealogie der Moral, 852쪽.
라고 언급한다. 프로이트에게서 영향 받은 예술의 생리학은 경험적 분석을 전제로 한다. 19세기말 유럽에 넓게 퍼진 생리학에 대한 관심은 데카당스 사조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예술의 생리학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되는 감각적 욕구는 에로틱한 사랑의 행위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감각적인 몸의 상태와 비교할 수 있지만, 직접적인 사랑의 행위보다는 다른 성적 대상으로 전위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즉 감각적 욕구는 원자적 개체에 의한 단편적 삶이 아니라, 공간의 주인이 되려고 힘을 뻗치는 개체들의 전체적인 삶을 향해 변형되어 나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본다면, 존재와 진리와의 관계에 회의를 품으면서 형이상학적 주체 대신에 몸을 내세우는 생리학적 미학은 생산미학이며, 감수성이 강한 인지를 토대로 하는 데카당스 예술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G. Plumpe, Ästhetische Kommunikation der Moderne, 78쪽.
이로 인해 니체의 삶의 예술에서 진정한 세계와 가상세계는 대립적이면서도 부분적인 보완관계와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의 가상개념이 제시하는 변증법적 특징도 엿볼 수 있다.
관점주의는 우연성 또는 상대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니힐리즘의 한 유형이다. 니체는 ꡔ우상의 황혼ꡕ 중 「마침내 진정한 세계가 어떻게 우화가 되었는지」라는 짧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다. "진정한 세계를 우리는 폐기하였다. 어떤 세계가 남아 있었던가? 가상의 세계였을까 ...? 아니 그렇지 않다! 진정한 세계와 같이 우리는 가상의 세계도 폐기하였다!“ F. Nietzsche, Bd. 2, Götzen-Dämmerung, 963쪽.
세계의 포기는 니힐리즘의 부정적 표현이자 염세주의의 사고이다. 이 사고는 역사의 발전을 부인하면서, 역사의 해체를 요구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를 부정하는데서 모든 의미형성이 부정되지만, 어떠한 의미도 긍정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 현실과 세계는 동일한 사물이 끊임없이 도래하는 현상이며, 형식화할 수 없는 혼동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F. Nietzsche, Bd. 3, Aus dem Nachlass der Achtzigerjahre, 704쪽.
이러한 혼동의 세계에서 니체가 구상하는 새로운 세계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생성될 수 있는 신화와 같은 세계이다. 그러나 끝없는 순환하는 가운데 이 세계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세계는 아직 불완전하게 모사할 수 있을 뿐인 세계인 것이다.
존재에 회의를 품으면서도 현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니체가 생리학적 층위에서 표방하는 몸의 미학은 하이데거나 메를로 퐁티로 대표되는 실존주의가 제시하는 몸의 현상학과는 구별된다. 가상세계인 경험적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그 현실은 전제로 하는 니체의 삶의 미학이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현존재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할 수 있는 진정한 세계는 가능한 세계이지만, 이 세계는 현존재로서의 개체의 현실세계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상세계는 삶의 모순이지만 구제될 수 있다. 니체가 “예술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현존재의 완성이다” 같은 책, 784쪽.
라고 언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또한 그가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필연성을 주장하면서도 가상의 구제를 역설하고 있는 것은 디오니소스적 예술 속에서 아폴로적 예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도취된 쾌락과 자기상실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모사의 세계에서 진리가 우화라는 것은 진리의 절대적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고, 진리의 확정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선과 악에 대한 미적 판단을 넘어서, 영원히 변화하면서 다시 도래할 수 있으며, 동일한 것이 영원히 반복될 수 있다는 이른바 ‘영겁회귀’의 신화세계에 접근하려는 미학적 시도이다. 또한 이는 언어로 세계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비판이자, 이성비판이기도 하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인 언어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지만 영원한 변화하는 진리에 대한 구원자적인 믿음 또는 헤겔 등에게서 보여지는 이상주의의 형이상학이 아닌 새로운 형이상학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관건이 된다.
이러한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는 진정한 세계를 형성하는 힘에의 의지를 생산해내는데 있어서 니체는 단연코 자연에 근거한 필연적인 인간을 상정하고 있다. 이 자연은 루소의 의미에서 낙원과 같은 목가적인 자연이 아니라, 인류 최초의 사회에서처럼 반문명적이고 반도덕적이며, 자유로운 정신을 구가할 수 있는 자연이며, 영원히 생성하는 자연을 의미한다. 진정한 세계와도 같은 이러한 자연에서 인간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과 하나가 되면서 모든 유형의 도덕적 가치판단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이상주의적이며 합리주의적인 성격이 배제된 자연 속에서 인간은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문학은 거짓말’이라는 논제의 이중성과 아방가르드
예술

니체에게 삶이나 인간을 자연과 연관짓지 않고, 문학이나 예술에서 그려낸다는 것은 허구적이거나 거짓이다.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주체나 삶이 허구라는 니힐리즘적 회의는 형이상학, 종교, 도덕, 학문 등이 보여주는 데카당스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의미에서 ‘문학은 거짓말’이라는 논제를 받아들이면서 그는 이를 삶의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다른 의미로 전환시킨다. 플라톤이 이데아가 아니라 가상에 근거하는 문학 전체를 매도하고 있다면, ‘시인은 거짓말하는 자’라는 니체의 논제는 주로 데카당스 문학에 해당되며, 더 나아가 이성의 합목적성에 근거하는 문학에도 해당된다. ꡔ차라투스트라ꡕ의 제 4부 중 「우울한 노래」속에 들어있을 뿐 아니라, 니체가 정신착란의 증세를 나타내기 직전인 1888년에 완성된 ꡔ디오니소스 송가ꡕ의 첫 송가이기도 한 유명한 시론시 「다만 광대일 뿐! 다만 시인일 뿐이지! Nur Narr! Nur Dichter!」에서, 그는 늙은 마술사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F. Nietzsche, Bd. 2, Also sprach Zarathustra, 533-534쪽. 문학적 인간이 허구적이라는 것은 ꡔ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ꡕ에서도 계속 언급되고 있다.


진실의 구혼자인가? - 그대가? 그래서 작열하는 태양이 비웃었구나!
아니야! 그대는 다만 시인일 뿐이라고!
거짓말해야만 하는
짐승, 간교하게, 약탈하면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짐승,
일부러, 일부러 거짓말해야만 하는 짐승이라고.
먹이를 탐내며,
알록달록한 가면을 쓴 채,
스스로 가면이 되고,
스스로 먹이가 되는,
그 짐승이 - 진리의 구혼자인가?...
다만 광대일 뿐! 다만 시인일 뿐이지!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시인인 엠페도클레스 이후로 문학에서 낮은 삶의 메타포이며, 태양의 지는 것은 삶의 종말을 의미하는데, 이 토포스는 니체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Wofram Groddeck, Nietzsches Gesicht: "Die Sonne sinkt", in Nietzsche-Studien 16 (1987), 31쪽 참조.
디오니소스와 아폴로, 낮과 밤, 현재와 과거가 대비되면서 교차되는 것은 니체 사고의 이중성을 의미하며, 절대적 진리를 표방하는 계몽주의나 합리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니힐리즘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이 미학에서는 시인은 조소의 대상이다. 영겁회귀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인 ꡔ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ꡕ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니체에게 시인은 진리를 말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죽어가거나 사멸해버린 종교와 문화에 이르게 하는 가교”의 기능을 하는 “아류”에 불과한 자이다. F. Nietzsche, Bd. 2,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547쪽.
니체의 예술론은 완전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표방하지 않지만, 아폴로적 예술처럼 이지적으로 인간을 창조한다는 것은 기만이며 속임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늙은 마술사가 우울한 노래로서 자신을 시인이자 가면을 쓴 광대로 조소하는 이 송가는 데카당스에서 보여지는 예술적 진실의 위선뿐 아니라 스스로 고귀한 인간으로 자처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특히 광대의 이미지는 ꡔ차라투스트라ꡕ의 첫 부분에서 잘 나타나 있다. 30세의 나이에 인간이 싫어서 산으로 들어가서 10년 간 고독하게 산에 머물렀던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인간세계로 내려오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몰락의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는 이 부분은 ‘신은 죽었다’는 그의 외침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기독교적 하나님의 죽음뿐 아니라 형이상학의 붕괴, 도덕 및 모든 사회적 절대가치의 몰락을 의미하는 신의 죽음이후에 나타나야할 초인에 대해 전파하는 그는 어느 마을에서 줄타는 광대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죽음은 ꡔ차라투스트라ꡕ가 제시하는 몰락의 이미지의 첫 번째 예이다. 즉 초인이 되기 위한 삶의 의지가 죽음에의 의지와 맞물려있다는 것을 이 책은 예시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몰락의 이미지는 디오니소스 송가의 첫 송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송가에서 시인은 광대이며 또한 짐승으로 비유되고 있다. 니체는 문학이 삶이라는 등식을 거부하면서, 시인은 거짓말하면서, 문학적 진실을 만들어내는 짐승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알록달록한 가면을 쓴 광대로서의 시인은 미적 유희와 수사학으로 거짓말하는 짐승이며, 거짓이 그의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니체가 구체적으로 ‘유럽인’을 지칭하는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여한다는 점에서 시인보다 조금 나은 위치에 있다. 진리는 초인처럼 삶의 의지에 대해 인간을 가르치면서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 진리는 고통과 관능적 쾌락 속에서 인간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문학이 거짓말과 거짓된 삶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니체의 언어비판과 인식비판은 디오니소스 예술의 이미지와 연관된다.
아류인 시인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현실이라는 가상세계에서 진리를 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삶의 의미인 디오니소스적 진리의 광기를 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다만 광대일 뿐! 다만 시인일 뿐이지!」에서 니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노래한다. F. Nietzsche, Bd. 2, Also sprach Zarathustra, 536쪽.


그래서 나 자신도
진리의 망상에서 벗어나,
대낮의 동경에서 벗어나 침잠 하노라
낮으로 피로하고, 빛으로 병들어,
- 밑으로, 저녁으로, 그림자로
침잠 하노라.
다만 유일자의 진리에 의해
불타버리고 목말랐노라.
- 뜨거운 가슴이여! 그대는 아직도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그때 그대가 갈망했던 것을?
모든 진리에서
내가 추방될 것을!
다만 광대일 뿐!
다만 시인일 뿐이지!

‘뜨거운 가슴’으로 비유되는 시인과 대립된 ‘그림자’로서의 시인은 다름 아닌 차라투스트라와 동일한 시인이며, 이 이미지는 자아상실과 몰락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이 이미지는 아이로니적 전환으로 데카당스 예술의 긍정적 의미를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구혼자’로 조소받던 시인의 이미지는 아폴로적 꿈의 예술을 의미하는 ‘대낮의 동경’에서 벗어나 디오니소스 세계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어둠의 이미지 속에서 이성의 진리를 벗어나고 있는 예술가로서의 시인은 계몽주의의 ‘밝은 신화’를 거부한다. 이성에 근거하는 밝은 세계라는 가상세계의 ‘모든 진리’에서 벗어난 니체의 초인 이미지는 존재와 비존재가 혼재하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거대한 주체’의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는 세기말 시대의 정신적 혼돈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문학은 거짓말’이라는 논제의 아이러니적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문학과 예술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 진리가 된다. G. Kaiser, Wie die Dichter lügen, in: Nietzsche-Studien 15(1986), 223쪽 참조.

절대적 진리를 표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존재를 부인한다는 점에서 니체의 삶의 예술은 불완전한 예술이다. 또한 부정적 의미의 형이상학에서 벗어나려는 불완전한 예술은 염세주의의 집합적 표현인 니힐리즘 예술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성 속에서 니힐리즘은 역설적으로 예술의 창조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니체의 예술론이 모더니즘 예술의 자율성 미학을 거부할 뿐 아니라, 이상주의 및 계몽주의의 이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 모더니즘 문학 및 예술전반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호프만이탈 이후 현대문학에서의 ‘언어에 대한 회의’라는 토포스의 시작일 뿐 아니라 아방가르드 예술과 연관된다.
니체를 아방가르드와 연관지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예술론이 사회의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의 기능은, 특히 데카당스 문학의 기능은 종교나 문화의 기능처럼 부정적이라는 점에서 문학과 문학 이외의 기능과의 차이를 보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탈차이는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문학과 정치와의 탈차이성과 연관된다. 삶과 예술의 차이를 해소하려는 아방가르드 예술은 전통예술의 의미를 파괴하고 해체시키면서 반리얼리즘 예술을 표방하는데, 니체와 연관하여서는 주체의 몰락을 표방하는 표현주의와 새로운 인간상을 구상하는 미래주의를 들 수 있다.
표현주의에서 니체는 고트프리트 벤이 표현한대로 “정신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현상” G. Martens, Im Aufbruch das Ziel, in: H. Steffen(Hg.), Nietzsche, Göttingen 1974, 116쪽 참조.
이다. 표현주의에서 니체의 수용은 쿠르트 힐러, 야콥 판 호디스, 게오르그 하임 등 “새로운 클럽”에 속한 작가들 뿐 아니라, 에른스트 슈타들러와 같이 실험시를 쓴 시인에게서 가장 두드러진다. 전통에 저항하는 과격한 혁명적 문학그룹인 ‘새로운 클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ꡔ차라투스트라ꡕ는 시대비판에 대한 ‘커다란 가르침’으로 작용한다. 세계종말의 분위기가 팽배한 표현주의에서의 니체 수용은 초인사상, 비도덕주의와 비합리주의 수용으로 집약된다. G. Martens, Im Aufbruch das Ziel, in: H. Steffen (Hg.), Nietzsche, Göttingen 1974, 120-130쪽 참조.
정신적인 층위에서 뿐 아니라 정치적 또는 사회비판적인 문학과 예술이론에서도 니체는 역동적인 새로운 삶의 가능성, 거대한 자아의 확장, 시대의 극복, 새로운 언어표현, 역사의 재인식에 대한 이상적인 시인이자 철학자로서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표현주의의 니체수용은 미래주의에서도 이어진다.
주체의 파괴를 주창하는 미래주의의 대표자인 마리네티는 미래주의의 인간을 초인으로 묘사한다. 그는 자신의 소설 ꡔ미래주의자 마파르카ꡕ에 대해 말하고 있듯이, 이 소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인간의 개선에 대한 무한한 희망” H. Schmidt-Bergmann, Futurismus, Reinbek bei Hamburg 1993, 113 쪽.
을 주려는 의도에서 쓴 것이다. 미래주의 강령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소설에서 그는 거인인 아프리카 왕 마파르카를 초인의 이미지로 서술하고 있다. 표현주의 작가인 르네 쉬케러의 에로틱한 정치소설 ꡔ여성 위로자 벤칼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 ꡔ마파르카ꡕ에서 자신의 신하에게 통치권을 넘기고 마을을 떠나는 왕의 모습은 니체의 초인을 알레고리한 이미지이다. 자기비판과 자기극복의 과정에서 왕은 전사들이 돌아와 달라는 청원을 뿌리치고, 패배하지 않는 무적의 전사인 ‘기계 새’를 만들러 가는 되는데 R. E. McCinn, Verwandlungen von Nietzsches Übermenschen in der Literatur des Mittelmeerraums, in: Nietzsche-Studien 10/11 (1981/82), 600-602쪽.
, 마리네티는 보다 아름다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니체의 ‘생성하는 삶의 과정’을 미래주의로 해석하면서 역동적인 삶의 의지를 동적인 기계와 연관짓는다.
비도덕주의자인 마리네티의 이러한 니체 해석은 ꡔ차라투스트라ꡕ 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책의 4부 중 「사막의 처녀들 사이에서」에 있는 송시 「사막은 성장한다. 사막을 갖는 자에게 화 있으리라」에서 ‘차라투스투라의 그림자’로 묘사되는 방랑자는 유럽을 떠나 아프리카로 떠나가는데, 이는 가상세계인 현실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데카당스 예술의 부정성을 긍정적으로 전환시키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프리카의 이미지는 마파르카의 ‘방랑’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체의 다양성이 우연한 결합으로 이룰 수 있는 거대한 주체는 원자와 같은 단편적 주체가 혼돈 상태에서 생산해 내는 것이다. 초인이라는 ‘위대한 인간’이 출현할 수 있는 우연성은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우연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요구하는 니체는 현실주의자이면서도 현실에 토대를 두는 리얼리즘을 부정하면서 모더니즘의 경계를 벗어나고 있다. 더 나아가 가상성 내지는 무한히 확대될 수 있는 불특정 주체의 다양성을 표방하고 있는 그의 미학론은 현실의 표층미학에 근거하면서도 주체의 가상성을 설정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연관을 지닌다. 주체의 가상성은 전통미학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존재개념을 부정하는 것이고, 구조주의의 층위에서는 기호의 확정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삶의 가치에 대한 니체의 해석은 모더니즘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서 라캉이 언급하는 무의식의 수사학, 바르트의 기표미학, 데리다의 의미산포나 차연 개념, 들뢰즈가 말하는 우연의 긍정성 등 후기구조주의와도 관련을 맺고 있다. E. Blondel, Vom Nutzen und Nachteil der Sprache für das Verständnis Nietzsches, in: Nietzsche-Studien 10/11 (1981/82), 522 쪽 참조.



4. 맺는 말

니체가 디오니소스가 다시 도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극의 죽음이후 ‘비극적’ 예술이 다시 탄생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비극의 죽음은 형이상학의 몰락이며, 이는 동시에 절대적 진리의 부정인 ‘신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가 신화로 회귀한 것은 예술 뿐 아니라 문화의 생산적 힘인 디오니소스의 예술이미지를 다시 재현하려는 시도이다. 니체의 아이러니는 긍정과 부정의 경계가 모호한 니힐리즘의 미학적 틀에서 가능한 세계를 역설하고 있다.
니체의 예술론은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비판이며, 데카당스의 예술형식에 대항한다. 삶을 아름답게 하면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기능을 하는 것이 비극적 예술과 동일시될 수 있는 삶의 예술의 본질이다. 삶의 자극제이자 삶에의 의지로서의 예술을 제시하는 그의 미학론은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병적인’ 모더니즘 예술에 대한 비판이다. 또한 모더니즘 문화전반에 대한 혁명적 전환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미학론은 아방가르드 예술과 연관된다.
삶에의 의지를 최고의 상태로 이끌어 올리려는 니체의 미학적 시도는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 사회․문화적 유토피아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니힐리스트이면서 니힐리즘을 극복하려는 그는 가상세계인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가상세계를 구제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현존재의 우연성뿐 아니라 세계의 끝없는 순환성과 유희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예술의 생리학’ 또는 ‘관점주의’로 대변될 수 있다. 예술의 생리학과 등가적 의미를 지닌 몸의 미학은 삶의 예술이 제시하는 또 다른 미학적 측면이다. 또한 예술의 생리학은 역사의 발전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해체를 암시하고 있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로로 대표되는 니체의 예술충동이론은 주체의 허구성 내지는 주체의 세계이미지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뿐 아니라, 주체의 다양성을 구상하는 것, 몸의 미학, 역사의 해체를 제시하는 것 등은 후기구조주의와 연관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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