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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서평문화>에 실린 이태수 교수님의 서평)

철학의 시작에서부터 되밟아오기 


글쓴이 : 이태수(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명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저/역자 : 탈레스 외 지음 | 김인곤 외 옮김

출판사 : 아카넷

2005.06.20 / 958쪽 / 35,000원


필자의 고등학교 재학시절에는 국어교과서에 ‘생활인의 철학’이란 제하의 수필이 수록되어 있어서 그것을 싫증이 날 정도로 씹어가며 읽어야 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글의 요지인즉, 소위 전문적인 철학자들의 현학적이고 어려운 논설보다 시정(市井)의 평범한 아낙네들이 하는 말이 훨씬 더 많은 지혜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난해함이 곧 지혜의 함량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 자체가 정말로 지혜로운 말씀의 한 훌륭한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그 글이 왜 꼭 교과서에 실려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긍정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아직 철학이 어떤 성격의 학문인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막 지식의 대해를 항해하려고 나서는 대다수의 젊은이에게 철학은 어려운 것, 그것도 불필요하게 어려운 것이란 편견부터 심어주는 것은 아무래도 부당해 보인다.


이런 점을 헤아렸는지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글은 교과서에서 빠졌다. 그 글이 담고 있는 지혜의 무게와 미리부터 철학에 대한 혐오감을 부당하게 부추기는 일은 삼가야 한다는 당위를 서로 견주어 보면 그렇게 하는 편이 옳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필자가 소위 전문적인 철학이란 것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곡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필자는 전문가가 아니라도 철학에 접해보는 것은 충분히 보람이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으며 평소에도 비전문가에게 철학책 읽기를 권고해왔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문제의 글에 대해서 한 가지 걸리는 대목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렵다는 지적만큼은 틀렸다고 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전문가뿐 아니라 전문가에게도 사실 철학은 어렵다. 누구라도 전문적인 철학서를 읽으면서 도대체 자신이 무얼 캐고 따지고 있는지 그 지점조차 혼미하게 될 정도로 어렵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을 것이다. 그럴 때 필자는 읽던 책을 덮고 아주 기본적인 것으로 되돌아가서 철학의 길을 ‘처음부터’ 다시 밟아보라는 충고를 한다. 수학이나 물리학 분야에서라면 입문서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말과 같은 것인데, 필자가 말하는 철학의 ‘처음’이란 시간적으로 철학이 발단한 때를 뜻한다.


많은 사람들은 서양 철학의 기원이라면 일단 고대 그리스의 두 거봉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그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그러나 철학이 시작되는 시점은 그 거봉들을 넘어 조금 더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적으로 그 시점은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주장을 했다고 하는 탈레스가 활동한 기원전 6세기 전반으로 잡는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5세기 후반 소크라테스가 철학사에 등장한 때까지 탈레스의 뒤를 이어 그리스 사상의 판도를 현란하게 꾸몄던 많은 현인들을 철학사에서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란 명칭으로 함께 묶어 부른다. 보통 그들이 논의했던 내용을 기술하는 것으로 철학사의 첫 장을 채우는데, 그 부분이 바로 필자가 공부하기를 권하는 철학의 ‘처음’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독자들은 그 부분에 관해서는 소략한 철학사 서적을 통해 매우 불충한 정보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사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저술 중에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한 권도 없다. 현대인들의 그들에 관한 지식은 모두 후대의 저술가들에 의해 인용된 조각들을 바탕 자료로 하여 복원된 내용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 복원 작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다. 당시 독일의 문헌학자 딜스(Hermann Diels)는 고문헌의 산더미 속을 뒤져 관련 자료를 찾아내고 옥석을 가려 정말 신뢰할 수 있는 것들을 솎아내는 일을 수행해내고 그 성과를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들』(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이란 저술에 담아냈다. 이 책은 그 이후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관한 연구의 표준적인 자료집으로서 역할을 해 왔다. 김인곤 외 7인의 고전학도가 달려들어 번역해낸 것이 바로 이 자료집이다. 그러니까 딜스의 책이 나온 지 백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우리 독자들에게도 그 동안 접근불가 지대였던 철학의 ‘처음’을 직접 탐사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린 셈이다.


역자들이 딜스의 책 전체를 다 번역한 것은 아니다. 딜스는 그의 책에서 관련 자료를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정리했다. 그 중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자신의 저술에서부터 직접 인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는 B군으로 분류되어 있고, 그들의 생애나 행적 등에 관한 후대의 증언은 A군으로, 그리고 나머지 확실히 신뢰하기 어려운 정보 자료는 C군에 모아 놓았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B군에 속하는 자료들이고 역자들은 그것들을 전부 번역하였다. A군 중에는 일부만이 선별 번역되었고, C군은 거의 무시되다시피 했다.


나아가 딜스가 붙여놓은 상세한 주석은 번역에서 제외되었다. 딜스의 주석은 당시의 기준으로 보자면 최상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학술적 정보가치를 지녔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이루어진 연구의 축적을 고려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그의 주석을 그대로 다 우리말로 옮기는 수고를 하라는 것이 오히려 무리한 주문일 것이다. 그 대신 역자들은 그동안 고심하며 나름대로 연구한 흔적을 담은 역주를 붙였다. 비록 딜스의 것만큼 풍부한 내용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국내 연구가들로서는 짚고 넘어가는 것이 마땅한 대목들을 가능한 한 모두 성실하게 점검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 점이 또한 이 번역의 학술적 가치를 방증해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이 책의 경우에는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건너뛰지 말고 꼭 읽어야 한다. 좥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단편들의 출전 개관좦이란 장이 그 부분인데, 거기서 독자들은 딜스가 자료를 취해 온 출처가 어떤 것이며 그것들의 전승 과정이 어떠했는지 등에 관한 필수불가결의 정보를 얻게 된다. 역자들은 이 부분을 1982년도에 나온 컬크(Kirk, G.S.) 등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The Presocratic Philosophers)에서 주로 빌려왔다. 역자들은 이 부분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여러모로 컬크 등의 책에 기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딜스 이후로는 컬크 등의 책이 관련 문헌 중에는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책을 긴히 참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컬크 등의 책에서 빌려온 것 중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역자들이 ‘희랍철학의 여명기’라고 이름붙인 부분이다. 앞서 말한 대로 탈레스를 철학의 시조로 모시는 것이 전통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실 철학이 어느 한 사람의 출현으로 돌연히 시작된 것은 아니다. 탈레스 이전부터 철학의 싹은 종교나 문학의 영역에서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글의 모두에서 언급한 소위 ‘생활인의 철학’이란 것에서도 전문적인 철학으로 발전할 빌미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딜스도 탈레스에서부터 시작된 전통에 속하지 않는 자료도 일부를 수록했다.


그러나 딜스의 책에 수록된 관련 자료에 관해서는 그것이 너무 불충분하다거나 또는 선정기준에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컬크 등의 책 역시 철학의 여명기를 중시하여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관련 자료를 선정하여 수록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는 딜스의 책보다는 확실히 진일보한 면이 있다고 판단된다. 역자들도 같은 판단을 한 모양인지 해당 부분에서 컬크 등의 책에서 자료를 빌려와 딜스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있다. 그 결과가 꼭 만족스러운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여명기에 관한 판단은 어떤 경우에든 주관적인 요소가 많이 개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길게 시비하지 않겠다.



역자들이 한 일 중 돋보이는 것은 번역 이외에 각 철학자별로 내용 해제의 수고를 해준 점이다. 여러 명이 썼기 때문에 해설의 수준이 고르지는 않다는 점이 있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꽤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혹시 이 대목에서 이 서평을 읽는 사람들에게 의구심 같은 것이 생길 수도 있다. 처음에서부터 되밟아오기를 하면 철학이 쉬워지리라는 기대를 하게 해 놓고서는 이제 와서 그 ‘처음’에 관해서도 해제의 도움을 받기를 권고하는 것 같은 말을 하다니, 아무래도 철학은 처음서부터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말이다. 미안하게도 그런 의구심을 완벽하게 풀어주지는 못할 것 같다. 처음부터 되밟아오기를 하면 이해가 쉬워진다는 말은 틀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처음’ 자체가 식은 죽 먹기 같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철학의 시작 단계에서는 논의된 질문 자체가 일상적인 언어로 제기된 소박한 내용의 것이었다. 예컨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논의되고 있는 핵심적인 질문은 “선천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것이다. 전문용어로 된 질문부터 무슨 뜻인지 한참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전형적인 질문 가령 ‘이 세상의 최초 모습은 어떠했을까?’와 같은 질문은 적어도 질문, 그 자체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분명히 어렵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워낙 오랜 옛날, 문화 환경이 전혀 달랐던 곳에서 쓰인 언어로 논의된 것들인지라 그 논의의 미묘한 뜻까지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하면 약간의 수고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말 세상에 가치 있는 일 중 ‘식은 죽 먹기’ 같이 호락호락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아는 것도 지혜로운 것이다.


이제 독자들은 역자의 노고와 성취가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주로 역자들이 극복해야 하는 진정 더 큰 어려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들은 역어의 선택 하나하나가 심각한 문헌학적, 철학적 논쟁과 결부될 수 있는 분야의 번역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아마 그들도 처음부터 시작하면 어렵지 않을 줄 알고 애당초 이 분야에 입문했다가 이제는 처음으로 되돌아 가보는 일이 지닌 독특한 어려움을 푸는 매력에 사로잡혀 있는 연구자가 되었을 것이다. 


필자소개 : 

- 서울대 철학과 졸업. 독일 괴팅겐오르크아구스트대 철학박사.

- 저서 : 『철학의 역사』, 『삶, 반성 그리고 인문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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