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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http://www.arko.or.kr/lecture/munhak/2005/050812.htm

문학하는 철학과 철학하는 문학 사이

- 철학자, 김진석 -

강연일시 : 2005년 8월 12일(금) 19:00 ~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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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특별히 김진석 선생님을 모신 이유는 이제까지 출연하신 분 중에 가장 유식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겁나게 유식한 분이에요. 제목만 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책만 벌써 대여섯 권을 내셨어요. 그리고 큰 글씨로 철학자라고 돼 있죠? 우리나라에 철학 교수가 엄청나게 많은데 남들이 철학자라고 불러 주는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김형석이라는 아주 나이 드신 분이 철학자 소리를 듣는데 그분은 글쓰는 사람들끼리는 철학자라고 안 하고 대개 수필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철학자가 참 드물어요. 철학 공부를 하는 사람은 많아도 스스로 자기 철학을 하는 건 참 드문 일이죠. 그리고 특이한 부분은 김진석 선생이 평론을 합니다. 대체로 문학평론이라고 하지만 문학 얘기를 해도 여러 분야의 얘기를 끌어다가 평론을 하기 때문에 예술평론이라고 해도 될 수준의 평론을 합니다. 이 말은 철학과 문학평론이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하죠. 김진석 선생님의 글을 보면 문학평론을 읽어도 철학 같고 철학에 관한 얘기를 해도 문학평론을 읽는 것 같아요. 거창하게 말하자면 철학과 문학평론이 가까워지는 것은 철학사적으로도 굉장히 의미심장한 일이고 문학평론사적으로도 굉장히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요새 유행하는 서구 철학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는 프랑스 철학의 핵심이 바로 문학평론인지 철학인지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맨정신이 아닌 영역을 넘나들면서 철학이 자기 몸을 넓혀 가는데 그 넓혀 가는 과정이 사실은 문학평론이 넓혀 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죠. 특히 우리나라 같은 데서 그런 흐름이 생기기는 참 힘들어요. 들뢰즈다 뭐다 하고 그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지로 그런 글을 창작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아주 희귀합니다. 그래서 제가 김진석 선생을 평소에 존경하고 있고 오늘이 마지막이라서 마지막 정리하는 데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모셨습니다. 제가 간단히 소개를 드렸는데 정확한 것도 있고 본인이 못마땅한 것도 있을 텐데 그런 얘기도 할 겸 우리나라에서 철학한다는 것이 뭔지, 철학하는 데 어려움이 뭔지 그 얘기부터 해 보지요.

김진석 : 김정환 선배 얘기를 가만히 들어 보니까 여기 나오신 분들이 직업적으로 공부하는 분들은 아닌 것 같아요. 요새 저도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이렇게 지식을 자꾸 비우면 나중에 치매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은 많이 읽지만 자꾸 지식을 비우고 사는 편입니다. 책에서 배운 건 안 하고 그냥 고집스럽게 제 얘기를 하다 보면 지식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많이 읽고 듣고 하는데도 왜 이러고 사나 할 정도로 지식하고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데 갑자기 유식한 사람의 대표자처럼 말씀을 하시니까 좀 겁이 납니다. 철학을 한다는 게 참……. 금방 김정환 선배께서 장황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개인적으로는 자괴감이 참 많습니다. 철학이 뭔지……. 사실 전 철학을 한다는 게 더러운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참 더럽고 치사한 짓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철학이 근본이고 원칙이니까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기대감이 좋은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구시대적이고 시대 착오적인 면도 있어요. 왜냐하면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다 철학자예요.

옛날에는 소수의 철학자들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나 교수들이 철학적인 방향을 제시했겠지요. 하지만 요새는 학자들이 입법자적인 역할을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여러분들도 그런 역할을 기대하지는 않을 거예요. 실제로는 기대를 안 합니다. 여러분들 각자가 다 철학자이고 모든 시민이 다 철학자입니다. 옛날처럼 고전적인 역할을 철학자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직업이 되다 보니까 여러 가지로 안 좋은 것 같아요. 더러운 직업이라는 말이 수사적인 말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 더러운데 철학자들은 자기 근본의 깨끗함만 매일 얘기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근본이 깨끗하고 본질적인 걸 말한다 하면서 자기는 깨끗한 길을 가는 시늉을 많이 하는데 그게 한편으로는 좀 더러운 짓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런다고 해서 세상의 더러움이 깨끗해지지는 않거든요. 그런데도 기본적으로 철학자들이 철학 교수니까 말로는 항상 고귀하고 근본적인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게 큰 영양가는 없지 않나 하면서도 자괴감이 들어요. 그러다 보니까 저도 오기로든지 하여튼 세상이 더러우니까 더럽고 이상한 면을 오히려 많이 받아들여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하죠. 그래서 차라리 글쓰는 걸 좀 더럽게 만들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이상하게 자꾸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철학에 대해서 좋은 말씀은 못 드릴 것 같아요. 사실은 저도 정말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김정환 : 시작하기 전에 오늘 좀 혼란스러워 보자고 했더니 처음부터 본격적으로 혼란스러운데 요즘 사람들이 철학을 우습게 본다거나 하는 것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옛날에 비하면 진정한 철학자가 없기 때문이고 진정한 철학자라는 것이 뭔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까먹었기 때문이죠. 특수한 상황인 탓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역사가 지나면서 철학이 했던 역할이 세분화 되고 미분화 된 탓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철학이 전학문을 통합하는 근본 원리이자 근본 법칙이었다고 한다면 그 뒤로 다른 학문들이 발전을 하고 독자적으로 나가니까 철학의 역할이 축소된 면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거꾸로 뒤집어 보자면 우리나라 풍토가 점을 치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그냥 철학자라고 하니까 철학자라는 말이 맛이 없어져 버린 감이 있어요. 그리스 철학 이후로 철학은 사실 변한 것이 없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철학이 너무 상세해지고 세세한 데를 파고들다 보니까 김진석 선생님이 표현했듯이 좀 치사해지고 짜증이 나는 거죠. 저 같은 경우는 더 나아가서 글을 쓰다 보면 참혹해지고 잔인해지는 걸 느끼거든요. 시답지 않은 글을 쓰고 있으면 신경질이 나는데 철학도 비슷하게 천 년 이천 년을 자기 문제를 찾아서 왔던 거죠. 철학이 다시 자기 영역을 제대로 찾기 시작했다고 할까, 철학의 변혁이라고 할까 하는 걸 대개 우리가 니체로부터 치잖아요? 저서를 보니까 김진석 선생님의 관심도 니체부터 시작해 포월과 소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면서 독자적인 철학 세계를 찾아가는데 제 생각에는 문학과 늘 관계를 갖기 때문에 그런 새로운 영역이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역시 그런 점에서는 서구와 내용이 같은 건 아니지만 경향 자체는 서구의 흐름 속에서 형성돼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진석 : 공부할 때는 니체에 대한 논문을 썼습니다. 제가 독일에 갔었는데 처음에는 더 공부하려고 희랍 문헌학도 하고 인도 산스크리트어도 하면서 고전적으로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한참 하다 보니까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런 고전적인 걸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더라고요. 그래서 좀 재미있고 자유분방한 걸 찾다 보니까 니체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초기에는 서구적인 맥락에서 공부를 했었죠. 그래서 니체의 철학도 많이 좋아했는데 제가 한국에 온 90년대 초에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불었어요. 저도 그때 이런 저런 얘기를 했는데 철학적인 것은 아까도 김정환 선배님께서 얘기 하셨듯이 말을 쓰되 개념적인 것을 새로 만들어야 되거든요. 서양 철학자든 동양 철학자든 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마 일상 언어에서 생겼을 거예요.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주고 새로운 맥락을 주고 개념의 위치에까지 끌어올려야 하는데 사상을 한다는 건 내용으로서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걸 담는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한국어일 텐데 한국어로써 어떤 새로운 표현을 만들든지 해야 한다는 거죠. 개념이 없으면 추상적인 내용 안에 아무리 알맹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공허할 수 있고 기본적으로는 한국어로써 독자적으로 살아 있는, 자생적인 개념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초월에 대비해서 포월이라는 말을 쓴 겁니다. 소외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죠. 철학적 개념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초월이라든지 소외라든지 하는 말을 흔히 쓰는데 제가 보기엔 너무 잘못된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거꾸로 가는 심정으로, 어긋나게 삐딱하게 가는 심정으로 계속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게 또 막막한 일이더라고요. 요새는 왜 내가 이런 짓을 하면서 자꾸 나이를 까먹고 있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한국어에서 어떤 말을 새로 만들어서 개념화하는 것이 공적인 일이고 집을 지을 때 주춧돌을 놓는 일과 같다고 생각은 해요. 하지만 말이라는 건 사회에서 통용이 돼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사회적으로 통용이 안되면 저부터도 그렇고 딴 사람들도 저 인간이 괜히 쓸데없이 말만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즉 사적인 일을 혼자서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 수도 있고 저부터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회적으로 좋게 잘 쓰이지도 않는 말을 아무리 공적인 관점에서 용어를 만든다고 해도 이게 참 괜찮은 일인지 회의가 들 때는 있어요. 하여튼 한국어로써 자생적인 말을 만들자 하는 동기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대부분 지붕부터 그리지 않습니까? 전에 아버님이 목수라는 어떤 분이 쓴 글을 잠깐 봤는데 지붕부터 그리는 사람들을 증오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집을 그리는데 밑에서부터 안 그리고 지붕부터 그리느냐고 하면서 자기는 항상 밑에서부터 그린다는 말을 자랑 삼아서 얘기하길래 맞는 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그런 문제를 생각한 적이 있는데 말과 개념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주춧돌이 되는 개념이 있긴 있어야 되는데 우리가 실제로 집을 그리라고 하면 지붕부터 그린 다음에 창문을 그리거든요. 그 정도로 신경을 안 쓰고 그리죠. 뭔가 어긋나는 지점이 어딘가는 있는 것 같아요. 철학적으로 개념을 만든다는 게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는 건지……. 그렇게 시도는 하고 있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사실 모르겠습니다.

김정환 : 저서를 훑어보신 분들은 나중에 질문을 하실 것 같은데 제가 대신 질문을 드려 보지요. 여기 보면 형이상학, 변증법까지는 조금 애를 쓰면 알 수가 있어요. 초월도 조금 애를 쓰면 알 수가 있고 이상 현실, 가상 현실, 환상 현실까지도 알 수가 있는데 포월이라는 말하고 소내라는 말이 여러분들 특히 궁금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잠시 여기 계신 분들을 학생으로 생각을 하시고 포월이라는 개념이 뭔지 또 소내라는 개념이 뭔지 먼저 설명을 하고 넘어가지요.

김진석 : 제가 보기에는 포월이나 소내라는 말보다 초월이라는 말이 엄청 더 거창하고 어려운 말입니다. 초월이라는 말은 껑충 넘어서 또 어디로 넘어간다는 뜻으로 어려운 말인데 우리가 쉬운 말로 생각을 하지요. 제가 생각하는 ‘포’ 자는 우리가 많이 쓰는 말입니다. 길 포(匍)자인데 한글로 기어서 넘어간다는 뜻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철학책을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철학 개념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고공 비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추상적인 개념들이 많이 있는데 읽을 때는 근사하고 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구체적인 현실과 연결시킬 생각을 안 하면 읽고 나서 아무것도 없어요.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추상적인 말이라는 거죠. 우리가 쓰고 있는 개념이라든지 사고를 우리 몸에서부터 시작하는 지점을 찾아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했어요. 뭘 패러디하면서 그냥 껑충 뛰어서 넘어간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기어서 넘어간다는 거죠. 이건 일종의 수사학적인 표현이에요. 우리가 은유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다 그런 과정인 것 같습니다. 본래적이 뜻이 있고 약간 옆에 수사학적인 표현이 있는데 포월이라는 말도 그런 뜻이고 그래서 길 포(匍)자 입니다. 껴안을 포(抱)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1차적으로는 길 포(匍)입니다.

제일 낮은 측면에서는 우리가 기어가다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든, 어떤 사람을 위해서 정을 쏫든 하면 그 다음에는 껴안을 포(抱)의 단계쯤으로 갈 것 같아요. 인간 관계를 중시하다 보면 너무 쉽게 금방 껴안는 데서부터 생각하는데 그건 오래 후의 얘기일 것 같고 첫 단계는 길 포(匍)고 그 다음에는 한참 기어서 가다 보면 다른 사람을 껴안고 가든지, 껴안고 같이 쓰러지든지, 껴안고 같이 떨어지든지 하겠죠. 그 다음에는 추상적인 단계로 포괄한다 할 때의 쌀 포(包)라는 의미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기어서 넘어간다는 뜻의 ‘포’ 자를 기본적인 것으로 삼았습니다. 몸이 움직이는 가장 낮은 지점, 가장 낮은 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되지 않나 하는 것 때문에 시작한 거고요, 소외라는 말도 우리가 너무나 잘 쓰는 말이죠. 제가 보기엔 이제는 너무 진부한 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떤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을 설명할 때 ‘소외된 현대인을 심도있게 설명한 작품’ 이라고 하는 상투적인 말로 설명하거든요. 그런데 이 말의 설명력이 소진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소외라는 말은 철학적으로 항상 안에 있는 중심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중심으로부터 바깥에 떨어지면 낯설다는 생각을 하는데 사실 굉장히 계몽적이고 고전적인 생각일 겁니다. 안에 어떤 존재의 집이 있든지 뭐가 있든지 하여튼 안에 어떤 중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헤겔, 맑스의 시대가 19세기 초에서 중반이 될 텐데 19세기만 해도 중심으로서의 내부를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데 소내한다는 것은 그런 중심은 없는 것 같고 계속 안에 있습니다. 안에 있는데도 낯설다는 느낌인 거죠.

예를 들어 보면 건물도 내부가 커집니다. 서양의 경우에도 옛날에는 성당이나 교회가 큰 건물이었어요. 그런데 요새는 대형 쇼핑몰을 보면 굉장히 커지지 않습니까? 건물이 굉장히 내부가 커집니다. 제가 보기엔 바깥이라고 하는 건 없는 것 같고 오히려 모든 것이 다 세상인 것처럼 보여요. 안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거죠. 그런데 그 안에서도 낯설게 보인다는 거죠. 옛날처럼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서 낯선 게 아니라 안에 있어도 낯설다는 거예요. 그걸 1차적으로 저는 소내된다고 봅니다. 바깥으로 소외되는 게 아니라 소내되는 거죠. 두 번째 단계로 소외된다는 게 제가 보기엔 자꾸 투정하고 징징 짜는 경향이 많은 것 같아요. 소외된다, 소외된다 하면서 말이죠. 누구든지 다 소외됐다고 합니다. 그 지점과 대비되는 어떤 긍정적인, 투정하거나 징징 짜지 않는, 고독하고 막막하지만 그래도 제 몫은 그냥 제가 가지고 가는 당당함과 긍정적인 면이 더욱 강조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두 가지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소내라는 말을 썼는데 사실 말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양 교육을 받으면서 초월이나 소외라는 말에 너무 익숙해져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어렵게 보이는 것이지 말 자체는 절대 현학적이지 않습니다. 제 책을 보고 어떤 분들은 현학적이라고 하시는데 현학적인 건 아니에요. 내용은 아주 기본적이고 쉬워요.

김정환 : 포월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니까 섹스를 설명하는 것처럼 들렸어요. 기다가 초월을 한다, 섹스에서 오르가슴까지가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물론 좀 천박한 비유입니다만…….

김진석 : 천박한 게 아니라 사실적인 거죠.

김정환 : 역시 몸인데……. 오르페우스가 수금을 타면 돌이 일어나서 춤을 춘다고 하더니 김진석 선생님 강의를 듣고 책상이 놀라서 떨어졌습니다. 니체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제 생각엔 그래요. 원래 철학이 세상을 많이 알게 되는 게 세상이라는 내용에 대해 법칙을 주고 법칙을 그려내기 위해서 시작이 되는 거죠. 그런데 개념이라는 것 자체가 형식이잖아요. 내용에 비해 형식이잖아요. 그래서 창조보다는 명명이죠. 개념화한다는 것은 이왕에 있는 것을 명명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창조적인 것보다는 명명으로 가고 어떤 학과의 내용보다는 분류쪽으로 더 관심이 가니까 형식이 우선되는 거죠. 사실 수학 같은 경우에서는 발명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있는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니까요. 과학도 옛날에는 온갖 발명이 있었지만 요새는 사실 발견이에요. 발명이 발견으로 거꾸로 가는 면도 있고요.

이런 와중에 너무 내용에서 동떨어지고 형식 위주로 가니까 말이 더 강해지죠. 내용보다 어떻게 말하는가,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더 강해지고 그에 대한 일종의 육체의 반란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새로운 내용을 찾기 위해서 진짜 미로, 미궁 속 같은, 육체 속이라는 것처럼 사실 난해한 게 없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내 몸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내 몸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세상보다 훨씬 난해하죠. 우리의 몸속에 빅뱅도 있고 태양계도 있고 별의별 게 다 있죠. 원자를 쪼개 보면 그 안에 조그만 게 있고 그 조그만 걸 쪼개 보면 그 안에 또 뭐가 있고 끝까지 가 보면 아무것도 없고 속도만 있거든요. 현미경이 발전할수록……. 그렇게 가면서 실제로 문명이라는 게 공(空)을 향해서 치닫는다는 거예요. 문명이라는 게 문명의 발전을 낳기는 하지만 철학적으로는 영(0)을 향해서 가는 거죠. 그래서 그에 대한 육체의 반란으로 시작이 된 게 니체 철학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래서 처음에는 상당히 오해를 받다가 특히 사회주의 혁명 혹은 이성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면서 다시 니체 철학이 재평가를 받고 오늘날까지 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지금 얘기하시는 것에서 몸이 굉장히 중요한 거죠? 김진석 선생이 얘기하는 것 중에서…….

김진석 : 예.

김정환 : 자, 이쯤 얘기를 하고 저는 예술평론 중에서 특히 문학평론이라는 게 여러 예술 장르를 위한 평균어가 돼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여러 장르를 빨아들이면서 그 수준을 높이면서 다시 예술한테 자극을 가하면서 예술 수준을 높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철학이라는 것도 사실 크게 얘기할 것 없이 자연과학이든 뭐든 온갖 학문을 위한 평균 언어, 보통어가 돼서 그 수준을 한 단계 높이면 스스로 자기 수준도 높아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도 제가 시를 한 편 골라 왔습니다. 오늘 시는 이제까지 나온 시보다 굉장히 쉬워요. 김진석 선생이 쉬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오늘 얘기가 너무 어려울 게 분명하기 때문에 제가 일부러 쉬운 시를 하나 골라 왔습니다. 읽어 주실래요?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났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전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고 있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김정환 : 자기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읽으시네요. 요즘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보통 철학을 가르치실 때 그냥 철학사를 가르치십니까? 아니면 철학하는 걸 가르치십니까?

김진석 : 옛날에는 철학과 교과목이 철학사, 인식론, 존재론 같은 것들로 많이 짜여져 있었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 그렇게 돼 있었습니다. 그건 사실 직업으로 철학하는 사람을 전제하고 겨냥한 커리큘럼이었거든요. 제가 보기엔 참 잘못된 거였습니다. 마치 다 철학 교수할 것처럼 교과목을 짜 놨던 거죠. 고대철학사, 중세철학사, 근세철학사, 동양철학, 노자, 유가철학……. 철학도 자기 자체내에서는 못 바꾸다가 몇 년 전부터는……. 요새 모든 분야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분야에서는 개혁을 못 하잖아요. 대학에서도 그렇고 철학과도 잘 바꾸지 않고 마치 모든 사람을 다 철학 교수시킬려고 하는 것처럼 커리큘럼을 운영해 왔는데 언제부터인가 바깥에서 오는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하여튼 그런 고전적인 커리큘럼을 허물고 학재적이랄까 문화적이랄까 하는 걸 좀 많이 하라고 하죠. 저도 선생을 한 십몇 년 했는데 초기에는 철학사적인 걸 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안 해요. 그때그때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김정환 : 문학도 있습니까?

김진석 : 제가 몇 년 전부터 문학 과정도 하고 있는데 철학이 인기가 없어지니까 동시에 문학도 학생들이 좋아하지 않는 과목 같이 돼 버린 경향이 좀 있어요. 저는 학생들이 철학을 너무 딱딱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문학을 했더니 문학도 또 딱딱하게 느끼는 형국이 갑자기 됐더라고요. 그래서 제 시도가 실패하기는 했는데 계속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김정환 : 철학을 싫어하면 문학을 좋아할 것 같고 문학을 싫어하면 철학을 좋아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김진석 : 글쎄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고전적인 세대의 생각이고 요새 학생들은 굉장히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1학년 때부터 취업을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사범대보다 문과대학이 좀더 인문적이기 때문에 문과대학을 선호했는데 몇 년 전부터는 문과대가 아니라 같은 국문학과하고 국어교육과가 있으면 학생들이 국어교육과를 훨씬 더 선호하거든요. 취업도 되고 좀더 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과거와 달리 인문적인 상상력이라든지 하는 데서 많이 벗어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정환 : 제가 어느 영화사를 어떻게 알게 돼서 영화사 자료와 회사소개 자료를 봤더니 글이 아주 엉망이더라고요. 제가 영문과를 나왔는데 한글도 엉망이고 영문도 엉망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열 받아서 좀 고치고 “야, 기본은 알아야지.” 하고 얘기를 했는데 영화는 엄청 잘 만들더라고요. 그래서 생각이 어떻게 미치느냐 하면 글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하고 영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하고는 조금 다르구나 하는 거였어요. 그림쟁이는 그림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건데 그걸 우리가 이해를 하고 오히려 권장을 해야 되겠구나 싶었어요. 글이란 것만 가지고 글을 잘 쓰네, 못 쓰네, 글이 기본이네 하는 말을 옛날에는 많이 했지만 요새는 그런 말도 안 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볼 때 그런 대목에 대해서 여쭤 보고 좋은 말을 들을 수 있는 분이 김진석 선생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이왕지사 만난 김에 연극하는 사람이 연극을 통해서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 문학을 통해서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 영화를 통해서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듣고 싶어요. 그걸 어려운 말로 전유라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질문을 통해서 그런 얘기를 많이 들으면 제일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얘기를 일단 인식론 차원에서, 예술적 인식에서 특히 장르적 인식 같은 것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데에 관심이 굉장히 많을 것 같은데 발제 비슷하게 좀 해 주시죠.

김진석 : 장르적 인식이요?

김정환 : 음악하는 사람들은 소리로 세상을 인식하잖아요. 음악 잘하는 사람이 소리로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우리가 알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소설 쓰는 사람이 정치 얘기하는 걸 보면 굉장히 무식한 것 같아도 그 사람이 소설 쓰기를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어느 정치가보다 잘 아는 사람이죠. 그게 예술가로서의 자긍심이고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위상을 구분하지 않고 100분 토론 같은 데 그냥 앉혀 놓는다고 하면 화가처럼 쪼다가 없고 글쟁이처럼 쪼다가 없잖아요.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른 거죠. 그런 것을 규명해 주는 것이 지금 철학이 나가고 있고 앞으로 나가야 될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점에 대해서 약간의 부연 설명을 해 주시고 질문을 받아 보겠습니다.

김진석 : 금방 그림을 보면서 올라왔는데 제가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현상 중의 하나가 평면 회화도 고유의 역할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전까지만 해도 회화가 그래도 꽤 중요한 문화적인 감상과 사색의 대상이었죠. 하지만 문자뿐만 아니라 회화까지도 매체로써 세계관을 대변하는 역할을 많이 잃어버린 것 같아요. 저도 그래서 글뿐만 아니라 이게 왜 이렇게 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연극도 그렇고……. 요새 영화, 이미지만 대중적이고 현실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이럴까 하고 저도 나름대로 생각은 꽤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생각한 결과는 문자나 회화, 연극조차도 굉장히 상징적인 방식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 이라고 얘기해요. ‘세상’이라는 말을 우리가 거침없이 합니다. 이 세상이 어떻고 저 세상이 어떻고 세상이 이런 판인데 하고 말이죠. 그런데 사실 세상이 뭔지 잘 모릅니다. 잘 몰라요. 상징적인 거죠.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이 있어요. 엄마가 아이한테 과일 좀 사 오라고 하면 아이가 과일 가게에 가서 “과일 오천 원 어치 주세요.” 하고 말을 합니다. 그럼 과일 가게 주인이 “엄마가 무슨 과일 사 오라시니?” 하고 묻습니다. 다시 아이가 “과일 사 오래요.” 하고 대답을 하면 과일 가게 주인이 사과하고 바나나를 담아서 줍니다. 그럼 그 아이가 “사과랑 바나나말고 과일 사 오라고 했어요.” 하고 말한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아이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어요. 아이가 보기엔 그것이 사과와 바나나지 과일이 아닐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아이가 고집 부리고 앉아서 떼를 쓰며 울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과일이라는 말을 그냥 씁니다. 잘 써요. 세상이라는 말도 쓰는 거죠. 제가 보기엔 그와 비슷한 상징적인 말들이 많아요. 우리 몸하고 이해의 방식이 떨어진 말을 개념뿐만 아니라 회화로도 쓰고 연극에서도 씁니다. 연극은 주로 말을 많이 하니까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몸하고 떨어진 말들을 많이 썼어요.

과거에는 그래도 몸의 차원하고 떨어진 현실적인 말과의 관계를 고급 문화가 다 커버해 줬던 것 같습니다. 고급 문화가 정신의 힘으로 말이죠. 우리가 정신에 대한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을 거예요. 고급 문화가 그 격차를 무마해 주고 덮어 주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 격차가 없어지고 격차를 메울 문화적인 힘이 없어지면서 사람들이 상징적인 것에 대해서 매력을 잃게 된 거죠.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든지 상징적인 표현물로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그게 또 현실을 해결한다고 믿지 않게 된 점이 많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영화는 어떤 사람이 때리는 장면이 나오면 물론 진짜 때리지는 않지만 우리가 진짜 때린다고 생각하고 총을 쏘면 가짜 총이지만 총을 쏜다고 생각하거든요. 표현물 자체는 굉장히 허구적이지만 과거에 기호와 기호가 대변해 주던 의미나 간격이 없이도 사람들이 그냥 직접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장르가 아닌가 싶어요. 조금 전에 김정환 선생님께서는 나름대로의 표현물에 대한 방식이 다 있음을 전제하고 말씀을 하셨는데 물론 따지고 보면 차이는 다 있을 겁니다. 그런데 1차적으로는 상징적인 표현과 그렇지 않은 직접적인 표현 방식의 차이인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표현들은 사람들이 멋있다고 순간 느끼면서도 한순간 돌아서면서 좀 맥이 없지 않나 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혼자서 막 고민하면서 죽으라고 글을 쓰다가도 쓰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허망한 느낌에 빠질 때가 있는데 이게 아마 과거의 고전적이고 상징적인 매체와 요새 우리가 빠져들어가는 직접적인 매체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해요. 과거에는 그 간격을 메워줬다고 하면 요새는 매체의 차원을 메워줄 어떤 무엇이 없고 우리가 또 속아넘어가는 것도 원치 않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말을 잘해도 저 사람은 말 잘하는구나, 말로 벌어먹는 사람이구나 하고 사람들이 느끼는 것 같아요. 제가 몇 년 전에 이발소에 갔는데 누가 나와서 토론을 하는데 말을 잘하니까 나이 든 주인 양반이 다른 분한테 “저 사람들은 하여튼 말로 벌어먹고 살어.” 하고 말하는 걸 보면서 사람들의 인식의 간격이 이렇게 크구나 하는 걸 퍼뜩 느꼈어요. 옛날에는 무슨 말을 하면 그 속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뭔가 계몽받기를 원하고 뭔가 자양분을 얻는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근사한 말을 하면 보통 사람들이 설명은 못하더라도 그것도 하나의 말하는 사람의 유식한 수단이 아닌가 하고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런 게 제일 큰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의 매체하고 요새 매체하고의 사이에 간격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정환 : 말과 글이, 말이야 훨씬 전에 생겼지만 특히 글이라는 게 생기면서 문명이 생기는 건데 글이 생기면서 몇천 년 동안 다른 것들을 지배해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것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말이죠. 다른 장르보다 글로 된 장르들이 우위에 있어 왔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이 역전되는 것 같아요. 아까 니체 얘기도 나왔지만 니체도 참 불운하고 그 뒤의 철학자들도 참 불운한 게 사실은 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글 이전으로 들어가서 글 이후를 끄집어내 보겠다는 소린데 글의 한계를……. 왜냐하면 음악은 있는 소리 가지고 하는 것이고, 그림은 있는 색과 모양 가지고 하는 것이고, 연극은 있는 육체 가지고 하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글이라는 건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거죠.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더 유용할 수도 있지만 더 위험할 수도 있어요. 수천 년 간의 소위 글의 독재도 연관이 돼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몸 얘기를 하면서 니체의 철학이 전개되는 과정이 말예요. 그런데 그걸 끈임없이 말로 풀어야 되니까, 말 너머를 말로 얘기해야 되니까 어려운 거죠. 그쯤에서 그것이 예술적이며 문학적이고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비근한 예를 들자면 영화배우 전지현 있잖아요. 영화배우라고 해야 할지 광고모델이라고 해야 할지……. 영화는 성공한 게 하나밖에 없으니까 광고모델이라고 해도 좋은데 전지현을 자세히 보면 얼굴이 이쁠 것도 없어요. 젖살이 아직도 안 빠졌고 우리나라의 다른 영화배우에 비해서 섹시하다거나 하는 것도 없어요. 그런데 왜 인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저도 보면 좋거든요. 저도 광고든 뭐든 전지현이 나오면 채널을 안 돌려요. 그래서 생각을 해보니까 몸으로 말하는 세대 같아요. 무슨 말을 하든 동작을 하든 간에 육체 전체가 얹혀서, 무게 전체가 얹혀서 오는 것 같아요. 그런 것이 보는 사람한테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그리고 우리 애들을 보면 글이라고 한 줄도 안 읽어요. 글이라고는 한 줄도 안 읽는데 「매트릭스」를 그냥 따라서 넘어가더라고요. 내가 보니까 나도 이해하기 힘들던데……. 영화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만 글로, 스토리로, 줄거리로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죠. 오늘 마지막 날이니까 그런 질문들을 많이 해 주십사 해서 말씀을 부탁 드렸던 겁니다.

[질의, 응답]

질문자 : 저는 두 가지를 여쭙고 싶은데요, 맨 처음에 말씀 꺼내실 때 철학하는 일에 관련한 소회를 지금 세상이 더러우니까 텍스트를 쓰거나 할 때 나도 더러워져 보려고 한다는 일반인의 사고에서 보면 다소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포월이라는 용어를 그래서 제기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어요. 아까 초월과 포월의 개념을 비교하는 설명에서 포월의 개념을 가장 낮은 데서부터, 우리 몸으로부터 기어서 넘어가는 상태로 설명을 해 주셨는데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초월이 지금 여기라는 상태를 포함하지 않고 너머를 향해 가는 의미를 갖는다면, 포월이라고 새로 제기하신 용어는 지금 여기를 포함해서 넘어가는 상태를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차이를 의식하게 되거든요. 그리고 텍스트를 쓰실 때 사회를 비판하는 비판자로서의 저자와 텍스트의 내용으로써 비판된 내용이 있겠죠. 초월이라는 용어로 보자면 비판하는 자와 비판되어지는 대상은 분리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포월이라고 얘기하면 비판하는 나는 꼭 텍스트에서 비판하는 나를 포함한다고 표현하지 않더라고 비판 내용의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비판하는 나도 결국 비판받는 내용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는 상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 부분에 관련한 제 의견에 대한 선생님의 느낌을 듣고 싶은데 아까 더러우니까 나도 더러워 보려고 한다 하는 말씀을 하실 때 언뜻 원효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아주 개인적인 궁금함입니다. 우리가 어떤 과제를 앞에 놓고 있을 때 그것이 시험이건 아니면 논문이건 아니면 개인의 인생사에서 커다란 관혼상제에 관련한 일이건 간에 굉장히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되죠. 그런 것과 관련해서 선생님께서는 그 앞에서 어떤 대처 방법 혹은 습관을 지니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도피를 하시는지 아니면 포월을 한다고 하면 어떤 형태로 하시는지 말이죠. 예를 들면 장아무개라는 화가는 스트레스가 많이 쌓일 때 술을 한두 말씩 드시고 사나흘 푹 잠을 자고 일어나서 간단한 그림을 그린 적도 있다고 해요. 아주 간단히 생각하자면 울고 싶을 때는 어떤 때인지, 또 그럴 때는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진석 : 저보다 더 차분하게 맥락을 잘 짚어주신 것 같아서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설명드릴 게 없을 것 같고요, 두 번째 질문은 글쎄 말입니다. 몇 년 전에 어떤 선배를 만났는데 집에서는 술을 안 먹는다고 그러더라고요. 혼자 먹으면 중독된다고……. 저는 집에 있을 때 가끔 혼자 술을 잘 먹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답답하거나 할 때는 산을 오릅니다. 고향이 강원도라서 그런지 아니면 전생에 산에서 돌아다녀서 그런지 저도 설명하기 어려운데 집 뒤에 산이 있어서 산에 가서 한바탕 걷고 오면 화나고 우울한 게 좀 없어지는 것 같아요. 그게 개인적인 해소 방법이에요. 술은 세지 않기 때문에 장 모 화가처럼 호기있게 먹지를 못하기 때문에 말씀 드릴 계제가 안됩니다. 저는 우울함에 빠지는 경향이 있어서 그냥 혼자 틀어박혀서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때가 있습니다. 집사람 얘기로는 삐쳤다고 하는데 삐친 건 아니고 그냥 세상이 싫어서……. 자꾸 삐쳤다고 하지 말라고 해도 자꾸 삐쳤다고 하는데 저는 삐친 게 아니라 그냥 말하기 싫어서 가만히 있는 경우가 있어요. 그게 아마 제가 몸으로 견디는 무엇이 아닌가 싶습니다.

질문자 : 문학이라는 것도 사회를 반영하는 다른 공간인데요, 선생님께서는 어떤 눈으로 문학 작품을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김진석 : 두 가지 말을 들어서 설명을 하자면 작년에 제가 낸 평론집의 앞 부분은 주로 사회적인 맥락이나 정치적인 맥락을 빼고 텍스트만 보고 비평을 했어요. 제가 그런 시도를 해봤습니다. 그런 것도 꽤 있는 것 같아요. 그것과 대비되는 게 아마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설명하는 거겠죠. 제가 책을 내놓고 보니까 너무 텍스트에 또는 서정적인 설명에 많이 빠진 경향이 있다면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 사회적인 맥락을 강조하는 두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요새 저는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합니다. 시적인 것을 포에틱이라고 생각하고 정치적인 것을 폴리틱이라고 생각한다면 포에틱과 폴리틱 사이에서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여튼 둘 다 섞어가면서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편입니다.

질문자 : 쓰신 책 중에서「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는 한나 아렌트를 굉장히 많이 의식하고 쓴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그 점에 관해서 답변해 주셨으면 하고요, 포월하고 소내의 개념에 관련해서 전에 김지하 선생님께서 김진석 선생님과 연관된 글을 쓰신 기억이 있거든요. 김지하 선생님이 주석없이 소내라는 말을 쓰는 바람에 김진석 선생님이 굉장히 섭섭해 하셨고 그로 인해 굉장히 소원해졌다는 과정을 쓴 글을 읽었어요. 글로 발표를 했으니까 사적인 얘기가 아니라 공적인 얘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김지하 선생님께서 소내의 개념이 원래는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의해 쓰였는데 김진석 선생님이 개념화했다고 말씀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진석 선생님께서 독립적으로 개념화했다기보다는 기존에 적층되었던 것을 언어화하지 않았나 하는 얘기였는데 그 후일담을 듣고 싶습니다.

김진석 : 한 십여 년 전에 그런 일이 있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섭섭해서 뭘 어떻게 한 건 아니고 가만히 있었어요. 아까 얘기했듯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세상에 삐쳐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대충 해결된 것 같아요. 그 양반이 공적인 신문에 쓰셨기 때문에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섰다는 말씀도 맞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후일담이라고 해도 개인적인 얘기를 더 하기는 글쎄 좀 그렇네요. 아무튼 그 후로 별 문제 없었습니다. 김지하 선생님을 만나면 제가 인사 드리고 하지요. 그런데 소내라는 말이 최시형 선생이나 동학에서 온 건 아니에요. 그때 저도 한국적인 사상의 맥을 찾느라고 동학을 읽었는데 소내라는 말이 동학에서 유래된 말은 아니고요, 어떻게 보면 출발은 오히려 서양철학쪽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 계속 소외라고 쓰고 있는 기반에서 출발했을 겁니다. 출발은 거기서 하면서 한국어로 좀더 대응할 수 있는 걸 나름대로 찾다 보니까 소내라는 말을 쓰게 됐고 아마 김지하 선생님도 그 말이 좋아서 쓰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에서 한나 아렌트를 거론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나 아렌트도 폭력에 대해서 많이 얘기하는데 저는 한나 아렌트하고는 좀 다른 생각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을 구분해서 권력은 굉장히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해요. 모든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서 자발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정치적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을 권력이라고 생각하고 폭력은 굉장히 도구적이고 수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저는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고 봅니다.

물질적이거나 수단적이거나 더럽거나 하지 않은 굉장히 고상한 폭력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폭력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봐요. 나쁜 폭력도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문화적으로 생각하는 것 중에도 굉장히 폭력적인 게 많아요.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굉장히 도식적으로 구분해서 폭력은 굉장히 도구적인, 수단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엔 도구적이지 않은 영역이 점점 커지는 게 지금 우리가 오히려 더 고민해야 될 문제라고 봅니다. 한쪽으로는 폭력과 싸우지만 싸움보다는 껴안아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책 이름은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라고 했는데 두 번째는 뒤집어서 폭력도 어떻게 보면 껴안아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 중요한 질문인 것 같은데 자기 삶에서 각자가 얼마만큼 폭력을 용인하고 있는지가 사실 저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우리가 말로는 다 폭력은 나쁘다고 하고 파시즘도 나쁘다고 하는데 실제로 각 개인이 얼마만큼 폭력을 스스로 용인하고 있고 스스로 끌고 가고 있는지는 얘기하지 않거든요. 요새 제 주된 관심사는 개인이 의식하든 아니든 또는 개인이 자기 몸으로 뿐만 아니라 공부하고 노력을 했다고 하더라도 폭력적인 게 많이 끼여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떨 때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겠죠. 그래도 폭력적인 요소가 꽤 많다고 생각하는데 한나 아렌트는 그 부분은 생각을 안 하고 굉장히 도식적으로 구분을 한 것 같아요. 제가 거기에 대해서 쓴 글이 어디 있는데 저는 한나 아렌트하고는 굉장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예를 들면 그리스 시대에도 사람들이 광장에서 대화를 하고 공동적으로 정치적인 신뢰를 줘서 대표를 뽑았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때는 투표를 해서 다수결로 대표를 뽑았던 게 아니라 그냥 제비뽑기를 해서 뽑았습니다. 제비뽑기를 했다는 건 그 당시에도 정치적인 대표자를 뽑는 과정에 대해서 사람들이 회의적인 태도를 많이 가졌다는 거죠.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고대 그리스적인 상태를 권력을 형성하는 공화적인, 이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 당시에 그렇게 이상적인 상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또는 목소리 큰 사람만은 꼭 아니겠지만 하여튼 똑같이 고른 목소리로 조절해서 대표자를 뽑는, 권력을 형성하는 이상적인 과정이었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김정환 : 아까 질문 중 일부는 제목 착안을 한나 아렌트에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내용도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저도 한나 아렌트 책을 옛날에 하나 번역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절대 제목을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라고 못 짓습니다. 이런식으로 제목을 붙이기에는……. 그 사람은 굉장히 엄정해요. 엄정하고 학구적이에요. 이런 제목은 철학자, 특히 싸움도 잘하고 싸움과 철학의 관계를 생각하는 사람이 겨우 붙일 수 있어요. 아마 우리나라에서나 이런 제목이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자기 저서에 이런 제목 붙이는 게…….

질문자 : 니체에 있어서 ‘Macht’ 라는 개념이 있지 않습니까? 보통 권력, 힘으로 번역을 하는데 니체에 대해서 상반되는 견해가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요즘에는 영화라든지 하는 영상이 모든 걸 거의 지배하다시피 합니다. 요새는 소설도 안 보고 시도 안 보고 책을 많이 안 봅니다. 문자의 시대는 이미 한물 간 게 아닌가 하는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사실 그런 경향에서 보면 소설도 영화처럼 영상이미지주의로 흘러가지 않나 싶어요. 또한 과거의 진지함에서 가벼움으로 즉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선생님이 생각할 때는 철학자의 위상이라든지 이 시대를 바라볼 때 과연 철학이라든지 문학, 사회……. 문사철(文史哲)의 시대는 이미 갔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

김진석 : 권력을 뜻하는 독일어 Macht가 있고 그 말과 관련해서 「권력에의 의지」라는 책 제목을 주로 붙이고 있습니다. 한국에 니체학회라는 게 있어요. 철학교수들이 주로 모이는데 그 양반들은 ‘힘’이라고 번역하는 경향이 많은데 저는 개인적으로 잘못됐다고 봅니다. 저는 권력이라는 말을 선호합니다. 왜냐하면 힘이라고 번역을 하게 되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이 빠지고 추상화되고 우주론적이며 본질적인 말로 가는 경향이 있거든요.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폭력이든지 권력이든지 좋고 나쁘고를 따지기 전에 현재 사회에 다양한 형태로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권력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게 낫고, 만약에 그래서 이 사회에 나쁜 권력이 많이 범람하든지 하면 그것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하고 정면으로 대응하는 게 낫겠죠. 그래서 권력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낫습니다. 사실 니체가 굉장히 위악적인 면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 따지고 보면 위악적인 면이 다 있죠. 저는 위선적인 것보다는 위악적인 면이 낫다고 봅니다. 그런데 어떤 말을, 권력에 대해서 자꾸 얘기하게 되면 어떤 면이 있느냐면 마치……. 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사람이 폭력에 대해서 많이 얘기하게 되면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다고 해도 말하는 본인도 그렇고 텍스트도 그렇고 마치 세상이 폭력으로 꽉 차 있는 것 같은 인상에 빠질 수가 있어요. 그렇게 되면 그에 맞춰서 대응하는 방식도 위악적인 경향으로 갈 수 있겠죠. 본인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렇게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마 다른 면이겠죠. 히틀러 치하의 제3제국에서 니체가 악용된 점이 있는데 물론 잘못되면 악용될 수는 있을 겁니다.

어떤 철학자라든지 사상가라든지 저자가 세상의 나쁜 것에 대해서 자꾸 얘기할 때 의도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는 있다고 봅니다. 나쁜 것에 대해서 그걸 타겟트를 삼아 자꾸 얘기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그럴 수도 있겠죠. 요새 박찬욱 감독이 복수에 대해서 자꾸 얘기하고 잔인한 장면을 많이 집어넣고 하죠. 요번에 「친절한 금자씨」를 보면서 저런 얘기를 자꾸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들었는데 두 번까지는 얘기해도 좋은데 자꾸 얘기하면 우리보고 계속 복수를 하라는 건지, 복수가 본질이라는 건지 헷갈리거든요. 균형이 문제겠죠. 두 번까지는 괜찮고 세 번은 지나치다는 건 개인적인 감정일 텐데 위악적으로 갈 가능성은 있을 겁니다. 권력이다, 폭력이다 자꾸 얘기하면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권력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두 번째 질문은 어려운 질문인데 요새 이미지가 하도 범람하니까 문자가 사라지는 걸 굉장히 애석해 하는 경향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공감을 하면서도 그걸 너무 강조하는 분들에 대해서는 거꾸로 이런 말씀도 드려요. 문자를 해독하는 능력이 한편으로는 계몽적이고 인문적인 능력이지만 과거에는 유식한 기득권이 갖고 있는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과 못 읽는 사람, 또 과거에는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과 못 읽는 사람……. 성경조차도 라틴어, 희랍어로 된 것을 독일말, 민족언어로 바꾸는 과정을 우리가 근대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문자 해독 능력을 갖고 또 백지에다 글자를 쓰는 게 이미지에 비해서는 굉장히 인문적인 또는 인본적인 경향이고 태도인 건 사실이겠죠. 사실 여태까지는 너무 문자 중심의, 선비 위주의, 폐쇄적인 기득권을 형성하는 데도 도움이 됐을 겁니다. 그러니까 좋은 것만은 아니겠죠. 우리가 지금 격변기에 있어서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문자와 문자 아닌 것의 관계는 옛날 기원전 1000년 전 이집트 시대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프라톤 책에도 나오는데요, 기원전 한 1000년, 2000년에 처음에 문자가 생기니까 그때부터도 문자가 중요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문자가 오히려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고 싸움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문화의 격변기마다 생기는 거예요. 르네상스 시대에도 그렇고 요새도 새로 또 생기는 거죠. 점점 치열해져서 그렇기는 한데 전반적인 경향은 문자보다는, 문자는 민족언어이기 때문에 모든 대중이 점점 규모가 큰 걸 지향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다 보면 매체의 속성상 문자가 힘을 잃어가는 건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민주적인 경향이거든요.

누구나 쓸 수 있는 매체가 폐쇄된 민족언어가 아니라 일반적인 이미지에 가까운 건 사실이거든요. 물론 거기에 위험도 있고 해악도 있겠죠.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 더 크게 대규모로 조작하기 쉽고 대규모로 사이비적으로 사용될 수 있고 남용될 수 있는 위험이 있죠. 하지만 그 위험이 꼭 우리 시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자가 쇠퇴하는 것은 비록 우리 시대에 거대한 규모로, 빠른 속도로 일어나지만 우리 시대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문화의 격변기마다 신석기 시대 이전에도 있었고 신석기 시대에도 있었고 르네상스 시대에도 있었고 우리가 지금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전번에 어떤 역사책을 읽으면서 느꼈는데 17, 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도 굉장히 혼란이 심했답니다. 정보가 너무 넘쳐서 그 당시에도 서양에서 고전을 정리해야 될 필요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희랍 시대로 회귀하든지 로마 시대로 회귀하면서 고전적인 작품들을 설정해 놓자, 그렇지 않으면 너무 정보의 양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관리를 못한다 하는 위기감이 200년 전에도 있었다고 해요. 물론 거칠게 상대화할 건 아니지만 그 당시에도 벌써 있었다는 거예요. 고전이라는 개념이 벌써 그 당시에도 위기감 때문에 생겼고 또 지금 와서 우리는 더 큰 규모로 당면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 몇 가지 복잡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정환 : 아까 용어를 어떻게 번역하는 게 좋을까 하는 얘기가 나왔었는데 우리나라가 아직 철학 용어 정리가 안돼 있어요. 아주 유명한 용어들도 일본이 쓰는 용어를 아직 다 벗지 못했죠. 철학계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게 통일이 되면 힘이 맞냐 권력이 맞냐 하는 질문 자체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질문자 : 아까 김정환 선생님께서 글이 그 동안의 독재에서 물러나 이제는 자리를 내주는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느냐 하는 말씀을 하셔서 더불어 공감을 합니다. 일단 개인적으로 말씀을 드려 보면 철학하시는 학자들의 언어가 너무 어렵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라는 건 일단은 사회적인 약속이기 때문에 사회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철학하시는 분들이 자의적으로 언어를 어렵게 만들어서 그런 부분에 대해 늘 고민을 하면서도 우리가 철학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그곳을 기웃거립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작가와 철학자가 있다고 할 때 어려운 것이 있으면 작가는 그것을 쉽게 풀어주는데 철학자는 그것을 더 어렵게 풀어주는 게 아니냐 하는 생각을 또 개인적으로 해봤습니다. 본론적으로 질문에 들어가고 싶은데 요즘 문사철(文史哲)이 죽었다 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문학, 역사, 철학……. 문사철(文史哲)이 죽었다고 하면서도 왜 언어를 강조하고 학교 현장에서는 논리를 강조하고 논술을 쓰고 독서를 해야 된다고 하는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 뭔가 자꾸 엇박자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또한 해봅니다.

얘기가 길어지는데 최근에 하버드 학생들한테 당신네들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더니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그래요. 많은 하버드 대학생 중에 5, 6명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물었는데 역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얘기를 했어요. 최근에 제가 어느 평론가를 뵜는데 그분 말씀이 문예창작과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주로 철학 서적을 많이 읽는다고 해요. 그렇다면 맨 처음에 김정환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신 글의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문학이 시, 소설, 수필, 희곡에서 이제는 보여줄 것 다 보여줬으니까 철학의 고난도의 상상력으로 글의 세계를 지키려고 하는 어떤 의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김진석 선생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은 계속 문사철(文史哲)이 죽었다고 말만 하고 그냥 가만히 계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뭔가 문학과 연관시켜서 전반적으로 한번 정리를 해봐야 할 책무감을 관객 입장에서도 갖거든요. 그런 답변을 자연스럽게 듣고 싶습니다.

김진석 : 문사철(文史哲)이 죽었다고 하면 저도 당사자니까 맞습니다, 죽었습니다 하고 말하기도 힘들고 에이, 죽어라 하고 말하기도 사실 힘듭니다. 어떻게 하기 참 곤란합니다. 정말 죽었다, 우리 큰일 났다, 국가의 모든 관심을 동원해서 빨리 살려라 하고 말하면 오도방정 떠는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아까 말한 것처럼 에이, 잘됐다, 죽어라 하고 말하면 무책임한 것 같고 이래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래요. 왜 그러냐 하면 제가 한번 설명을 드려 볼게요. 철학이, 문사철(文史哲)이 다 마찬가지인데 철학에 대해서 아직 기대하고 있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건 참 힘든 문제예요. 우리나라는 고등학교에서도 철학을 기본 교과서에 안 넣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무슨 바칼로레아 철학 논술이 있는데 왜 우리나라는 안 하느냐 하는 말들을 하는데 맥락의 문제인 것 같아요. 프랑스는 옛날부터 인문 교육이 강한 데고 근대화가 빨리 된 데 아니었겠습니까? 따라서 그게 100년, 200년 내려오는 거죠. 저도 철학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철학 교육이 중요하니까 지금 우리나라 고등학교에 철학 과목을 만들어야 된다고 하면 원론적으로는 맞는 얘기일 겁니다.

그런데 저는 철학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회의적이에요. 아까 철학책이 어렵다고 하셨는데 반은 맞는 말씀인 것 같고 반은 틀린 말씀 같아요. 일반적으로 철학책이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면 어렵기는 한데 철학 교수들이 2차적인 문헌으로 쓰는 것들은 어렵다는 말에서 구분해야 될 점이 있겠죠. 세상에 있는 문제를 바로 가까이에서 다루는 데 그걸 복잡하게 다루고 너무 적나라하게 다루다 보니까 복잡하고 따라하기가 참 힘들구나 하는 면하고 그냥 난삽한 개념을 2차적으로 많이 섞어 놓은 것하고는 구분을 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일반적으로 철학 교수들이 2차적으로 써 놓은 것들에는 쓸데없는 난삽함이 꽤 많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현학적이라든지 그런 건 있겠죠. 그런 것은 불필요한 쓰레기 같을지도 모르죠. 다시 말하면 천직에 있는 교수들도 사실은 철학을 얘기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겁니다. 아주 어렵다는 거예요. 사실은 어렵습니다. 요새도 우리가 황우석 박사 나오면 반으로 나눠져서 얘기하잖아요. 생명 윤리를 지켜야 된다 하는 쪽하고 반대쪽이 있는데 사실은 과학자들도 제대로 답을 알 수 없고 어떤 학자들도 다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철학자가 대답할 수 있느냐 하면 또한 아닙니다. 철학자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회의적인 상태에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실 물음을 던지는 게 어떻게 보면 철학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고 이런 문제를 이렇게 접근하면 또 이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는 거죠. 하지만 이렇게 얘기하면 요즘 사람들은 답답하게 생각하거든요. 답을 빨리빨리 대라는 거죠. 지금 급한데, 위기 상황인데 이런 문제가 생기면 저런 문제가 생기고 복잡한 물음만 자꾸 끄집어내니까 사람들이 안 좋아하잖아요. 제가 보기에 이게 참 근본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철학 교수도 가르치기 힘든데 실제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남녀 차별을 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남학생은 군대라도 갔다 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군대도 안 갔다 온, 고등학교 졸업한 여학생이 대학에서 4년 동안 공부하고 고등학교에 가서 철학을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저는 회의적입니다. 참 힘들어요. 왜냐하면 박사 마친 사람도 대학생들 잘 못 가르칩니다. 가르치라고 하면 매일 칸트, 플라톤, 공자, 노자 얘기만 하지 지금 삶의 문제에서 이 문제가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느냐를 풀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서……. 말은 좋죠. 프랑스 같은 경우는 연륜이 쌓여 있기 때문에 시행착오의 위험이 좀 적은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곧바로 그걸 시행하기가 어려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철학의 이름으로 하더라도 사회과학이든지 자연과학이든지 통합적인 사고 훈련을 하는 걸 만들어야지 철학 자체만으로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 드렸듯이 굳이 기대할 필요 없고 지금은 각자 개인이 거의 철학자예요. 사실 알만큼 정보도 다 알고 실존적으로 각자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철학자가 입법자의 입장에서 뭘 어떻게 하라고 제시해 줄 수는 없어요. 어떤 학자도 그런 걸 제시해 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더 속속들이 많이 만들어 주는 역할을 지식인이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역할은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지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쁜 세상에 회의적인 물음들을 다 이리저리 굴려보고 할 여유가 없겠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문사철(文史哲)은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사실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정환 : 문사철(文史哲)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글 혹은 이성의 독재를 그나마 벗기 위해서 만든 겁니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의 관계를 규정짓는 이유는 글의 독재가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죠. 역사라는 건 현실적 실체고 문학이라는 건 소위 딴따라, 예술을 대표하는 것이고 철학이라는 건 이론을 대표하는 거죠. 그 세 개가 어울어져야 사람이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생각을 갖는다 하는 건데 제가 아까 드린 말씀은 소위 예술이라는 것을 문학 혼자 오랫동안 주도할 경우에 문학 자체가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문학도 인제는 미술적인 사고를 끌어들일 생각을 해야 되고, 미술가가 미술적으로 세상을 아는 법을 끌어들일 생각을 해야 되고, 영화하는 사람이 총체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끌어들일 생각을 해야 된다는 얘기였어요. 어쨌거나 시간이 다 됐는데 이제까지 한번도 안 빠지고 나와 주신 분들께는 특히 감사를 드리고 오늘 나와 주신 분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좋은 선생님들 많이 만나서 같이 얘기하면서 내내 행복했습니다. 이만 마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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